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
손제하 지음 | 일빛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
손제하 지음/이면우 옮김
일빛/2000년 3월/311쪽/10,000원
제1장 천문과 기상
첨성대 가는 길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瞻星臺)’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인 647년에 세워졌다. 고대 문명 국가에서 첨성대란 흔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고구려에는 이미 평양성 안에 첨성대가 있었으며, 백제에서도 4세기쯤에 첨성대를 세워 하늘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이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첨성 또는 점성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국가적 통치 행위였다. 이 때 첨성의 ‘첨(瞻)’자는 ‘우러러보다’는 뜻이므로 첨성대의 건립은 곧 왕의 위업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첨성대가 세워진 7세기 중엽은 신라의 군사력과 정치적 기반이 더욱 견고해지고 민족 통일의 기운이 움트던 때였다. 따라서 첨성대는 신라의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삼국 사이의 건축 기술과 경험의 교류, 그리고 그 형성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첨성대는 그 하부 벽면은 수직이지만 점차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고, 3분의 1 정도의 높이에서 약간 급해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다가 3분의 2 높이에서 다시 완만해진다. 첨성대에는 고구려 시대 이후의 산성 구축이나 불탑의 건축 경험을 풍부하게 살린 높은 과학성과 건축 양식의 독특함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곧 첨성대는 삼국이 보유한 건축 기술의 진수를 모아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첨성대는 그 때까지의 천문과학의 정수가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우선 첨성대의 위치가 신라의 천문관측 표준선이었고, 받침석의 정사각형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켜 네 방위의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그 위에 세워진 돔 모양의 겉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둥글고 완전히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절이나 태양의 위치에 관계 없이 햇살의 방향과 그림자의 길이를 재기가 쉽고, 이에 따라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무렵 중국의 천문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춘분점과 추분점, 또 동지점과 하지점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첨성대는 그 자체로 당시대의 사회상과 건축기술, 천문과학 수준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측우 제도
조선 초기에는 천문 기상관측 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강우량을 계측하는 부문도 크게 진보했다. 그 때까지는 비가 내린 뒤에 빗물이 땅에 스며든 정도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준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세종실록』을 보면 “각 도의 감사가 호조에 올리는 강우량에 대한 보고 가운데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드는 정도는 토지가 말라 있을 때와 젖어 있을 때가 서로 같지 않아서 서운관에 받침대를 두고 그 위에 깊이 2척, 지름 8촌의 쇠로 만든 기구를 놓아 빗물을 받아서…”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세계 최초의 원통형 절체 측우기가 서운관에 설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비가 올 때의 하천 수위도 측정했는데 비가 올 때나 맑게 갰을 때에 따른 물의 증감을 측정하기 위해 서울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눈금을 새긴 나무 기둥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측우 기구와 측우 제도도 임진왜란을 비롯한 거듭된 외적 침입과 양반들의 무질서한 권력 투쟁 때문에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1770년에 측우기를 다시 만들어 8도에 배치함으로써 그 제도가 전국적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그 무렵 연간 강우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측정 및 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측우 기간을 5~9월의 쌀농사 기간으로 제한하고 있다가 그 때부터 연간 측우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한 큰 비가 올 때는 시간당 강우량을 기입하기도 했다. 측우기의 발명과 측우 제도의 확립은 같은 시대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다. 그 무렵 중국에 강우량 측정 제도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고 측우 기간도 한정되었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의 측우 규정은 오늘날의 현대화한 측우 체계를 연상케 하는 세계 최초의 것이었다.
제2장 목판 인쇄에서 활판 인쇄로
하얗고 매끄러운 고려 종이
문자의 기록과 활자 인쇄에 가장 편리한 종이의 발명은 앞에서도 말한 대로 후한의 채륜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 제지법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610년 고구려 사람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채색법과 함께 종이와 먹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평양에 있는 모란봉의 청암동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금동 투각 장식과 함께 베 섬유를 삶거나 빨아서 희게 만든 양질의 종이가 발견되었다. 백제나 신라에서도 그 무렵 같은 종류의 종이를 만들었다고 짐작되는데 아직까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의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훌륭한 종이와 목판 인쇄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적어도 석가탑을 증축한 751년 이전에 이러한 종이를 목판 인쇄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쇄술의 발전에는 당연히 종이의 질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고려는 이러한 삼국의 제지기술을 계승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고려 종이는 그 당시 색이 희고, 매끄럽고, 튼튼해서 외국에도 그 품질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는 섬유가 잘고 균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튼튼한 것은 섬유의 질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나라에서 높이 평가받아 많은 양이 수출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 종이의 원료로는 닥나무나 등나무가 쓰였는데 우선 나무를 큰 가마솥에서 쪄낸 다음 껍질을 벗겨 말렸다. 이어서 이것을 물에 담가 하루 밤낮을 불리고 내피를 벗겨서 햇빛에 건조시키는데 이 상태를 흔히 ‘백피(白皮)’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끓는 잿물 속에 이 백피를 넣고 표백을 마친 다음 건조시킨 뒤에 몽둥이로 때려 가루로 만든다. 이어 풀을 섞어서 종이를 뜨는 틀에 얹어 놓고 균일한 종이층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이렇게 습기 있는 종이층을 판 위에 한 장씩 옮겨서 적당하게 눌러 표면을 매끄럽게 한 다음 마무리하는 공정만 거치면 된다.
