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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검 특수부

우오즈미 아키라 지음 | 사과나무
1988년 초 「문예춘추」의 기사에 떠밀리듯 화려하게 변호사로 데뷔한 다나카는 사무실 경영을 궤도에 올려놓고 급속하게 인맥을 넓혀간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두 사람의 금융업자이다. 하나는 도쿄의 전성기에 약 20개의 점포를 소유하고 650억 엔의 매상을 자랑했던 논뱅크 아이치의 전(前) 사장 모리시다 야쓰미치로 '금융왕'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모리시다와의 만남은 다나카의 지하 인맥의 기점이 되었다. 정·관계 방면 인맥을 넓히게 된 데는 전(前) 대장성 주계국 차장 나카지마 요시오에게 수천만 엔의 현금을 증여했다고 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오사카의 논뱅크 ECC 회장인 나카오카 노부에가 계기가 되었다. 개업 2년째부터 다나카의 소득은 1억 엔을 넘었다.



같은 해 1월 4만엔 대까지 육박했던 도쿄 증권거래소의 평균 주가가 폭락하며 버블경제의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특수부로서는 강력한 순풍이 되었다. 그 동안 제 세상인 양 봄날을 구가하고 있던 가부토마치(도쿄의 금융가)의 큰손들이나 거기에 몰려드는 폭력단과 정치인, 오너 경영자들이 주가 급락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지하경제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고 그것은 고발로 이어져 특수부에 적발의 단서를 가져왔다. 특수부의 타깃이 된 '어둠 세계의 신사들'은 어떻게든 적발을 면하려고 다나카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나카가 그들의 변호에 분주한 반면 옛 일터인 특수부와의 대립은 심화되어간다.



