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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거미줄

김윤식 지음 | 생각의나무
상상력의 거미줄

김윤식 외 지음

생각의나무/2001년 9월/612쪽 /20,000원



제1부 언어

발화점을 찾아서

출생과 성장이 모태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할 때 이어령은 같은 문학평론가인 최재서와 여러 모로 대비된다. “겨울 밤 헐벗은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차디찬 별떨기”를 보면서 고독을 견디곤 했다는 황해도 해주 교외의 과수원집 아이, 비평가 최재서의 유년 시절 역시 이어령과 마찬가지로 다른 시골 소년들로부터 분리된 일정한 고독을 안고 있었다. 최재서와 이어령은 모두 이러한 고독 속에서 도회지가 주는 현대적인 문화의 레퍼런스들이 거의 없이 책만을 보고 문명을 사유한 시골 수재 특유의 자존심과 관념의 날카로움을 자기 비평세계의 원형질로 형성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어령 문학의 모태공간은 대대로 서울로 열려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세계였으며, 그러한 열림 속에 난세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살아가는가를 체득한 지식인들의 세계였다. 이어령의 청년기는 학식과 권위를 가진 가부장이 중심에 존재하는 질서의 세계로부터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서울의 근대적 세계로 나아가면서 시작된다. 너무도 혼란스럽고 비루한 근대적 세계의 혼란은 이어령에게 현실에 대한 극도의 환멸과 함께 하나의 절대적 사건으로서 선택되는 형이상학적 오만을 가져다준다. 순수한 만큼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이 같은 오만을 촉발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1952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의 현실이었다.

이 시기 서울대학교 문리대는 이어령의 동기생 최일남의 술회에서 나타났듯이, ‘폐허의 현실’과 ‘상아탑의 환상’이라는 양의적인 성격을 안고 있었다. 이어령 또래의 문리대 학생들은 외견상 거지와 구별될 수 없었다. 미군부대 구호물자를 얻어 걸치고 끌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판잣집 피난교사에서 책도 없이 엉터리 강의를 듣다가 찢어진 워커를 끌고 상경한 이 불쌍한 청년들의 눈앞에, 흠칫 경외심을 일으키는 ‘말로만 듣던 붉은 벽돌교사’가 우뚝 서 있었다.

전쟁은 잘 정비되어 있던 경성제대의 도서관과 기반시설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대학 운동장에는 아직도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한국문학이 ‘전후세대’라 부르는 이어령 또래의 문학 청년들은 이런 초라한 대학을 배회하면서 복잡한 비평적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비록 생활은 가난하고 비참할 망정 일찍이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순수하고 탈정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눈으로 정신적인 문화와 교양과 예술에 골몰했다.

이들은 잉크병의 잉크가 얼 정도로 추운 자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날의 끼니를 굶주리면서도 무엇이든 인쇄된 것이라면 휴지에 가까운 조잡한 종이도 좋다고 게걸스럽게 읽어대던 ‘마음이 가난한’ 세대였다. 대학에서 문학개론이나 원론 심지어 작품조차 배우지 못했던 이들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헌 책을 주워 뉴 크리티시즘을 공부했고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군소리 없이” 싸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를 수용했다. 바로 이 같은 상황, 학문과 예술에 대한 강한 열정과 전쟁과 사회적 추락에 대한 강한 공포의 교착상태, 영웅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의 공존이 이어령의 비평적 자의식을 낳는 세대적 원형질이었다. 이시기 이어령의 의식은 「문리대학보」 그룹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의 집단적 세계관에 적당히 포획된다.

“우리 젊은 지성은 혼미와 허탈과 절망의 깊은 근저에 오히려 창조와 희망에의 벅찬 감격을 가져올 역사의 필연과 섭리가 있음을 통찰한다.” 이들은 당대 세계의 시사적인 문제를 자신의 삶과 깊숙하게 연결시켜 내면화하면서 이를 다시 문학의 문제로 변용한다. 이 같은 시대인식의 역학 속에서 「문리대학보」 그룹은 일종의 세계시민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세계관을 표출하게 된다. 실존주의를 굴절 없이 수용하고자 했던 이들은 어떤 지식인 집단보다도 강한 세계사적 보편주의의 눈으로 자기 시대의 현실을 투명하게 인식하고자 했다. 이들 그룹 가운데에서도 이어령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면모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비평충동과 창작충동의 통일성, 논리로서의 비평을 생명적인 것으로서의 창작과 융합시키는 지적 모험의 독창성이었다.

