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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

권삼윤 지음 | 효형출판사
오슬로의 표정은 한없이 맑고 밝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사나이들은 그들의 낙원에 안주하지 않는다. 바이킹의 후예들이어서인지 그들은 바다로 바다로 나갔다. 비그되위란 이름의 박물관 지구는 바로 그런 바다 사나이들의 모습들을 한 눈에 보여 준다.



프람호 박물관은 1893년 북극 항해에 나섰던 난센이 타고 떠났던 배다. 프람호는 듬직하다못해 우직해 보인다. 프람호 박물관 옆에 있는 콘티키 박물관. 붉은색의 커다란 돛을 활짝 펴고 망망대해를 오직 해류와 바람의 힘으로 달려가는 콘티키. 1947년 노르웨이의 청년 토르 헤이에르달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발사나무 뗏목으로 페루의 카이요항을 떠나 101일만에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 도착, 폴리네시아인의 선조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건너갔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과연 난센의 후예다운 면모이다.



노르웨이의 역사는 바이킹의 활약으로 시작된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를 근거지로 바이킹은 비옥한 땅과 새로운 물자를 찾아 바다로 바다로 뻗어나갔다. 급기야 이웃나라에선 그들의 출몰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영국과 프랑스 북부지역은 물론 지중해와 러시아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그러나 바이킹은 식민지를 통한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주체성을 잃어갔고 결국 그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비그되위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이킹 배 박물관에는 바이킹 시대 초기 여왕이 사용했다는 배가 전시되어 있다.



베르겐을 찾기 전 오슬로의 또 하나의 명물인 프롱네르 공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프롱네르 공원은 조각공원이다. 대리석과 철 등으로 만든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구스타프 비겔란이란 조각가의 작품이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공원은 조깅과 산책 등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종일 붐빈다.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입구의 돌다리 양쪽 난간을 차지하는 청동 인물상들이다. 비겔란은 인간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근원을 표현하려고 했다. 비겔란의 최고 걸작인 모노리스는 스무 개쯤 되는 계단을 쌓아올려 만든 원형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어 전체 공간을 압도한다. 모노리스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모노리스에 새겨져 있는 인간 나상 하나하나는 한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새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롱네르 공원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래도 그림 같은 곳 베르겐의 백미는 옛날 독일 상인들이 살면서 상업활동을 벌였던 브리겐 지구다. 유네스코는 이 브리겐을 197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한자동맹시대의 도시구조와 목조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목조건축물의 특징은 돌이나 벽돌건축물과 달리 벽면을 다양한 색깔로 쉽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조건축물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불이다. 한자 박물관의 안내원이 말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절대 금연입니다. 불을 켜서는 안 됩니다." 이곳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말린 왕대구도 있다. 베르겐 일대의 북해 바다에선 대구가 많이 잡혔고 이곳의 주력 수출품은 바로 이 말린 대구였던 것이다. "이 말린 대구는 2백살도 넘습니다. 아주 명물이죠. 브리겐을 먹여 살렸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린 대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안내인은 이상하게 생긴 나무통도 가리켰다. "이건 벌금통입니다. 규율 위반자에게는 가차없이 벌금을 물렸던 것이죠.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한자동맹 시민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구 22만의 베르겐은 유서 깊고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브리겐 지구를 껴안고 있는데다 이 도시 출신 음악가 그리그가 피아노 협주곡 a단조에서 선율로 표현한 피오르드가 있어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여느 도시 같으면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을 짓겠지만 베르겐은 그러지 않았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미래를 희생할 수 없다는 생각과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산다. 그런 마음가짐이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하였으니 미래 또한 약속해 줄 것이다."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라는 아폴리네르의 시처럼 '파리'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세느강. 유네스코는 세느강 양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생 루이섬 한쪽 끝을 지나는 쉴리 다리에서부터 에펠탑이 우뚝 선 레나 다리에 이르기까지,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등이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왕정을 뒤엎은 시민들. 대혁명을 통해 문화와 예술의 지형도 완전히 바꿔나갔다. 왕가의 전유물이던 문화와 예술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왕궁에서 박물관으로 바뀐 루브르다. 시민들이 화가들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가난한 화가들도 시민들의 관심을 끌면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이름 없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를 찾아 먼저 정착했던 곳이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파리의 달동네 몽마르트르는 무명 예술가들에겐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예술의 산실이었다. 1887년 고흐가 그린 '몽마르트르 전망'에 나오는 풍차와 포도밭도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이곳에서 자주 찾던 곳은 두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테르트르 광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아래 펼쳐진 에밀 구드란 이름의 작은 광장으로 피카소가 파리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을 그렸던 곳, 에밀구드란엔 '바토 라브아르'란 글씨를 새겨놓은 말쑥한 건물이 있다. 바로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집이 1970년대 불타버리자 파리시가 옛 모습으로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바토 라브아르는 불어로 '세탁선'이란 뜻이다. 새로 단장한 바토 라브아르의 1층 진열장엔 당시 피카소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과 함께 아비뇽의 처녀들의 복제화가 걸려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어느 순간 평가를 받게 되자 피카소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혁명의 도시 파리에서 기존 미술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한편 파리와 마르세이유 인류학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사람은 머리를 쭈삣쭈삣 세우고 귀고리를 길게 늘어뜨린 백인 여인이었다. 조금 전 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여인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를 바로 '아프리칸 룩'이라 부르는데, 이것의 선구자는 엉뚱하게도 나폴레옹이다. 그는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나서면서 175명이나 되는 전문학자들을 대동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발간한 『이집트 지』라는 책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이집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프랑스인들이 이집트인들의 머리, 복장, 장신구 등을 흉내내는 바람에 파리는 때아닌 이집트 패션이 불었다. 이집트 열기는 유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이집트 발굴 붐까지 일으켰다. 그 결과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에 상당량의 이집트 유물이 전시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정복문화가 날조해 낸 예술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강한 저항감과 역겨움을 느낀다. 사실 그들은 우리네 땅에서도 귀한 문화재를 앗아갔다. 외규장각 문서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다.



