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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김희곤 지음 | 푸른역사
만주로 이동하여 새로운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며 갖가지 준비에 몰두하던 신돌석이 죽었다는 소식에 민중들은 그저 영문을 모르니 답답할 뿐이었다. 신돌석이 치명상을 입었다거나 죽었다는 소문을 워낙 여러 차례 들어온 터라 사람들은 이번에도 사실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영덕군으로 옮겨지고 부하들에 의해 확인되면서 세상은 온통 침울하게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겨울의 마지막 길은 어떠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1908년 12월 초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1908년 12월 들어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 곳이면서 전반기에 요새로 이용하였던 묘곡과 대동 및 대곡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후반기 들어 더 깊은 산골인 일월산과 백암산 골짜기로 파고들었지만 이제 신돌석은 예전의 골짜기를 다시 돌면서 새로운 구상을 정리했다. 결국 대다수의 부하들이 떨어져나간 상황에서 그는 만주행을 결심하고 마지막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동에 필요한 자금이었을 터. 12월 8-11일 사이에 일본군에게 포착된 그의 행적은 자금문제의 해결과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는 12월 11일 밤 9시 무렵 순국장소인 영덕군 북면 눌곡(현 지품면 눌곡)에 총각 1명을 데리고 도착하였고 4시간이 지난 12일 새벽 1시에 순국하였다.



그렇다면 살해범은 누구일까? 살해범의 이름을 기록한 자료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의병에 참가했던 인물들의 회상을 정리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의 정보 기록이다. 신돌석 의진의 참여자나 주변 인물들이 신돌석 의진을 기념하여 정리한 기록에는 한결같이 살해범으로 김상렬·상태·상호 3형제를 들고 있다. 또 다른 자료에는 3형제 가운데 김상렬과 아우 상근의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그리고 3형제와 신돌석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엇갈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상렬이 신돌석 모친의 외종질이란 기록도 있고 김상렬 집안이 신돌석 조부의 외가라는 설도 있다. 만약 두 가지 모두 맞는 이야기라면 신돌석은 아버지의 진외가로나 어머니의 외가, 즉 외가로 이들과 6촌 관계가 된다. 내려오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신돌석을 살해한 김상렬 형제는 3형제인데 신돌석과 인척으로 6촌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황곡마을 윗마(웃마, 상계)에 살았고 신돌석은 그 골짜기를 내려오다가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헌병과 경찰측 자료는 이 내용과 전혀 다르다. 우선 살해범의 신상에 대해 그들은 신돌석 의진의 부장이었다가 1908년 8월경에 귀순한 김도윤과 그의 형 김도룡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렇다면 김상렬 형제와 김도룡 형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고민 끝에 마침내 이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그 이유는 첫째, 비록 이름은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의 행적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사건 이후 신돌석의 부하들이 살해범을 응징하려고 찾아 나섰는데 그 공격 대상에 김도윤의 사위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돌석의 부하들이 김도윤을 찾아 나섰다가 그 과정에서 김도윤의 사위를 만나 행방을 묻다 공격했다는 것인데 이 부하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름이 김도윤이 아닌 김상렬 형제였다는 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살해범이 신돌석을 살해한 이유도 한국측과 일본측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한국측 기록은 일본군이 '신돌석에게 붙여놓은 현상금'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도룡을 심문한 결과를 적은 일본측 기록을 보면 김도윤은 원래 신돌석의 부하로 활동하였는데 1908년 8월에 그가 일제에 투항하자 신돌석이 그를 다시 포섭하려다가 언쟁이 벌어지고 그것이 싸움으로 발전했다고 되어있다. 이는 신돌석과 부하 사이의 갈등이 빚은 비극으로 신돌석에 대한 평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살해 과정에 대한 기록 역시 우리와 일본의 자료가 각각 다르다. 한국측 기록들은 약이 든 술, 혹은 아주 독한 술을 권해 신돌석을 취하게 만들고 그 허점을 노려 김상렬 형제가 무기로 타살하였다는 데 일치한다. 반면 일본측 기록은 김도룡과 신돌석의 언쟁이 싸움으로 진행되었고 이 때 도피했던 김도윤이 몰래 나타나 뒤에서 기습적으로 돌로 신돌석의 뒤통수를 쳐서 쓰러뜨려 죽였다는 것이다. 신돌석의 순국에 대한 소식은 해외로도 퍼져나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 大東共報」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0일쯤 지난 1909년 4월 4일자 2면에 '일인(日人) 보다 더한 김가 형제'라는 글을 게재하였다."신 대장은 한국의 충신이요, 나는 일본의 충신이니 각기 제 나라를 위하는 충심은 일반 이라. 지금 신 대장에게 한 일을 후일에 내게 또 그러할 터이니 짐승의 마음을 가진 너희 는 빨리 돌아가라 하고 축출한 후에 신 대장의 신체를 감장하여 그 부친에게 내어주었다 하니 피차 적국이 되어 싸우던 원수라도 충성있는 사람을 이같이 위하거든 같은 한국 사 람이 될 뿐 아니라 척족 간에 이같이 불칙한 일을 행한 김가 형제는 청천백일 하에 죄를 도망할 수 없으며..."여기에서 '서쪽으로 건너간다.'는 내용이나 '여러 강국에 응원을 요청한다.'는 표현은 만주로 가서 활동하겠다는 뜻이다. 일찍이 유인석도 만주로 갈 때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호랑이 쓰러지다김가 형제가 보상을 요구했을 때 일본 수비대장이 보인 반응을 적은 구절이다. 이 기사에서 살해 동기를 보상금에 두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비해 의병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던 「황성신문」은 '폭도 괴수'가 죽었다고 표현하였다.신돌석을 어떻게 평가할까"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 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 병 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 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쓴 이 글에서 비록 짧지만 한 마디 틀림이 없고 덧붙일 것이 없는 한 시대 구국의 영웅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와 그 면모를 읽을 수 있게 된다.의병 대열에 첫발을 내딛다어디로 갈 것인가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 (登樓遊子却行路)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可歡檀墟落木橫)

