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자연의 장난 원숭이 여인

얀 본데손 지음 | 일빛
자연의 장난 원숭이 여인

얀 본데손 지음/강주헌 옮김

일빛/1999년 10월/264쪽/8,000원



원숭이 여인 줄리아 파스트라나

1857년 7월, 런던 신문의 광고란에 ‘멋지고 새로운 구경거리’가 런던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실렸다. 미국과 캐나다를 돌아다니며 커다란 흥미를 일으킨 ‘정체불명의 생명체, 줄리아 파스트라나 양’을 흥행사인 테오도르 렌트는 많은 일간신문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선전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신문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고, 그녀의 쇼는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쇼가 진행되는 동안 줄리아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렀고, ‘환상적인 춤’을 추어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가 많은 것을 물어 보았는데 줄리아는 사람들이 찾아와 질문을 해대고 그녀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구레나룻을 살펴볼 때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줄리아 파스트라나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1834년에 태어났으며, 멕시코 시에라마드레 산의 서쪽 기슭에 살고 있던 루트 디거 인디언 부족 출신이라고 추측된다. 당시 선전 팸플릿에 따르면 에스피노자라는 인디언 여자가 줄리아의 어머니로 설명되고 있다.

카우보이들이 동굴에서 에스피노자를 찾아냈을 때 그녀의 곁에는 두 살 정도로 보이는 계집아이가 있었고, 여인은 아기에게 ‘줄리아 파스트라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줄리아의 어머니가 죽자 줄리아는 주지사 집에 머물면서 하녀로 일하다 레이츠라는 미국인을 만나 뉴욕으로 가게 된다.

뉴욕에서 일반 대중뿐 아니라 많은 의사와 과학자의 흥미를 끈 그녀를 검사한 사람은 알렉산더 모트 박사였다. 그녀는 브레너드 교수의 검진을 받기도 했는데 팸플릿에는 모트 박사와 브레너드 교수의 확인서가 덧붙여졌다. 줄리아의 부족인 루트 디거 인디언은 그녀처럼 온 몸이 털북숭이였으며, 얼굴이 곰이나 오랑우탄과 무척 비슷하다고 했다.

언제나 쾌활했고 자신의 삶에 무척이나 만족해했던 줄리아에게는 루트 디거 인디언의 심술궂고 고집스러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착하고 사교적인 편으로 새로운 것을 열심히 배웠으며 배운 것을 쉽게 잊지 않았다. 볼티모어에서는 군 무도회에도 초대되었다. 참석자 모두가 줄리아를 찾아와 악수를 청했고, 몇몇 대담한 장교들은 그녀와 왈츠나 쇼티세를 추기도 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당연히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란셋」이라는 잡지에는 그녀가 “1.35m로 땅딸막했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영리하고 민첩했으며,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하고 전체가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털로 덮여있었다.”고 기록했다.

박물학자 프랑크 버클랜드는 연구를 위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고 자신의 책에 그녀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그녀의 얼굴은 이마에 난 무성한 털과 검은 턱수염 때문에 섬뜩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몸매는 놀랍도록 훌륭했고 기품마저 느껴졌다.”고 기록했다.

렌트는 줄리아와 결혼했고 그녀를 언제까지나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859년 말 모스크바의 공연에서 렌트는 양심도 없이 그녀를 계속해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몇 개월 뒤 줄리아는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줄리아는 아기가 아버지를 닮기를 바랐으나 아기도 그녀처럼 털로 덮인 기형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35시간만에 사망하자 충격으로 그녀도 닷새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오랫동안 많은 인류학자와 피부학자들은 줄리아가 유전질환의 하나인 취모성 다모증 환자라고 생각해 왔다. 선천적 취모성 다모증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은 치아의 수가 눈에 띄게 적다는 점이었다. 미얀마 태생의 쉐 마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곱슬진 털로 덮여 있었는데,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위턱과 아래턱에 각각 네 다섯 개의 치아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선천적 취모성 다모증 환자를 두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쉐 마옹과는 다른 유형으로 원숭이와 비슷한 얼굴을 한 경우인데, 단 세 사람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줄리아의 경우는 결국 선천적 다모증과 잇몸의 과다발육으로 특징지어지는 유전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숯덩이가 된 사람들

