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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 | 홍익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함규진 옮김

홍익출판사/2001년 10월/344쪽/12,000원



최고의 승리자, 아돌프 히틀러

기원 전 400년경, 중국의 전략가 손자는 전쟁에 관한 가장 심오한 문장을 남겼다. “강한 자를 피하려면 먼저 약한 자를 공격하라.” 아돌프 히틀러는 손자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통치하기 시작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7년 동안 바로 이 전략, 즉 “강한 세력을 피하고 약한 세력을 선제 공격하라.”를 철저히 실행했고, 그 결과 거의 완전한 승리를 손에 넣기에 이르렀다.

1940년 여름까지 히틀러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그가 지닌 놀라운 정치적 테크닉에 의해 얻어진 승리였다. 그 결과 히틀러는 1933년 1월에 독일 수상으로 취임했고, 두 달 후에 총통 자리에 올랐으며, 그 해 말에는 국제연맹의 탈퇴를 선언했다. 그는 1934년부터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1935년에는 베르사유조약을 위반하고 징병제도를 도입한 후 다음 해 프로이센령 라인란트를 장악했다. 또한 1937년에는 베르사유조약이 효력을 상실했다고 선포했고, 1938년 3월에는 주권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여 독일에 편입시켰다.

1939년 3월에는 체코 영토 일부를 점령했으며, 1940년 4월 9일 덴마크를 점령한 다음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까지 점령했다. 게다가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이 개발해 낸 장갑차와 전차들은 빠른 속도로 폴란드의 방어선을 허물어 폴란드 영토의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소련이 점령하게 되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적군의 방어선을 허물면 포병대와 융거87B 슈투카를 동시에 이용하여 적군의 진지를 파괴했고, 때로는 차량화 보병대가 공격을 도왔다. 연합군에게는 이 새로운 전략에 맞설 방법이 없었고, 전선은 급격히 독일군의 독무대가 되어갔다.

독일군은 원래 계획대로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 첫 공격을 가했고, 연합군은 너무나 엄청나고 확실한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황급히 진격했다. 1940년 5월 14일, 독일의 기갑군이 공격한 장블루 마을 근방에는 프랑스군의 전차가 150대 이상이 있었다.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은 독일군 장갑차들을 격렬하게 밀어냈지만 독일군이 전차를 계속 투입하자 끝내 밀리고 말았다. 5월 15일, 프랑스군은 마침내 독일군 전차들에게 길을 터주고 말았다. 이 독일군의 완벽한 승리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고, 서방 민주 진영을 자극했다. 서방 진영에 연합군들을 도와 히틀러를 무찔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게 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프랑스의 최후는 빨리 찾아왔다. 불과 3주만에 독일군이 100만 명 이상의 프랑스 포로를 생포한데 반해 독일군측의 사상자는 고작해야 6만 명 정도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전멸했으며, 프랑스군은 전체 병력의 1/3인 30개 사단, 그것도 가장 훌륭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병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거의 모든 장비를 잃고 본국으로 돌아간 영국 원정군도 8개 사단을 잃었고 당시까지 프랑스에 남아 있던 영국군은 솜강 남부에 주둔한 1개 사단이 전부였다.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고, 6월 16일에는 론강 계곡까지 도달했다. 바로 이날 밤 프랑스는 휴전을 요구했고, 6월 17일에는 레노가 사임하고 필리쁘 뻬뗑 원수가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계속 루아르강을 넘어 진군하고 있었다. 6월 22일 프랑스는 콩피에뉴에서 독일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휴전협정의 조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던 바로 그 열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24일 양측은 마침내 전쟁을 멈추었다. 현대 역사상 가장 빠른, 그리고 큰 군사적 승리가 히틀러에 의해 단 6주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분노에서 파생된 착오

처칠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일부라도 독일의 손에 넘어갈 경우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것을 걱정해서 영국이 프랑스 함대를 손에 넣거나 아니면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1940년 7월 3일, 프랑스 군함들을 습격하여 장악한 뒤 제임스 서머빌 제독이 이끄는 3대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몰고 알제리의 오랑과 메르스엘케비르에 도착했다. 이러한 영국군의 공격은 당연히 프랑스를 격분케 했지만 세계인들에게 영국 해군의 막강한 힘을 알리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 국민들에게는 영국을 돕는 일이 승산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었고 괴링은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집중적으로 전면 공격을 펼쳤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것은 영국이 새로 개발해 낸 레이더 때문이었다. 독일군 전투기가 서유럽에 있는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영국군 레이더의 화면에 나타나 그 진로까지 모조리 파악되었기 때문에 전투기 사령부는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한동안 슈투카 폭격기들은 계속해서 영국의 공군 비행장과 레이더 수신소를 공격했고, 8월 12일에는 레이더 수신소 한 곳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레이더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독일군은 레이더 수신소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8월 15일, 레이더 기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취소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된 괴링은 8월 24일에 가서야 영국 공군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로 중요한 방어 요소인 통신기지에 대해 알아내게 된다.

