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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의 기밀문서

루크 베르긴 지음 | 사람과사람
1986년 보쿰 대학의 훌거 프로이쇼트 교수는 일본 열도 남서쪽 규슈지방에서 길이가 자그마치 44.3센티미터에 달하는 거인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화석이 1500만여 년 전인 중신세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중신세라고 하면 7000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신생대 제3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2600만 년 전에 시작되어 1900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학계는 바로 이 시기부터 현생종인 초식 포유류가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화석의 발자국은 두 번째 발가락에서 다섯 번째 발가락까지 굽어 있었고, 자국이 약간 깊게 패인 엄지 발가락은 나머지 발가락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발꿈치는 매우 좁았으며 발바닥이나 발끝보다 깊이가 얕았다. 프로이쇼트 교수는 이 거인에게 '페딤프레소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거인의 발바닥 앞부분의 배치, 특히 뼈대의 구조와 근육의 배열, 발바닥의 피부 문양 등이 유럽 원숭이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거인이 직립보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고 했다. 직립보행을 하면 발뒤꿈치 부분이 더 깊게 패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원숭이들은 직립에 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 거인이 두 발로 활동하여 손을 자유롭게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다. 프로이쇼트 교수는 1991년 10월 보쿰에서 열린 인류학 및 인간유전학협회 세미나에 자신의 발견을 공식 보고했다. 그러면서 일본에는 그 동안 이 거대한 발자국의 설인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의 보고가 많았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세미나에 참석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규슈지방의 거인 화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4. 불가사의한 유적지



그랜드캐니언에 이집트 무덤이 있었을까5. 신비한 물건



그 밖의 미스터리 -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문화유산들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북동쪽으로 2백킬로미터 떨어진 사앙쿠앙 고원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다. 1960년대 라오스 내전 당시 작전기지로 사용되면서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쟁탈전이 심했지만, 해발 9백-1천 1백미터의 석회암과 사암 구릉이 대부분이고 풀 또는 관목으로 뒤덮여 있어서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은 지역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이 지역에서 수백 년 된 장례식용 석재 조각인 항아리를 발견한 뒤에는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은 일명 '항아리의 평원'이란 뜻으로 자르 평원이라고도 불린다. 항아리의 크기는 거대하다. 높이 1-3미터, 직경 1-2미터, 그리고 무게 6-7톤에 이르는 항아리 2백 50여 개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항아리들은 처음에는 그 재료가 점토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안드레아스 라이네케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엄청난 크기의 항아리를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주변에 있는 거석으로 미루어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지역의 토착민들은 항아리가 지금으로부터 1천 5백년 전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과실주를 빚기 위해 거대한 돌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1899년부터 이 지역에 관심을 두었던 프랑스의 고고학자 마들레인 콜라니는 베트남 북부지방에서 선사시대 유물을 발굴한데 이어 1931년 시앙쿠앙 군처의 반앙에서도 거대한 돌 항아리와 함께 청동으로 만든 도구와 팔찌, 조가비 껍질, 홍 옥수와 유리로 만든 구슬 등을 발견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태어난 그녀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곳으로 건너와 줄곧 자연사 연구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앙에서 출토된 청동제 도구들이 비로 항아리를 만들었을 때 쓰였을 도구로 추정했다. 그리고 돌 항아리는 일종의 유골 단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우선 항아리 내부에서 불에 그슬린 흙과 인간의 뼈가 발견되었고 항아리가 발견된 지역 가까운 곳에서 굴뚝 형태의 돌무더기와 함께 불에 탄 인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굴곡이 심한 고원지대라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이 엄청난 크기의 돌덩어리를 아주 먼 거리에서 운송해온 것으로 추정하는 그녀의 결론은 모든 의문점에 대해 완전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그녀 이후 그 누구도 이 지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발굴작업 역시 중단된 상태이다. 이 지역이 1980년대 말까지 엄청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혼란을 겪었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전 세계에는 인류의 기원이나 고대 문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 발굴물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상식이나 정설을 근본부터 뒤집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파리인류사박물관 지하실에는 1937년 뤼사크 레 샤토에서 멀지 않은 동굴에서 발견된 석조 유적 출토품의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손바닥 크기만한 이 유물에는 복잡한 선이 마구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그림은 현대인의 복장을 한 인물이다. 모자, 재킷, 바지, 구두를 신고 콧수염까지 길렀다. 문제는 이 유물이 자그마치 1만 7000년 전의 것이라는 데 있다.



