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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들의 책사

신영란 지음 | 생각하는백성
1. 고려시대



태조편 - 최응과 유금필, 최후의 선택




하루는 태조가 급한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주살(誅殺)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화와 가재도구를 점검하고 있다가 태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가 어젯밤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 이에 태조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궁예가 말하길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 으로 다 알 수 있으니 내가 장차 입정(入定)하여 그 일을 다 말하리라." 그때에 장주(掌奏)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서 이것을 줍는 척하며 태 조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 태조가 이에 깨닫는 바가 있 어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사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니이다."라고 하니 궁예가 크 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태도가 가히 정직하도다.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하 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하사하였다.

이것은 궁예가 왕건에게 관심법을 행했던 때의 상황을 기록한 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최응은 백성들의 희망이 언제부턴가 왕건 편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궁예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그런 용기를 내게 된 것이었다. 최응은 고려가 개국한 뒤에도 한동안 학문연구 분야 책임자인 지원봉성사 자리에 있다가 어느 날 태조의 부름을 받고 광평낭중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최응의 나이 불과 20세,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실무에 통달했다는 평판이 자자할 정도로 최응은 행정관료로서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1년도 안 되어서 왕건은 또다시 그에게 차관급인 광평시랑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최응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며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저는 자격이 없으니 저보다 10년 연상인 동료 윤봉에게 맡겨주십시오." 왕건은 자신의 아들 같은 사람 입에서 그렇듯 대견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예의를 지키고 사양할 줄 안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과연 경이 그런 사람이다." 왕건의 칭찬에는 최응이 통치자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그는 최응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옳게 받아들였는데 특히 조정인사에 관한 한 최응의 의견을 거의 수용하는 편이었다. 최응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가 진짜 정의로운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비록 남의 단점을 내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일단 최응의 입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런 장점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면 그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은 최응이 천거한 인물이라면 가능한 등용하려고 애썼다.

그가 죽기 전에 왕건은 삼한통일을 발원하기 위한 석탑을 개경과 서경에 짓고 최응에게 기도문을 적도록 했다. 최응은 마치 그 일이 자신이 태조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과업이라도 되는 양 발원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다. 최응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건은 연산진에 머물고 있었다. 왕건은 친히 조문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대관태자태부의 벼슬을 추증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유금필은 타고난 무장이면서 동시에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안목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또 그는 싸움에 임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장수로서의 용맹과 기상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930년에 있었던 병산전투에서 고려군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유금필은 백제군을 대파하고 안동 일대의 고려 영토를 보다 굳건히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에 왕건은 다른 장수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유금필의 공로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총애는 화를 불러들여 유금필은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백령도로 유배된다.

얼마 후 견훤은 해군장군 상애와 상귀를 보내 고려를 습격하는데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때 유금필은 주변의 어부들을 모아 임시 수군을 조직하여 백제군의 해상함대를 물리쳤다. 왕건은 곧 그를 정남대장군에 봉하며 노고를 치하했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그에 대한 신임을 버리지 않았다. 932년 유금필은 경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 땅으로 들어가 백제군을 물리친다. 이에 왕건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유금필은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어째서 저를 이토록 칭찬하십니까?" 지나친 칭찬은 꾸지람만 못하다는 따끔한 충고였다.

성종편 - 최승로와 서희, 명재상의 성군 만들기



최승로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유달리 총명하며 특히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리하여 불과 12세의 나이에 태조 왕건에게 불려나가 학문적 재능을 평가받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임금 앞에서도 전혀 위축됨이 없이 논어를 줄줄 외우는 어린 신동에게 반했다. 그래서 원봉성의 학생으로 추천하여 영재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후로 981년, 최승로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 하늘이 점지한 운명의 파트너, 성종의 즉위와 함께 비로소 그의 시대도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이듬해인 982년, 임금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고려사에 한 획을 긋는 최승로의 명작 '시무 28조'가 탄생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행정 등 국가운영 전반에 걸친 대안을 제시했다. 성종이 강력하고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최승로의 시무 28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종 재위 2년, 최승로는 정2품인 문하시랑평장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이양, 김심언 등 유학자들과 더불어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국가건설이라는 대업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언제나 개혁세력의 맨 앞에 서서 정국을 이끌었다. 최승로의 가장 근본적인 정책기조는 고려를 누구나 마음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안정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3성 6부제의 도입을 건의,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전국 곳곳에 12목을 설치하여 고려가 국가의 골격을 갖추는데 공을 세웠다.