마침내 영국 공군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8월 23일과 9월 6일 사이에 독일군 전투기가 352대 손실된 반면 영국군 전투기는 466대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조종사 103명이 목숨을 잃고 128명이 부상당함으로써 조종사 1/4을 상실하였다. 만약 이때 히틀러가 통신기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시기에 그는 치밀한 계산이 아닌 분노에서 파생된 착오를 범하였다.

그는 영국의 도시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국민의 사기와 전시 생산력이 떨어져 적국의 항복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사기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가하여 군비 생산량은 독일을 앞질렀다. 히틀러는 뒤늦게 이러한 공중전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건물 파괴와 인명살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악한 교전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깨달아갔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

이제 히틀러의 주된 관심은 영국을 떠나 있었다. 히틀러의 이러한 태도는 1940년 7월 31일에 각 군 최고 지휘관들과의 면담에서 “1941년 봄까지는 소련을 파멸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발표했을 때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 당연히 히틀러의 이러한 발표에 독일의 많은 고위 관리들이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히틀러가 서방을 영국과 미국에게 맡겨둔 채 독일의 힘과 생각과 군사력을 오로지 소련을 파멸시키는 일에만 집중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지휘관과 각급 참모들은 히틀러에게 소련으로 진격하기 전에 영국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으며, 자기 신념에 대한 맹종으로 유태인을 비롯해 자신이 증오하는 민족들을 말살하고 소련을 파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련을 파괴하면 영국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의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무한정 소모되었으며, 이미 여러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고 독일군 내에서도 가장 잘 훈련된 병사라고 칭송 받던 낙하산부대원들도 잃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파멸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소련과 우크라이나에 독일인들만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아리안족들만의 삶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곳에 거주하는 슬라브족들과 유태인, 집시들을 말살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를 통해 600만 명을 학살했고, 폴란드인과 집시 100만 명, 그 밖에 770만 명의 소련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연합군 병력 910만 명과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거나 생포되었다가 살해된 소련 병사 500만 명은 포함되지도 않은 수치였다.

강자를 피하고 철저하게 약자만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원칙으로 각 국가들을 하나씩 흡수해 프랑스의 군사력을 무력하게 만들고 영국을 대륙에서 몰아냄으로써 승리를 거둔 그는 예전의 원칙을 버리기 시작한다. 1941년 6월 22일에 감행된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일명 ‘바르바로사 작전’은 20세기에 일어난 사건들 중에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성공적인 전쟁에 대한 불변의 원칙을 무시하고 곧바로 파멸로 이르는 길을 선택한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히틀러가 저지른 전략상의 최대 실수는 단 하나의 확고한 목표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각기 다른 세 지역, 즉 공산주의라는 이유로 레닌그라드를, 산업도시라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지방을, 그리고 소련의 수도이며 신경중추라는 이유로 모스크바를 한꺼번에 점령하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림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히틀러의 계획은 잘못된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비와 눈이 불규칙적으로 내리는 소련의 가을이 시작되기 전에 군대를 북쪽으로 보냈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시간상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거리가 너무 먼데다 열악한 소련의 도로 사정에 악천후까지 겹쳤고 붉은 군대의 끈질긴 저항은 히틀러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실수는 포위섬멸전에서 붉은 군대를 무찌른 후에는 스탈린이 더 이상 군대를 일으키지 못하리라고 가정했던 점이다. 즉 일단 포위섬멸전이 끝나면 소련은 붕괴할 것이고, 결국 나머지 지역을 여유 있게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소련 지도자의 탄력성과 소련 국민들의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이 시베리아에 대한 공격을 거부하자 스탈린은 그 지역에 있는 25만 명의 병사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결정적인 순간에 독일군에 대항하게 만들었다.게다가 독일군의 군사력이 열세로 몰리고 있는데도 유일한 문제 해결방법으로 오로지 공격만 고집했다. 잠시 후퇴만 하면 독일 군대를 구할 수 있었을 때 그는 그 때까지 점령한 영토를 한 뼘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절대로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오판 으로 스탈린그라드와 튀니지, 커스크 등에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그는 막심한 재앙을 초래했고, 결코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독일군의 상당 부분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만약 그가 소련에 정면 공격을 가하지 않고 북아프리카를 거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공격방법을 택했다면 2차대전의 결과는 그의 승리였을 것이다. 이 경로가 승리를 가져다 주리라는 점은 적군인 영국의 지도자들까지도 모조리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었다. 또 독일군 작전참모장인 알프레드 요들 장군,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로 유명해진 에르빈 롬멜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군 지휘관들까지 이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참고로 1940년, 프랑스 군대가 섬멸된 후에 이집트와 수에즈운하를 보호할 수 있는 병력은 영국군 1개 사단밖에 없었지만 독일군은 12개 사단이나 있었다. 그런 만큼 독일, 이탈리아의 구축국(樞軸國) 동맹군이 이 병력을 이용해 수에즈운하를 점령했다면 영국 해군은 지중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 지역과 아프리카 서해안을 점령해 그곳을 거점으로 남대서양의 주요 해로를 일거에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움을 받을 희망이 전혀 없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도 결국 항복할 것이며, 이전부터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던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포섭해 남동부 유럽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일단 수에즈운하를 장악한 후에는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요르단과 아라비아반도, 시리아, 이라크, 이란을 침공할 길도 열리게 될 것이므로 독일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전쟁 물자인 석유를 무제한으로 공급받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그 모든 기회를 놓침으로써 승리의 길을 잡지 못한 채 소련에 대한 정면 공격에만 집착하느라 최후 승리의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또한 히틀러는 훌륭한 전략적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기회를 잡기 위해 언제라도 전체적인 목표를 옆으로 밀쳐 버리는 전형적인 소탐대실의 태도를 갖고 있었다. 히틀러에 의해 집행된 키예프 공격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단기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궁극적인 승리의 길을 저버리는 행동을 보여주는 역사상 가장 명백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키예프에서 지역적으로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보다 큰 전쟁에서 이길 마지막 기회는 영원히 놓쳐 버렸다.

