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덕형 지음 | 책세상
1.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원을 찾아
서구를 향한 창문 상트페테르부르크1703년 5월 27일, 구력으로 5월 16일은 러시아의 유럽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탄생 기념일이다. 북방전쟁(1700∼1721) 초기에 스웨덴에게서 되찾은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의 어귀에서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겠노라."라고 말했고, 이날 전제 군주의 이 한 마디는 새로운 러시아 역사의 시작이자 '서구를 향한 창문', '북구의 베니스', '북방의 팔미라'로 불리게 될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문화의 성스러운 로고스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설에 따르면 목선을 타고 네바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황실의 상징이자 신의 은총으로 간주되던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계시이자 상서로움의 징조로 생각해 지금의 페트로 파블로스키 요새(Petor Pavlovskaia Krepost)가 들어선 토끼 섬이란 뜻의 '자야치 섬'에 배를 댄다. 그리고는 소나무를 잘라 십자가를 만들어 그것을 땅에 박고 이곳에 요새를 세우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표트르 대제가 십자가를 땅에 박을 때 성자 사도 안드레이의 유골을 담은 황금 성물함을 돌 상자 속에 넣고 성수로 축성을 한 다음 땅 속에 묻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안드레이는 그리스도가 죽자 흑해를 거쳐 드네프르 강을 따라 슬라브족에게 최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사도 안드레이는 10세기경 비잔틴으로부터 정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러시아에서 가장 추앙받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돌 상자 안에는 "성육화된 그리스도처럼, 전 러시아의 위대한 군주, 황제 표트르에 의해 1703년 5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정초되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초석도 들어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하늘에서 독수리가 계속해서 선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은 사도 안드레이의 유골 위에 세워진 도시이며, 돌로 만든 상자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돌과 뼈, 그것은 앞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표적 환유가 되는 동시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화의 원초적인 재료들이 된다. 표트르, 러시아의 전제 군주인 그는 돌이자 반석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틴칸 성 베드로 성전 같은 신탁의 도시를 지상에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러시아정교회의 본향인 콘스탄티노플에서 벗어나 로마를 본받고자 했던 그의 서구 유럽 지향적 의지와 바람을 이런 신화의 변형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신탁의 도시인 새로운 로마를 유럽의 아주 먼 변방, 북구의 한 구석에 새롭게 이식하고 싶던 인신(人神) 표트르 대제의 기적 행위로 묘사되곤 한다. 표트르 대제는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의 도시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황량하고 척박한 핀란드 만의 어귀의 늪지대. 핀란드어로 늪지대란 뜻의 네바 강은 라도가 호수에서 발원하여 이 어귀에 이르면 사행(蛇行)을 거듭하며 열두 개의 작은 섬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나간다. 봄 홍수 때 이 늪지대와 섬들은 물에 잠기고 핀란드 만에서 불어오는 역풍과 역류하는 해수로 온 세상이 물바다를 이룬다. 그러나 핀란드 만 어귀, 네바 강의 물결이 천천 거쳐 나가는 늪지대, 소나무와 자작나무, 모기와 진흙 개흙, 그리고 모래가 전부였던 자야치 섬에 제일 먼저 페트로파블로프스키 목조 사원과 요새가 건설된다. 그러나 물기 스민 연약한 지반을 다지는데 동원된 병사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징용된 한 해 4만여 명의 민초들은 화강암과 대리석을 가까이는 지금의 발트 해와 핀란드, 멀게는 중앙아시아에서 실어 와야 했다.