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男子二七成何事)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를 느끼네. (暫倚秋風感慨)새로운 방향을 찾아서신돌석이 의병이라는 조직에 첫발을 내딛은 시기가 병신년, 즉 1896년이라 알려지고 있으니 그의 나이 만 18세 때다. 일본 사무라이 폭력배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상투를 강제로 자른 '단발령'이라는 두 가지 폭거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이 '을미의병'(1895)이다. 신돌석이 1896년 의병에 참가했다는 말은 바로 이 시기에 10대 후반의 청소년으로서 전투에 나섰다는 말이다.



당시 그가 참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최대 격전은 뭐니뭐니해도 '남천쑤 전투'다. 1896년 7월 13일 벌어진 첫 날 전투는 김하락 의진과 영덕 의진 및 영해 의진이 연합한 의병이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들은 관군과 맞붙어 종일토록 전투를 치러 많은 수의 적군을 무찔렀고 의병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그런데 다음 날 정오 무렵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육로와 수로로 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김하락은 좌우 양어깨에 총을 맞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여러 상황으로 미뤄볼 때 아마 신돌석도 영덕 의진에 속하여 이 전투에 참가했을 것이다. 영덕 의진은 김하락이 죽고 나서도 8-9월까지 간헐적인 전투를 치렀으니 신돌석도 계속 활동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의병이 해산될 무렵 홀연 사라졌다.신돌석은 전기 의병이 끝난 뒤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나날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쓰러져 가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에게는 전기 의병에 참가하여 보낸 이 무렵이 생애 처음으로 민족 의식에 눈뜬, 그것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으로 남은 시기였던 셈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일단 전국을 돌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했으며, 이 여정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한편 동지들을 사귀고 민족문제를 풀어나갈 전략을 논의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마음에 맞는 인물을 찾기도 했다. 당시 그가 만난 인물은 손병희, 박상진, 민특무, 이강년 등이었고, 특히 박상진과는 마치 의형제처럼 지내며 시사를 논하다가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심정을 절절히 보여주는 글 한 편이 남아 있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04년 가까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이다. 신돌석이 월송정에 올라 읊었다는 이 시는 그의 사상과 신념을 전해주는 유일한 작품이다.이 시에서 그의 피끓는 심정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주목할 점이 있다. 둘째 구의 단군의 터전이 쓰러져 가고 있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여기서 '단군'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인데 이것은 당시 유림 의병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여준다. 즉 당시 중화의식, 척사정신, 주자학을 중심사상으로 내세우던 유림들과는 달리 신돌석은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인 것이다. 그가 월송정에 올라 이 시를 읊던 1904년은 일본이 우리 땅을 점령하다시피 하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였다. 이런 때 신돌석이 단군을 애타게 찾고 부르짖은 것은 그의 가슴에 민족혼을 보존하려는 뜨거운 불길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10년 전 1894년에 청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낸 일본이 이제 다음 경쟁자인 러시아를 상대로 한판 승부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을사5조약을 강요하여 결국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1896년에 막을 내렸던 의병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니 이를 '중기의병'이라 부른다.