처녀작 「환상곡」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을 척척 결정적으로 예언하는 눈먼 장님인 아버지가 역사와 그것의 폭력을 상징한다면 심약한 나는 실존과 그것의 우연성을 상징하고, 눈먼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아들의 반역을 통해 주장했던 ’저항’의 관념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저항의 형상은 1950년대의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압제, 문화적 저열성이라는 누추한 역사적 현실에서 죽음 그 자체를 느끼며 몸부림치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명의 갈망, 바로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어령에게 글쓰기는 “생명의 소용돌이와 현실의 진구렁” 사이에서 생명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작업이다. 지금 여기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전야”이며 시인들의 노래는 “상처 입은 포효, 신음, 규환으로서 생명 그대로의 울음“이 되는 것이다.

저항의 문학, 문화주의 비평

이어령 비평의 기본적인 인식체계는 문학의 창조적 상상력과 인간의 본원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비평적 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비평은 전쟁의 회색구름 속에 내면화된 현실과 한국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인간성의 좌절과 그 회복에 이르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22세라는 젊음의 재산 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분노와도 같은 광기와도 같은 젊음의 반역뿐이었다. 홀몸이었다. 친구들 가운데는 이미 전쟁의 참호 속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고, 소위 망명 유학을 떠나 이방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사람도 있었다. 생존하기 위해 문관노릇을 하던 교수님들 밑에서 우리는 반세기 전 증권문서 같이 낡아 버린 노트의 학설을 베끼며 인생을 배웠다. 그런데 내가 몇몇 문인들, 노대가들을 만나보고 기절할 정도로 실망해 버린 곳도 그런 다방에서였다. 구세대의 작가나 비평가는 그 어려운 시절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붙은 집에서 바둑을 두고 포탄이 터지는 전선에서 자장가를 노래하는 사람같이 보이기만 했다.”

이 글이 담고 있는 전반적인 의식은 ‘통증의 문화’, ’부정의 문화’, ‘반역의 문화’로 표현되는 전후세대의 ‘역사의 아웃사이더’적 자세이다. 여기에서 이어령은 한 인식 주체가 놓인 세계, 그가 대면한 문학과 문단의 자기방기로부터 비평적 글쓰기의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거칠게 시사하고 있다. 근대 비평의 기점을 가르는 비평정신의 중핵을 ’반동의 미학’으로 잡고 있었다는 점, 현대의 상황에 필요한 것이 분노라는 것, 그것은 ‘순수한 자기표현’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주체적 자기수호의 미학이라며, ‘분노의 상실’을 ‘분노’했던 점 등 이어령의 비평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적 기저라고 할 수 있다. 문학과 작가의 현실참여는 ’인간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곳, 여기에 역사와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저항’의 비평인식이 놓여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아 갔다. 고향의 감나무가 포탄에 찢기우던 날, 우리들의 이웃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끌려가던 날, 비가 내리고 있었던 날 우리들은 알았다. 인간의 사랑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이, 행동한다는 것이, 생활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군화 밑에서 끝없이 퍼져 가는 카키색의 공포, ’캐타페라’의 검은 음악, 그리고 또 완구의 곁에서 쓰러져 죽은 아이의 시체,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학살을 배웠다. 젊음을 알기도 전에 꿈을 이장하는 의지를 배웠다. 그렇다. 그 언어는 잠든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고 자명고처럼 스스로 울려 위기를 고한다. 죽어간 모든 인간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언어, 그것은 폭발하며 분출한다.”

“작가가 하는 일이란 ‘피상적인 제도의 혁명보다 인간 의식의 개혁’에 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모럴은 음악과 같은 힘을 가지고 그 주어진 상황을 움직여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간의 상황이 가능해진다.” 이어령은 자기 세대에게 주어진 현실과 역사의 부채를 미결인 채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을 세대의 문학적 책무로 파악한다. 그에게 있어 구세대는 바로 자신들 세대의 문학적 책무를 회피한 무책임한 세대로 보였다. 그들의 문학은 현실에 침묵했고, “서녘하늘의 놀 속에서 너울거리며 흘러가는 언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어령 비평의 저항의 축은 인간적 저항과 구세대를 향한 ‘세대적 저항’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성의 오솔길』이란 수상집 첫머리에 ‘수인의 영가’라는 게 있다.



