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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

권삼윤 지음 | 효형출판사
나는 유고내전으로 유명해졌다오 - 두브로브니크



"유럽 선진국들이 유럽문명과 예술의 상징적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포격 하나 중지시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 프랑스의 학술원 회장 장 도르메송은 서구 지도자들을 이렇게 질타했다. 프랑스 최고 지성의 이 한 마디가 문제의 발단이 되어 많은 인명을 앗아간 유고내전 그 자체보다도 더 비중 있게 언론에서 다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유네스코도 복구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고 비서구인들까지 이 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짙푸른 아드리아해를 끼고 펼쳐져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신시가지는 물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도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와 같아 멀리서 바라보는 순간 심장박동이 멎는 것 같았다. 발칸 특유의 붉은 기와 지붕을 이고 있는 가옥들, 그 사이사이로 고개를 길게 뽑고 서있는 교회의 종탑, 해안을 끼고 난 도로를 따라 무성하게 자란 사이프러스와 올리브와 소나무의 수목들, 부두를 가득 메우고 있는 흰색의 보트와 요트…. 두브로브니크는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들게 했다. 이 도시는 7세기경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역에 살고 있던 달마티아 로마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슬라브인들이 대거 밀려옴으로써 이름도 지금의 두브로브니크로 바뀌었다.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발휘한 이 도시는 서방과 이슬람세계를 잇는 자유항으로서 오랫동안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가리켜 '아드리해의 진주'라 부르기도 한다. 구시가지를 들어서면 잠시 중세의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아주는 것은 오노프리오 분수다. 분수에서 시작되는 구시가지의 중심거리 플라카를 걷는다. 오른쪽으로는 성 구세주 교회와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왼쪽에는 성 블레즈 수도원이 나타난다. 프란시스코 수도원은 르네상스 양식의 부속교회와 1317년에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부속약국을 자랑한다. 성 블레즈 수도원 부속 고아원과 양로원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500미터 남짓한 플라카는 성 블레즈 광장으로 이어진다. 성 블레즈는 베네치아가 이곳을 침략했을 때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구해 준 인물로 성 블레즈 교회는 그를 기려 세운 것이며, 광장 이름도 마찬가지다. 광장은 때론 갈림길 구실도 한다. 먼저 이 도시의 최고 행정관인 렉터의 집무공간이었던 렉터궁으로 향한다. 렉터궁은 달마티아 건축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케이드가 달린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로 지금은 바로크 회화작품과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렉터는 투표에 의해 선임되며 임기는 한 달로 그 동안에는 궁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렉터궁을 나와 대성당과 그 뒤쪽의 몇몇 건물을 구경하다 해안 성벽으로 갔다. 우연히 만난 한 화가를 따라 그의 스튜디오에 가서 그의 그림을 구경했는데 그는 전쟁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 수입이 줄고 물가는 올라서 살기가 많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브로브니크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즈넉한 아름다움과 평화로움만 보일 뿐 내전의 피해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관광사무소에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플라카 입구의 사무실을 찾아가 한 중년신사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곳은 관광지다. 우리는 그들이 파괴한 흔적을 빨리 지워버려야만 했다. 그래서 방문객들은 눈치챌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는 구멍 뚫린 오노프리오 분수의 지붕과 그 복구된 모습을 좌우로 대비시킨 유네스코 제작카드와 사진첩을 펼쳐보였다. 그의 설명과 사진첩에서 불행했던 과거로부터 빨리 벗어나되 그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두브로브니크인들의 자부심 어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몸으로 말한다 - 아테네·아크로폴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포도주빛 바다라고 낭만적으로 표현했던 에게 바다. 에게 바다 남쪽에 보기 좋게 가로 놓여있는 섬 크레타의 이라클리온항을 출발한 대형 선박 '크놋소스'호를 타고 아테네로 향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이게우스 왕이 잠든 곳이라 하여 에게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그 에게해의 물살을 사정없이 가르며 크놋소스호는 달린다. 우선 아테네의 오모니아 광장 근처에 싸구려 방을 구한 다음 곧장 아크로폴리스로 달려갔다. 그곳은 아테네의 역사, 나아가 유럽문명의 핵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 아니라 아테네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게해를 내려다볼 수 도 있다. 프로풀라이란 이름의 거대한 정문을 지나자 곧바로 눈에 익은 파르테논이 서 있다. 하얀 대리석 기둥이 너무 눈부시다. 화려하고 장대한 여인상을 모셨던 파르테논 신전에서 직선을 볼 수 없다. 얼핏 보기에는 직선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직선은 한군데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사용한 것 중의 하나가 엔타시스 기법이다. 에게 바다를 여행하는 중에 무수히 본 나신의 인간들. 정말 그들은 자랑해도 좋을 몸매를 가졌다. 육체는 나름의 감각을 갖고 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체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육체를 자랑하고 체감을 존중하는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문화권은 바로 이 같은 상대성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했다. 그 바탕 위에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싹텄다. 자유와 평등의 행복한 공존관계. 다시 말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 방법을 어떻게 찾았을까? 우주를 질서의 실현체로 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하학을 응용하여 '비례'라는 해답을 찾아냈다. 비례의 원리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미학이자 사회질서의 이상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반에 깔려 있는 비례의 원리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따를 것이 없다. 전체적으로 비례의 집합을 이루는 파르테논은 그래서 황금의 직사각형이라 불린다. 인본주의는 이렇게 파르테논 신전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평면구조 또는 장면구조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단결'이란 요소는 장식에 잘 표현되어 있다. 단결의 이미지는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을 축하하여 4년마다 열리는 판 아테나이 제전의 행렬 모습을 돋을 새김 기법으로 장식한 박공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축제, 그리고 옛 축제의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스포츠 행사, 그 중에서도 특히 올림픽 대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파르테논은 대단하다. 간결함과 정확성, 그리고 균형과 조화로서 아테네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단결이란 가치를 형상화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은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은 서구문명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러고 보면 아크로폴리스의 건축물들은 하나의 큰 조각품이다. 인간적 크기의 건축물을 지향했던 그들이었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아크로폴리스는 황폐하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가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밤이면 아크로폴리스는 배우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빛과 소리의 향연'이다. 문득 들려오는 파르테논의 나직한 소리. 그것은 "지켜라(police)."이다. "삶이란 계속되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이 어제의 복사판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날로 새로워지라."고 충고한다.

