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재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 아침이슬
키신저 재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안철흥 옮김
아침이슬/2001년 12월/270쪽/10,000원
0. 뚜껑 열린 판도라 상자
키신저가 캄보디아 테러와 가난, 대규모 죽음을 유발한 동시에 미국 헌법을 크게 손상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는 민간인 학살에 관여하고 미국에게 거추장스러운 정치가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군인과 언론인, 성직자의 납치와 살해를 명령하고 허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나는 키신저가 연설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가 약간 불안하고 거북한 웃음을 유발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유발하면서 추악한 권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람이다.
1. 1968년의 비밀
1968년 가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과 그의 밀사들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이 진행해 왔던 파리 평화회담(민주당의 존슨 행정부가 1968년에 추진했던 베트남 종전을 위한 평화협상)을 방해하려 했다. 그들이 선택한 수단은 아주 간단했다. 그들은 향후 집권할 공화당 정부가 민주당 정부보다 좀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고 남베트남 군부를 몰래 설득했다. 이같은 방법이 효과를 거두어 남베트남 군부는 선거 전야에 평화회담을 거부, 민주당이 제시한 평화적 수단을 수포로 되돌려 놓았다.
공화당이 파리 평화회담을 무산시키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비밀 채널이 필요했다. 우선 닉슨은 남베트남 군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행정부 내의 비밀정보를 알려주고 정부의 정책의도를 빠르게 읽어낼 수 있는 '첩자'가 있어야 했는데 그러한 정보 제공자가 바로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자유주의 공화당에서 가장 부유한,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의 열렬한 지지자였을 뿐 닉슨의 인간됨과 정책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경멸했으므로 애버렐 해리먼(민주당 존 슨행정부의 부통령이자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주축으로 하는 파리 평화회담 대표단은 키신저를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닉슨은 파리 평화회담 대표단인 애버럴 해리먼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 관련 정보를 얻는 데 헨리 키신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키신저는 록펠러의 수석 외교정책보좌관으로서 독자적인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아 북베트남 정부와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지도부와 직접 대화 채널을 갖고 있던 두 명의 프랑스인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다. 키신저는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베트남 하노이에서 프랑스 중재단을 접촉하고, 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키신저는 남베트남 군부 입장에서 볼 때 민주당 행정부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도왔던 것이다. 나중에 닉슨이 들고 나온 구호를 빌면 유리한 조건이란 결국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4년 더' 연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이것이 키신저의 출세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평범하고 기회주의적인 학자에서 국제적인 유력자로 급부상했다. 아첨과 권력에 대한 숭배와 비양심적인 태도, 과거의 적을 버리고 새로운 적을 선택하는 약삭 빠른 거래, 이러한 특징들은 닉슨의 대통령 취임시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키신저는 기분 나쁜 질문을 받을 때면 거드름을 피우면서 화를 내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목표했던 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영향력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을 더럽혔으며, 약소국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재난을 안겨주었다.
키신저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의장직을 맡았던, 비밀결사단체와 유사한 성격의 '위원회 40'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키신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빼놓 수 없는 대목이다. 이 기간에 미국이 해외에서 전개한 모든 비밀활동에 대해 이 위원회가 궁극적인 감독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 조지 브라운, 합참회의의장 윌리엄 클레먼츠 2세, 정무담당국무차관 조셉 시스코, 중앙정보국장 윌리엄 콜비 등이 키신저와 함께 위원회 40의 위원직을 맡았다. 포드 대통령이 최초로 위원회 40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미국 정부가 수행하는 모든 비밀작전은 위원회 40의 상임위원들이 감독했다. 이것으로 1969년과 1976년 사이에 수행된 미국의 주요 비밀작전들을 키신저는 알고 있었고, 나아가 직접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 인도차이나
키신저는 베트남 협상을 지지하는 듯 위선을 떨기도 했지만 사실은 베트남 전쟁을 4년 더 연장시킨 2차 장기전의 장본인이었다. 키신저는 이러한 2차 장기전 이외에 가능한 모든 대안들(베트남 종전을 위한 파리 평화회담을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제기됐던 다양한 대안들)을 좌절시켰다. 이것이야말로 키신저를 고발해야 하는 이유이며, 자신이 저지른 파괴행위들이 결국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키신저의 즉흥적인 변명은 마땅히 공박되어야만 한다.
정치적 집권을 위해 베트남 전쟁을 연장시킨 키신저는 이것을 집권 후 닉슨 행정부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키신저의 행위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닉슨과 키신저가 집권한 날로부터 1972년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총 20,492명의 미군 병사들이 인도차이나에서 목숨을 잃었다. 억울하게 죽은 미군 병사들의 가족과 생존자들이 키신저의 '야심' 때문에 자신과 가족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한, 키신저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뒤에도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 대통령을 설득하여 해군과 공군을 베트남에 추가로 파병시켰다. 파병된 110명의 해군 가운데 18명이 죽고 50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23명 가량의 공군이 비행기 추락으로 목숨을 잃었다.