'어둠의 세계'에서 인기 있는 퇴직검사 다나카의 힘의 비밀은 무엇인가. 첫째, 검찰과 경찰에 깔아놓은 정보 루트다. 그는 오사카의 후배 검사와 사무관, 경찰관 사이에서 "팬클럽이 형성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뿌리가 튼튼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둘째로는 다나카가 검찰과 국세청의 약점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로서는 자기들 솜씨를 훤히 알고 있는 다나카만큼 귀찮은 변호사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민완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맘껏 떨쳤다. 이 무렵의 그는 자신이 조만간 후배들에게 체포영장 집행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1997년 10월 25일 「아사히신문」 조간에 큰 제목이 튀었다. '허영중 피고 어음사기 의혹/상시 2백억 엔 발행/오사카의 변호사 개입?' 어음사기를 당한 것은 와카치쿠 건설 등 10여 개 계열사를 두고 있는 이시바시 산업 그룹으로 허영중으로부터 아라이 구미의 주식 1,120만 주의 구입 제의가 있어서 그 대금 명목으로 어음을 사취 당했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실명은 밝히지 않았지만 '오사카의 변호사'란 다나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기사가 난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이시바시 산업그룹의 오너인 이시바시 히로시의 의형으로서 허영중과의 교섭 창구가 된 부동사 회사 HR로열 사장인 하야시 마사미쓰를 만났다."어머니를 며느리한테만 돌보도록 맡길 수도 없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수용시설에 모 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검사의 봉급만으로 역시 큰일이지요. 게다가 2, 3년 주기로 이루어 지는 전근도 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여러 가지 문제에다 오사카부의 사건이나 헤이와 상 은, 간다초 사건 등이 겹쳐 참 이상하게도 '이제 그만둘까'하고 생각하니 정말 금세 마음 이 무너져 버리더군. 의료비가 많이 드니까 변호사를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사정을 상사에게 설명하자 '어머니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않은가. 조금 만 참으면 될 텐데…'라고 한 마디 하고 말더군. 너무나 차가운 말에 정나미가 떨어져 검 찰이 싫어졌소."제4장 이시바시(石橋) 산업 사건제3장 어둠 세계의 수호신그런데 S는 교섭하는 자리에서는 "성의만 보여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려 하지 않아 교섭은 일단 중단되었다. 새해 들어서자마자 하야시는 허영중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 허영중의 협박에 못 이겨 그해 4월 이시바시 산업측은 아라이 구미 주식 대금조로 총 230억 엔 남짓의 어음을 발행했다. 그런데 다음해 2월 2천 엔대였던 아라이 구미 주가가 6백 엔대로 급락해 조사한 결과 다나카가 보관하고 있어야 할 주식이 매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허영중은 아라이 구미의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관계 기업으로 하여금 증권회사에 매수 주문을 내게 하는 한편 몰래 증권시장에 내다 파는 수법을 써서 백수십억 엔의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아라이 구미 주식의 주가 조작 싸움에서는 중소 증권사 십여 개가 허영중측으로부터 매수주문을 받았지만 대금을 받지 못하는 '허수주문' 거래의 피해를 입었고, 그 결과 역사가 깊은 오가와 증권이 폐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검찰측에 의하면 허영중은 이시바시와 하야시에게 "어음은 어디까지나 보이기 위한 것일 뿐 결제 자금은 내가 조달한다. 조달될 때까지 어음을 돌리지 않기로 교토 파이낸스와도 말이 되어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믿게 하는 한편, 교토 파이낸스측에는 "이시바시 산업이 자금을 조달하여 어음을 틀림없이 빼낼 것이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이시바시가 "어음 결제 청구가 돌아오면 이시바시 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다."고 걱정하면서도 교토 파이낸스 사장인 미나토한테 허영중의 '약속'을 확인하지 않은 점이다. 2백억 엔이라는 거액의 어음에 이서를 하려고 하는 경영자가 전화 한 통화면 확인될 일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허영중과 이시바시, 그리고 하야시 사이에 주거니 받거니 했던 돈의 흐름 속에 그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가 숨어 있다. 검찰측의 모두진술에 의하면 허영중은 약 2백억 엔의 어음을 손에 넣기 직전인 3월 하순 하야시를 통해서 이시바시에게 융자 명목으로 25억 엔을 우려냈고, 4월 중순에도 60억 엔의 융자를 받았다. 허영중은 총 85억 엔 중 20억 엔밖에 갚지 않았다. 만약 돈의 흐름이 이것뿐이라면 이시바시와 하야시는 허영중의 입방아에 놀아난 가엾은 피해자다. 하지만 이시바시는 어음에 이서하기 직전인 4월 초, 허영중에게 현금 2억 엔이 든 가방을 받았다. 게다가 검찰측 모두진술에 의하면 4월 말경 이시바시는 허영중으로부터 모두 15억 2천만 엔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중 5억 2천만 엔은 이시바시의 이복 형인 가스노리가 군바 현의 신판 회사에 담보로 넣어둔 이시바시 산업 주식 1만 주의 매수 대금조였다. 나머지 10억 엔은 허영중이 "이시바시를 일류 재계인사로 만들기 위한 자금이오."라면서 주기에 받았다고 한다. 이 10억 엔 중 4억 엔은 의동생인 하야시 마시미에게 건넸고 수중에 남은 6억 엔 중 4억 엔은 허영중이 계획하고 있던 회원제 고급 클럽 '오사카 아메리칸 클럽'에 출자했다고 한다.



그가 받은 총 16억 2천만 엔의 태반은 이시바시 산업측이 허영중에게 융자한 85억 엔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이시바시가 회사 돈을 융자해 주고 그 보답으로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특별배임 혐의가 생긴다. 이 경우 HR로열의 하야시나 허영중도 이시바시의 공범으로서 특별배임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 "2백억 엔의 어음은 '보이기 위한 어음'이 아니라 아라이 구미 주식 대금조로 이시바시측에 지불한 것이다. 결제 자금도 이시바시측이 마련한다는 약속으로 되어 있었다."라는 허영중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기죄는 성립되지 않고 도리어 이시바시, 하야시, 허영중이 공모한 특별배임의 혐의가 발생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검찰측이 묘사한 것처럼 '사기의 가해자=허영중과 다나카, 피해자=이시바시와 하야시'라는 단순한 구도로는 이 사건을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시바시 산업과 교토 파이낸스를 희생양으로 삼은 허영중과 그 '짝'인 다나카를 적발했다는 의미에선 '정의'는 검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의'가 아무래도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왜 검찰은 풋내기의 눈으로도 확실히 부자연함을 알 수 있는 사건을 짜맞추기한 것일까. 허영중과 다나카의 변호인 기노시타 다카시가 말한다.1995년 말 대장성은 파산한 주택금융전문회사('주전'으로 약칭) 7개 사의 처리책으로서 6,850억 엔의 공적자금 투입을 발표해 여론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1996년 7월 26일 전(前) 일본변호사협회 회장 나카보 고헤이가 이끄는 주택금융채권관리기구('주관'으로 약칭)는 이 날부터 주전 7개 사가 남긴 거액의 부실채권 회수에 나서게 된다. 나카보는 "국민에게 2차 부담을 끼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직원들에게 "우리는 국책을 실천한다. 우리는 정의라는 확신을 갖는다. 대출로 이득을 취하는 일과 자산 은닉은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는 기개를 갖는다."라는 카드를 휴대하게 했다.