아무튼 파리는 혁명의 도시다. 1889년 파리 시는 혁명 100주년을 기념키 위해 상징조형물로 에펠탑을 세웠다. 에펠탑에 쓰였던 철제는 그랑팔레, 프티팔레 등에 두루 나타났으며, 유리와 결합함으로써 아르누보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도 꽃피웠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신축한 오르세 역이다. 오르세 역은 1980년대 초 미술관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더 없이 넓고 밝은 오르세 벽면을 따라 마네, 모네, 고흐, 루소 등의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파리인들은 지금도 예술과 생활을 밀착시키면서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 있다. 인간을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예술작품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와 그것을 즐기려는 시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파리 예술기행에서 새삼 느껴본다.남국의 태양은 대지를 쉬 달구어 놓는다. 온도의 상승속도만큼 리스본 도착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9시 30분 열차는 리스본 역에 도착했다. 간밤에 떠나왔던 마드리드와는 사뭇 다른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리스보아(Lisboa, 포르투갈에선 이렇게 부른다)'란 이름이 보였고, 앞으론 바다(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가 아니라 강이었다)가 펼쳐졌다. 너무나 퇴락한 모습이었다.

15세기 말에 시작되어 150년간 가까이 지속된 리스본의 전성기. 시골스런 동네를 지나 만난 벨렝(belem) 지구에서 옛 영광을 볼 수 있었다. 리스본은 아직도 이런 옛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채 자연스레 15세기 그 대 항해시대로 데려다준다. 바로 그 때 웅장한 흰 건물이 차창 밖으로 나타났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이었다. 국왕 마누엘 1세가 항해 왕 엔리케 왕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이슬람과 비잔틴, 그리고 고딕양식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축 양식은 포르투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마누엘 양식이라 부른다. 입구 한쪽에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누워 있는 바스코 다 가마가 눈에 들어온다. 식물 무늬가 매우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석관 벽면에는 그가 바다의 사나이임을 알리려는 듯 인도항해시 탔던 둥근 돛을 단 범선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다 가마가 손에 넣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항으로 향했던 향료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중해를 어로의 터전이 아니라 이동의 공간으로 활용하여 일찍이 무역과 상업을 발전시킨 유럽인. 그들은 동물성 단백질을 물고기가 아닌 양에서 구했다. 기후적으로 양을 사육할 초지가 발달되었으나 겨울엔 목초가 부족하여 많은 양을 죽여야만 했다. 그들은 그 고기로 겨울을 났는데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선 산패를 더디게 하면서 냄새도 제거해 주는 후추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후추는 유럽에서 재배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후추는 무척이나 귀해 화폐 역할까지 할 정도였다. 마침 국왕의 아들 엔리케 왕자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선 대 항해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씨를 뿌린 터전에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고,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했다.



성당을 나와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해 박물관이 있다. 해도와 나침반, 칼 등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파도와 바람을 이기게 했으며 다시 위험천만의 세계로 나가도록 부추겼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특히 동양에 수준 높은 문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렸다.



