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이희수 지음 | 청아출판사
종교, 민족, 종파 그리고 국가간에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 테러와 전쟁이 중동을 전혀 다
른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와의 접촉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착취와 부도덕뿐이었다는 과거 역사에 대한 뼈저린 경험은 다른 저항수단을 잃어버린 이 슬람 급진세력의 극단적인 투쟁을 불러오기도 했다.한 이데올로기나 민족집단이 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공존과 융합을 필요로 한다. 단일성을 강조하면 그것은 왕조나 왕국에 머물고 만다. 파괴와 정복이 주가 되었던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왕국이나 징기스칸의 몽고나 티무르가 지역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 정복자의 사망으로 국가의 운명도 끝나는 경우가 이를 말해준다. 오랜 제국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리스, 로마, 압바스, 오스만 제국 등은 모두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제국 정신을 갖고 있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그 자원을 배경으로 선진공업국으로, 경제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한 서구 제국주의가 이제는 좀 양보할 때가 되었다. 우리도 제3세계의 핵을 이루고 있는 중동-이슬람권 세계에 보다 유연한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면서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착각과 희망이 뒤섞인 채, 약한 자가 아닌 가진 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수없이 반복해 온 피지배의 아픈 경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아랍인을 비롯한 이슬람인들도 중동을 둘러싼 근세 역사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에 걸맞은 개혁과 의식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이미 서구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와 대항보다는 전통적인 이슬람 규범 속에서 새로운 발전과 변화를 수용하는 조화와 절충의 묘를 찾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원래 이슬람은 화해와 용서, 절충과 합의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였다. 따라서 다양성이 포용된 공존과 조화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이슬람 정신의 진정한 출발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인류가 함께 사는 방법을 처음 시작한 중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서기 880년경 처용이 동해 바다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여 누가 보더라도 외지인에 틀림없는 처용을 두고 그 동안 아랍인 일 가능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 가능성은 무엇보다 당시 통일신라기에 배를 타 고 신라의 개운포(지금의 울산항)까지 올 수 있었던 해상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랍 상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론에 근거한다.중동은 인류가 처음으로 문명을 일구어 낸 땅이고, 다양한 이념들이 함께 하는 경험을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해 간 공존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20 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강대국들의 경제적 야욕과 문명의 이름으로 남의 가치를 무참히 짓밟는 야만에 의해 공존과 조화의 약속은 무참히 깨져버렸다.지금도 중동 지역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전쟁과 평화 협정이 반복되고, 쿠르드족 유랑의 비애가 계속되고 있으며 코소보 사태, 체첸 독립운동, 보스니아 사태, 캐시미르 분쟁 등 끊임없는 무력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아프가니스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연결해 주는 유일한 요소는 국민 99%가 믿고 있는 이슬람이다. 20세기 초 현대화의 개혁 정책을 폈던 국왕 아마눌라 칸은 종교-민족 지도자들의 반발을 사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 무함마드 자히라 샤에 의한 40년 간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쿠데타로 전복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는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하고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다우드는 소련에 기대를 걸고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모를 꾀하지만 좌익 정당들 간의 내분은 결국 소련군의 침공을 불러들여 1979년부터 9년 간 이슬람 원리주의로 무장한 '무자히딘(전사들)'과 소련군 사이에 피로 얼룩진 전쟁이 계속되었다.