팔만 대장경의 주변
팔만 대장경은 1236년부터 16년 동안 몽고군의 침입에 맞서 고려의 장인들이 글씨를 새긴 8만 6600매에 이르는 방대한 불교 경전이다. 이것은 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벌레 하나 먹지 않고, 풍상을 견뎌 내며 별다른 손상도 받지 않은 채로 오늘날까지 경상남도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팔만 대장경에 쓰인 목판의 재료는 그 무렵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는데 미리 몇 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 두었던 목재를 다시 소금물로 쪄서 기름 성분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몇 년에 걸쳐 그늘에서 말려 습기를 제거하고, 목판 형태로 다듬어 그 위에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 다 새긴 목판에는 옻칠을 하여 말린 뒤에 판목의 네 귀퉁이를 다시 놋쇠로 보강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글씨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백지에 글자를 쓰고 나서 이것을 거꾸로 목판에 붙이고 조각칼로 양각으로 파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장경 판의 표면과 안쪽에 14자씩 23줄로 총 644자를 새겼는데 그 글자 수는 무려 5천자를 넘는 아주 방대한 것이다. 16년 동안 글씨를 쓰고 새기는 사람말고도 몇백 명이 넘는 운반공, 목공, 칠공, 교정공, 그리고 승려들의 질서정연한 분업 공정으로 이루어졌다.
제3장 주조와 가공
현대의 주조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잔무늬 거울
우리 나라 고대의 대표적인 청동기 가운데 특히 주목받는 것으로 잔무늬 거울(多鈕細文鏡)이 있다. 여기서 ‘다뉴(多鈕)’란 뉴(鈕: 끈을 꿸 수 있는 고리를 말함)가 많다는 것으로 거울 뒷면에 고리가 두세 개가 달려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세문(細文)’은 글자 그대로 잔무늬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잔무늬 거울은 뒷면의 모양이 대개 무수히 많은 섬세한 직선과 삼각 무늬를 조화시킨 기하학적인 도안이므로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 나라의 잔무늬 거울은 양질의 백동을 써서 만든 것으로 둥근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또한 거울의 크기도 랴오닝 성의 차오양(朝陽)에서 출토한 직경 22.5㎝의 커다란 것에서 10㎝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남쪽에서 발견되는 것일수록 작다. 잔무늬 거울은 중국의 동북 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평안도, 함경도에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일본에서도 같은 종류가 상당수 발굴되었다.
잔무늬 거울에는 무수히 많은 가는 선으로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늘날의 첨단 제도기를 이용하더라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운 훌륭한 솜씨이며 그 기법은 놀라운 것이다. 무늬를 새기기 위해서 아마 딱딱한 박달나무에 그림을 새기고 그 위에 입자가 아주 가는 점토를 눌러 찍는 방법으로 거울 주형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지금부터 2천 몇 백년 전에 오늘날의 제도 기술로도 그리기 어려운 솜씨를 보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백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무녕왕릉
1971년 7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굴된 것은 백제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전기를 가져 온 사건이었다. 백제 문화는 주로 일본이나 신라에 전해진 유물로 그 우수성이 알려져 있었을 뿐 실제 우리 나라에서 유물은 많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백제는 신라에 비하면 금․은 장식품의 화려함에서도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고 여겨졌는데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이러한 상식을 깨뜨렸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품은 왕과 왕비의 금관 2점을 비롯하여 금․은제 관 장식이나 관대, 팔찌, 귀고리, 곡옥, 청동제 신발 같은 장신구 외에 잔, 숟가락, 식기, 화병 등과 같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40여 종, 1천여 점으로 많은 양이다.왕과 왕비의 금관 장식을 보면 백제는 금속 공예면에서 중국 남조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권을 창조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다시 신라나 일본에 전하는 가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무녕왕의 부장품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했으며 ,통일을 이루어 그 속에서 굳건한 민족 문화의 뼈대를 형성했음을 보여 준다.