독일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소련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소련군은 어디서나 끈질기게 저항했고, 심지어 포위망에 빠져서도 조급하게 겁을 먹거나 항복하는 일이 없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사망자와 부상자, 그리고 실종자의 수는 77만 5천 명까지 증가했는데 이는 전체 야전군 병력의 25%에 해당하는 수였다. 게다가 지도층의 위기의식은 더욱 심각했다. 이미 히틀러는 미우스강으로 후퇴하려 했다는 이유로 룬트슈테트 장군을 해임했고, 독일군 내에서 가장 뛰어난 기갑군 지휘자이자 서부전선의 영웅인 구데리안마저 해임했다.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이 모스크바 북서쪽 100마일 지점의 칼리닌과 남서쪽 100마일 지점의 칼루가를 탈환하여 독일군의 거점을 포위함으로써 독일군의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위협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히틀러는 전군에게 끝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무렵 히틀러의 심장은 분명 분노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소련 침공에 실패하고 이대로 퇴각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실패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파리로 돌아갔던 나폴레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1942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에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히틀러는 자멸을 초래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할더가 자기파괴의 극치인 이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자 히틀러는 할더를 당장 해직시켰다. 결국 만슈타인이 독일군 제6군이 고립되고 25만 명의 병사를 잃기 직전인 스탈린그라드 전투 말기에 이르러서야 히틀러를 간신히 설득하여 남부에 남아 있던 나머지 독일 군대를 완전히 전멸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1942년 전투에서는 특히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한 작용을 했다. 우선 그는 집중의 원칙을 무시하고 볼가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의 유전을 점령하기 위한 두 가지 목표에 힘을 분산시켰다. 물론 붉은 군대는 이 기회를 잡아 두 공격을 모두 저지했으며 보다 임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스탈린그라드에 군사력을 더 집중시켰는데 바로 여기서 두 번째 실패 요인이 등장한다. 히틀러는 볼가강으로 진격하여 그 강을 통한 교통을 방해한다는 원래 목적을 이루었음에도 만족하지 않고 독일군 정예6군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 자체를 점령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그러려면 6군은 볼가 강변에 연안지역의 돌출부 끝에 있는, 건물이 매우 조밀하게 들어선 도심지에 병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같은 전략은 소련군으로 하여금 거리와 거리 사이를 누비는 도심 전투를 통해서 6군을 완전히 포위하도록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이 거대한 백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 독일군의 길고도 허술한 양쪽 방어선에 군대를 수집한 뒤에 막강한 반격을 가해서 6군을 삽시간에 포위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위협이 적은 지역에 있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로 보내어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6군을 구하도록 명령하지 않았다.

게다가 히틀러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결정만을 골라서 내렸다. 먼저 군대를 조각냈고, 도시에서의 시가전이 예상되는 스탈린그라드를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고 고집했으며, 6군에게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포위된 뒤에도 구출할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 나가 있는 두 집단군을 고립시키려는 징후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42년 11월 19일 소련군이 실질적인 반격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히틀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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