자유란 자기 표정을 갖는 것 - 프라하



몰다우강의 카르르다리 난간에 기대어 흐라디차니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프라하성을 바라보면 누구나 황홀경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광객을 매혹하는 것은 다리 위를 지나는 행인들의 표정이다. 다리 위를 지나는 발걸음마다 여유로움과 탄력 있는 힘이 느껴진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 햇살을 가득 담은 듯한 얼굴, 무엇이 그들의 표정을 저토록 밝게 만드는 것일까? 프라하를 처음 찾았던 1988년 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사회주의 시절의 시민들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유럽 땅에서 사회주의 정권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젠 표정을 감추고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자유란 개성 있는 자기 표정을 살려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밀란 쿤데라는 「중부유럽의 비극」이란 글에서 체코는 동유럽이 아니라 중부유럽에 속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이유로 체코의 문화적 뿌리는 슬라브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등 중부유럽에 그 기반이 있음을 강조했다. 1968년 3월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은 '우리들은 유럽의 본토박이며 러시아와는 다르다.'는 자부심의 발로에서 태동되었던 것이다. 약간은 멜랑콜릭하면서도 방랑기가 다분한 보헤미아인들이 천년동안 수도로 삼았던 프라하는 오랜 연륜에다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프라하만이 갖는 독특한 표정을 갖고 있다.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단연 구시가지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종교 개혁자 후스의 동상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형태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고딕양식의 틴 교회,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교회와 시계탑으로 유명한 옛 시청사 등. 거리의 밴드, 판토마이머들도 관광객을 즐겁게 해 준다. 시청사에 걸린 시계도 볼만한 눈요기거리다. 매시 정각, 시계판 옆으로 난 작은 창문을 통해 예수의 열두 제자를 형상화한 인형이 관광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최첨단의 시대에도 프라하는 한결같이 옛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구시가지의 남쪽으로 신시가지가 펼쳐진다. 신시가의 중심은 단연 바츨라프 광장. 대로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이곳에는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서 있다. 기마상 아래는 소련군에 대항하다 분신한 얀 팔라치와 그의 동지들의 빛 바랜 사진이 꽃다발과 함께 놓여 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화를 외쳐 1989년 정작 프라하에 진정한 봄이 왔건만 성스러워야 할 공간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뛰쳐나와 자긍심을 되살렸던 이 광장은 분명 프라하의 얼굴인 것이다. 카를 다리 위에서 바라보았던 환상의 프라하성은 어떤 표정일까? 프라하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프라하성의 정문을 지키는 두 근위병은 관광객들의 기념사진에 빠질 수 없는 모델이다. 프라하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작가 카프카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되었던 프라하성 가운데에 성 비투스 성당이 있다. 이곳은 교권과 제권이 함께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기에 교회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성당 옆으로 왕궁의 일부인 브라티 슬라브 홀이 있다. 왕궁 뒤로는 16세기 상인들의 거리인 폭 좁은 골드레인이 있다. 중세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향수를 자극하는 이곳엔 멋과 품격을 지닌 다채로운 기념품들이 있다. 여행객들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CD는 이곳 태생의 음악가라는 점에서 기꺼이 산다. 프라하의 유혹. 프라하는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유네스코가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도시발전 과정은 물론 훌륭한 건축 및 예술적 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어 많은 도시에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여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프라하에서 나는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마셨다. 프라하는 씹으면 씹을수록 깊고 그윽한 맛이 난다. 그 맛의 여운은 프라하를 떠난 뒤로도 오래도록 기억의 화폭 위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기 말린 대구 있습니다 - 베르겐·비르겐 지구



