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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오가타 구니히코 지음 | 예지
괴짜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

오가타 구니히코 지음/윤기 옮김

예지/2001년 9월/172쪽/9,800원



1. 일본의 정치풍토를 뿌리째 뒤집어 놓은 사나이

2001년 4월 24일, 21세기 첫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20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틀 후인 4월 26일에는 국회에서 총리지명을 받아 87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고이즈미 내각이 발족한 것이다. 조각에 착수한 고이즈미 새 총리는 여성인 다나카 마키코를 외상으로 임명했으며, 각 파벌의 반대의견을 일축하고 이시하라 노부테루와 나카타니 겐 등 젊은 사람들을 등용했다.

여성각료 5인, 이것은 일본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실로 충격적이고 신선한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고참 정치가들의 빈축을 사긴 했지만, 엄청난 지지율 때문에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또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개혁의 깃발을 빼앗긴 채 전략을 새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고이즈미는 총리취임 기자회견에서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자신만만한 포즈와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내각은 개혁단행 내각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 기대를 하면서 고이즈미 내각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고이즈미 내각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일본의 정치․경제력, 빈사상태의 사회시스템을 개혁해 줄 것인가.

그것은 정말로 극적인 승리였다. 2001년 4월에 실시된 자민당 총재선거는 사상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를 낳았다. 20대 자민당 총재 자리에 결국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올라선 것이다. 그것도 예비선거 역사상 최고의 압승이라는 신화를 낳은 채... 고이즈미는 국회의원이 된 지 29년 만에 자신의 야망을 성취했다. 총재선거에 3번이나 도전한 결과였다. 고이즈미의 극적인 승리는 29년이라는 세월을 이겨내면서 고생 끝에 새로운 총재의 자리에 오른 한 정치가의 성공적인 스토리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파벌정치’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일본의 정치풍토를 뿌리째 바꾸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잦은 실언으로 역대 총리 중 가장 인기가 없었던 모리 전 총리. “모리 총리를 내세워서는 2001년 7월 29일에 행해지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분개하여 일어선 자민당 젊은 의원들은 하나같이 ‘모리 총리 퇴진’을 외쳤다. 정계의 화려한 무대에서 모리 총리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 2001년 4월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고이즈미는 총재선거 입후보를 결심하게 된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 파가 지지하는 전 총리 하시모토 유타로, 에토․가메이 파의 추천을 받은 자민당 정조회장 가메이 시즈카, 그리고 고노 그룹 지원으로 출마한 경제재정상 아소 다로, 고이즈미는 국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이 쟁쟁한 3명의 후보를 극적으로 이겨냈다.

일찍이 다나카 가쿠에이(총리 재직 중 중 ․일 국교정상화, 일본열도개조를 추진, 1976년 록히드 스캔들에 연루 수탁수뢰죄 등으로 기소됨)는 ‘민주주의는 숫자다‘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민주주의의 이런 ’다수결 원칙‘이 금권정치라고 비난받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돈과 표와 한자리를 바라는 정치가들을 아낌없이 뒷받침해 줌으로써 자민당에 다수파 지배를 확립했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하시모토 파는 ’다수의 지배‘라는 절대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다.

항상 ‘다수의 지배’를 통해 그 실력을 나가타 초(도쿄 도 치요다 구에 위치한 일본 정치의 중심지, 서울의 여의도와 같이 국회의사당, 국회도서관, 총리관저 등이 위치해 있다)에 과시해 오면서 자민당 중․참의원 350명 중 101명이란 수를 배경으로 자민당의 3역(간사장, 총무회장, 정조회장)의 선임은 물론이고 국회대책위원장과 5-6명의 각료를 입각시켜 정계를 자파에 유리하게 지배했던 하시모토 파였다. 오부치 총리의 돌연한 사망으로 밀실에서 모리 총리를 탄생시킨 모리 요시로 당시 자민당 간사장(모리 파),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하시모토 파), 아오키 관방장관(하시모 파)의 5인 방 중 3인이 하시모토 파였다. 하시모토 파가 결정하면 다른 파는 따라 올 수밖에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과시해왔다.

자민당 총선거에서 입후보한 고이즈미는 ‘파벌정치가 주는 장애’를 외치고 개혁을 주장하며 “일본은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열렬히 외쳤다. 여기에 국민들이 뜨겁게 지원함으로써 자민당의 지방 당원들도 일어나고 국회의원까지도 움직여서 지금까지의 정치에 대해 큰 소리로 “NO"라고 외친 고이즈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고이즈미는 그 모습에서부터 ‘보수당 국회의원’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정치가로 보였다. 고이즈미는 정열적이다. 그가 가두연설에서 하는 말들 들어보면 자민당원이 여태껏 반복해온 거짓말들이 아니라, 마치 생명을 걸고 혁명을 외치는 피끓는 젊은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말한다면 메이지 시대 열사들의 비장한 메시지와 같은 인상을 느낄 정도였다.