“허공을 향하여 독침을 찌르고 땅위에 떨어진 웅봉의 시체를 본다. 어느 왕자의 장례와 같이 숱한 개미떼가 열을 짓고 간다. 이 조그마한 비극의 모형 앞에서 나는 차마 울 수도 없다. …훨훨 별들이 떨어져 강물로 묻힐 적에 나는 무엇인가 잉태한 채로 시체가 된다. 웅봉처럼 꽃나무처럼 혹은 저주받은 유다처럼, 나는 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세대」 그 말미에 있는 ‘결론을 위한 몇 개의 아포리즘’은 니체를 방불케 하면서도 보다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그는 “감상적이고 유연하고 연약한 모든 패배주의를 오늘의 세대는 거부한다.”하고 다음을 이렇게 잇는다. “오늘의 세대는 경멸한다. 사과를 따먹은 이브에게 모든 잘못을 던지려는 성직자의 한숨과 넝마처럼 애국을 팔고 다니는 정치가의 연설문과 눈물을 현미경으로 분석하고 앉아 있는 모든 위선자와 비겁자를 경멸한다.” 라고 말한다.



제2부 통찰

저항의 문학 그리고 비평의 논리와 방법

문학비평은 그 방법과 지향이 어떠한 속성을 드러내든지 간에 문학의 존재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과 정신을 대변해야 한다. 저항의 문학은 우리 문학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비평적 쟁점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비평의 방법론적 확립을 문제삼고 있다. ‘저항’이라는 말은 인간을 파괴하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저항과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의식과도 통하지만 기성의 모든 문학적 관념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포함한다. 이어령은 전후의 혼란된 현실 속에서 인간의 삶과 그 존재방식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 교차되면서 현실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문학의 요건을 중시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 비판하는 문학의 정신을 리얼리즘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는 참여문학론으로 발전한다.

전쟁으로 규정되는 1950년대만큼 주체가 세계를 정서적으로 수용해야만 했던 시대를 찾기란 어렵다. 전쟁이 감탄사와 느낌표로만 받아들여야 했던 기막힌 상황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의 개입이 차단되고, 계몽과 진보의 합리적 이성이 여지없이 부서져 다만 경악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뜻한다. 1950년대의 바로 이러한 상황과 정신적 조건에서 수사와 비유로 실현된 그의 비평담론이 당대의 수용자에게 강한 인상과 비평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의 실제 담론방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또 다른 특성은 ‘담론적 전위’라 할 수 있는 실제 비평의 ’덮어쓰기’ 방식을 들 수 있다.

“염상섭 씨는 불우한 두 부녀의 성격유형 ‘인플루엔쟈’에 등장했던 이러한 인물들이 가지는 리얼리티란 오늘날에 있어서는 역사성의 활력과 조명을 받고 있지 않다. 삼사십 년 전의 틀을 가지고 자꾸 찍어만 내는 그 국화빵 같은 소설”, ”청록파의 우아한 산 속에서 뛰어나온 가녀린 사슴이 저 험준한 ‘골고다’의 계곡을 향해 달려보자는 비장하고 약간 성스러운 박두진 씨 “등. 작품을 통하면서도 대상이 되는 작품과는 다른, 비평 주체의 담론만이 두드러지게 각인된다. 이어령 비평은 바로 이런 담론적 전위를 통한 ’덮어쓰기’의 해석방식을 보여 준다. 이 전후비평에 대해서는 분석비평이란 말을 쓸 수 도 있으나 후기 과학적 분석비평과는 다른 차라리 수사론의 범주에 넣을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후비평이 1950년대 말기 전통 논쟁을 앞뒤로 하여 어느 틈에 1960년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전통의식의 환기가 한국적인 것과의 관련성을 맺는 일, 그러한 방향성이 1960년대 비평계의 한 과제였음은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비평의 신화적 섬광

