콜라 독립을 넘어서
최준식 지음 | 사계절
우리말은 지금 열병 혹은 중병을 앓고 있다. 한국인들이 쓸데없이 영어를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못 쓰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한국의 백성이 아니라 저 세계 최강의 미국 시민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만이라도 백인 시늉을 내고 싶어 안 되는 영어를 씨부렁거리는 것이다. 그래야 고상한 것 같고 유식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건대 누가 되든 영어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거나 우리 문화를 잘 모르고 있는, 다시 말해 문화적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들 문화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좋아한다면 저렇게 영어를 남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한글이 겪어온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 따위로 천박하게 영어를 써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한글이 창제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세종같이 어질면서 천재였던 왕이 아니었더라면 한글창제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글은 문자로서 진화를 끝낸 문자라는 설이 있다. 지난 1994년에 발간된 미국의 과학 전문 잡지 「디스커버」에 재레드 다이아몬드라는 미국 교수는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논문을 실었다. 그는 논문에서 한글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자사에서 한글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밝혔다. 이렇게 세계가 극찬하는 우리 한글은 정작 본국에서 푸대접받고 있다.
영어 남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요즘은 누가 이런 짓을 제일 많이 할까? 교수나 연예인, 의사들이 아닐까? 이른바 조금 배웠다는 사람이나 연예인처럼 남들 앞에 자주 서는 사람들이 영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는 말이다. 연예인들도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가수나 코미디 하는 20대 친구들이 제일 심한 것 같다. 이 젊은 희극 배우들을 개그맨 혹은 개그우먼이라고 하는데 '개그'라는 단어가 희극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개그(gag)란 영어로 구역질한다는 뜻인데 이게 어쩌다 지금처럼 희극 배우, 그것도 젊은 희극인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로 되었는지 잘 모를 일이다.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될 때를 제외하고 영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말이 발전하고 새로운 좋은 우리말이 복권되거나 생성된다. 컴퓨터라든가 햄버거 같은 것을 영어로 쓰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우리가 쓸데없는 데에 너무 영어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 시민이나 된 듯이. 게다가 그 영어도 제대로 된 게 거의 없다. 전부 '개그'란 단어 모양 엉터리 영어들이다.한국인들이 쓰는 영어 가운데 이런 세상에 웃기지도 않는 것들의 행진은 계속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집이나 정원 등을 뜻하는 가든이나 파크, 혹은 하우스와 같은 영어 단어가 정말로 요상하게 쓰이고 있다. 가든 하면 우리는 선뜻 갈비집을 연상하고, 파크 하면 여관을 연상한다. 그리고 하우스는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를 생각하게 한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내 눈에는 이런 것이 전부 영어 콤플렉스에 걸린 환자들이 저지른 짓 같기만 하다. 무조건 영어로만 쓰면 선진국 국민 같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인가.
교수나 의사 같은 우리 나라 지식인들은 정말 영어를 쓸데없이 많이 쓴다. 이들이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은 '우리는 일반 한국인들과 계층이 다르다.'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심산이 아닐까? 의사들이 영어를 많이 쓰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다. 가령 "그 페이션트를 보니까 테스트 리절트가 네거티브하게 나와서…." 뭐 이런 식이다. 그냥 "그 환자를 조사했더니 결과가 음성적으로 나와서…."라고 해도 아무 문제 없는데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죽어라 하고 영어만 쓴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웃기는 일이 있다. 이것은 교수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인데 강의를 할 때나 자신의 책에 공연히 영어 단어를 쓰는 것이다. 나도 많은 경우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영어 단어를 썼는데 어느 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령 이런 거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설명하면서 칠판에 꼭 'libido'라고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굳이 영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거다. 굳이 원어를 써야 한다면 프로이트는 독일 사람이나 독일말로 써야 한다. 정말 이상한 것은 동양의 개념도 영어로 쓰는 것이다. 가령 인도 사상을 설명하면서 나는 열반을 종종 영어로 'nirvana'라고 적고, 요가는 'yoga'라고 적곤 했는데 가만 보니까 이게 보통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니르바나'나 '요가'는 전부 산스크리트어이기 때문에 영어로 적으나 한국어로 적으나 어차피 다 외국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국인이니 당연히 한국어로 적어야 한다.