2. 괴짜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누구인가

도쿄 근교에 있는 가나가와 현. 이 지역에서 중의원으로 당선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요코스카 시 미하루 초에 자택과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 또 같은 도시 내 오가와 초에도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미하루 초의 자택을 방문해보니 경비하고 있는 경찰관이 한가롭게 서 있을 뿐 일국의 총리 자택이라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에 몇 번인가 산책하면서 도쿄 메지로에 있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큰 저택을 감탄하면서 본 기억이 있다. 그에 반해 고이즈미의 집은 서민주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다나카 저택은 높은 담으로 침입자를 막는 철선이 걸쳐 있는 데 반해 고이즈미 집은 2층집으로 100평도 안 돼 보였다. 게다가 대문도 없었고 누구든지 현관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16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고이즈미의 집 맞은편에는 손님 의자가 2개정도 있는 조그마한 이발소가 있다. 이발소 주인, 나카고미 데루오는 고이즈미 내각의 탄생을 계기로 매스컴으로부터 취재공세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한 살 차이로 죽마고우였다.

“우리 지역에서는 자유롭게 후원회를 만들어 표는 밀어줄 테니 의원님은 도쿄에서 나라를 위해 일해달라고 말했을 뿐 우리 지역을 위해 다리나 도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본인도 여기서는 선거연설은 하지 않았으니 그 관계가 다른 지역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이 듭니다.”

낙선을 두려워하는 정치가는 선거 때는 물론이고 보통 때도 음식이나 버스여행, 온천초대 1박 여행 등으로 유권자를 접대한다. 또 그것을 당연시하는 정치풍토가 전국으로 퍼져있으며 지연이나 혈연이 약한 도쿄에서도 국회의원은 관혼상제에 놀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장을 싫증이 날 정도로 보아온 나에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선거구 관리는 이색적으로 비쳤다. 선거구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족이나 자신의 팬들에게 맡기고 있다고 대답했다.

백발이 섞인 긴 머리.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이 헤어스타일은 요코스카에 있는 자택 근처 이발소에서 고이즈미 자신이 베토벤 머리처럼 파마를 해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항상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포즈를 취하면서 기자단의 질문에 답하는 고이즈미의 모습은 지금까지 국회주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총재선거에 임하는 여당 각 파벌이 펼치는 여러 가지의 전략 속에서도 시종일관 슬로건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4명의 후보자 중에서 고이즈미 뿐이었다. “새로운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도 앞으로의 불황을 일시적으로 참아달라.”고 하는 우직할 정도의 대담함이나 “일본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건설회사나 은행이 쓰러져도 할 수 없다.”라고까지 말한 용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 결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생각했던 것보다 뼈대가 있는 상식인’이라는 일면이 많은 국민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정치가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취미로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 ’고집쟁이‘라는 고이즈미의 이미지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국회의원 중 2세 의원은 무척 많지만, 고이즈미는 정계에서도 보기 드문 3세 의원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 마디지로는 노동자의 신분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2차 세계대전 전의 하마구치 유코내각에서 체신상에까지 올랐고, 노동자 시절에 새긴 문신을 지니고 있어서 문신장관이라고 불려질 정도의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정치가였다. 또 아버지 준야도 이케다 내각의 방위청 장관을 지낼 정도로 노련한 정치가였다. 이처럼 고이즈미 집안에는 정치가로서의 피가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고이즈미는 요코스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을 재수하고 게이오 대학에 입학하여 1967년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이전부터 정치가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다고 한 괴짜였으나, 런던대학 유학시절 아버지 준야가 69세로 급사하자, 급히 귀국한 고이즈미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1969년 12월 그 해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첫 출마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서둘러서 출마했다는 점과 준비부족이 겹쳐서 아쉽게도 당선자 다음에 머물렀다. 정치계에서 처음 맛 본 좌절이었다.

그 후 후쿠다 다케오 의원의 비서로서 새롭게 정치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훈련을 쌓아나갔다. 그리하여 1972년 12월 총선거에서 고이즈미는 가나가와 현 2구에서 다시 출마하여 처음으로 중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27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이즈미는 자민당 후쿠다 파의 기대주로 주목받으며 정치가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고이즈미는 1982년, 그가 40세 때, ‘정치가의 아내’가 아니라 ‘가정의 주부’가 되고 싶다던 14세 연하의 아내와 이혼한 이래, 두 자식을 데리고 지금까지 요코스카의 자택에서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 일이 바쁠 때는 도쿄 미나토구 다카나와에 있는 의원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가끔 시간이 나면 22세, 20세의 대학생인 자식들과 여름에는 캠프를, 겨울에는 스키를 함께 하는 등 독신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정치가의 아내로서 선거구민을 알뜰하게 보살펴 온 고이즈미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때부터 지금의 고이즈미 대에 이르기까지 비서로서 아버지와 동생의 모든 정치활동을 뒷바라지해 온 독신의 누나, 그 외에 현재는 이혼해서 친정에 와서 살며 가사전반을 총괄하는 여동생으로 구성된 고이즈미 집안은 시집온 22세의 젊은 신부에게는 고생스러운 곳이었을 것이다. 고이즈미의 속옷 세탁까지 누나들이 했다고 한다면 아내로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었으리라는 점이 상상이 간다. 고이즈미의 현재 비서는 빈틈없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의 누나, 노부코와 동생 세야. 고이즈미가 ‘시스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은 누나에게 신변의 일을 모두 맡기고 있는 데서 유래한 것 같다.