하지만 진정 주관이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정의'의 회사일까. 주관은 원래 민간 금융기관이 주전에 쏟아 넣은 자금의 회수를 대행하기 위해서 만든 국책회사로 더 단적으로 말하면 민간 금융기관의 채권 회수 '별동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카보가 내건 '정의의 깃발'은 그러한 주관의 본질을 감추는 무화과잎에 불과한 것이다. 이 별동대 덕분에 민간 금융기관은 대신 채권 회수를 해 주는 덕을 봤을 뿐만 아니라 포기한 채권은 손금으로 세무처리되었기 때문에 전액 회수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금융기관 구제를 위해 대장성이 생각해 낸 눈속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 눈속임의 최대 악취는 1차 손실 보전에 6,800억 엔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채권회수 과정에서 2차 손실이 나면 국고로 보전하는 궁리를 짠 것이다. 부동산업자들은 단지 주전이라는 논뱅크로부터 돈을 빌린 것뿐이고, 그것이 어느새 국가에 대한 빚인 양 바꿔치기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카보가 내건 '정의의 깃발'에 의해서 도바후시미의 싸움에서 패한 막부군처럼 '국적'으로 비난받게 된 것이다.



주관이 탄생하기 전에는 강제집행방해와 경매방해가 적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민사상의 상거래나 채무·채권 관계에 수사당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민사 불개입의 원칙'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수사당국이 일반 시민의 사생활이나 경제행위에 함부로 개입해 오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나카보의 주관은 이 방파제를 무너뜨렸다. 두려운 것은 '민사 불개입'의 방파제가 기본적 인권의 옹호자를 자인하는 변호사의 손으로 붕괴됐다는 사실이다.



겉치레 속임수인 '정의의 깃발'도 높이 내걸면 큰 구심력을 갖는다. 주전 문제가 일어난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 경제의 앞날에 대한 위기감을 배경으로 변호사도, 재판관도 그리고 검사도 '국책의 수행'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민들로서는 우려할 만한 사태이다. 재판관, 변호사, 검사의 법조계 3자가 서로 독립적이고, 솔직히 비판을 주고받음으로써 비로소 사법의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 이 3자가 '국책'이라는 미명 아래 한편이 되어 공조를 한다면 어떤 무서운 사태가 일어날 것인가. 1998년 말 도쿄지검과 경시청에 적발한 야스다 변호사 사건은 그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제7장 야스다 변호사의 체포제8장 법정의 대역전극제9장 국책수사제10장 변모하는 사법가부토데코무는 버블시대에 홋카이도 경제의 견인차로 각광을 받았던 부동산·건설회사다. 1994년 9월 삿포로에서 이 가부토데코무에 연루된 이상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가부토 본사의 회장실 및 자택 도청, 관리인의 의문의 추락사, 삿포로지검 후쿠하라 겐지 검사의 자살…. 일련의 괴사건의 공통적인 키워드는 가부토데코무의 어음위조 사건이다.