중국 시안의 반포박물관에는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점토 판들이 있는데, 점토 판에 새겨진 문자가 라틴어 알파벳과 너무도 흡사하다. 아테네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기원전 1세기경 그리스의 안티키테라 섬 앞 바다에서 침몰된 한 선박에서 건져 낸 청동유물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1900년경 건져 올린 이 청동유물은 기원전 82년에 제작되었다고 적혀져 있는데, 복잡한 톱니바퀴 구조를 가진 일종의 천문학 계산기와 유사하다. 캠브리지 대학의 프라이스 교수는 1971년 이 기계는 태양계의 모든 혹성들의 상대 위치와 시간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자동회전식 천구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처럼 톱니바퀴를 이용한 메커니즘이 과학에 응용된 것은 1575년 이후였다. 박물관 측은 '이런 종류로서는 유일한 유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의 한 고고학자는 그와 비슷한 유물 40여 점이 그리스의 연구소와 박물관 지하에서 녹슬고 있다고 했다. 페루의 나스카 고원 근교에서 발굴된 질그릇은 놀랍게도 오늘날의 증기기계와 흡사하다. 기원전 400년경부터 서기 600년경에 이르기까지 발달된 비쿠스 문명과 비루 문명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페루의 리마박물관에는 두 마리의 공룡이 그려진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용도가 꽃병인 것으로 보이는 이 토기는 기원전 200년경부터 서기 600년경에 이르는 동안 페루 북부 해안지역인 모체 계곡에서 발달한 모차가 문명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의 스미소니언연구소와 콜롬비아 보고타의 황금박물관, 브레맨의 해외박물관에는 콜롬비아 왕릉에서 나온 황금 셔틀을 보관하고 있다. 길이 6센티미터, 폭 5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 크기의 소형이지만 생김새가 요즘의 제트기와 아주 흡사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삼각 주 날개와 수평 꼬리날개, 수직 꼬리날개가 있고 풍향계, 조종석, 엔진의 공기흡입구가 있다. 발견한 곳은 기원전 500-800년경 시누문명이 번성하던 곳이다. 독일의 알군트 앤봄, 페터 밸팅, 콘라트 튀버스 등이 황금 셔틀의 비례대로 비행기를 제작하여 활주능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새나 곤충의 그림으로 분류되는 황금 셔틀은 탁월한 기체역학을 선보였다고 한다.1. 문제의 제기

기존 학설이 흔들리고 있다2. 은폐된 발견일찍이 칼 콜렌베르크는 "19세기의 학문은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분명하고 일목요연한 체계를 세워 모든 것을 쓰기 편하게 서랍 속에 정돈했다. 그 날 이후 현대 학문은 이런 성과를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휘르첼러 교수는 일찍이 오레오피테쿠스가 발견되었던 이탈리아 토스카니 탄광의 지하 2백미터 갱도 천장에서 오레오피데쿠스의 완벽한 전신 골격을 발굴하여 화제를 일으켰던 인류학자였다. 그는 그 유골에서 인간에게만 발견되는 여러 특징들, 특히 골반의 폭이 넓고 송곳니가 작은 것 등으로 미루어 인류의 한 곁가지라고 주장하면서 직립보행했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당시 학계는 그의 해석에 대해 비웃음과 조롱만을 보냈다. 우선 뼈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지질시대 중 신생대 제3기 초로 밝혀졌는데 그 시대에는 코끼리, 말, 코뿔소 등의 조상인 고생물들이 존재했을 뿐 고등 영장류는 있지 않았다면서 오레오피테쿠스를 인간과 연결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사바델 고생물학연구소의 두 인류학자(마이케 쾰러와 살바도르 모야 솔리)는 오레오피데쿠스를 멸종한 유인원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던 인류와의 유사한 특징들은 병행 발전의 결과라고 해석했다. 말하자면 오레오피테쿠스가 인류의 가까운 친척은 아닐지언정 직립보행했다는 휘르첼러 교수의 주장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은 유골의 연대를 700-800만 년 전으로 추정하여 휘르첼러의 주장보다 훨씬 뒤로 계산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휘르첼러 교수의 사례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선사시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수정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사기꾼 취급을 당하면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에 따라 지구 곳곳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몇 달에 한번씩 새로운 화석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은 화석을 새로 발견할 때마다 기존 학설을 바꾸고 연대를 고치면서 보잘것없는 퍼즐 조각을 맞추려 애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발굴물이 등장하여 그 학설을 뒤엎는다. 학설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사례를 살펴보자. 1994년 독일의 「슈피겔」지는 지금으로부터 3백 5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인 '루시'에게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조사연구팀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백 25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에서 4백 4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직립원인의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슈피겔」지는 이 발굴팀의 책임자인 화이트 교수의 말을 빌어 "지금까지 발견된 원숭이와 인간의 공동 조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골"이라고 전했다. 또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트리닐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의 뼈 조각은 당초 추정했던 70만-100만 년 전보다 훨씬 오래된 180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고대 인류학자들은 기존 학설의 연대를 수정하는 데 비교적 소극적이다. 취리히 대학의 인류학자 페터 슈미트 교수의 말처럼, 몇 십 년 동안 똑같은 학설이나 이론을 강조하다보니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확신에 빠지게 되고, 결국 새로운 견해나 이론을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일까. 분명히 이들은 학식으로 볼 때 뛰어난 학자들이다. 하지만 기존의 틀에 얽매여 있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다는 그 점이 오히려 학문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들이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물의 가치를 판단할 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슈미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인류 조상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수준'에 불과하다. 예컨대, 학자들이 인류 역사를 재구성하는 증거라고 하여 제시하는 유물은 화석 5천여 점이 전부인데, 그것마저 시대적으로 그리고 발굴 장소가 특정지역에 편중되어 있다. 특히 800만 -400만 년 전의 유물은 12개에 불과하고 모두 모아봤자 구두 상자 하나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것들 뿐이다. 40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진화과정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물이 12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다. 이 정도의 유물로 재구성한 인류 계보를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일까.1982년 4월의 어느 날,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러셀 버로우스는 와바시강 계곡을 지나던 중 우연히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전에 보지 못한 지하 동굴이었다. 손전등으로 이 구석 저 구석을 비쳐본 그는 깜짝 놀랐다. 출입구가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의 이끼 탓에 문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출입문으로 사용했던 돌문이었다. 문을 열자 좁고 기다란 통로가 이어졌다. 그는 손전등을 비춰가며 그 미로를 따라 조금씩 기어 들어갔다. 통로는 어둡고 침침했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조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에는 온갖 이상한 기호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바닥에는 인간이 다듬어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돌 하나가 있었다. 등잔으로 쓰였던 것처럼 보이는 석두상이 걸려 있기도 했다. 여기저기 몇 개의 출입문도 눈에 띄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출입문의 하나를 열었다. 억지로 몸을 안으로 밀어 넣은 그는 어둠 속을 조금씩 더듬어 갔다. 통로가 조금 넓어졌다고 생각될 무렵 차갑다는 느낌이 손끝을 자극했다. 쇳조각이었다. 아니, 청동으로 만든 장신구들이었다. 그것들은 손전등의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또 다른 출입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든 곳에 들어가 본다는 게 꺼림칙했다. 분명 이곳을 만든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출입을 원치 않았을 것 같았다.