3. 인도차이나에서 저지른 전쟁범죄
키신저는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베트남 전쟁을 두 중립국(라오스와 캄보디아)으로 확대시킬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베트남에서는 장기전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키신저는 중립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폭격과 침공에도 개입했다. 키신저는 베트남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동맹국의 지원이나 베트남 외부의 비축물자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대규모 초토화 전술을 통해서만 베트남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키신저는 수소폭탄을 사용하여 북베트남에서 중국에 이르는 철도를 파괴하거나 북베트남의 홍수방지를 위한 댐을 폭격할 생각까지도 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권력을 장악한 직후 캄보디아 영토를 실제로 침공하기 전부터 폭격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실행했고 결국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1969년 3월 18일과 1970년 5월 사이에 캄보디아 국경에서 3,630차례의 폭격이 행해졌다. 폭격은 일정한 계획에 따라 시작되었다. 폭격이 민간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도 키신저는 이를 은폐했다. 확대 폭격작전 결과 라오스에서는 35만 명, 캄보디아에서는 6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사망자의 몇 배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했다. 유독성 고엽제가 널리 살포되었고, 피해자는 어린 아이들, 산모, 노약자들이었다. 이처럼 소름 끼치는 전쟁과 이러한 전쟁이 낳은 끔찍한 결과들은 미국의 도덕적, 정치적 위기로 여겨질 수 있고, 또 그렇게 여겨져야만 한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에서 야전 사령관에게 내려가는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명령 계통에 자신이 개입했음을 밝혔다. 키신저는 핼드먼 헤이그 레이시턴 대령과 자신이 캄보디아 비밀폭격을 위한 '군사 외교적 일정'을 입안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해외에서 실행하는 모든 비밀작전을 계획하고 감독했던 위원회 40과는 별도로 키신저는 워싱턴 특별행동그룹(WSAG), 군비통제 담당확인위원회, 베트남 전쟁의 일상적 전개상황을 감독하는 베트남 특별연구그룹, 국방부 예산을 감독하는 국방정책 검토위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위의 직책들은 당시 키신저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좌지우지했는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자료이기도 하다.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 발생한 엄청난 사망자수에 대해서는 키신
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의회와 언론, 대중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최대한 은폐했다. 그리고 베트남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는 정치 보복을 가했다. 베트남 전 종전 당시 키신저가 미국 법률을 위반하면서 저지른 역할과 그를 처음 권좌에 올려놓았던 1968년 비밀작전은 모두 사전에 계획된 전쟁범죄들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짝을 이루고 있다.
키신저가 국제법을 위반하고 저지른 인도차이나 지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의 전쟁범죄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적군을 살상하기 위한 “화력 사용”이 아니라 “민간인 지역을 목표로 무차별적으로 행해진 화력 사용 혐의”다. 베트남 지원 차단이란 명목 하에 치러진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으로 죽어간 민간인 희생자는 1백만여 명이 넘는다. 이같은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은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이며, 바로 뉘른베르크 재판소나 헤이그 재판소의 피고석에 키신저를 세울 수 있는 중대한 전쟁범죄인 것이다. 이같은 전쟁범죄의 궁극적인 목적은 닉슨의 대통령 당선이었으며, 그 후에는 닉슨 행정부 내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키신저가 미국의 군사적 행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좌에 앉는 계기가 된 너무도 무차별적인 전쟁이었다.
4. 방글라데시
1970년 파키스탄 군부는 십 년만에 공개 선거를 허용했다. 벵골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아와미 동맹 지도자 샤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손쉽게 압승을 거뒀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도 압도적으로 다수 의석(동파키스탄에서 169석 중 167석)을 차지했다. 국회는 1971년 3월 3일에 개회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축출 위기에 직면한 군사정권의 우두머리 야하칸 장군은 3월 1일 국회소집을 연기했다. 이에 항의하여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에서는 대규모 시위와 비폭력적 시민운동이 전개됐다.