해양박물관 기념비 쪽으로 걸어갔다. 기념비 주위에는 아름다운 작은 배들이 오물조물 맞대고 있었다. 그 옛날 먼 바다로 떠나갔던 돛배 카라벨은 보이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에게는 이제 해외 식민지도 없다. 마지막 남은 마카오도 곧 중국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유럽 연합에서 그리스와 함께 가장 가난한 나라로 분류되는 포르투갈. 그들은 그 옛날 영화를 떠올리며 지난 1960년 항해 왕 엔리케 서거 500주년을 맞이하여 태조 강변에다 해양 발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를 지나 거리에 장식용으로 세워놓은 커다란 기타를 보고, 또 새로 지은 벨렝 문화회관의 어느 CD가게에서 학창시절 자주 들었던 파디스타(파도가수)아마리오 로드리게스가 "돌아오지 않는 해변의 돛단배들을 들어봐… 항상 나와 함께 있어줘."라며 부르는 '검은 돛배'란 노래를 다시 들으며 포르투갈 민속음악 특유의 우수와 열정을 느껴본다.여기 말린 대구 있습니다 - 베르겐·비르겐 지구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작품이란 - 파리·세느강 일대그들은 그렇게 바다로 떠났다 - 리스본·제로니모스 수도원, 벨렝탑몰다우강의 카르르다리 난간에 기대어 흐라디차니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프라하성을 바라보면 누구나 황홀경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광객을 매혹하는 것은 다리 위를 지나는 행인들의 표정이다. 다리 위를 지나는 발걸음마다 여유로움과 탄력 있는 힘이 느껴진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 햇살을 가득 담은 듯한 얼굴, 무엇이 그들의 표정을 저토록 밝게 만드는 것일까? 프라하를 처음 찾았던 1988년 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사회주의 시절의 시민들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유럽 땅에서 사회주의 정권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젠 표정을 감추고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자유란 개성 있는 자기 표정을 살려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밀란 쿤데라는 「중부유럽의 비극」이란 글에서 체코는 동유럽이 아니라 중부유럽에 속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이유로 체코의 문화적 뿌리는 슬라브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등 중부유럽에 그 기반이 있음을 강조했다. 1968년 3월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은 '우리들은 유럽의 본토박이며 러시아와는 다르다.'는 자부심의 발로에서 태동되었던 것이다. 약간은 멜랑콜릭하면서도 방랑기가 다분한 보헤미아인들이 천년동안 수도로 삼았던 프라하는 오랜 연륜에다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프라하만이 갖는 독특한 표정을 갖고 있다.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단연 구시가지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종교 개혁자 후스의 동상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형태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고딕양식의 틴 교회,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교회와 시계탑으로 유명한 옛 시청사 등. 거리의 밴드, 판토마이머들도 관광객을 즐겁게 해 준다. 시청사에 걸린 시계도 볼만한 눈요기거리다. 매시 정각, 시계판 옆으로 난 작은 창문을 통해 예수의 열두 제자를 형상화한 인형이 관광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최첨단의 시대에도 프라하는 한결같이 옛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구시가지의 남쪽으로 신시가지가 펼쳐진다. 신시가의 중심은 단연 바츨라프 광장. 대로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이곳에는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서 있다. 기마상 아래는 소련군에 대항하다 분신한 얀 팔라치와 그의 동지들의 빛 바랜 사진이 꽃다발과 함께 놓여 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화를 외쳐 1989년 정작 프라하에 진정한 봄이 왔건만 성스러워야 할 공간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뛰쳐나와 자긍심을 되살렸던 이 광장은 분명 프라하의 얼굴인 것이다.



카를 다리 위에서 바라보았던 환상의 프라하성은 어떤 표정일까? 프라하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프라하성의 정문을 지키는 두 근위병은 관광객들의 기념사진에 빠질 수 없는 모델이다. 프라하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작가 카프카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되었던 프라하성 가운데에 성 비투스 성당이 있다. 이곳은 교권과 제권이 함께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기에 교회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성당 옆으로 왕궁의 일부인 브라티 슬라브 홀이 있다. 왕궁 뒤로는 16세기 상인들의 거리인 폭 좁은 골드레인이 있다. 중세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향수를 자극하는 이곳엔 멋과 품격을 지닌 다채로운 기념품들이 있다. 여행객들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CD는 이곳 태생의 음악가라는 점에서 기꺼이 산다.



프라하의 유혹. 프라하는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유네스코가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도시발전 과정은 물론 훌륭한 건축 및 예술적 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어 많은 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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