특히 유학의 전파가 지지부진한 원인이 모두 부실한 교육제도 때문이라고 판단한 최승로는 먼저 국립대학인 국자감 설치를 건의하고 각 지방마다 학교를 세우는 한편, 12목에는 특별히 선발한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유학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이렇듯 그의 정치적 구상은 성종에 의해 현실화되고, 성종의 이상은 최승로를 통해 구체화되는 환상적 동반관계는 근 10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성종 재위 8년인 989년,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명을 다해 성종의 개혁정책을 보필하였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서희는 광종 재위 11년,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차관급인 광평원외랑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던 서희는 광종 재위 23년인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그 동안 끊어진 양국 간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회복시키고 돌아왔다. 당시 그의 품위 있는 행동과 예절을 높이 평가한 송나라 태조가 그에게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이후 조정의 신임을 얻게 된 서희는 승진을 거듭, 983년에는 벼슬이 정3품 병관어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꼭 10년 뒤인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는 정2품 내사시랑으로서 다시 한 번 특유의 달변으로 적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서희의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은 집안내력이었다. 신라의 아전이었던 할아버지 서신일에서 광종대의 재상이었고 성격이 대쪽같기로 이름났던 아버지 서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집안은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이것은 서희가 고려의 사직을 수호한 인물로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교훈은 결코 "세 치 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식의 달변의 논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정당한 명분을 관철시키기 위해 언어라는 고도의 무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기의 위력은 과연 총칼의 힘보다 강하고 효과적이었다.

공민왕편 - 이제현과 신돈, 국권회복의 마지막 몸부림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공민왕이 고려 제31대 왕으로 조정에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지 고려는 1백여 년 간 지속된 원나라의 지배체제에 거의 길들여진 상태였다. 공민왕은 다른 태자들과 마찬가지로 12세 때 원나라의 볼모로 잡혀가 22세인 1351년 12월에야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는 즉위 후 바로 배원정책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개혁작업을 통해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돌입하는데 이러한 공민왕의 기상을 알아본 이가 바로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의 등장과 함께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변발과 호복을 금지시키고, 관제는 문종 대에 맞춰 복고풍으로 전환하는 등 그 동안 원나라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던 고려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얼마 후, 이제현은 지공거가 되어 이색을 비롯한 신진 사림 35명을 조정에 등용한다. 그리고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하륜을 비롯한 조선 개국의 주역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니 사실상 이제현의 영향은 조선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후에 조일신 일파에게 밀려난 71세 고령의 이제현에게 공민왕은 꾸준히 자문을 구하였고, 이제현 역시 사직이 어려울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왕을 보필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상주로 몽진했을 때는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찾아가 호종하기도 했다. 말년의 이제현은 주로 역사를 집필하는데 전력하였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고 홍건적의 개경 함락으로 불탄 사료를 보충하기 위해 『국사』를 편찬하던 도중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제현은 공민왕의 개혁의지에 불을 지핀 정치적 도반이었음에 분명하지만 그 기간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왕을 보필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충신으로, 혹은 변함 없는 지지자로서 왕의 선택을 지켜 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충신이라 해도 일단 조정을 떠난 다음에야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와중에 이제현의 빈 자리를 메꿔 줄 왕의 새로운 충신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신돈이었다.