그들은 네바 강의 건너편, 앞으로 건설될 도시의 지층에 사도 안드레이처럼 백골로 눕게 될, 그래서 '하얀 뼈들의 도시'로 불리게 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 없는 증인들이 된다. 로마노프 황실과 귀족들의 연극 무대 같은 호사스러운 장식들 밑에서 턱없는 보상의 도로(徒勞)를 "군주이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감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실레프스키 섬의 스몰렌스크 공동묘지에도 묻히지 못해 지금도 오래된 건물을 보수할 때마다 땅 속에서 이따금 초석들과 뒤엉켜 뼈로 발굴되곤 한다. 그들의 영혼은 도시 건물과 벽과 운하와 다리를 휘돌며 앞으로 생성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환상과 섬망과 몽유의 기제가 되는 것이다.표트르 대제의 도시 건설 계획안에 따라 1704년,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건너편 모이카 샛강과 강폭이 넓어지는 네바 강 사이의 작은 섬에 러시아 해군 조선소가 들어선다. 표트르 대제는 이 새로운 도시가 유럽을 향한 창문이 될 것을 기대했고, 이를 위해 암스테르담과 같은 조선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발트 함대를 통해 발트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유럽과의 통상과 교역을 위해서는 항구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선소의 건설이 당면 과제였다. 1704년 공사를 시작한 조선소는 표트르 대제의 설계에 따라 러시아 알파벳 ' '자를 닮은 형태로 건설되기 시작한다. 표트르 대제의 이니셜이기도 하고 밑변의 트인 부분이 네바를 향해 있어서 건조한 선박의 진수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표트르 대제가 직접 조선소 신축 공사에 참여해 공사기간 단축을 독촉하면서 직접 선박 건조에 뛰어들어 목수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마침내 1706년에는 첫 번째 선박을 진수시킬 수 있었다.
이곳은 1840년대까지 러시아 발트 함대의 주요한 거점이자 선박 건조 기지가 되어서 새로운 선박들을 진수할 때마다 성대한 축제들이 거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17년에는 이 해군 조선소 뒤로 흐르던 모이카 샛강을 포장하고 새로운 간선도로를 설치했으며, 1718년에는 해군 사관 생도들을 교육하는 사관학교도 이곳에 있다.
이 해군 조선소의 건축과 더불어 해군성 중앙 건물은 첨탑이 달린 목조 건축물이었지만 1719년 네덜란드의 건축가 게르만에 의해 첨탑에 사과와 범선이 장식되었으며, 1733∼1738년 목조 건물에서 표트르 대제 시대의 바로크 건축양식이 가미된 석조 건물로 재건축된다. 이 중앙 건물의 마지막 재건축은 1806년 러시아의 건축가 안드레얀 자하로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가 죽은 뒤 1823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공사기간이 많이 지연된 것은 1812년 나폴레옹과 벌인 전쟁 때문이었다.
자하로프는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이 해군성 건물의 재건축에 응용하고 있었는데 그의 재능은 해군성 중앙 건물의 첨탑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중앙 건물은 77미터 높이로서 아치형 입구에는 님프의 조각상이, 그 위의 지붕 계단에는 고대 그리스의 신상들이 서 있으며, 그 위에 있는 원주 둘레에는 28개의 입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시계가 달린 원형의 둥근 지붕 위로 22미터 높이로 치솟은 첨탑에는 금박이 입혀졌으며, 첨탑의 꼭지점에서는 범선이 하늘을 항해하고 있다.앙장브망(enjambement)은 다리를 걸친다는 의미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조화의 리듬이 모여 시행의 시구를 이루고 줄을 바꿔 다른 행에서 또다시 시구가 시작되는 앙장브망과 같이 이 도시의 앙장브망은 거리와 가로와 대로들이 교차하면서 만드는 모퉁이와 골목과 교차로들이다. 우리의 유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먼 곳의 도시, 골목과 그리고 모퉁이에서 갑작스럽게 어릴 때의 친구들이나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한 옛 친구들이 그 시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불쑥 나타날 것 같다. 골목길의 모퉁이는 영화의 한 장면과 다른 장면이 결합하는 몽타주의 원리를 반영한다. 우리는 영화관의 스크린에서처럼 이 도시의 거리와 모퉁이, 굽이굽이에서 몽타주된 기억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
