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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한 그리스 신화

사에구사 가즈코 지음 | 시아출판사
여성을 위한 그리스 신화

사에구사 가즈코 지음/한은미 옮김

시아출판사/2002년 1월/221쪽/12,000원



태초에는 혼돈뿐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의 천지 창조는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로 시작된다. 모든 것이 뒤섞여 혼란스럽던 카오스의 시대가 끝나고 나타난 것은 ‘넓은 가슴을 가진 대지’ 즉, ‘가이아’라고 하는 여성성을 지닌 신이었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 대지의 모신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대지는 모든 신들의 영원히 변치 않을 어좌(御座)이며, 모든 것을 지탱하는 기반의 역할을 한다. 대지가 생겨난 후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저승)가 생겨났으며, 빼어나게 아름다운 신인 에로스가 탄생하였다.

천지 창조의 근원이 되는 네 신이 탄생한 후 카오스에서 에레보스(어둠)와 뉙스(밤)가 태어났고, 밤과 어둠이 사랑을 하여 대기의 신 아이테르와 낮의 신 헤메라가 태어났다. 그리고 대지의 신 가이아는 황금의 시대를 여는 우라노스를 낳았고 높은 산들을, 거칠게 날뛰는 바다 폰토스도 낳았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가이아가 남성과 결합하지 않고 혼자서 산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가이아는 땅 속의 타르타로스와 결합하여 사람과 짐승의 혼합체 같은 괴물들을 낳기도 했고, 우라노스와 사이에서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낳게 되는 티탄 신족, 퀴클롭스 3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를 낳았고, 폰토스와 결합하여 괴물을 낳았다. 이처럼 가이아 여신을 중심으로 하여 우라노스, 타르타로스는 삼각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이런 식으로 장대한 교합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낳은 괴물인 헤카톤케이레스와 퀴클롭스를 싫어해 그들이 태어날 때마다 지하에 있는 타르타로스에게 던져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가이아는 강철로 만든 커다란 낫을 만들어 놓고 나서 자식들을 불러놓고 복수를 종용한다. 이 부분은 신화를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앞으로 태어나게 될 아이들에 대해 권력을 휘두르려는 아버지와 그에 뒤질세라 아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움켜쥐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여신인 어머니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회로부터 남신인 아버지가 실권을 잡는 세계로 바뀌어 가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지배하는 형태로 실권을 더욱 공고히 유지하려는 사회의 구조가 이 신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가이아를 돕겠다고 나선 것은 막내인 크로노스였다. 어머니 가이아가 준 낫을 들고 숨어 있던 크로노스는 아버지가 나타나자 재빨리 아버지의 자지를 잘라 등 뒤로 던져 버렸다. 이것은 어머니의 부추김을 받은 아들에 의해서 새롭게 권력의 중심이 이동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처럼 아버지가 물러나기를 종용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인다기보다 아버지의 생식 능력을 절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뒤로 던져진 우라노스의 자지는 피를 흘리면서 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 가이아의 몸에서 에리뉘스라 불리는 신들과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긴 창을 손에 든 거인 기가스가 태어났다. 이들은 기이한 탄생방식으로 인해 불길한 신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원래 올림포스의 신화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신으로서 그 땅의 수호신인 대지 모신에 대한 신앙이 편입될 때 변질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라노스의 피는 에리뉘스와 기가스뿐만 아니라 드넓은 대지 위에서 많은 요정들을 탄생시켰다. 숲이나 강가에 사는 풀과 나무의 정령으로서 그리스 신화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는 요정들은 모두 이때 태어났다.



그의 시대와 종말 - 크로노스

크로노스는 혼자서 세상의 실권을 독점하기 위해 다시 가이아의 자식들을 타르타로스에 밀어 넣고 레아와 결합하여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포세이돈, 하데스를 차례로 낳았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자신의 지배권을 자식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식들이 태어나는 대로 삼켜 버렸다.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만이라도 무사히 출산하고 싶은 레아가 가이아에게 도움을 청하자 가이아는 태어난 아이를 곧바로 크레타섬에 숨겨 두고 크로노스에게는 강보에 쌓인 돌멩이를 아기라고 속여 삼키게 하라고 알려 준다. 크레타섬의 동굴에서 요정들에게 양육된 이 아기가 바로 신들의 아버지, 주신 제우스이다.

