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들의 책사
신영란 지음 | 생각하는백성
흥선대원군이 섭정 초기에 사회적 제도의 개혁에 주력한 것은 자신의 사상적 성향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는 중농적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위민정치를 기본으로 내세웠다. 국가적 체질개선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서원의 철폐였다. 한편으로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경국대전 이후 법전을 재차 정비하여 집대성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삼반예식』, 『오례편고』,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문무고관의 합의체로서 국가의 주요 업무를 맡은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 본래의 기능을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밀어붙였던 경복궁 중건은 대원군의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바람에 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무려 4년여에 걸친 공사기간 동안 수많은 백성들을 징발함으로써 민심이 등을 돌리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인한 외교분쟁과 천주교 박해 등으로 자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원군은 대외문제에 있어 강력한 척화정책을 선택했는데 서구열강들의 개방압력에 맞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끊임없는 마찰이 일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와 쇄국정책은 안팎으로 많은 반발을 사고 있었다. 1873년 11월, 고종은 친히 정사를 주관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켰다. 물론 이 선언의 배후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1873년,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대두되는 등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해지는 가운데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민생고의 가중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었을 때 명성황후는 은밀히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들을 규합하고 그의 정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섭정을 끝으로 실각하고, 명성황후는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었다. 고종을 움직여 서원의 폐지를 중단하고, 일본과도 강화도 조약을 맺는 등 기존의 쇄국정책에 반하는 일련의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한편, 갑신정변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원세개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군사적으로 우세한 청나라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갑신정변은 명성황후의 일본에 대한 악감정만 더한 채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후 명성황후는 더욱더 일본을 미워하게 되었고, 일본 역시 그녀에 대한 경계의 끈을 바짝 조이게 되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가뜩이나 불리한 형국에 놓여있던 일본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기에 이른다.명성황후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위해 조선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를 따라 돌아온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게 되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은 호시탐탐 정계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체결된 조·러 조약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 큰아들 재민을 옹립함으로써 재집권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조선의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 일본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전위에 내세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명성황후의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야욕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보다 노골적인 친러정책을 펼침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 하는데 이것은 명성황후의 뼈아픈 실수였다. 결국 그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민씨의 계속적인 친러정책에 대한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명성황후가 반드시 제거해야 될 위험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5시경, 일단의 수상한 그림자가 경복궁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다름 아닌 명성왕후였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를 보자 먹이를 앞에 둔 이리떼처럼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들었고, 명성황후는 그들의 무수한 칼날아래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했던 조선의 마지막 여걸 명성황후. 그녀는 비록 총명한 지혜와 탁월한 수완으로 격변의 시대를 헤쳐 나왔으나 무력을 앞세운 외세에 의해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역사는 이 일을 '을미사변'으로 기록했다. 을미사변은 당시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일본 본국의 지령에 의해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한 일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 정가의 친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었다. 훗날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 내부의 반란이라고 날조하며 자신들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토록 처참하게 살해한 일본의 만행은 곧 국제사회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본은 이후 국제사회의 집중비난을 받게 되자 사건에 유감을 표시하고 형식적인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 뒤 달라진 점이라곤 서인으로 강등되었던 명성황후의 신원이 복귀되었다는 것 정도였다.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과 정난정은 황해도 교하 땅으로 유배를 당한다. 그녀는 장차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측하고 품속에 항상 독약을 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금부도사가 군졸들을 이끌고 부근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윤원형은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착각하여 눈물을 흘리고 정난정은 "남의 손에 끌려가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그 동안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먹고 죽었다. 윤원형은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강음에서 죽었다.
한편, 윤원형이 세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15채나 되는 집 곳간마다 쌀이 남아돌 정도로 벼슬을 돈으로 사려는 모리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윤원형의 재물이 나라 살림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소문도 돌았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다. 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처형시키지 않은 것을 애석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니 그들이 일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 명종편에는 문정왕후의 죽음을 기록하며 그녀의 실덕을 조목조목 열거한 내용이 있는데 일국의 대왕대비로서 그녀를 예우하는 흔적은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고려가 망하고 새 왕조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은 선비된 도리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모두들 관직을 버리고 집을 떠나 두문동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태조 2년, 새 왕조를 건립하고 첫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는 날 태조는 이 날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올지 내심 기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시험장 안에는 썰렁한 냉기만이 돌았다.
문득 대궐 맞은편 언덕 위로 한 떼의 선비들이 줄지어 오르는 광경이 태조의 눈에 띄었다. 내관을 시켜 알아보니 새 왕조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을 거부하기 위해 두문동 산 속으로 들어가는 망명 유생들이었다. 이튿날 실시한 무과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떼를 지어 두문동 맞은편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참으로 내가 공왕보다도 우왕이나 창왕 만큼도 덕이 없더란 말이냐!" 태조는 탄식했다.
몇 차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대신들이 다녀오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두문동 사람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은 "끝까지 반항하면 이 마을을 불태울 것이다. 죽음을 택하든지 조선의 신하가 되든지 결정하라. 기회는 단 하루뿐이다." 그 날 밤, 두문동 선비들은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우리들 누군가 살아서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고려라는 나라는 이미 없어졌어도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누군가는 살아서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게 그 날 회의의 중론이었다. 적임자로 선택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살아서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그가 바로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가장 으뜸가는 정승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였다.
두문동 대학살이 있던 날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나왔고, 5백년 왕조의 마지막 충신 두문동 72현은 끝내 투항을 거부한 채 모조리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아마도 72명의 동지들을 죽음의 골짜기에 남겨두고 홀로 살아 나와야 했던 절박한 현실이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늘 원리원칙대로 행동했고, 무엇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했으며, 정승으로 몇 십 년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검소했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 쓰여 있다.
