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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투호」는 투호를 하는 장면이다. 투호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보통 화살 12개를 화살 길이의 2.5배 되는 거리에서 병 속에 던져 넣으면 된다. 투호는 가벼운 오락으로 궁중과 양반가에서 유행하였고 시정인의 오락물이기도 했다. 안동 도산서원의 유물 전시실에는 투호가 전시되어 있다. 이황 선생이 이 물건으로 투호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원과 같은 근엄한 학문의 공간에서 투호를 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좀더 흥미로운 그림은 「쌍륙」이다. 젊은 여자 둘이 젊은 남자 둘과 어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성들은 양반가의 부녀자는 아니다. 남자들이 야외로 기생을 데리고 나와 쌍륙판을 벌인 것이다. 쌍륙은 지금의 서양장기와 같이, 말을 전진시켜 상대방의 궁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말은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대로 전진시킨다. 중국에서 유입된 쌍륙은 백제에서 유행하였으며 주로 지배계급 사이에서 유행하던 오락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도박성 게임이 비상하게 발달했었고, 그것은 사회적 문제였다. 도박 중에서도 투전은 거대한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는데 풍속화에서도 투전하는 장면을 그린 꽤 괜찮은 그림이 몇 점 남아 있다. 문헌기록은 더 풍부하다. 오늘날 화투에 빠진 사람들이 헤어나지 못하듯이, 투전 역시 일단 빠져들면 끊을 수 없는 강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런데 왜 조선후기 사람들은 도박에 몰두하게되었는가?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금속화폐의 본격적인 유통이었을 것이다. 화폐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단일한 기준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화폐는 도박꾼들에게 너무나 편리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혜원은 왜 투전처럼 당대에 널리 유행했던 도박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한없이 궁금하다.선유와 유산 - 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철다투호와 쌍륙 - 너무 즐겨 제정신을 잃는구나절과 여인 - 저 중아 걸기는 걸고 갈지라도 훗말 없이 하시소신윤복의 세 그림 「우물가에서」, 「손목」, 「봄날」을 보면 각각 독립적으로 그려졌지만 내용상 서로 연결시켜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 세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는 예외 없이 양반이다. 여종을 음침한 눈길로 바라보거나, 후원에서 손목을 덥석 잡거나, 대낮에 술을 마시고 나물 캐고 돌아오는 여자의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거나, 한결같이 양반이다. 조선시대는 성의 문제에서 남녀가 철저하게 불평등했다. 남성은 타인의 아내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아내 외의 여자와 관계할 수 있었다.

세 그림 중에서 「봄날」을 살펴보자. 남자는 부채를 쥐고 철릭을 입고 있다. 철릭이 도포나 중치막과 크게 다른 점은 상의와 하의의 연결 부분에 주름이 있다는 것이다. 철릭은 조선 후기에는 주로 무관들의 평상복, 혹은 왕이 교외로 거동할 때 시위하는 신하가 입는 옷이었다. 물론 악공이나 별감, 무당 등도 입는 옷이었다. 이 때문에 철릭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 신분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남자가 갓을 쓰고 합죽선을 쥐고 있는데 합죽선은 양반만 휴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남자는 무반에 속한 양반으로 볼 수 있다.



여자는 여염집 여자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앞치마를 두르고 봄날 홀로 나물을 캐러 간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여자의 나물 바구니에 손을 대고 있다. 젊은 양반이 나물 바구니에 손을 대면 싫어하련만 여자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빛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서로 아는 눈치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나물 바구니에 손을 넣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더욱이 여자의 얼굴에는 색기가 흐르고 있다. 바구니와 나물(풀)이라,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없는가? 또 옆의 초가를 보라. 초가지붕 위에 불쑥 솟아나온 것은 기묘하게도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