제우스의 탄생 신화는 그리스 신화와 오래 전부터 내려온 크레타의 전승과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어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크레타섬은 그리슨 신화의 모태를 이룬 것으로 추정되는 미케나이 문명 이전의 문명, 즉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제대로 남아 있는 미노아 문명과 관련된 신화는 없지만 크레타섬의 동굴이 탄생시킨 신화로 보아 레아는 원래 크레타의 대지모신이었거나 산의 여신이었을 것이고, 제우스는 그 아들신이었을 것이다. ‘모신(母神)과 자신(子神)’이라는 형태의 신앙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확고하게 굳어진 남성 우위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신앙의 형태로 여러 고대의 유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케나이 민족이 원주민인 미노아 민족을 흡수해 나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노아의 오래된 대지모신과 그 아들신의 신앙은 미케나이, 즉 그리스의 남신인 크로노스의 아들이라는 형식으로 그리스 신화 속에 편입되어진 것이다.

제우스가 성인이 되자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토하는 약을 먹여 지금까지 집어삼킨 자식들을 모두 토해 내게 했다. 제우스는 자신들의 형제와 함께 거인 퀴클롭스, 백수 괴물 헤카톤케이레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의 형제들인 티탄족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렇게 크노로스의 황금 종족 시대가 끝나자 새롭게 올림포스 산의 주신이 된 제우스는 제2세대, 즉 은의 종족을 만들게 되었다.



신들의 아버지 - 주신 제우스

크노로스를 추방한 제우스 형제들 중 남신 3형제인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가 전 세계를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케나이 왕조가 오랜 권력투쟁 끝에 남성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어 갔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우스는 천계를,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데스는 지하세계, 즉 저승을 관장하게 되는데 하늘나라를 관장하는 제우스가 결국은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는 모습이 된 것이다. 하늘을 지배하는 제우스는 퀴클롭스들로부터 빛과 불의 기능을 전해 받은 ‘천둥’과 ‘번개’의 신이었다. 이러한 제우스의 힘은 인간들뿐 아니라 신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지고(至高)의 신으로 숭배되어 온 제우스는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테미스와의 사이에서 운명의 신인 모이라이 세 자매와 계절의 신인 호라이 세 자매를, 에우뤼노메와의 사이에서 카리테스를, 데메테르와의 사이에서 페르세포네를, 므네모쉬네 사이에서 시와 노래의 여신인 무사이 아홉 자매를 낳았다. 제우스와 여섯 번째로 관계를 갖고 올림포스 12신이 되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레토는 헤라의 질투로 아이를 낳을 곳을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순탄치 않은 출산과정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 전승은 약간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레토는 제우스의 여섯 번째 상대였고, 이에 비해 헤라는 일곱 번째 상대였다. 일곱 번째 상대가 여섯 번째 상대를 질투하여 출산을 방해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남성 우위사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부분도 바로 여기부터이다. 즉 헤라를 제우스의 본처로 만들어 놓고 다른 여신들과 인간들이 제우스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질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2인자 - 포세이돈과 하데스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제우스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주신으로서의 통치권을 양보했다고 해서 이들이 제우스의 동생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들은 제우스의 형들이다. 그러나 이 두 신은 제우스에게 순순히 통치권을 양보한 것은 아니었다. 신화의 내용을 살피다 보면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화를 잘 내며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표현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인 동시에 하천이나 물을 지배하는 신이지만 배가 아닌 말을 타고 다녔다. 그는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트로이아 전쟁에 출정하거나 올림포스 신전을 드나들기도 했다. 포세이돈은 여러 도시들의 수호신 경쟁에 참여했지만 그때마다 패했다. 아테나이에서는 아테나에게, 아르고스 땅에서는 헤라에게, 코린토스에서는 헬리오스에게 졌으며, 아이기나에서는 제우스에게, 낙소스에서는 디오뉘소스와 싸웠지만 늘상 패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세이돈의 지위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포세이돈의 실패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은 미케나이 왕조에서의 새로운 세력 투쟁의 상징이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하데스는 부를 의미하는 플루토스에서 유래하여 ‘플루톤’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대지에 서려 있는 부의 힘을 상징한 것이겠지만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금․은․보석 같은 자원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포세이돈은 올림포스 12신에 들어가지만 하데스는 저승의 왕이기 때문에 12신 안에 들지 않는다.