1635년 코펜하겐대학에서 평의회가 소집되었다. 농부 페데르 페데르쇤의 죽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는 발표에 대해 몇몇 재판관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몸에서 불이 나서 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수들은 사람이 알코올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19년 뒤, 덴마크의 저명한 해부학자 토마스 바르톨린 교수는 사람이 저절로 불에 탈 수 있다는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한 술을 지나치게 마실 경우 위에서 불길이 솟을 수 있다는 가정이 임상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몇 가지 실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사례는 에버하드 보르스티우스가 썼다는 출처가 애매한 책에서 본 것이었다. 폴란드의 한 남자가 브랜디를 한꺼번에 두 병이나 마셨는데 갑자기 입에서 불을 뿜더니 그 불에 타 죽고 말았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바르톨린은 또 다른 사례를 발표했다. 이번에는 코펜하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 교수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입에서 강력한 불길이 치솟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친구들이 물을 부어 불을 꺼 준 덕분에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결국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초 인간의 자연발화론은 의학계에서 별다른 반론 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의학자들은 술에 만취한 사람이 위에서 타오른 불길 때문에 타 죽을 수도 있다는 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때로는 법정에서도 그런 주장이 통했다.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가 연소를 위한 기본 화학식을 발표한 뒤 인간의 자연발화론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1848년 독일 의사 스투루벨은 자연발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전류가 사람 몸 안에 흐르면 몸 안의 물이 수소와 산소로 나뉘며 발생하는 가연성 기체는 전기 불꽃에도 쉽게 점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연발화론을 주제로 고팅겐대학의 프랑크 박사도 흥미로운 가설을 발표했다. 상습적인 술꾼의 몸에는 인을 함유한 화합물이 배어 있어 쉽게 불에 탈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 이론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랑스 외과 의사 기용 뒤퓌뜨랑의 가정이 제일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그는 술 때문에 불이 붙는다는 가설 자체를 부정했다. 술은 사람을 혼수 상태에 빠뜨리고, 조심성이 없게 만든다. 따라서 옷에 불이 붙는다 해도 잘 느끼지 못하며, 일단 불이 붙게 되면 인체의 지방이 녹으면서 연료 역할을 하게 되고, 마침내 온몸이 불에 타 버린다는 가정을 내세웠다. 이런 결론은 ‘촛불 효과’라는 오늘날의 해석과도 맞아떨어진다.

인간의 자연발화에 대한 현대 법의학계의 입장은 전반적으로 무사안일이라 평할 수 있다. 금세기 들어 자연발화에 대한 학술논문은 단 두 편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65년 가빈 서스턴 박사가 발표한 것이다. 논문은 어느 날 아침 시체로 발견된 한 여자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결코 뚱뚱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윈 편에 가까웠다. 또한 늘 바른 생활을 해 오던 여자였다. 난로 곁에서 발견된 그녀는 숯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양말과 슬리퍼 그리고 두 다리는 말짱했다. 주변의 가구에도 전혀 손상이 없었고, 방 안에는 매스꺼운 냄새와 재로 가득했다. 전형적인 자연발화 사례였다. 그러나 검시 결과, 그녀는 심장혈관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것이 결정적인 사인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녀가 죽은 뒤에 난로 쪽으로 넘어지면서 몸 안의 지방에 불이 붙은 것이라는 추정이 덧붙었다. 이 과정에서 옷이 심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로 촛불 효과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현대의 법의학자들이 제시한 촛불 효과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여겨졌던 대부분의 사례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가설을 뒷받침해 줄 실험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해결되지 못한 중요한 문제들이 몇 가지 남아 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특별히 불에 잘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뚱뚱한 사람이 촛불 효과에 의해 타 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상상할 수 있겠지만 몸이 마른 희생자들도 많았다. 피부가 건조한 노령층이 더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20세기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상습적 술꾼들이었다는 사실도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술꾼의 피가 훨씬 불에 잘 탄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술에 취한 사람은 불을 조심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정신이 혼미한 채로 불 앞에서 잠들어 버리거나 불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자연발화에는 외적 요인이 더 치명적이었다. 희생자가 입고 있던 옷이 심지처럼 천천히 타올라 피하지방이 녹을 정도의 열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희생자가 발견된 방의 통풍장치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동물을 토해 낸 사람들

1694년, 남부 독일 베르츠하임 마을에서 되더라인 목사의 열두 살 짜리 아들에게 심각한 일이 벌어 졌다. 소년은 발작을 일으키고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더니 커다란 갯강구를 토해 냈다. 알토프대학의 의사들과 곤충학자들이 달려왔다. 소년에게 다양한 살충제를 투약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3주 동안 어린 아들은 갯강구 162마리, 쐐기벌레 32마리, 노래기 4마리, 지렁이 2마리, 나비 2마리, 개미 2마리, 풍뎅이 1마리를 토해 냈다. 어린 독일 소년의 뱃속에 있던 곤충들은 곧 양서류로 바뀌었다. 소년은 도롱뇽 21마리, 개구리 4마리, 그리고 두꺼비 1마리를 토해 냈다.