그런데 왜 나를 위시한 배운 사람들은 이걸 영어 단어로 쓰는 걸까? 영어로 써야 고급스럽고 배웠다는 것을 더 확실히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문화의 중심은 어차피 미국 쪽에 있으니까 거기 언어를 써야 중심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때 양반들이 죽어라 하고 한자 쓰던 것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다.이제는 은퇴를 하셨지만 같은 학교에 있었던 황병기 선생을 가끔 사석에서 만나면 선생은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일전에 선생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신촌에 사는 어떤 개가 어느 날 주위의 친구 개들을 자기가 사는 창고로 다 초청을 했단다. 자기가 어떤 악기를 연주하려고 하는데 와서 좀 들어달라는 것이다. 이 신촌 개는 친구들을 전부 불러놓은 다음 다른 불은 다 끄고 자기 쪽에만 조명을 비췄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른 개들은 누워서 꼼짝도 않은 채 가만히 들어야 했다. 선생은 이런 걸 상상해 보면 얼마나 웃기고 기괴하냐는 말씀이셨다. 우리가 음악회 한다는 게 전부 이런 거 아니겠냐는 말씀인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인들이 서양의 고전음악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 저절로 우러나온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주위를 살펴보면 음악을 듣는 관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공을 한 사람들도 음악이 생활화되지 못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고전음악이 자기들 거니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향유한다. 상당한 수준에서 악기 배우는 데에도 돈이 별로 들지 않고 음악회 가는 데에도 그리 큰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데서나 음악을 한다. 그런 반면 우리 나라는 예술 문화가 삶과 유리되어 있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즐기려 하지 않고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고급 장소에만 가려고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예술과 관계되는 것으로 한복 문제에 대해 말해 보자. 왜 소위 지도층들이 솔선수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민들에게는 한복을 입으면 고궁이나 박물관을 무료입장할 수 있다고 해놓고 자신들은 거의 한복을 입지 않는다. 지도층 가운데서도 가장 큰 불만의 화살이 가는 사람은 바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다. 기억을 더듬어볼 때 이승만 대통령 이후로는 한복을 입는 대통령을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문제 많은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인인 자기 부인에게도 한복을 입혔는데 그 뒤 대통령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어라 하고 한복을 입지 않는다.
다른 나라 가서는 몰라도 외국 국빈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만찬장에서 대통령이 한복을 입고 건배를 제의하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이게 그저 망상일까? 대통령 같은 사람이 이렇게 우리 문화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 효과는 만파백만파로 국민들에게 파급될 게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한복을 입지 않는다. 대통령들이 굳이 한복을 외면하는 데에도 예의 전통문화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우리 나라의 미국화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은 개신교가 중심이 된 기독교의 예외적인 팽창 현상이다. 우리 나라 개신교는 여러 면에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단일 교회로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는데 바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도 수가 한 10만 명 정도 된다고 하고 주일 예배도 일곱 차례인가로 나눠 드린다고 한다.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 남짓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신도 수가 제일 많은 교회가 우리 나라에 생겼다. 어떤 목사 말마따나 성령이 서구에서 보따리 싸가지고 우리 나라로 오셨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이 핵 세례로 떨어졌나?
한국 교회의 진기록 행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 교회였다고 하고, 10대 교회 가운데에는 4개가 한국 교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 건물에 교회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기록을 갖고 있고(개포동의 한보 건물이었다나), 도시 면적 비율로 교회가 제일 많은 도시도 한국에 있다고 하고(군산이라지), 많은 경우 건물 하나 건너에 교회가 들어가 있고, 웬만한 교파에서는 신학교를 다 가지고 있어 신학교 숫자도 한 200개쯤 된다고 하고.
