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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삼국지

이규완 지음 | 들녘
이미지 삼국지

이규완 지음

들녘/2002년 1월/263쪽/10,000원



1. 이미지의 힘

이미지는 세상을 보는 눈이자 세상을 평가하는 잣대다. 우리는 세상일에 실재(객관적 현실)나 메시지(상징적 현실)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미지(주관적 현실)에 근거해 반응한다. 세상을 지배하려면 이미지를 지배해야 한다. 이미지를 지배하려면 이미지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나 메시지를 장악해야 한다.

21세기 정보사회에서는 20세기에 있었던 대중문화 논쟁과 다른 양상의 문화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메시지의 소비자였던 대중이 정보사회에서는 메시지의 생산자로 변신했고, 기업인과 광고인이 상징적 현실을 지배하는 새로운 집단으로 등장했다. 상징적 현실을 지배하려는 경쟁은 위성방송과 인터넷의 네트워크, 콘텐츠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 경쟁의 당사자들이 국가를 넘어 기업과 광고회사로 확대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20세기와 구별되는 21세기 정보사회의 특징이다.



2. 이미지의 구조와 기능

이미지는 인지적ㆍ정서적ㆍ행위적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인지적 요소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 이루어진 대상의 다양한 속성들에 대한 이해, 즉 지식을 말한다. 정서적 요소는 대상에 대한, 또는 대상의 개별적 속성에 대한 싫고 좋은 정도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행위적 요소는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에 근거해 특정 상황에서 대상에 대한 구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대상에 대한 평가는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또한 대상을 평가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인지적 요소를 핵심적 속성이라 하고, 덜 중요한 요소를 부수적 속성이라고 한다. 부수적 속성에서 아무리 뛰어난 평가를 받더라도 핵심적 속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전체적인 평가에서 우월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핵심적 속성과 부수적 속성은 대상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미지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판단하는 수문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정 정보를 기존의 이미지와 비교해 일치 여부를 판단한 다음 해당 정보를 수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만약 특정 정보를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기존의 이미지는 변화 없이 존속된다. 그러나 기존의 이미지와의 일치 여부와 관계없이 새로운 정보 추가를 결정한다면 복잡한 정보추구 행위를 거쳐 수용한 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3. 이미지의 수정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미 구축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미 생긴 이미지가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이미지란 없다. 기존의 이미지 구조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이미지를 바꾸면 이익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광고에 있는 쿠폰을 가져오면 가격을 할인하거나 경품을 주는 것도 이익을 주는 흔한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일관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이다. 장기간에 걸쳐 정보를 반복적으로 제공하면 싫더라도 그 정보에 익숙해지면 친근감이나 신뢰감이 생긴다. 셋째,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실제와 달리 크게 왜곡되어 있을 경우 잘못된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이미지 구조 자체를 변경시키는 방법이 있다. 기존 이미지 구조에 새로운 인지적 속성을 추가하거나 각 속성에 대한 평가기준을 바꾸어 유리한 속성을 우위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이 전략은 자신의 장점이 시장에서 평가절하될 때 많이 사용한다. 경쟁자와 비교해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 부분을 강조해 상품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다. 그 외에 비어 있는 핵심적 속성을 차지하는 방법도 있다. 의외로 핵심적 속성의 주인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자리를 발견해 먼저 차지하는 것도 경쟁사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4. 삼국지의 이미지 구조

삼국지에는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크고 작은 집단의 리더들이 등장한다. 삼국지는 이들 개개인에게 이상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섯 가지 요소들 중 일부만을 부여한다. 때문에 군웅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보물을 빼앗기 위해 싸운다. 이 여섯 가지 보물은 천시, 지리, 인의, 군사, 장수, 전략이다. 이미지 이론에서 보면 천시, 지리, 인의는 핵심적 속성이고 장수, 군사, 전략은 부수적 속성이다. 핵심적 속성이란 중요한 평가기준을, 부수적 속성은 보완적 평가기준을 뜻한다.

천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천시이다. 천시는 기다려야 가질 수 있다. 천시를 억지로 빼앗으려 해서는 안 된다. 준비하며 기다리다가 때가 되었을 때 움직여 거머쥐어야 한다. 천시를 잡은 자는 곧바로 지리를 차지한 경쟁자를 공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리 없는 천시는 디딜 땅 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격이기 때문이다. 천시를 잡았으나 지키고 즐기는 데 골몰한 인물이 동탁이고, 천시를 잡자마자 지리를 얻으려고 신속하게 움직인 인물이 조조다. 그 결과 동탁은 망했고, 조조는 성공했다.

