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읽어주는 남자
김학민 지음 | 명진출판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
김학민 지음
명진출판/2001년 12월/232쪽/9,900원
1. 트리스탄과 이졸데 - 사랑은 밤과 죽음 안에서만 완성된다
한동안 ‘최음제인 줄 알고’ 필로폰을 탄 음료를 마셨다는 여자 연예인 이야기로 귀가 시끄러웠다. 최음제란 성적 흥분을 유도하는 이른바 ‘사랑의 묘약’이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이런 약이 있어서 그 약을 마시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 사랑의 묘약은 문학, 연극, 오페라 등 두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서양사람들조차 이 약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소 황당한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사랑의 묘약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희극적이다. 그러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 색깔부터가 다르다. 이 오페라는 사랑의 묘약을 비극적인 톤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콘월과 아일랜드가 전쟁을 치른 지 몇 해가 지난 뒤, 아일랜드는 전쟁의 승리국으로서 콘월에 공물을 요구하고 나섰다. 콘월은 이를 무시하고 왕의 조카인 트리스탄을 앞세워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이 싸움으로 아일랜드 최고의 기사이자 이졸데 공주의 약혼자인 모롤트는 목숨을 잃게 되고 트리스탄은 배 안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아일랜드로 떠내려가 공교롭게도 이졸데 공주의 치료를 받게 되면서 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 이졸데 공주는 홈이 패여 있는 기사의 칼을 보고 그 홈이 자신의 애인인 모롤트의 두개골에 박혀 있던 쇠파편의 문양과 꼭 맞아떨어진다는 사실로 인해 그가 적장 트리스탄임을 알게 된다. 이 일로 그녀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 살려준다. 트리스탄은 몸이 회복되자 수백 번 충성을 맹세하며 콘월로 돌아간다. 이윽고 콘월과 아일랜드의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트리스탄을 포함한 많은 신하들이 콘월 왕에게 이졸데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도록 한다. 트리스탄은 자신의 슬픈 사랑을 뒤로 한 채 명예롭게 살려는 기사의 모습으로 새 왕비를 데려오는 수행단의 책임자로서 아일랜드로 향한다.
여기까지가 이 오페라의 막이 오르기 전 상황이다. 막이 오르면 바다를 향하는 범선의 갑판 쪽에 방향키를 잡은 채 망연자실 생각에 잠겨 있는 트리스탄과 갑판 앞쪽에는 분노로 떨고 있는 이졸데 공주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섬기겠다던 사람이 자기네 나라 왕이랑 결혼하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하다니. 이졸데가 극도로 분개하는 이면에는 트리스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이졸데는 브랑게네를 시켜 트리스탄을 호출하지만 트리스탄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트리스탄은 명예에 죽고 사는 기사로서의 입장과 이성에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이졸데의 선실에서 그녀는 브랑게네에게 마법의 약 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그 안에는 독약과 마시면 상대를 불문하고 사랑에 빠져 버리는 신비의 묘약 등 많은 종류의 약들이 다 들어있다. “차라리 나도 죽고 내 약혼자의 원수도 죽게 만들겠어!” 이졸데는 브랑게네에게 술잔에 독약을 넣도록 시킨다.
이졸데는 마지막으로 트리스탄을 다시 호출하고 그는 마지못해 그녀와 만난다. 이졸데는 그를 비난하고 트리스탄은 칼을 주며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졸데는 이를 거절하고 화해의 술을 권한다. 트리스탄이 반쯤 술잔을 비웠을 때 갑자기 이졸데가 트리스탄이 마시던 잔을 빼앗아 나머지 반을 들이킨다. 이들이 마신 것은 사랑의 묘약이었다. 브랑게네는 공주를 죽게 할 수 없었기에 사랑의 묘약을 넣은 것이다.