3. 어떻게 산을 움직일 수 있었는가

2001년 4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행운이 따라주었다. 그것은 선거전에 돌입하기 직전 국민적 인기로 유명한 다나카 마키코 전 과학기술청 장관이 고이즈미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다나카는 고이즈미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청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본능적인 재능을 가진 의원이다. 이 희대의 연설 마술사, 다나카가 고이즈미와 함께 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가두연설장에서 이들 두 사람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전국 각지에서 압도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렇게 ‘고이즈미․다나카’ 콤비는 순식간에 많은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마키코의 연설은 서민들이 정치에 대해 지니고 있던 답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바람구멍을 내며 두 사람의 콤비가 전국에 ‘고이즈미 붐’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민당 총재선거는 지금까지와 같이 ‘예비선거’와 ‘결선투표’라는 이중구조로 실시되어 왔다. 단지 지금까지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 도부, 현 대표들에게 ‘예비선거’에서 할당되었던 표의 수가 한 표에서 세 표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47표였던 지방단위 표를 3배로 늘리는 것을 집행부가 승인하여 141표가 된 것이다. 여기에 자민당 중․참의원 표인 346표를 합친 487표 중 과반수인 244표 이상을 얻은 후보자가 총재에 임명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또 예비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은 후보자가 없는 경우, 상위 2명에 대한 결선투표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고이즈미처럼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어 지방 표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해도 당내 의원들에 의한 결선 투표결과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결선 투표에 올라가면 예비선거에서 3위나 4위를 했던 다른 후보의 표가 고이즈미와 하시모토 어느 진영을 지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다시 말하면 ‘3위, 4위와의 연합’에 따라 승패의 귀추가 결정되는 시스템이다.

이제 예비선거에서 3, 4위였던 가메이, 아소 표가 하시모토, 고이즈미 중 어느 쪽을 지원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선거 중반에 접어들자, 결선투표 때에는 하시모토를 지지하겠다고 표명했던 아소 다로가 막판에 가서 방침을 바꿔버렸다. 가메이 파는 유리한 후보자 쪽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하고 있었다. 이때 하시모토 파의 지휘자인 노나카 히로무가 4월 18일 “하시모토가 새로운 총재에 당선되면 간사장, 정조회장은 유임!”이라고 선언했다.

차기 간사장을 기대하고 있었던 가메이가 결선투표에서 하시모토 파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 직전에 터져 나온 노나카의 발언은 가메이에게 미묘한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정책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이즈미 파의 정책협의 등을 교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메이 파는 결선투표를 기권함으로 중립의 태도를 표명했으나 결과적으로 고이즈미를 밀어주게 되어 고이즈미 내각이 탄생되었다.4. 정치가로서 무엇을 해왔는가

고이즈미는 지금까지 오쿠라(대장성) 정무장관, 자민당 재정부회장, 그리고 중의원 오쿠라 위원장 등 경제관련 요직을 두루 거쳐왔다. 이러한 경력을 고려할 때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재정통 후생족이란 측면과 정치가답지 않은 고상한 인격을 갖춘 인물로 보인다. 1987년 11월 고이즈미의 첫 입각이 이루어졌는데 당시는 다케시다 내각 때로 후생상에 취임했다. 그리고 1989년 후노 내각 때도 후생상에 연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생상 역임시절의 활동을 보면 영어를 추방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영어 추방’이라는 것도 ‘아메니티’, ‘맨파워’ 등 영어 사용을 남발하며 알기 쉬운 문장을 쓰지 못하는 후생상 관리들에게 일본어를 공부하라고 지시한 것 정도다.

정계에서 ‘이치젠고치’, ‘짧게 말하는 고이즈미’로 일컬어진 그의 특성이 1991년 미야자와 내각의 우정상에 취임했을 때는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지금까지 우정성이 추진해온 ‘노인우대’의 비과세 확대 문제에 대해서 ‘그것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해 우정성을 혼란에 빠지게 한 일이 있다. 물론 이것도 어떤 평가를 받은 실적은 아니었다. 또 1993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 당시 미야자와 총리에게 퇴진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우정상을 사임한 일화도 있다. 고이즈미 다운 시원스런 일면이다. 당시 고이즈미는 정책면에서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진퇴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한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또 장관으로서 고이즈미가 걸어온 경력을 보면 어딘가 핀트가 좀 맞지 않는 점, 이상한 것에 관심을 갖는 국회의원이라는 불가사의한 인상이 남는다. 이러한 점은 ‘취미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는 나가타 초만의 평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정치가로서의 일면을 보여준다. 1997년 가을의 중앙성청 재 개편 회의에서 고이즈미는 자신의 신념인 우정 3사업의 민영화를 주장하며 그 당시 총리였던 하시모토에게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사임도 불사하겠다고 하며 철저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하시모토 총리는 이를 두고 "고이즈미는 왜 한 가지 일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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