도시의 앙장브망인 교차로 위에서 길을 건너고, 돌아가거나 신호등의 붉은빛 앞에서 멈춰 서면서 우리는 도시의 새로운 리듬을 읽는다. '막혔으니 돌아가시오, 아니면 다른 골목의 시행으로 돌아가시오.' 오선지 위에 표시된 음부 같은 그런 삶의 기호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생기를 얻는 것은 이러한 도시의 호흡과 하나의 음계를 이룰 때이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자폐증, 아니면 스타카토로 격앙된 히스테리. 그것은 도시가 리듬을 상실할 때 우리가 걸리게 되는 도시의 전염병이다. 길게 늘어선 자동차의 정체 앞에서 우리는 이런 전염병에 자주 걸린다. 또한 도시의 앙장브망에 유려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경고를 받는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앙장브망은 샛강과 운하와 다리로 연결된다. 북부의 베니스, 제2의 암스테르담이라는 별명처럼 상트페트르부르크의 폰탄카와 모이카 샛강,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그 위에 걸려 있는 수많은 다리들. 푸슈킨이 모이카 샛강의 강변로에 살면서 건넜을 페브체스키 다리나 코뉴센니 다리, 겨울 궁전의 에르미타주 다리, 모이카의 신니 다리와 크라스니 다리, 그리보예도프 운하의 사자 리비니 다리와 그리핀의 반콥스키 다리, 카잔 다리, 폰탄카의 이즈마일로프스키 다리, 세묘노프 다리, 넵스키를 이어주는 아니치코프 다리, 백야의 주인공이 걷던 센나야 광장 다리, 고골리의 주인공들이 걷던 쿠쿠쉬킨 다리나 스타로-칼린킨 다리…. 그러나 도시 내부의 이 다리들은 네바를 가로지르는 궁전 다리와 슈미트 대위 다리, 트로이스키 다리, 리체이니 다리, 알렉산드르 넵스키 다리처럼 한밤중에 들리는 도개교가 아니다.
앙장브망의 다리 난간을 장식하는 무늬들이나 물의 요정 루살카와 해룡 그리고 다리 입구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말과 사자, 그리핀과 스핑크스 같은 상징물들은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만의 독특한 정서를 만든다. 그 정서는 무늬와 상징이 엮는 이국적 상상력이자 신화적 상상력의 환기이다. 아니치코프 다리의 루살카, 반콥스키 다리의 그리핀 그리고 이집트 다리의 스핑크스들이 다리의 난간에 서서 우리를 지켜볼 때 그들의 시선에서 반짝이는 상고 시대의 현실 인식이 '지금 이곳(hic et nunc)'의 존재인 우리에게 투사하는 것은 무시간적인 존재 지평의 확산이자 생명의 경이로움이다.
하나의 생명체 위에 또 다른 생명체를 중첩시켜 모자이크하는 루살카와 그리핀과 스핑크스 같은 상상의 합성 동물들은 종과 종의 경계를 지우고, 종들이 서로 메타모르포시스처럼 변신된다는 점에서 생명과 그 생명의 한계인 시간을 영원과 무로 전이시키고자 했던 고대의 현실 관조물인 것이다.
자연의 왕국에 구획된 종들의 경계를 해체하고 모든 완성된 존재물의 고정적인 형태를 지우는 것, 그래서 모든 생명이 확산되어 궁극에는 하나의 통일체로 귀결하고, 그럼으로써 생명의 한계를 넘어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모순의 통일(coincidentia oppositorum)'을 달리 부를 이름이 없어 우리는 단순히 그로테스크,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이 모순의 통일 속에서 이제 우리도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고, 금속으로 신체의 일부를 대신하고, 유전자를 복제하기도 한다.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원을 물어본다면 누구나 주저없이 스몰니이 사원이라고 말할 것이다. 1748∼1764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신앙심을 상징하기 위해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세운 이 사원은 러시아식 바로크와 서구 유럽의 바로크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다. 라스트렐리가 이 도시에 세운 바로크 건축의 진주, 스몰니이 사원은 러시아정교회 사원 건축의 기본적인 형태인 그리스 십자가와 다섯 개의 둥근 지붕이 있는 형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 바탕에 하얀색을 대비시키고 있는 이 사원은 테두리의 윤곽선이 기둥과 벽면의 주름에 의해 공간적 고립에서 벗어나 전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건물 전체를 회화적으로 만들고 있다. 