3월 25일 파키스탄 군대는 벵골의 수도 다카를 공격하고 라만을 체포하여 서파키스탄으로 끌고 간 다음 라만의 지지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키스탄 정규군이 여대생 기숙사에 총을 난사한 사건이었다. 기숙사를 빠져 나오려는 여학생들에게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파키스탄 대학살은 처음 3일 동안에만 최소 1만 명의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결과적으로 민간인 사망자수는 5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나중에 작성된 자료에 따르면 3백만 명에 이르렀다. 1971년 4월 말, 대량학살이 절정에 달했을 때 키신저는 야하칸 장군에게 “신중하고 빈틈없이” 행동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의 입장에서 방글라데시 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매우 중요했다. 키신저는 중국 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른바 ‘핑퐁 외교’를 펼쳤다. 닉슨과 키신저는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미국이 개입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정치적인 필요로 중국과 비밀스런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71년 4월 말 미국 탁구팀은 북경에서 시합을 갖자는 놀라운 초청장을 받았다. 또한 4월 말 중국 정부는 베이징 주재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닉슨에게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서한을 전달했다. 키신저는 중국과의 비밀스런 접촉을 통해 수많은 뱅골 민간인의 희생에 대한 암묵적인 양해를 받게 된 것이다. 방글라데시에 대한 키신저의 정책은 인도에 대한 닉슨의 적대감을 만족시켜주고, 방글라데시가 자주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된 이후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아와미 동맹의 지도자이자 방글라데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던 샤이크 무지부르 라만에게 보인 태도에서도 명확하게 뒷받침되었다.
1974년 11월, 키신저는 아시아 순방 중 8시간을 방글라데시에서 머물렀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3년 전에 뱅골만으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파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키신저가 출국한 뒤 몇 주 지나 다카의 미대사관 직원들은 라만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방글라데시 장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1975년 8월 14일 방글라데시에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고 라만과 그의 가족 40명이 살해당했다. 라만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정치적 동료들도 그로부터 몇 달 뒤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방글라데시에서 키신저의 저지른 전쟁범죄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게 미국 정부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정부임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외교적 목적 때문에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랄 수 있는 파키스탄 야하칸의 대학살을 용인하고 묵인했다. 더 나아가 가장 추악한 전쟁범죄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야하칸을 워싱턴이 지지할 수 있도록 했다.
5. 칠레
키신저는 민주주의를 경멸하며 단순히 “국민들이 무책임”하다고 해서 특정 국가를 “마르크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놓아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바로 칠레를 일컫는 말이었다. 키신저가 이런 말을 할 당시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고도로 발전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1970년 9월 칠레의 좌파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36.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우익 세력들은 분열하고 소규모의 급진 정당과 기독교 정당은 좌파를 지지함에 따라 칠레 의회가 살바도르 아옌데를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옌데라는 이름 자체는 칠레 극우파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일부 대기업(펩시콜라, 체이스맨해턴 은행 등), CIA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키신저는 체이스맨해턴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 CIA국장 리처드 헬름스와 대응방안을 논의한 뒤 헬름스와 함께 백악관으로 달려갔다. 헬름스가 작성한 회의록은 닉슨이 원하는 내용, 즉 아옌데 정권의 집권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험요소는 없다. 단 대사관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1천만 달러를 사용할 수 있고 필요하면 좀더 사용해도 좋다. 우리는 최고 정예요원을 확보하고 있다. …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라. 48시간 내에 행동계획을 완성하라."
1970년 9월 15일 닉슨과 면담한 뒤 키신저는 아옌데 정권을 군사 쿠테타로 전복시키기 위해서 유명한 '두 궤도' 정책을 고안해 냈다. 두 궤도 정책은 궤도 1과 궤도 2로 나뉘며 궤도 1은 위원회 40이 고안하여 실시하는 반(反)아옌데 선전 및 정치 프로그램을 뜻하며, 궤도 2는 위원회 40, 국무부, 당시 칠레 대사 코리에게는 비밀에 부친 상태에서 칠레 군사 쿠테타를 지원하고 도발하기 위해 수행된 비밀활동을 뜻한다.
1970년 10월 15일 키신저는 로베르토 비아욱스라는 극우파 장군으로부터 "납치 기한은 충분하며 아직 여유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비아욱스는 아옌대정권의 핵심 인물인 슈나이더 장군을 제거하라는 미국의 비밀지령을 받았다. 결국 닉슨-키신저 행정부가 아옌데 정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계속 불안정하게 만들어 1973년 9월 11일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음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키신저가 상원에서 국무차관으로 인준(1973년 9월)되는 동안 아옌데 정부는 유혈 낭자한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키신저의 음모가 성공한 것이다. 당시 칠레 주재 미국 군사고문단 패트릭 라이언은 1973년 9월 11일이 D-day였다. 칠레의 쿠데타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보고했다. 국무차관 잭 쿠비쉬는 칠레 군사평의회 피노체트의 집권을 위한 잔악행위에 대해 키신저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피노체트 집권 초기 19일 동안 처형된 사람들은 320명이며, 그 이후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키신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피노체트 정권 유지를 위해 CCC차관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인권범죄를 묵인, 방조했다. 키신저는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