혜원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그냥 범범한 말로 에로시티즘을 표현했을 뿐인가? 우물가에서 아낙을 엿보고, 후원에서 여종의 손목을 덥석 잡고, 대낮에 술에 취해 나물 캐는 아낙네를 희롱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이고 근엄한 양반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혜원은 양반들의 실제 생활의 이면을 들추어냄으로써 양반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이야기한 도덕과 배치되는 인간이었음을 비꼬고 있는 것은 아닐까?혜원 신윤복이 살았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엽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회화사의 찬란한 개화기다. 우리는 이 시대를 창조해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기의 화가들에 대해, 대개의 경우 그들 이름에 값하는 정보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풍속화를 이야기할 때 단원 김홍도는 그 이름에 걸맞는 문헌자료가 쏠쏠히 남아 있어 조촐한 평전 한 권쯤은 꾸릴 정도가 된다. 사대부 화가라면 더러 문집이 남아 있고 때로는 그림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신윤복은 그렇지 못하다. 그림 외에 인용할 만한 어떤 쓸 만한 문헌정보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화원(畵員) 출신 화가라도 소소한 자료가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왜 신윤복의 자료는 없는 것인가? 그가 비속(卑俗)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대의 전언이 사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사대부 쪽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양반 사회와 결연된 공간에서 활동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풍속화는 문자 그대로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풍속화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그림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남편의 적은 수입에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자식들의 성적표에 분노 내지 허탈감을 느끼는 아내, 한데 어울려 고스톱을 치고, 인터넷 증권 거래에 빠지거나 홀로 포르노에 열중하고, 여자를 끼고 노래를 부르고 등의 일상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은 오늘날에도 그림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반면 조선 후기 풍속화는 인간의 현세적, 일상적 모습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밭을 갈고 타작을 하고 짚신을 삼는 생산현장부터 음주, 도박, 섹스까지 숨김없이 화폭에 옮겨졌다. 점잖은 양반님네들을 그리던 초상화와 달리 풍속화를 통하여 우리는 양반이 아닌 인간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것도 풍속화의 시대에 와서이다. 전통을 따지자면 저 멀리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까지 이를 수 있는 풍속화지만 일상을 사는 인간을 재현하기 위한 풍속화는 조선 후기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풍속화는 윤두서(尹斗緖, 1688∼1715)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윤덕희(尹德熙, 1685∼1776), 조영석(趙榮 , 1686∼1716), 신한평, 김홍도, 신윤복 등 다수의 작가가 족출했다. 이중 김홍도와 신윤복은 그야말로 풍속화 최고의 작가이다. 이들에 의해 조선시대 그림은 인간의 현세적 일상세계를 본격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는 단원의 풍속화는 단박에 무엇을 그렸는지 이해가 되는데 반해 혜원의 풍속화는 갑갑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도대체 풍속화라고 하는데, 무슨 풍속을 그린 것인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림은 그림 내부의 미학적 장치뿐 아니라 그것을 산생한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읽어낼 때 좀더 정확한 이해와 감상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혜원의 풍속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풍속화란 말을 기계적으로 분할하면 풍속 + 그림이 된다. 그림에 대한 연구는 차고 넘친다. 혜원의 그림이 달성한 성취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재현 대상이 없는 비구상이 아닐진데 도대체 그 대상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어떤 사회적 배경 하에서 그림의 제재가 되었으며, 어떤 사회적 변화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가? 요컨대 혜원의 풍속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그것이 그려진 사회적 컨텍스트는 무엇인가?이 그림에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짝짓기에 열중하고 있는 개 두 마리이다. 개의 짝짓기라니, 그림의 제재로는 워낙 속된 것이기에 이 그림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인물을 보자. 한 성인 여성과 몸종으로 보이는 처녀가 소나무 앞에서 개의 짝짓기를 감상하고 있다. 그런데 여인은 소복을 입고 있다. 상중인 것이다. 기와를 얹은 담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꽤 지체가 높거나 부유한 상류층의 여인이다. 짝짓기를 하는 것은 개뿐만이 아니다. 개의 위쪽을 보면 참새 세 마리가 있다. 자세히 보면 두 마리는 땅에 내려앉아 짝짓기를 하고 있다.



담장 밖 나무는 분홍색 꽃이 피었으니 바야흐로 봄이 한창이다. 이 여인은 남편의 상중이다. 부모의 상중이라면 이런 그림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봄날의 과부라? 생각나는 것이 없는가? 이 그림을 통해 혜원은 과부의 억압된 성(性)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부란 어떤 존재인가? 조선시대 과부는 사회적 무게를 갖는 말이었다. 조선시대 여성은 남편이 죽는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다. 개가냐 수절이냐? 단 개가의 경우 자손들의 벼슬길은 막히고 말았다. 수절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였다. 수절의 고통 중에서 사장 감내하기 어려운 것은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한문단편에 「유훈(遺訓)」이란 이야기가 있다.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장성시킨 장씨라는 여자가 임종 직전에 손자, 증손자의 며느리들을 부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시 젊은 나이에 홀로 될 때는 수절할 자신이 있으면 수절하고 그렇지 못하겠으면 위로 어른께 고하고 개가하는 것도 또한 좋은 방편이니라. … 너희는 내 말이 비정(非情)의 말로 들리느냐? '수절' 두 자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란다. …"



혜원의 그림을 다시 살펴보자. 과부의 표정을 보라, 수절하는 과부에게서 기대되는 그런 표정, 곧 슬픔과 우수에 찬 표정이 아니다. 과부는 배시시 웃고 있지 않은가? 여종은 민망한지 과부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다. 과부의 웃는 표정에는 내밀한 욕망이 드러나 있다. 사실 '과부'란 존재는 성을 억압하는 존재인 동시에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구실을 한다. 소복이 그 징표가 아닌가? 소복은 도리어 남편 없음의 징표이며, 달리 말해 남편이 없는 여자임을 선전하는 구실을 한다. 그리하여 남성에게는 어떻게 해볼 가능성이 있는 여자란 음험한 판단을 가능케 한다.