두 사람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에 대한 열망으로 온몸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두 남녀는 사랑의 묘약을 마신 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배는 벌써 해안에 거의 도착하였고 해안에는 왕과 신하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대바깥에서 군중들의 함성이 들려오는데 이 연인들은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브랑게네는 두 연인을 억지로 떼어 놓고 이졸데에게 사랑의 묘약을 넣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1막과 2막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이졸데가 왕과 혼례식을 치루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이처럼 불명확한 것은 바그너의 의도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바그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사건이 아닌 주인공들의 내면이다. 두 남녀는 아직도 서로를 향한 열정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오늘은 왕과 신하들이 사냥을 갔다. 시녀 브랑게네와 하인 쿠르베날은 이들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결국 이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그 즉시 뜨거운 포옹으로 하나가 된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는 순수한 내적 환희에 빠진 채, 긴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이때의 환희는 곧 서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의 아픔으로 이어지는데 그 아픔은 ‘사랑의 갈망’의 연주가 점차로 어둡고 거친 색조로 변해감으로써 표현된다. 오케스트라가 ‘낮의 동기’를 연주하면, 이들은 저항하는 노래를 부른다. 빛은 서로를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들을 비참함 속에 빠뜨려 왔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순간 이들은 다시 황홀한 밤의 위안을 떠올리면서 다시 행복해진다. 트리스탄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낮의 동기’는 어느덧 잉글리시 호른의 나직한 선율로 바뀌고 쇼팽의 야상곡처럼 평화로운 느낌의 ‘사랑의 밤’ 동기가 흐른다. 밤의 평화와 안식이 주는 도취상태에서 두 남녀가 ‘사랑의 극단적 환희’를 노래하는 순간, 오케스트라는 갑자기 날카로운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동시에 들리는 브랑게네의 비명소리. 망을 보던 그녀는 왕이 일찍 사냥에서 돌아오고 있음을 전한다.
마르케 왕의 또 다른 기사인 멜로트는 평소 트리스탄의 명성을 시기하여 트리스탄에게 거짓 우정을 베푸는데 그런 줄도 모르는 트리스탄은 멜로트에게 혼자만의 아픔을 털어놓는다. 이렇게 해서 비밀을 알게된 멜로트는 왕에게 사냥을 가자고 제안하고 그 사이 이졸데와 트리스탄이 만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왕에게 예정보다 일찍 궁정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간통현장을 목격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놀라서 고개를 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앞에는 이미 왕과 멜로트 그리고 다른 궁인들이 서 있다. 멜로트는 왕에게 아첨을 떨고, 늙은 왕은 탄식하며 배신자 트리스탄을 나무란다. 이 광경을 보고 멜로트가 검을 뽑아드는데 트리스탄은 멜로트의 칼을 향해 몸을 날린다.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전주곡은 기악곡이지만 그들의 비극적 사랑을 잘 표현해 준다. 바이올린의 상승곡선은 그의 육체적, 정신적 아픔과 이졸데를 기다리는 그의 고독을 말해 주는 듯하다.
여기는 브리타니의 외로운 성. 충성스런 신하 쿠르베날에 의해 이곳까지 도망쳐온 트리스탄은 신하가 사람을 시켜 부른 이졸데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이때 구슬프기만 하던 목동의 피리 소리가 갑자기 경쾌한 멜로디로 바뀌면서 이졸데가 왔다는 것을 신호해 준다. 멀리서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이졸데가 달려온다. 트리스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졸데가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이졸데는 그를 와락 껴안지만 그는 그녀의 품안에서 눈을 감는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몸 위에 쓰러진다. 그녀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인다.
잠시 후 브랑게네가 또 다른 배를 타고 와 왕에게 이들이 사랑의 정념에 불타오른 것은 자기가 사랑의 묘약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왕은 이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전하러 온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이미 죽었다. 갑자기 이졸데가 마지막 독백의 노래를 부른 뒤 다시 트리스탄의 품에 쓰러진다. 음악은 점점 강도를 더하면서 이졸데의 내적 환각상태를 묘사한다.
두 남녀에게 죽음은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이다. 사랑은 밤과 죽음 속에서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바그너는 말한다. 현실을 망각한 채 서로에게만 죽고 못 사는 사랑, 그래서 결국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 이것은 바그너가 생각한 낭만적 사랑의 극단적 형태이다.