5년 뒤 버로우스는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흔히 '주묘(主墓)'라 불리는 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석조 바퀴로 막혀 있었고 그 바퀴에는 이상한 문자가 장식되어 있었다. 방안에는 무기를 비롯하여 갖가지 문자와 그림들이 조각된 거대한 석관이 놓여 있었다. 석관 안에는 순금제관이 있었고, 판에는 천으로 둘러싸인 미라가 있었는데, 마치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옮겨 놓은 듯 했다. 한 편의 탐험소설처럼 흥미진진한 그의 동굴 탐사는 이것이 전부였다. 버로우스는 새로운 지하동굴을 발견했다는 증거로 그곳에서 갖고 나온 4천여 점의 부장품 가운데 일부를 공개했다.



대부분 손바닥만한 크기인데, 날개가 달린 반인반수의 형상, 투구를 쓴 인물, 천체도 등 갖가지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손목시계를 닮은 부조도 있었다. 이 부장품에 대한 미국 고고학계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현대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새겨진 모티브와 문자에서 너무나 다양한 문화양식이 발견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학자는 문자를 전혀 해독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위조임을 더욱 강조하기도 했다.



'버로우스 동굴'이라 불리는 이 지하 동굴의 부장품에는 고대 이집트나 페니키아 문화를 연상케 해주는 그림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이들 문화권은 미대륙과 전혀 접촉이 없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물론 1658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한 인디언 구역에서 발견된 비문에 근거하여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유럽인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 비문에는 서기 425년 카르타고의 한노라는 사람이 금을 찾아 떠난 항해를 기념하여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중앙아메리카의 올맥인들과 마야인들이 만든 무게 4톤의 거대한 석두상은 페니키아와 이집트의 탐험대에 동행했던 아프리카 흑인 얼굴을 형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일 버로우스 동굴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 모두 진품이라면 어떻게 될까. 어느 고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역사를 무시해야 한다. 결국 이 동굴의 유물들이 모두 가짜여야 구대륙과 신대륙의 접촉이 콜럼버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기존 학설은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버로우스 동굴의 출토물에 대해 모든 학자들이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학자도 상당수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제임스 쉐르츠 교수는 버로우스가 공개한 유물들이 실제로 고대의 부장품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1992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 고고학계는 버로우스 동굴의 발굴품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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