혜원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과부」에 등장하는 개와 참새의 짝짓기는 성에 관한 한 짐승과 사람이 다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혜원은 '수절? 웃기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욕망은 억압될 뿐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혜원이 이것을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뱃놀이」는 선유(船遊)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선유는 강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이야 바다에 요트를 띄우지만 조선시대에 바다에서 선유를 즐기는 법은 없다. 이 그림에 나오는 강은 아마도 한강일 것이다. 이 그림은 양반들이 기생을 불러 선유놀음을 불리는 모습이다. 등장 인물을 보자. 여자가 셋인데 모두 기생이다. 그리고 남자가 다섯인데 갓을 쓴 사람이 양반으로 기생의 파트너이다.

이 세 양반 중에서 갓을 약간 제쳐 쓴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가장 흥미를 끈다. 이 사람이 겨드랑이 바로 아래 두르고 있는 띠를 보라. 보통 도포의 띠는 검은색, 붉은색, 자주색이다. 혜원은 이 남자의 흰색 띠를 유난스레 강조해 놓았다. 사실 흰색 띠는 상중에 있다는 의미다. 즉 누구의 상인지는 몰라도 양반은 지금 상중에 있는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상중에 있는 양반이 기생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다니 혜원은 은근히 양반을 비꼰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심오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신윤복이 살던 시대에 선유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였다.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 감사가 거창하기 짝이 없게 벌이는가 하면 간단한 악공을 대동하고 조촐하게 벌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시대에 유흥이 발달하면서 뱃놀이가 유흥의 종목으로 부상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왜 이런 유흥이 발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늘어난 농업생산력, 상공업 발달로 인해 경제적 변화가 진행되어 약간의 경제적 잉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 변화가 불러일으킨 사회 변화, 혜원은 그 점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절로 가는 길」을 보자. 혜원의 그림은 대부분 유흥의 퐁속을 다루고 있는데, 뜬금없이 왜 절에 올라가는 여인을 제재로 잡았을까? 그림 속 여성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펄쩍 뛰겠지만, 당시 부녀자의 사찰 출입이 꼭 거룩한 목적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의 부녀자들은 절에 갈 수 없었다. 『경국대전』 '금제(禁制)'에 따르면 "유생,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는 장 1백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사찰출입을 금지시킨 것은 표면적으로 불교 신도의 대종을 이루는 여성을 억압하여 불교의 세를 축소시키겠다는 불교 탄압의 일환이었겠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사찰에서 부녀자와 남자가 접촉하고, 음행이 이루어져 절개를 잃는 일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부녀자의 입장에서 사찰 출입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절이야말로 남성중심주의의 억압에서 일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부녀자들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이곳에서 남편 아닌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과 여성 사이에는 성적 관계가 있기도 했다. 그것은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춘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그림들에는 중과 어떤 여성이 일을 벌이고 있고, 바깥에서 어린 상좌승이 이를 지켜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승려와 양반가 여성의 성관계?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실제 이런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다음 사설시조를 보자.창밖에 어른어른하니, "그 뉘오신고?" "소승이올소이다. 어제 저녁에 노시(老媤) 보러 왔던 중이러니 각씨네 자는 방 족두리 벗 어 거는 말 곁에 이내 송낙을 걸고 가자 왔네."

"저 중아, 걸기는 걸고 갈지라도 훗말 없이 하시소."이 그림 「밀회」보다 답답한 그림은 없으리라. 연인인 것은 분명한데 어떤 살가운 설명을 붙일 수가 없다. 오른쪽 남자는 넓은 갓에다 중치막을 입고 있는데, 수염도 나지 않은 아주 젊은 양반이다. 여자는 쓰개치마를 쓰고 자주색 깃과 끝동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자의 신분을 알 수 없다. 다만 여자의 신발이 비싼 갖신인 것으로 보아 꽤나 살 만한 축이다.



이 그림의 시간은 밤이다. 초승달이 떠 있고, 남자가 사각등을 들고 서 있지 않은가? 이 그림의 화제에는 시간이 삼경이라 하고 있다. 삼경은 지금 시간으로 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다. 한밤중인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통금이 있었다. 초경(밤 8시)에 인경종을 33번 치면 관원과 이속 외에는 거리를 나다니지 못하고, 5경(새벽 4시)이 되어 파루종이 33번 울리면 통금이 해제된다. 따라서 이 두 남녀는 야금(夜禁)임에도 은밀하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꼭 통행금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은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다. 꼭 외출을 해야 한다면, 종과 함께 나서는 것이 통례다. 종을 둘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면 모르겠으나 이 그림의 여자는 복장으로 보아 그렇게 가난한 축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한밤중에 이 남녀는 만나고 있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이 남녀의 만남이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정상적 혹은 합법적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부부도 아니다. 부부가 무엇이 아쉬워 한밤중에 집 밖에서 만나겠는가? 그렇다면 이 여자는 기생인가? 기생이 저렇게 조심스럽게 남자를 만날 이유가 없다. 혜원의 다음 그림인 「밤의 안내」의 기생을 보면 담뱃대를 물고 당당하지 않은가? 혜원이 남긴 『혜원전신첩』을 통틀어 이처럼 부끄러워하는 어색한 표정의 기생은 없다. 이 두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 관계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만나서는 안 될 남녀가 밀회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처럼 남녀 접촉의 기회를 봉쇄했던 중세의 그 야박한 도덕의 족쇄를 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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