소름끼치고 불가사의한 이 사건은 곧 성직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많은 목사들이 고뇌에 빠진 동료 목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다음에는 심령술사들이 소년을 떠맡았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에도 아랑곳없이 소년은 더 이상한 것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달걀껍질, 사슬 대못, 압정 따위였다. 엄격한 동료 성직자들이 악마가 어린 아들의 몸을 차지할 때까지 무엇을 했느냐고 윽박지를 때 되더라인 목사의 심정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불쌍한 소년이 기침을 할 때마다 다음에는 어떤 모습의 괴물이 나올지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내과 의사가 ‘지옥에서 나온 개구리’를 자세히 조사했다. 개구리의 뱃속에서 반쯤 소화된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개구리가 소년의 뱃속에서 토해지기 전에 소년의 몸 밖에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그러나 소년을 치료했던 의사들은 거의 미칠 듯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가정은 생각지도 않았다. 대신 목사들은 당시에 뱃속의 동물을 퇴치하는 치료법으로 쓰이던 말 오줌 요법을 생각해 냈다. 불쌍한 소년은 말 오줌을 몇 그릇이나 마셔야 했다. 하나님을 부르짖는 기도와 악마를 쫓아 내는 주문의 도움으로 그 약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 뒤로 소년은 더 이상 개구리 같은 동물들을 토해 내지 않았다. 목사들은 마귀를 물리쳤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당시의 의학서들도 그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말 오줌을 다시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개구쟁이가 못된 장난을 그만 두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 즈음 어떻게 동물이 인간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오염된 물 속에 있던 알을 우연히 삼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뱀이나 도마뱀이 잠자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는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물론 목사 아들의 경우처럼 마녀나 마법사가 파충류를 사람의 몸 속에 집어넣어 고통을 주는 것이라는 색다른 가정도 있었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뱀이나 개구리가 뱃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신경성 소화질환을 앓던 환자들이 뱃속에 그런 동물이 들어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많은 환자들이 ‘뱀의 또아리’라고 생각했던 하복부 돌출은 대장에 가스가 고인 탓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런 착각을 한 사람들이 뱃속에 기생 동물들로 가득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서 거짓으로 토해 내는 척 했을 가능성도 있다. 개구리를 토해 낸 사람들은 대개 사기꾼이거나 히스테리 환자였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들도 있었다.



살인 진드기

고대 질병 가운데 사이리아시스는 가장 흥미롭고 기괴하다. 이 질병은 고름이 전혀 없고 이로만 가득 찬 종창이 살갗 위로 부풀어 오른다. 종창이 터지면 이가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환자의 살은 조금씩 없어지면서 이로 덮였다. 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질병’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야만 했다.

사이시리아스의 기록은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질병을 언급한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역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이시리아스를 사람의 살에서 생겨난 이가 피부의 작은 종기 속에 모이는 병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역사』에서 사이시리아스로 사망한 두 명의 저명인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의 시인 알크만과 시리아의 철학자 페레시데스였다. 특히 페레시데스는 피타고라스의 스승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페레시데스의 죽음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피타고라스가 스승의 안부를 물으려고 방문했을 때 페레시데스는 문틈으로 해충이 우글거리는 손가락을 내밀며 “벌레가 온몸을 먹어치운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사이시리아스로 죽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플라비우스 요세프스의 『고대 유대교』와 성경의 사도행전은 헤로데 왕이 사이시리아스로 죽은 것을 도덕적 결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사이시리아스에 얽힌 가장 유명한 사건은 플루타르크의 술라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침내 폭군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이들의 세상으로 변해갔다. 어떤 치료법도 효과가 없었다. 술라의 죽음에 대해 플리니도 그가 벌레에 온 몸이 먹혀 고통스러워 할 때 그의 손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1940년에 아른헴대학의 명예교수 우데만스가 전설 속의 질병인 사이시리아스의 역사에 대한 연구서적을 출간했다. 곤충학자인 우데만스는 ‘살인 진드기’가 사이시리아스의 병원체라고 발표했다. 이 살인 진드기의 길이는 약 750미크론이다. 머리 속에 기생하는 이가 1~2mm, 옷에 있는 이가 3~4mm 인 것에 비하면 무척 작다.

1977년에 버스바인 교수는 『곤충, 위생 그리고 역사』라는 책에서 우데만스의 가정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전반적으로 동의했지만 살인 진드기의 모습을 확인시켜 줄 만한 자료나 그림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 유감을 표시했다. 어쨌든 현재에도 폭군과 간음자들은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 끔찍한 진드기가 완전히 멸종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거인의 신화

고대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거인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일반 사람보다 100배 이상이나 큰 뼈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렇게 발견된 유골들이 모두 괴물 폴리페모스를 떠올리게 했다. 폴리페모스의 유골이 14세기에 시칠리아에서 실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대홍수가 있기 전까지 사람들의 키는 적어도 15m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상당히 많은 거인들이 있었다. 거인들은 고대의 신과 영웅에 맞서 싸웠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45명의 타이탄들은 우라누스 신과 테라 여신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거인이었고 뛰어난 힘을 가졌다. 타이탄과 제우스와의 싸움에서 거인들은 거대한 바위와 뿌리 채 뽑은 나무를 휘두르며 공격했다. 신들은 헤라클레스를 거인들과 싸우도록 했고 거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