현재 개신교 인구는 7백만∼8백만 명이고 가톨릭까지 합치면 기독교인이 1천만 명이 넘는데 왜 조국의 현실은 여전히 개판일까? 사랑과 정의의 종교가 넘실거리는 나라에 온갖 폭력과 야합·비공정 등 사랑과 정의에 정반대되는 악덕들만 넘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건 기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고등 종교인 기독교가 이 땅에 제대로 뿌리를 박았다면 이 땅에 새로운 문화가 펼쳐져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가 구악(舊惡)으로 계속 간직하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들이 교회 안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이것은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직도 기독교가 우리 문화에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착되지 않았으니 원래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사회 문화가 그대로 스며드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많이 늘어나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해방된 뒤나 6. 25 직후에는 먹고 살기도 바쁜 때라 종교에 그다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1970년대 들어 조금 한숨을 돌리게 되자 당시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미국에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종속되는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미국이 그네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하는 단계였다면 그 뒤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스스로 미국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어려운 말로는 '식민 문화의 내재화'라고 하던가?게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떤 게 한번 유행하면 별 생각 없이 그냥 따르는 집단성이 매우 강하다. 그저 남이 삐삐 사면 나도 사고 남이 휴대전화 사면 나도 사는 것, 그뿐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 나라에 기독교 신자가 늘어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독교로 가니까 너도나도 별 생각없이 교회로 향한다.
이것은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절대 진리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하나의' 진리로서가 아니라 절대 진리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적인 보편 진리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특수성이라는 비좁은 문틈을 통해 보편성을 살짝 맛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사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변치 않는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정말 역사나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다. 굳이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사랑과 봉사, 정의와 같은 기독교의 근본정신 뿐이다. 심지어 유태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생각도 역사적으로 숱한 변화를 겪어 왔다. 초기의 질투와 복수의 신에서부터 예수가 생각하는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까지, 또 자연 위에 군림하는 하느님에서 자연을 돌보는 하느님까지 등 정말 병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독교의 신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 어디 절대적인 게 있는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바뀌어간 것뿐이다.
기독교가 분명 훌륭한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보편 종교라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보편 종교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비판 없이 기독교나 서양 문명을 보편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어떤 종교가 들어올 때 보통은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문화도 같이 들어온다. 따라서 한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2∼3천 년이나 지속되었던 서양의 문화를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는 비록 이스라엘이라는 동양에서 발생한 종교이지만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발달된 종교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서양적인 세계관이 물씬 녹아 있다. 아니, 서양적 세계관 그 자체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는 서양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가 되면 아무래도 서양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에 가깝게 가려고 애를 쓴다.사실 기독교의 교리는 그리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던 세계관과 기독교의 그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은 죄인이다. 물론 이 인간의 죄성(罪性)에 대해서도 여러 수준에서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극히 평범한 수준에서 '인간은 죄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인간의 죄가 하도 커 혼자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으니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공로에 의탁해야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골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전통신앙에서 가르쳤던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유교에서는 인간이 하늘의 성품을 그대로 내려받았기 때문에 지선(至善)하고 지순(至純)하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인간 성품의 가장 밑바닥에는 부처님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 이들 가르침에서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존재다. 이 얼마나 다른가? 한 전통에서는 인간이 죄덩어리라고 하고 다른 전통에서는 인간은 최고의 존재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은 불교나 유교를 1600년 이상 신봉해 왔다. 그렇게 지내왔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과 매우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를 화들짝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런 건 정말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를 건전하게 받치고 있는 가치관이 전무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탄생이나 결혼·죽음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은 어떻게 해야 성스럽고 의미 있게 맞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이 전혀 없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종교와 문화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종교는 갈래갈래 찢어져서 장사하기만 바쁘고 한국인의 수준 높은 삶을 창출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지금 우리 나라 정신계는(정신계라고 할 것도 없다)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또 다른 종교들은 그 종교대로 서로에게 아무 관심없이 자기 종교의 구원 장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종교가 다양한 것은 좋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냥 여러 가지를 늘어만 놓은 의미 없는 다양성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된 삶을 유지하려면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책을 한참 쓰고 있는데 미국 뉴욕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이번처럼 적나라하게 테러 당시의 장면이 생생하게 찍힌 적은 없었다. 또 이번 사건에 무고한 민간인이 많이 죽은 것도 사건을 막중하게 만드는 데에 가세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전쟁 중에 민간인이 죽는 것은 다반사 아닌가? 물론 이번 사건은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어서 그 충격이 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인 나이 많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폭격했을 당시 죽은 민간인이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번 뉴욕 사건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