가부토데코무의 주식이 거래소에 상장된 것은 버블 최성기인 1989년 3월로 2,300엔의 주가가 이듬해 7월 4만 1,400엔으로 18배나 급등했고, 1989년 154억 엔에 불과했던 매출도 1991년 1,010억 엔으로 뛰어올랐다. 급성장의 비밀은 하나의 건물로 두 번씩의 매출을 올리는 '마법의 매출'이라고 일컬어진 독특한 거래방식과 산업구조가 취약한 홋카이도 도내 신흥 기업을 육성하려는 척식은행의 전면적인 지원이었다. 그러나 척식은행과 가부토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 했다. 1990년 4월 대장성의 '총량규제'로 부동산 신화가 붕괴되고 가부토데코무의 실적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때 척식은행은 가부토 그룹에 1천 수백억 엔을 융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척식은행의 경영을 압박하는 최대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1992년 11월, 척식은행은 가부토 그룹에 대한 금융지원을 단행함과 동시에 대폭적인 압축을 촉구하는 방침을 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금융책은 가부토데코무의 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토의 파산을 전제로 한 척식은행의 채권 확보책이었다.



척식은행은 가부토 그룹 내의 두 우량기업인 에에펙스와 리치필드를 분리시켜 척식은행의 산하에 넣어둘 시간을 벌기 위해 도산시키는 것을 미루고 있었고, 척식은행이 벌이고 있는 가부토 파산의 시나리오를 눈치챈 가부토 회장 시게루는 에이펙스의 어음을 발행했다. 에이펙스 지배권을 수중에 넣은 3개월 후인 5월 말에 이 사실을 안 척식은행측은 에이펙스를 도산시키지 않고 어음결제를 면하기 위해서 1993년 7월 어음 위조로 사토 시게루를 삿포로지검에 고소했다. 8월 25일 척식은행 부행장은 고소 취하 조건으로 사토에게 그룹 총수 사직과 해외 자산을 내놓을 것을 제시하고 사토는 이 제안에 굴복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고소를 취하하면 당신네들의 특별배임이 문제가 됩니다."라는 삿포로지검 형사부의 K검사 말에 민사상의 흥정 재료로 고소했던 척식은행은 기가 막혀 버렸다. 지검이 실제로 겨냥한 것은 어음위조 사건이 아니라 척식은행과 가부토가 한 몸이 된 특별배임 사건의 적발이었고, 고소 반년 전부터 K검사는 척식은행의 가부토에 대한 과잉융자 의혹의 내사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척식은행과 대장성의 노력으로 특별배임 사건의 강제수사는 중지되었으나 삿포로지검은 어음위조 사건으로 강제수사를 개시해 어음위조 및 행사의 죄로 사토를 기소했다.



1994년 2월 26일, 삿포로지법에서 열린 사토의 첫 공판 한 달 후 검찰은 수사종결을 선언하고, K검사는 이동발령이 났다. 이 와중에 일어난 특임검사 후쿠하라 겐지의 자살은 검찰 상층부의 무리한 지휘로 인한 검찰의 분열을 드러냈다. 후쿠하라 자살의 배경이 된 상층부의 무리한 지휘는 가부토데코무 사건에도 여실히 드러나 척식은행과 가부토의 특별배임 사건에서 어음위조 사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갈피를 잃은 수사는 법정 심리에 악영향을 미쳐 재판은 검찰측의 무참한 패배로 끝이 났다.



가부토 사건과 허영중·다나카 모리가즈의 어음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하나는 모두 다 수사의 최종 목표가 정계의 오직 적발에 있었다는 것이다. 정계오직 적발을 위해 짜맞추는 식의 수사를 진행한 검찰측에는 정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사실 규명은 어이없을 정도로 등한시되었다는 점에서 정의와 진실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 검찰을 억누르고 있던 정계의 중압은 사라지고 검찰이 정계의 우위에 서는 검찰과 정계와의 관계가 변화되었다. 또한 특수부의 수사도 정·관계 오직과 대규모 기업범죄 적발이라는 역할에 부실채권 문제처리까지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검찰 OB가 경제 재상의 키를 쥐고 있는 정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검찰은 눈에 띄게 변모했다. 그들을 속박했던 냉전구조는 붕괴하고 자민당과 대장성도 전과 같은 힘을 잃었다. 이제 아무 것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 없다. 내 세상 돌아왔다고 노래 부르는 동안 국가의 질서를 지탱할 사법 관료로서의 자부심이 교만으로 변해 철저히 진실을 파고드는 정신이 조금씩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999년 3월 3일, 도쿄지법 104호 법정은 이상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90여 석의 방청석은 보도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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