오슬로의 표정은 한없이 맑고 밝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사나이들은 그들의 낙원에 안주하지 않는다. 바이킹의 후예들이어서인지 그들은 바다로 바다로 나갔다. 비그되위란 이름의 박물관 지구는 바로 그런 바다 사나이들의 모습들을 한 눈에 보여 준다. 프람호 박물관은 1893년 북극 항해에 나섰던 난센이 타고 떠났던 배다. 프람호는 듬직하다못해 우직해 보인다. 프람호 박물관 옆에 있는 콘티키 박물관. 붉은색의 커다란 돛을 활짝 펴고 망망대해를 오직 해류와 바람의 힘으로 달려가는 콘티키. 1947년 노르웨이의 청년 토르 헤이에르달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발사나무 뗏목으로 페루의 카이요항을 떠나 101일만에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 도착, 폴리네시아인의 선조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건너갔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과연 난센의 후예다운 면모이다. 노르웨이의 역사는 바이킹의 활약으로 시작된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를 근거지로 바이킹은 비옥한 땅과 새로운 물자를 찾아 바다로 바다로 뻗어나갔다. 급기야 이웃나라에선 그들의 출몰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영국과 프랑스 북부지역은 물론 지중해와 러시아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그러나 바이킹은 식민지를 통한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주체성을 잃어갔고 결국 그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비그되위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이킹 배 박물관에는 바이킹 시대 초기 여왕이 사용했다는 배가 전시되어 있다.

베르겐을 찾기 전 오슬로의 또 하나의 명물인 프롱네르 공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프롱네르 공원은 조각공원이다. 대리석과 철 등으로 만든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구스타프 비겔란이란 조각가의 작품이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공원은 조깅과 산책 등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종일 붐빈다.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입구의 돌다리 양쪽 난간을 차지하는 청동 인물상들이다. 비겔란은 인간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근원을 표현하려고 했다. 비겔란의 최고 걸작인 모노리스는 스무 개쯤 되는 계단을 쌓아올려 만든 원형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어 전체 공간을 압도한다. 모노리스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모노리스에 새겨져 있는 인간 나상 하나하나는 한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새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롱네르 공원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래도 그림 같은 곳 베르겐의 백미는 옛날 독일 상인들이 살면서 상업활동을 벌였던 브리겐 지구다. 유네스코는 이 브리겐을 197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한자동맹시대의 도시구조와 목조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목조건축물의 특징은 돌이나 벽돌건축물과 달리 벽면을 다양한 색깔로 쉽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조건축물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불이다. 한자 박물관의 안내원이 말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절대 금연입니다. 불을 켜서는 안 됩니다." 이곳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말린 왕대구도 있다. 베르겐 일대의 북해 바다에선 대구가 많이 잡혔고 이곳의 주력 수출품은 바로 이 말린 대구였던 것이다. "이 말린 대구는 2백살도 넘습니다. 아주 명물이죠. 브리겐을 먹여 살렸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린 대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안내인은 이상하게 생긴 나무통도 가리켰다. "이건 벌금통입니다. 규율 위반자에게는 가차없이 벌금을 물렸던 것이죠.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한자동맹 시민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구 22만의 베르겐은 유서 깊고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브리겐 지구를 껴안고 있는데다 이 도시 출신 음악가 그리그가 피아노 협주곡 a단조에서 선율로 표현한 피오르드가 있어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여느 도시 같으면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을 짓겠지만 베르겐은 그러지 않았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미래를 희생할 수 없다는 생각과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산다. 그런 마음가짐이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하였으니 미래 또한 약속해 줄 것이다.

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작품이란 - 파리·세느강 일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라는 아폴리네르의 시처럼 '파리'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세느강. 유네스코는 세느강 양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생 루이섬 한쪽 끝을 지나는 쉴리 다리에서부터 에펠탑이 우뚝 선 레나 다리에 이르기까지,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등이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왕정을 뒤엎은 시민들. 대혁명을 통해 문화와 예술의 지형도 완전히 바꿔나갔다. 왕가의 전유물이던 문화와 예술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왕궁에서 박물관으로 바뀐 루브르다. 시민들이 화가들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가난한 화가들도 시민들의 관심을 끌면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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