지리는 땅이다. 땅은 경제력이자 백성이었고, 백성은 곧 군사들이었다. 모든 땅은 천자의 소유였기 때문에 일단 확보한 지리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천시를 약화시키기 위한 중앙정부에 대한 공격이다. 지리를 지키는 데 가장 위험한 요소는 내부에 있다. 내부의 적은 바로 주어진 땅 안에서 은밀히 인의를 키우는 자다. 한 영역에 주인보다 인의를 높이 쌓은 자가 오랫동안 머물면 지리의 이점은 금세 허물어진다. 삼국지에서 덕망 높기로 소문난 유비를 받아들인 제후들은 예외 없이 땅을 빼앗겼다.

천시와 지리가 눈에 보이는 힘이라면, 인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인의는 온전히 얻고 쌓은 사람 개인의 것이다. 인의는 곧 백성의 신망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인의는 관용, 후덕, 올바름으로 나타난다. 인의의 대표적 인물로 원소, 유비, 유표 등이 거론되지만 결국 승리자는 유비였다. 그는 애써 얻은 지리를 포기하면서도 인의를 쌓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목표를 달성했다.

천시, 지리, 인의라는 가치를 얻고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수단은 장수, 군사, 전략이라는 부수적 이미지 속성이다. 장수의 힘이 효율적으로 발휘되는 경우는 천시에 따라 지리를 취하려고 공격할 때이다. 따라서 삼국지의 이미지 구조에서 장수는 천시와 지리 사이에 위치한다. 군사는 백성의 힘이다. 백성의 수는 풍요한 자연환경과 어질고 옳은 다스림에 기초한다. 따라서 군사는 지리와 인의 사이에 위치한다. 전략은 인의를 널리 펼치기 위한 것이었을 때 빛나고 하늘의 도움이 없다면 전략을 펼쳐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략은 천시와 인의 사이에 위치한다.



5. 이미지 변화로 본 삼국의 정립

삼국지에서 조조, 유비, 손권, 원소의 이미지 변화를 살펴보면 성공한 이미지 전략과 실패한 이미지 전략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조조는 이미지의 핵심적 속성에서 천시를 가장 우선시했다. 조조가 중요하게 생각한 핵심 속성은 천시, 지리, 인의의 순서였다. 유비는 인의, 천시, 지리의 순서로, 손권은 지리, 인의, 천시의 순서로 자신의 이미지 전략을 추구했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에서 유비는 조조나 손권 모두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위치였으나 조조와 손권은 지리를 추구하는 측면 때문에 동맹을 맺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유비가 인의를 가장 먼저 추구한 까닭은 천시와 지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지리보다 천시를 먼저 추구했다. 이러한 사실은 힘들여 얻은 땅을 버릴지언정 대의명분을 잃지 않으려 했던 장면, 조조와 함께 허도로 가서 천자를 만나 황숙임을 공인 받음으로써 한 시대를 움직일 인걸의 위치를 차지했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또 항상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현실을 바로 세운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던 것도 인의를 바탕으로 천시를 추구하는 유비의 이미지 전략을 대변한다.

손권이 지리를 먼저 추구한 것은 아버지와 형에게서 가업을 물려받은 제후였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물려받은 강토를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인의가 바탕이 되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지리를 확보했던 손권이 천시를 추구했을 경우에는 한나라와 자신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천시를 지리나 인의보다 우선시할 수 없었다.

원소는 황건적의 난에 이어 동탁을 토벌할 때까지만 해도 삼국지의 인물들 중에서 여섯 가지 이미지 속성 모두에서 가장 우위에 있었다. 때문에 원소는 현재의 이미지를 확대한 전략을 택했다. 이것이 평화시라면 분명 성공을 보장해 주었겠지만 당시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것이 그가 실패한 이유였다. 혼란 시에는 다양한 속성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과 경쟁해야 한다. 하지만 원소의 이미지 전략은 결국 어느 하나의 속성에 전력을 경주할 수 없었고, 각각의 이미지가 분명한 다른 경쟁자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삼국지에 나타난 이미지 전략을 보면 성공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미지의 핵심적 속성과 부수적 속성의 우열을 잘 알고 있었다. 곧 천시, 지리, 인의라는 핵심적 속성과 장수, 군사, 전략이라는 부수적 속성의 차이다. 부수적 속성에서의 우위는 단기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것을 영속시킬 힘을 갖지 못하는 반면, 핵심적 속성에서의 우위는 단기적으로 실패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성공의 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 부수적 속성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핵심적 속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셋째, 이상을 위해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핵심적 속성 모두에서 최상위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핵심적 속성 하나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그 다음에 다른 속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택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궁극적인 목적과 현실적인 가능성을 구별할 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특징은 이미지 전략을 신중하게 수립하되 선택한 전략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이에 비해 삼국지에서 실패한 인물들의 이미지 전략을 보면 그들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 했다. 무리하게 여섯 가지의 이미지 속성 모두를 거머쥐려고 했다가 실패한 원소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핵심적 속성보다 부수적 속성에 집착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탁, 여포, 공손찬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지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면 처음 동탁을 토벌할 때 모인 군웅들은 18명이었다. 그런데 결국 남은 인물은 조조, 유비, 손권뿐이었다. 당시 유비는 공손찬의 객장이었으므로 18명의 군웅들 중에서 16명이 패망했던 것이다. 또 18명의 연합군 가운데 조조는 세력이 가장 약했고, 유비는 비교할 처지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은 조조, 유비, 손권 세 사람이 한번 수립한 이미지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했기에 경쟁자들 틈에서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방증이다. 특히 조조와 유비는 자신의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방해되는 것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6. 조조의 이미지 전략

“천시로써 지리와 인의를 얻는다.”