세종 조에 이르러 황희 정승은 만백성의 친구이자 어버이 같은 존재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자기를 한없이 낮출 줄도 알았지만 불의를 보면 아무 때고 참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는 세종 임금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에게도 신임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신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땐 훌륭한 중재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한 하도 아랫사람들에게 관대하여 '허허 정승'으로 불렸었다.
문종 2년 2월 8일, 영의정 부사직에 있던 황희가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 90세였다. 『조선왕조실록』 문종편에서는 황희 정승의 죽음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다.그가 두문동 변절자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십여 년간 정승을 지내며 가슴 속에 한결같이 간직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것이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백성을 위하여 온 마음을 기울였기에 명재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 "세종 같은 임금 황희 같은 정승이 있었기에 조선에 태평성대가 있었다."는 말로 세종과 황희 정승 시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맹사성은 세종 시대를 빛낸 또 한 사람의 정승으로 4대에 걸쳐서 조정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맹사성에게 물어 봐라."라는 국왕의 발언내용이 실록에 실릴 정도로 왕실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세종 14년인 1432년, 윤희 등과 함께 1400년대의 세계 지리학 사상 유례가 없는 가치를 지닌 명저 『팔도지리지』의 집필을 끝마쳤으며,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나 아악을 육성시키는 등 문화발달에 공헌했다. 그리고 황희는 김종서를 이끌고 6진을 개척하는 한편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루는 병조판서 황상이 6진 설치에 관해 상의하려고 맹사성의 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이곳저곳에서 빗물이 새어 병조판서가 가지고 온 서류며 관복들이 모두 젖어버렸다. 하지만 맹사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삿갓 하나를 찾아 쓰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불 정승다운 행동이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청렴결백, 그 자체였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고 온양으로 낙향한 맹사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세종은 이런 시호를 내렸다. "충성과 믿음을 예로 삼았으니 문(文)이요, 청렴과 결백함을 절도 있게 지켰으니 정(貞)이라." 맹사성은 1438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황희는 그보다 14년을 더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조선 전기 정치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중종의 제2계비였던 문정왕후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그중 하나뿐인 아들인 경원대군은 인종과 19살 터울로 훗날의 명종이 된다. 문정왕후는 성격이 표독스럽고 어찌나 질투심이 강한지 남한테 지고는 못 사는 여자였다. 성품이 못된 데다가 사악하기까지 했던 그녀는 세자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문정왕후의 친동생 윤원형과 그의 애첩 정난정의 힘을 빌어 김안로와 윤임을 몰아냈다.
그 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좌찬성 이언적이 원상으로서 정사를 주관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을사사화'란 명종의 즉위로 실권을 장악하게 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는 무고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과 40여 명의 선비들이 반역죄로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당했다. 사건의 배후에는 윤원형과 그의 첩 난정이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칼자루는 문정왕후가 쥐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왕을 오직 자신의 아들로만 여기고 여염집 자식 다루듯 했다. 때로는 반말로 상대하는 것은 물론 예사로 욕을 해댔고 툭하면 뺨을 치고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명종은 그런 어머니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후원 후미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이유로 명종은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명종은 인종과 마찬가지로 천성이 착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워 문정왕후의 청이라면 무조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속 타는 일이 한두 가지였겠는가, 왕이 심열증을 얻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당시 사관의 기록이다.
정난정은 도총관 정윤겸의 서녀였다. 천하 절색이고 머리도 영특했다. 그녀의 꿈은 최소한 정경부인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권세를 넣는 것이었다. 난정이 윤원형의 첩이 되어 그의 집 후원에 들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여러 명의 첩이 기거하고 있었다. 난정은 이 첩들을 몰아낸 후, 집안 하인들을 모두 매수해 정실부인을 광에 가두고 굶긴 후에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여 급사시킨다. 그리하여 그녀는 윤원형의 권세에 편승하여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의 단맛을 보았다.
그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조선왕조실록』 명종편에서는 "왕후가 병이 깊어갈 즈음 정난정은 수시로 내전을 드나들며 내인(內人)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사이로 거침없이 곧바로 들어가고, 또 내의(內醫)들에게 호령하여 병에 맞지 않는 약이라도 처방하게 하였으니 아무도 그 기세를 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과 정난정의 세도는 극에 달한다. 모든 일은 정난정이 뒤에서 꾸미고 윤원형은 그것을 조정으로 들고 들어갔으며, 문정왕후는 왕권을 대신하여 정적들을 싹쓸이하는 역할을 맡았다.이것은 궁예가 왕건에게 관심법을 행했던 때의 상황을 기록한 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최응은 백성들의 희망이 언제부턴가 왕건 편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궁예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그런 용기를 내게 된 것이었다. 최응은 고려가 개국한 뒤에도 한동안 학문연구 분야 책임자인 지원봉성사 자리에 있다가 어느 날 태조의 부름을 받고 광평낭중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최응의 나이 불과 20세,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실무에 통달했다는 평판이 자자할 정도로 최응은 행정관료로서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1년도 안 되어서 왕건은 또다시 그에게 차관급인 광평시랑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최응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며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저는 자격이 없으니 저보다 10년 연상인 동료 윤봉에게 맡겨주십시오." 왕건은 자신의 아들 같은 사람 입에서 그렇듯 대견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예의를 지키고 사양할 줄 안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과연 경이 그런 사람이다." 왕건의 칭찬에는 최응이 통치자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그는 최응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옳게 받아들였는데 특히 조정인사에 관한 한 최응의 의견을 거의 수용하는 편이었다. 최응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가 진짜 정의로운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비록 남의 단점을 내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