공민왕은 이후 신돈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게 되는데 신돈은 무척 개혁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신돈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정치세력 제거에 나섰다. 개혁의 대상은 오래 전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권문세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조정관리들도 포함되었다. 신돈은 기존의 어떠한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지 않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왕의 주변을 정리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신돈의 입장에서는 국왕의 의지만을 좇다보니 결과적으로 너무나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 그는 성균관 재건축 사업을 통해 신진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이르러서는 국내외의 조건이 신돈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외적들의 침입으로 다시 무신세력들의 입장이 강화된 반면 신돈의 비리가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1371년 7월, 공민왕은 신돈을 반역혐의로 잡아들인다. 실제로 권력남용의 혐의는 있었지만 그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제대로 된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다. 공민왕 14년부터 19년까지 5년 동안 신돈은 왕을 능가하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허망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의 권력기반이 오로지 왕 한 사람의 신임에 좌우되는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 조선시대



세종편 - 황희와 맹사성, 변절이 아닌 선택




고려가 망하고 새 왕조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은 선비된 도리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모두들 관직을 버리고 집을 떠나 두문동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태조 2년, 새 왕조를 건립하고 첫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는 날 태조는 이 날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올지 내심 기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시험장 안에는 썰렁한 냉기만이 돌았다.

문득 대궐 맞은편 언덕 위로 한 떼의 선비들이 줄지어 오르는 광경이 태조의 눈에 띄었다. 내관을 시켜 알아보니 새 왕조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을 거부하기 위해 두문동 산 속으로 들어가는 망명 유생들이었다. 이튿날 실시한 무과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떼를 지어 두문동 맞은편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참으로 내가 공왕보다도 우왕이나 창왕 만큼도 덕이 없더란 말이냐!" 태조는 탄식했다.

몇 차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대신들이 다녀오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두문동 사람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은 "끝까지 반항하면 이 마을을 불태울 것이다. 죽음을 택하든지 조선의 신하가 되든지 결정하라. 기회는 단 하루뿐이다." 그 날 밤, 두문동 선비들은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우리들 누군가 살아서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고려라는 나라는 이미 없어졌어도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누군가는 살아서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게 그 날 회의의 중론이었다. 적임자로 선택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살아서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그가 바로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가장 으뜸가는 정승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였다.

두문동 대학살이 있던 날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나왔고, 5백년 왕조의 마지막 충신 두문동 72현은 끝내 투항을 거부한 채 모조리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아마도 72명의 동지들을 죽음의 골짜기에 남겨두고 홀로 살아 나와야 했던 절박한 현실이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늘 원리원칙대로 행동했고, 무엇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했으며, 정승으로 몇 십 년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검소했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 쓰여 있다.

세종 조에 이르러 황희 정승은 만백성의 친구이자 어버이 같은 존재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자기를 한없이 낮출 줄도 알았지만 불의를 보면 아무 때고 참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는 세종 임금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에게도 신임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신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땐 훌륭한 중재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한 하도 아랫사람들에게 관대하여 '허허 정승'으로 불렸었다.

문종 2년 2월 8일, 영의정 부사직에 있던 황희가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 90세였다. 『조선왕조실록』 문종편에서는 황희 정승의 죽음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가며 시력을 길러 비록 잔글씨라도 읽기를 꺼리지 않았다. 늙었는데도 기력이 강건하여 홍안백발을 바라보 면 신선과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송나라 문노공에 비하기도 하였다.

그가 두문동 변절자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십여 년간 정승을 지내며 가슴 속에 한결같이 간직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것이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백성을 위하여 온 마음을 기울였기에 명재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 "세종 같은 임금 황희 같은 정승이 있었기에 조선에 태평성대가 있었다."는 말로 세종과 황희 정승 시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맹사성은 세종 시대를 빛낸 또 한 사람의 정승으로 4대에 걸쳐서 조정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맹사성에게 물어 봐라."라는 국왕의 발언내용이 실록에 실릴 정도로 왕실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세종 14년인 1432년, 윤희 등과 함께 1400년대의 세계 지리학 사상 유례가 없는 가치를 지닌 명저 『팔도지리지』의 집필을 끝마쳤으며,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나 아악을 육성시키는 등 문화발달에 공헌했다. 그리고 황희는 김종서를 이끌고 6진을 개척하는 한편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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