빛과 그림자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사원 전체의 조화를 흘러가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대칭과 비례를 통해 전체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네바 강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해 지반이 단단하지 못해 5만여 개의 대형 목재 지주를 땅 속에 박고 난 뒤에야 라스트렐리는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스몰니이 수도원의 사원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작은 교회들을 세웠고, 사원의 중앙 종탑에는 양파형 쿠폴을 하얀색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또 다시 작은 황금 쿠폴을 세워 올렸으며, 양옆에는 이보다 작은 푸른색 종탑과 하얀 쿠폴을 잇대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사원은 스몰니이가 아니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도심 한가운데에 모스크바의 노보제비치 여자 수도원과 같은 여자 수도원을 만들고 싶어서 부지를 물색하던 중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스몰니이 궁전 터를 이 수도원의 건축 부지로 내놓게 된다. 여제는 수도원을 노보제비치 수도원이라 불렀으나 이 부근에 위치한 스몰니이 궁전 때문에 수도원 내의 사원을 스몰니이 사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나자 라스트렐리는 원래의 설계대로 중앙 건물에 거대한 피라미드식 첨탑을 세우지 못하고 만다. 라스트렐리는 모스크바의 크렘린에 있는 이반 대제의 종루보다 장엄한 140미터 높이의 종루를 설계했으나 이를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다. 엘리지베타 여제 다음에 즉위한 예카테리나 여제는 라스트렐리의 화려한 바로크 건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이 사원 건축을 위한 황실의 자금 지원을 1764년 중단시켰다. 사원의 공사는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고 내부공사만을 남겨두었는데 사원의 출입구는 잠기게 되었다. 그러나 1832∼1835년 니콜라이 1세의 도움으로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스타솝에 의해 사원 공사가 마무리된다. 스타솝은 사원의 내부를 하얀색으로 장식해 외부의 푸른색과 대비되는 무대를 연출했고, 내부는 공명 효과가 뛰어나 콘서트 홀로도 자주 이용되었다.
스몰니이 사원은 네바 강 건너편에서도 바라보이는데 한 무명 시인은 이 네바 강에 반사된 스몰니이 사원의 쿠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5. 은박 없는 거울
물과 하늘의 형제, 구 해군성 첨탑6. 거리의 풍경, 그 안의 시간
앙장브망과 교차로, 몽타주된 기억을 찾아서7. 겨울 궁전에서 여름 정원으로
러시아의 영원한 시인 푸슈킨8. 기념비를 세우다
스몰니이바로크 사원의 하얀 쿠폴그러나 스핑크스의 이미지는 안드레이 비톱과 같은 현대 작가의 작품 『푸슈킨의 집』에서는 러시아 문화의 자기 동일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중적 존재이자 러시아 자체의 이중적 성격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스키타이인」이라는 시에서 러시아의 정체성 문제를 스키타이인의 이미지와 결부시켰다면, 비톱은 자기 동일성의 문제를 스핑크스의 이미지와 연계시킨다. 스키타이족과 스핑크스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스키타이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제, 스핑크스는 러시아의 미래가 지닌 수수께끼이자 비밀이라는 문제와 결부되면서 이 둘은 러시아의 정체성이라는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네바 강을 마주보고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 입구에서 나와 겨울 운하를 건너 밀리온나야 거리로 나오거나 궁전 광장의 텅 빈 공간을 바람과 같이 가로질러 모이카 샛강으로 나오면 연한 우윳빛을 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집이 보인다.
푸슈킨이 러시아 문학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특히 고전주의 시의 엄격한 작시법과 리듬감을 통해 낭만주의적인 서정성을 사실주의적 현실 인식과 결합시킨 것은 그의 창작세계가 지닌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를 통해 러시아 시는 금세기를 구가하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러시아 모더니즘, 즉 상징주의, 아크메이즘, 미래주의는 시의 은세기를 형성했다.
커다란 대문에 나 있는 쪽문으로 들어서면 건물 안채의 정원에 푸슈킨의 하얀색 대리석 동상이 서 있고 그곳에 그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소장품을 진열한 서재에는 생전에 그가 읽던 장서들과 원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