대지모신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 헤라

헤라는 그리스 신화 성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우스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우스를 주신(主神)이라고 부르는데 비해 헤라를 대 여신(大女神)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헤라는 올림포스 12신이라는 신화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대지모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올림포스의 신들이 미케나이 왕조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헤라는 미케나이의 여왕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신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미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의 비(妃)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원래 미케나이의 여왕이었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아가멤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에 이 지역으로 들어온 그리스 민족이 먼저 살고 있던 토착민과 혼화되어 그들로부터 헤라 숭배의식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제우스는 이른바 데릴사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림포스의 신으로 통일을 시도한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는 제우스의 본처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대지모신에 대한 신앙을 그 땅의 권력자였던 여성과 분리하여 가이아라는 천지 창조의 신으로 돌려 버리고, 헤라는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녀인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정의되며, 제우스와는 남매이면서 부부 사이가 되었다. 대지여신의 자리에서 주신 제우스의 아내로 지위가 격하되고 만 것이다. 바람둥이 신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제우스와 헤라와의 관계에서는 특별히 ‘혼인’이라는 관계가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헤라가 신성한 혼인을 수호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라와 관련된 신화들이 남자의 바람기와 본처의 질투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구성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그리스가 다분히 남성 위주의 사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헤라는 혼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대장일을 주관하는 헤파이스토스가 바로 그 신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했다. 하필이면 헤파이스토스는 절름발이 신이 된 것일까? 아마도 남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이를 낳은 헤라의 행위를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신화의 모습은 남성 사회의 가치관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위해 헤라 여신은 꽤 손해 보는 역할을 떠맡게 된 셈이다.



풍요와 곡식의 여신 - 데메테르

올림포스 12신들 중에서 헤라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데메테르 신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페르세포네라는 딸을 두었다. 그런데 페르세포네를 저승의 왕 하데스가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납치하였다. 데메테르는 제우스가 허락한 혼인이라는 사실에 격노하여 신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인간이 사는 마을과 논밭을 떠돌아다녔다. 지상에 데메테르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식물도 열매를 맺지 못했고, 모든 가축들은 새끼를 낳지 못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기아가 계속되었고, 신들에 대한 공물도 점차 없어지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제우스는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되돌려줄 것을 명령했다. 하데스는 저승을 완전히 떠날 수 없도록 페르세포네를 속여 석류 열매를 먹게 하고 그녀를 데메테르에게 보냈다. 그래서 페르세포네는 꽃과 곡물의 종자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겨울 동안에는 저승으로 내려가 하데스와 함께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우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분명하다. 즉 페르세포네는 곡물의 씨앗을 의미하며, 씨앗은 땅 속에 묻힘으로써 그 모습을 감추었다가(저승의 신에게 납치당함) 봄이 되면 싹을 틔워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페르세포네가 어머니에게로 돌아옴). 그리하여 데메테르라는 대지모신의 풍요로움과 저승의 사자와의 관계, 즉 저승에서 씨앗이 자라 지상으로 올라와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그 이중성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데메테르 신은 곡물, 즉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므로 그가 페르세포네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는 전승은 인간의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농사에 관한 온갖 지혜를 전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미의 여신 -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에는 ‘아프로스’, 즉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아들 크로노스에 의해서 잘린 우라노스의 자지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생긴 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미와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의 능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세 여신 아테나, 헤스티아, 아르테미스를 제외하고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신들은 아프로디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일단 아프로디테에게 포섭되면 제우스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우스가 신들뿐 아니라 인간 세상의 여성들과도 많은 관계를 맺은 것은 모두 다 아프로디테가 판단을 그르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고대의 신들이 새로운 신들의 계열 속에 편입될 경우 혼인과 같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오래된 신화는 새롭게 변형되고 개편되는 것이다. 또한 새로 편입되는 신들은 불리한 역할을 맡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아프로디테는 거품에서 태어나는 형태로 올림포스의 신이 되었고, 본거지가 되는 키프로스섬은 그리스의 시각으로 보면 동방의 나라이므로 아프로디테는 외래신인 셈이다. 이성적이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에게는 사랑과 연애를, 아프로디테와 출신배경이 비슷한 디오뉘소스에게는 술과 가무를 부담시킴으로써 그 사상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 아테나

지혜의 여신과 전쟁의 여신이 같은 신이라는 사실은 좀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가 대규모의 전쟁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경계 분쟁, 약탈, 보복 등 온갖 종류의 싸움이 그칠 새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듯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지혜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전쟁의 신으로 군신 아레스가 있기는 하지만 아레스는 힘만 셀 뿐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고대는 여성의 지혜를 크게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 신을 낳은 메티스의 지혜를 두려워한 남편 제우스가 메티스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이마가 갈라지면서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튀어나와 트리톤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테나 신은 ‘아버지의 딸’이라 불리면서 “나는 모태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만사가 아버지 편이다.”라고 공언하게 되었다. 이것은 여신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옹호하게 만들어 놓고 남성 우위 사회의 기반 굳히기에 대해 마치 여성의 동의를 얻은 것처럼 착각하도록 강요한 증거로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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