2. 카르멘 - 사랑은 갈등과 유혹으로 짠 그물
프랑스의 오페라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다이나믹한 추진력, 생동하는 리듬감, 음을 하나씩 쌓아올려 만들어 내는 건축적 느낌이 빠져 있다. 그러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이러한 프랑스 오페라의 일반적 성향에서 벗어난, 프랑스라는 오페라의 불모지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이다. 참신한 극적 구성과 맞물려 있는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색채감과 이국적인 정서, 활기찬 리듬은 이 오페라를 단연 프랑스 최고의 오페라로 끌어올리게 충분한 요소다.
이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곳은 스페인의 세비야라는 마을이다. 막이 열리면 한편으로 담배공장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위병소가 있다. 트럼펫 소리가 병사들의 임무교대 시간을 알리고, 다른 군인들 사이에 섞여 나타난 호세가 상관인 주니가 대위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곧, 담배 공장의 휴식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여공들 중에 검은 눈과 붉은 입술을 가진 카르멘이 보인다. 남자들의 눈이 온통 한곳으로 쏠린다.
그녀는 남자들을 보고 ‘하바네라’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잔인한 속성을 노래하는 것이다. 반음계의 음들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다가 점차 고조되는 느린 가락은 농염하게 무르익은 성숙한 여인의 선정적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카르멘은 지금 호세를 찍어놓고 자기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호세는 그녀를 애서 외면하고자 하지만 흔들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녀는 호세를 향해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던지며 공장으로 들어가고 다른 여공들은 카르멘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느닷없이 전환되는 장면은 미카엘라라는 여자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미카엘라는 호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호세가 몹시 기뻐하자 그녀는 어머니가 ‘대신 키스를 전해달라’고 했다며 수줍게 호세의 뺨에 키스를 한다. 호세와 미카엘라의 ‘내 어머니 얘기를 해 줘'는 이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남녀가 다정하게 부르는 이중창이다. 노래의 끝부분에서 호세는 ’어머니께 전해달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비제가 이 이중창을 통해 보여 주려 한 것은 카르멘의 마녀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미카엘라의 청순한 사랑이다. 그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갑자기 무대 뒤에서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 온다. 카르멘과 다른 여공의 싸움이 두 편으로 나뉘어져 소란이 일었다. 근위 대장 주니가는 호세를 보내 진상을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호세는 카르멘을 끌고 나오고 주니가는 호세에게 카르멘을 지키고 있으라 지시한 뒤 자신은 영장을 가지러 간다. 단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세기디야’를 부르며 친구가 경영하는 릴라 술집에 가서 화끈한 사랑을 나누자고 유혹한다. 그는 카르멘에게 그대는 진정으로 날 사랑하느냐고 묻고 그녀는 ‘YES'라고 답한다. 호세는 카르멘을 풀어주고 그녀는 실제로 릴라 파스티아에서 호세를 기다린다.
술집 주인 릴라 파스티아는 밀수업계의 대부 격이다.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집시여자들이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춘다. 카르멘도 함께 춤을 추고 ‘신나는 트라이앵글 소리(Les tringles des sistres tintaient)'를 부른다. 이 술집에 주니가 대위가 있다. 그는 타락한 장교로 카르멘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엉큼한 속셈 때문이다. 주니가는 카르멘을 유혹하지만 카르멘은 튕긴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오늘이 호세의 출감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카르멘은 몹시 들떠 있다.
이때 투우사 에스카미요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 술집에 나타난다. 당시 스페인에서 투우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직업이다. 에스카미요는 유명한 투우사의 노래 ‘토레아도르’를 열창한다. 이렇게 대단한 상대가 자기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도 카르멘은 시큰둥하다. 호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호세가 나타나고 카르멘을 남겨 두고 모두가 자리를 피해 준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부르는 이중창 ‘그대와 춤을 추리(Je vais danser)'은 먼저 부르는 카르멘의 노래와 꼬시는 유혹의 춤과 함께 시작된다. 호세는 카르멘의 뇌쇄적인 모습으로 넋이 나갈 지경이다. 이때 호세가 부르는 답가는 사랑의 화답이 아니라 곧 군대로 돌아가야 되는 자신의 착잡한 심경으로 시작한다. 그러자 카르멘은 버럭 화를 내고 호세는 자신의 뜨거운 열정을 ’꽃노래'로 답하지만 카르멘은 산 속에서 밀수나 하면서 살자고 말한다. 이는 자기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호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카르멘을 포기한다.