제4장 독자적인 의술에서 한의학으로
불후의 명저,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16세기 의학자인 허준이 편찬한 책으로 우리 한의학을 성숙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다. 1596년 왕명으로 『동의보감』의 편찬이 시작됐지만 다음 해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침략 때문에 의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천연두가 유행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기도 했다. 그리고 이처럼 불운한 상황에서 허준은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당한 기간에도 쉼없이 집필을 계속했다. 유배 기간을 포함하여 실로 15년의 피나는 노력 끝에 드디어 1610년 25권이나 되는 명저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동의보감』이 종래의 의학서와 비교하여 가지는 특징이 있다. 우선 이 책이 허준의 학문에 대한 탐구와 비판 정신, 그리고 실증주의 사고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허준의 정신의학적인 진보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병을 정신과 육체의 상호연관과 통일성을 기초로 하여 봤을 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한 정신 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의 의학서 가운데 『동의보감』만큼 많이 읽혀진 책은 없다. 최근에 이 책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다.
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사상 의학
‘사상 의학(四象醫學)’이란 사람의 체질을 태양, 태음, 소양, 소음 4가지로 구분해서 같은 병이라도 그 사람의 체질에 따라 예방과 치료를달리 해야 한다는 학설이다. 허준과 함께 우리 나라의 뛰어난 의학자인 이제마는 1894년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지어 사상 의학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표했다. 이 책은 4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에는 성명론(性命論)․사단론(四端論)․확충론(擴充論)․장부론(臟腑論)을, 권2에는 의원론(醫源論)을 서술하고 있다.
이제마는 성명론에서 그가 제창한 사상 의학의 철학적 근거 또는 의술의 기본 원리인 사고틀을 기반으로 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과 인간의 체질과 심리 상태를 상호연관시켜 다뤄야 한다는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펴고 있다. 그리고 사단론에서는 정신 작용이 육체에 끼치는 영향을, 확충론에서는 사상인이 갖는 성격의 장단점과 체질의 조화에 대해서, 이어 장부론에서는 장기의 소재와 생리 형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권2의 의원론에서는 의학의 유래와 함께 사상 의학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내놓게 된 동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권3과 권4에서는 사상인에 대한 자신의 치료법을 체계화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제마 이전에도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생리에 관한 네 가지 체액설이나 중국의 음양오행설처럼 관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학설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상 의학은 오랜 기간에 걸친 임상 경험과 실증을 통해 이루어진 학문이며, 약효나 사람들 각자가 나타내는 현상에 대응하여 서로 다른 처방을 내리는 완전히 새로운 종합적인 임상 체계였다. 『동의수세보원』은 기존 한의학계뿐만 아니라 현대 서양 의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제5장 가마와 물레
빗살무늬 이름에 숨어 있는 비밀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우리 나라 선조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쓴 토기인데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유역과 서남부의 섬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규수 서해안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모래 성분이 섞인 흙으로 구운 것이 대부분이지만 시기가 나중인 것은 서면이나 활석, 운모 가루와 같은 부재료를 섞어 만든 것도 있다. 모래를 섞은 것은 구울 때 높은 온도로 구우면 모래 성분이 유리질로 바뀌어 단단한 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석면이나 활석, 운모 가루를 섞은 것은 그릇을 만들 때 진흙을 쉽게 갤 수도 있고 불에 넣어 구울 때에 쉽게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빗살무늬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표면이 빗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무늬는 점선으로 된 띠 모양, 사선 모양 또는 나뭇잎 모양과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신석기 시대 후반이 되면 점선은 파도 모양으로 변하고, 사선은 번개 모양이나 소용돌이 모양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무늬가 간결하고 선명한 점이 같은 시대 인접한 여러 나라의 토기들과 다른 특징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처음에 V자형으로 밑이 뾰족한 형태가 많이 만들어졌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둥근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부푼 듯한 모양에 견주어 비교적 깊이가 있는 용기가 많으며, 그 모양새가 매우 단정하고 아름답다.
분청 사기가 도자기의 질을 떨어뜨렸나
분청 사기란 ‘분장 회청 사기’를 줄인 말로 회색 흙으로 그릇 형태를 만들어 그 표면에 흰 흙을 바르고 다시 회청색의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 낸 자기를 말한다. 분청 사기는 대체로 청자보다는 값싸고 거친 도자기라고 여긴다. 그리고 고려 청자에서 볼 수 있는 폐쇄적이며 정교한 멋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강한 힘이 느껴지며, 구김살 없는 서민의 도자기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분청 사기의 특징과 그것이 가진 멋은 고려 청자와는 완전히 다른 조선 시대의 서민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거친 느낌의 분청 사기가 어떻게 귀족적 품풍격의 고려 청자에 뒤이어 조선 초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원래 고려 청자는 서민들의 생활용품이 아니라 상류 귀족 계급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자는 고려 사회에서 사용했던 전체 도자기 가운데 지극히 적은 양이었다. 따라서 고려 청자는 질적인 측면에서는 고려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만 생활용품으로서의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