이제 스물 일곱 살의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 마침내 구국의 횃불을 들고 영덕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장소는 그의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주점인 김춘궁의 집 앞이었다. 주점 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양반 유림들이 으레 서원이나 향교에서 거병한 것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술집과 그 앞마당에서 성립된 의병. 신돌석 의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는 의병의 이름을 '영릉'이라 짓고 스스로 영릉 의병장이 되었다. 신돌석 의진은 거병한 곳에서 멀지 않은 상원 마을 앞 개천가 숲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바로 남쪽 맞은편에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고래산 중턱에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펼쳤다는 사실이 이 곳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영릉 의진을 비롯하여 영남 지역에서 연일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설치한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이에 대한 진압을 요구하고 나섰다. 강압에 못이겨 고종은 각 지방에 의병 활동을 중지하라는 조칙을 발표하였으나 의병장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통감부가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세력을 잠재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대구와 원주의 진위대를 동해안 방면으로 파견했다. 남쪽에서는 6월 상순 대구 진위대 정위 방두영이 200명의 헌병과 함께 영덕 방면으로 파견되었고 북쪽에서는 원주 진위대 참령 이승칠이 100명을 이끌고 남진하여 평해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돌석을 비롯한 1,000명 정도의 의병에 대해 협공을 시도하였다. 의병이 일어난 뒤 처음으로 대규모 토벌대가 울진과 영해 및 영덕지역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저항 역시 치열하였다.



항쟁 끝에 토벌대가 물러가자마자 영릉 의진은 곧 영해로 진격하였다. 사실 신돌석 의진이 영해에서 일어났지만 한번도 고향 영해를 정면으로 공략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 의진은 영해 읍성의 가장 중요한 정문인 서문을 먼저 공격하여 들어갔다. 그러자 영해군 관아를 지키던 수비대 군사들이 남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런 와중에 선봉장 이하현이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불을 지르기 시작하자 신돌석은 이를 말렸다. 진보 출신인 이하현과는 달리 신돌석에게 영해는 고향 마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영해 읍성을 점령한 신돌석은 영해 군수의 죄상과 그에 따른 거의(擧義), 곧 의병을 일으키는 일의 마땅함을 강조한 방을 붙이고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일본군 토벌대를 무찌르다일본군의 2차 토벌작전에 맞서며 산간지역으로 이동하다조여드는 공격에 약해지는 의병들영릉 의진이 갖추어지자 신돌석은 첫 공격지로 당시 일본의 조선침략의 전초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을 정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울진 지역에 침입한 일본의 어부와 수산업자들은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여 전복과 해삼 등의 수산자원을 쓸어가고 있었다. 전복 채취 잠수기를 사용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비해 10배 이상의 수확을 올렸고 이를 지켜보는 조선 어부들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한일 양국 어부들 사이에 일찍부터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단 공격 목표를 세운 영릉 의진은 이에 필요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인력과 장비, 자금을 모아야 했던 이들은 대상지로 이웃한 영양과 청송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창수면을 거쳐 영양으로, 다시 영양에서 진보와 청송으로 이동하면서 사람과 식량 및 무기를 확보하였다. 4월 25일 신돌석은 150명의 병사를 이끌고 울진군 평해로 이동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관군과 맞닥뜨렸다. 이때 관군과의 본격적인 첫 충돌인데다가 기습을 당한 영릉 의진은 제대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물러난 듯하다. 신돌석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서쪽 방향으로 태백산맥을 훌쩍 넘어 다시 남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울진 공격을 위해 출발했던 지점인 영양 진보 접경지대까지 단숨에 후퇴했다.



또 다시 영릉 의진은 4월 29일 밤에 영양읍으로 향했고 다음 날 영양군 관아를 쳐들어가 무기를 확보하였다. 영양군 관아에서 무기를 획득한 영릉 의진은 기세좋게 이동하여 소계동에 집결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 남쪽과 북쪽으로 향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울진 공략이었다. 이를 위해 두 개로 나뉜 부대가 각각 병력을 정비한 뒤 재결합하여 북을 북상한다는 전략이었다. 북쪽을 향해 떠난 부대는 일월산에 머물며 청기면과 일월면에서 부호들의 집을 중심으로 군수품을 마련하였고, 신돌석은 남진 부대를 직접 이끌었는데 규모는 대개 100명을 갓 넘는 정도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5월 6일 마침내 신돌석이 이끄는 본진과 북으로 파견된 별동대가 다시 합진하였다. 영릉 의진은 남북 부대가 합진한 뒤 북상길에 올라 영양에서 합진한 지 이틀만인 5월 8일 울진에 도착하였다.

울진에서 벌인 영릉 의진의 활약은 일본인을 공격한 것이 그 핵심이다. 영릉 의진은 일본인이 살던 가옥을 집중적으로 부수고 그들의 돈을 빼앗았다. 영릉 의진은 일본인의 집을 공격하다가 울진의 순교감 관군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신돌석의 목적지는 일단 울진 읍내 일본인 거주지에 한정돼 있었다고 추측된다. 신돌석이 결국 최종 공격 대상지인 장호관까지 북상하지 않고 되돌아선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계속 승전했다면 갑작스럽게 군사를 돌려 영해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6년 5월10일 무렵 영릉 의진은 영해 지역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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