이때 주니가 대위가 나타나 카르멘이 호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모욕적인 말을 한다. 곧 호세와 주니가는 칼을 빼들고 싸우기 시작한다. 호세는 이제 상관에게 칼까지 들었으니 좋든 싫든 카르멘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밀수꾼의 소굴에서 보금자리(?)를 틀게 된 호세는 자신의 처지가 싫다. 카르멘 역시 이러는 호세가 못마땅하면서 점점 싫어진다. 호세는 카르멘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점점 싸움이 잦아질 뿐이다.
장면이 바뀌면서 미카엘라가 호세를 만나기 위해 산 속에 등장한다. 해가 진 산 속을 헤매며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네(je dis que rien)'을 노래한다. 이 노래는 공포심을 나타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청아하다. 미카엘라의 청순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극적인 계산이다. 결국 미카엘라는 호세를 찾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호세는 이 말에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호세는 떠나가면서도 카르멘에게 곧 너를 다시 볼 것이라고, 나는 너를 절대 놔줄 수 없다고 말한다.
장면이 바뀌어 투우장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잠시 후 경기에 참여할 투우사들이 도착하면서 에스카미요의 모습이 보이는데 카르멘은 그의 팔짱을 끼고 있다. 둘은 이제 애인 사이이다. 카르멘의 모습은 옛날의 떠돌이 티가 없어지고 화려하고 세련되게 변해 있다. 호세는 카르멘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애원하지만 카르멘은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게다가 카르멘은 예전에 그가 끼워준 반지까지 땅바닥에 던져 버린다.
호세의 머리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그의 심장은 황소처럼 뛴다. 그는 카르멘에게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고 사랑의 불이 아닌 죽음의 불을 지핀다. 투우장 쪽으로 달려가는 그녀에게 달려가는 호세. 잠시후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 앞에서 호세는 죽은 카르멘을 움켜잡고 울부짖는다. “오, 카르멘, 나의 사랑!”
작곡가 비제는 남녀의 사랑을 아름다운 색깔로 칠하지 않고 일부러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원래 남녀의 사랑이란 그렇게 지고 지순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야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말하려 한다. 성애의 욕망에 취해 열정을 불사르다가도 금방이라도 냉정하게 상대방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랑, 이것이 비제가 그리려한 사랑의 모습이다.
카르멘과 호세를 통해 우리는 인간한테 숨겨져 있는 사랑의 야수성을 목격한다. 죽은 여인을 향해 울부짖는 호세와 자유와 욕망을 쫓다가 죽음으로 치닫게 된 카르멘의 비꼬인 사랑. 이들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그물에 갇혀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도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섬뜩한 사람의 모습을 목격한다.
3. 살로메 - 등을 바라보는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성격에 나오는 헤롯 왕과 그의 의붓딸 살로메, 그리고 당대의 예언자 세례 요한의 비정상적인 사랑의 관계를 다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대작 ‘살로메’는 근친상간과 ‘시간(屍姦)’의 이미지를 짙게 풍기는 아주 독특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1893년에 쓰여진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희곡을 슈트라우스는 특유의 현란한 음악적 수사를 덧붙여 ‘살로메’를 세기말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재탄생시켰다.
자극적이고 광란스러운 세기말적 작품을 위해 슈트라우스가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 보통은 성스럽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연상하기 쉬운데 실제로 오페라의 내용은 정반대다. 작품의 줄기는 세례 요한과 헤롯 왕, 그의 아내 헤로디아스, 의붓딸 살로메 사이에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애증과 무의식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성애의 터질 듯한 욕구에 관한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강박증은 걷잡을 수 없는 광기와 살의로 표출되면서 욕망에 대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왜 하필 이토록 곤혹스러운 소재를 선택했을까? 어쩌면 이것은 세기말이라는 혼돈의 시기, 정체성을 잃고 방황해야 했던 그 자신을 포함한 당시 사람들의 자화상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