이어령은 비유를 문학적 언술구조의 한 장치로 본다. 그의 수많은 비평적 담론들이 촌철살인의 섬광으로 대상을 공략한 것도 이러한 비유법의 힘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대의 비평적 스타일을 보면 ‘여하간’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면 ~이겠다’의 가정법, 그리고 ‘~하자!’ 등의 권유법이다. 논리의 독선적 고집인 ’여하간’이란 말이 나오고, 가정법과 권유어가 문학의 도처에서 횡행하게 된 것을 보면 추상적인 창검을 가지고 문단을 행진하던 당대의 비평적 기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여주듯이 이어령은 논리의 독선적 고집을 피하기 위해서 비유법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비유의 활용은 더욱 미학적으로 상승하여 그의 예리한 판단력을 아름답고도 명쾌하게 보여준다. “구둣솔 같은 수염이 달린 빅토르 위고가 애국을 말할 때, 랭보가 ‘때여 오라. 도취의 때는 오라!’고 외칠 때,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말하고 프로이트가 에디프스 콤플렉스를 말할 때,” 우리 민중은 그런 사치스러운 지성보다는 시대의 고통 때문에 우수에 젖어 눈물 흘리고 있었음을 이어령은 생각한 것 같다. 이처럼 축축한 눈물의 분지에서 이어령의 예술철학은 아름다운 미학이 되었다.

이어령에게는 수많은 지적 자산이 축적되어 있다. 그 지적 자산도 자기 내부에서 충분히 곰삭아 생의 철학으로, 비평의 시화적 섬광으로 운신의 폭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부연하면 동서고금을 통한 해박한 지식의 활용은 불혹을 지나 지천명과 이순을 넘고 불유구에까지 이른 것이다.

“예수는 부활할 것을 믿으며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만약 그러하였다면 그의 죽음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다. 그런 죽음이라면 삼류배우라도 능히 해치울 수 있고 인간에의 사랑을 모르는 샤일록도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연극이다. 예수는 부활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렸기 때문에 진정 부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여호와의 아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도 상징적인 의미에 있어선 그러한 부활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활은 생의 완전한 단절, 완전한 무, 완전한 절망 속에서 가능해진다.”

이어령의 반세기 언어의 숲에 들어서면 신화를 비롯한 각종의 우화, 설화, 전설, 일화가 그 숲을 더욱 기름지게 해준다. 그의 20세기 언어가 21세기에 더욱 찬란한 것은 바로 그러한 언어의 상징 동력 때문이기도 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생긴 연유를 알 만하다.

“그 옛날 아시아의 대륙은 남북으로 나뉘어 고래 싸움을 벌였다. 북대륙에는 흉맹한 유목민의 제국(몽고, 흉노)이, 그리고 남대륙에는 거대한 농경민의 제국(중국)이 있어 끝없는 세력의 아귀다툼을 벌였다. 불행히도 이 반도는 남북 양 대륙이 만나는 경계선에 자리하였기에 슬픈 ‘새우등’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토끼’가 아니라 그것은 ‘새우’였다. 이 새우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양대 세력의 저울대를 재빨리 읽고 강한 쪽으로 들러붙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사람들은 사대주의라고 욕하였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한시도 동해의 그 외로운 ’새우’는 연명할 수가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끼어 든 근세 이후에는 한층 더 관계가 복잡하다.”

천재와 시인

이어령의 지금까지의 생은 단순한 학자나 문인이 아니라 교수 소설가, 시인, 희곡작가, 시나리오 작가, 평론가, 잡지 편집자, 문화비평가, 기호학자, 언론인, 장관, 문화행정가 등을 겸한 매우 복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그 어떤 실패도 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이어령이 최소한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예증한다. 그것은 천재적 재능과 청년적 열정과 장인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천재성을 발휘하며 천재적으로 활약해 왔다. 젊어서는 내노라 하는 기성 문인들이 그의 필봉에 걸려 들까봐 오돌오돌 떨었다. 젊은이들은 그의 맹신자가 되어 목이 터져라 환호작약했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괴물처럼 괴력을 가진 창조적 인물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의 천재성은 무엇일까? 천재성이 보편이나 이성을 초월해 어떤 특출한 예지나 직관으로 범인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내는 정신작용이라면 그것은 상상력, 그의 비범한 상상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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