조조는 화려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전략가였다. 그는 이미지 전략의 핵심 속성인 천시, 지리, 인의 가운데 천시를 택해 쟁취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지리와 인의를 추구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조조는 천하를 평정하는데 필요한 핵심적 속성과 부수적 속성을 잘 구별했다. 천시, 지리, 인의라는 핵심적 속성 모두를 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천시를 대세라고 한다면 대세의 흐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만 그 흐름을 잡을 수 있는 특정한 사건을 포착하는 능력과 잡은 대세를 지킬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천시를 성공 조건으로 상정한 조조가 천자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근거가 완전한 건 아니었다. 일례로 그의 부친 조숭이 동군으로 오다가 서주태수 도겸의 부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만큼 취약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근거를 비우고 군대를 움직였다. 그것은 천시를 위해 또 다른 핵심적 속성인 지리를 잃을 위험을 감수했던 것이다. 당시 다른 제후들도 천자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얻은 지리를 잃을까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에게 지리적 기반은 천시를 대표하는 천자를 옹립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자신이 추구해야 할 핵심 속성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작은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큰 것을 취했다.

조조의 이미지 전략에서 최대 약점이었던 인의 구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는 천시, 지리 다음으로 인의를 평가했거나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서 인의라는 허명보다 천시와 지리라는 실익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의를 포기한 손권과 대비된다. 즉 조조는 세 가지 핵심 속성 중에서 하나만 포기한 반면 유비와 손권은 두 가지를 포기했다. 이러한 전략적 차이는 조조가 천시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행운 때문에 생겼지만 결국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인 위나라를 차지하게끔 했다. 조조의 이미지 전략은 이미지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또 이미지를 구성하는 속성의 영향력 차이를 꿰뚫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와 손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특히 죽을 때까지 천자를 모시는 신하의 위치에 머물러 인의를 쌓아둔 결과 다음 세대에 조비가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이미지 전략이 전체적으로 성공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7. 유비의 이미지 전략

“인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유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인물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가진 게 없었으므로 더욱 인내하고, 더욱 양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진 게 없을수록 작은 것에 집착하고, 쉽게 교만해진다. 하지만 유비는 결코 그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유비는 어떠한 경우에도 최종 목표를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손권의 누이와 결혼할 때도 그는 결코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는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승리하고도 유비에게 형주를 빼앗긴 손권은 주유의 계략에 따라 누이를 미끼로 유비를 끌어들인다. 그런 다음 유비를 죽이거나 볼모로 삼아 형주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잔꾀는 지혜로운 공명이 간파하였고, 그 결과 나이 많은 유비는 어린 손권의 누이와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

유비는 여러모로 앞서 달리던 조조와 차별된다. 그는 평생 천시에는 인의로, 빠름에는 느림으로, 자신감에는 우유부단함으로 조조에 대응한다. 즉 최강의 경쟁자 조조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유비의 특징은 상대방의 예상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조에게 쫓기면서 신야와 번성의 백성을 이끌고 하루에 십리씩 강릉으로 이동할 때의 일이었다. 유비군의 느린 행보를 감지한 조조는 경기병대를 동원해 맹추격하고, 천자의 군대가 백성들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유비는 어차피 얻지 못할 강릉성을 포기하는 대신 인의를 쌓고, 조조는 자신이 이미 얻은 강릉성을 확보하느라 인의를 잃었다.

세상에는 겸손의 미덕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겸양의 대표인 유비 역시 형주에서 이 같은 한계에 부딪혔다. 변신하지 않으면 도태될 상황이 온 것이었다. 유비에게는 자신의 인의를 지키면서 남의 땅을 빼앗아줄 악역을 맡을 인물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제갈량이다. 그들의 역할분담 원칙은 간단했다. 유비 자신은 인의를 계속 확대하면서 천시를 밝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제갈량은 천시를 밝히는 데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해 지리를 확대하는 일을 맡는 것이다. 즉 유비는 인자한 아버지가 되고, 제갈량은 험한 들일을 나가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천하를 향한 거보를 내딛는다. 이것이 유비의 삼고초려에 숨겨져 있는 의미지 전략이다. 유비와 공명이 서로의 이미지 전략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삼고초려’라는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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