1992년 경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자히딘 그룹이 세력을 장악하는 듯 했으나 탈레반(학생들) 그룹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내전 양상은 새롭게 변화된다. 탈레반들은 1994년 가을 스스로 이슬람주의 학생들이라고 자처하며, 자신들의 목표는 국내에서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군벌들의 무장해제와 아프가니스탄에 엄격한 이슬람법을 적용시킨 이슬람 정부를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 정권은 카불 점령 후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해 실질적인 집권세력이 되었으나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의 다른 나라들은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제 내전은 탈레반 측과 반탈레반 연합세력인 이슬람 연합전선의 대결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이들의 배후에는 주변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탈레반 정권은 이슬람 원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극단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국내외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가무와 오락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영화 및 비디오 상영까지 금지시킴으로써 가뜩이나 전쟁으로 인해 크게 피폐된 시민생활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같은 비난 여론에 대해 여성의 교육과 고용기회 확대, 교육, 문화 시설물 건립을 위한 재원확보 등에 주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여성 교육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는 원인은 공산주의와 내전 때문이며, 여성에 대한 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 교육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9세기경 동아시아 해상교역은 북쪽은 신라 해상이 장악하였고, 남쪽은 거의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다. 심지어 양주에는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과 아랍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번방이 한 도시에 나란히 존재함으로써 두 민족 사이의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랍 상인들의 한반도 내왕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9~15세기 사이에 17명의 이슬람 학자들이 쓴 20여 권의 책에서도 아랍인과 신라인의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통일 신라 및 고려전기에 무슬림들과의 교류는 중국에서의 정치, 외교, 문화, 통상적 교류와 중국 동남부에 거주하던 무슬림 상인들의 직접적인 한반도 진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매회 1회 이상 당에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며, 동시에 파견된 이슬람권 사절들과의 빈번한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에서 활동한 신라 불교승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인도를 내왕하면서 이슬람화 되어 있던 서역 및 아라비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처용은 아랍인인가? 기록에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종합해 보면 아랍-이슬람 상인세력 이외의 대안은 없다. 중국 동남부에 거주하던 수십만의 아랍-이슬람 집단 중 일부가 지척에 있는 통일신라로 교역을 위해 진출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후로 고려, 조선, 일제시기를 거쳐 이슬람과의 교류는 계속되어 왔으며 오늘날 우리 나라에도 이슬람 교도들인 한국인 무슬림들이 많이 늘고 있다. 그들의 숫자는 약 35,000명에 이르며, 이슬람 성원인 모스크는 전국에 5개가 있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을 통해 처음으로 조직적인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한국 이슬람 공동체의 바탕이 된 것이다.
또한 급성장한 한국 경제에 많은 이슬람권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현재는 이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 등으로 많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으나 계속되는 세계화 추세 속에서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급진전될 전망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의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인종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으로 심각한 차별과 냉대를 감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한국정부는 통제와 허용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취해왔으며, 불법체류 문제와 인권 탄압 등으로 세계적인 지탄을 받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그들만의 집단문화도 생겨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과의 결합은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세계적인 현상의 시작 단계에 선 한국은 문화상대주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정책을 정비하여 한국문화를 새롭게 재생산할 공존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때이다.8. 한국을 걷는 이슬람 통신사9. 이슬람 세계의 현실, 갈등과 조화6.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슬람은 인간이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현세와 내세에서 신이 가르치고 인도해 준 생활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만을 일컫는 종교 용어가 아니 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활동 전체를 포함하는 생활 그 자체이다.7. 끝나지 않은 전쟁들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들에 의한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 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슬람의 전파는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이지만 꾸란에서는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를 부정하고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람교는 발생하자마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피정복민들의 문화나 관습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들에게 더 많은 세금만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피정복민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막을 이유가 없었으며 오히려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떠한 종교도 폭력과 양립될 수 없으며, 이슬람 사상 또한 평화를 중시하며 극단을 배격하는 동양적인 중용사상이다.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세계는 동, 서의 틈바구니에 끼어 너무나 많은 핍박을 받아왔다. 서구의 핍박을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이슬람 공동체라는 정체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폭력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급진파나 극단파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파되어 온 이슬람 세계는 주변 문화의 수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고대 문화까지도 재생시키는 이슬람 문화를 탄생시켰다. 아랍인들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인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이슬람화한 데 있는 것이다. 실제로 8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육, 해상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활동한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 문화의 제 요소가 동서로 교류되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세계 문화의 다양화와 일체화에 기여했다.
무슬림들은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는가? 무슬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사실상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길지 않다. 현대 미국의 퇴폐적인 성문화나 극단적인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반감이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서 출발한다.
1차대전 중 영국은 반터키 운동을 촉발시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전쟁 후 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자 두 민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2차대전 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의결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에 비해 아랍권이 지나치게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결정이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으며, 미국이 지금까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돕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구의 정치 경제에 예속되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대표성을 띤 미국의 지원에 의해 계속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당한 아랍 세력은 미국을 대표한 제국주의 세력을 싫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대표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일부다처제의 발생 원인은 일반적으로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를 능가하거나 한 명 이상의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구, 더 많은 자손을 갖고자 하는 욕망 등이다. 이슬람의 경우 초기 전투에서 많은 남성들이 사망하게 되자 과부와 고아들이 늘어나 이들을 구제할 효과적인 방도로 도입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그 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는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단서가 붙어있다. 바로 남편은 아내들에게 편애 없이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평성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는 아내가 합법적으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 여성이 다른 문화권의 여성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히잡'이라는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모습 때문일 것이다. 히잡의 모양에는 대개 얼굴과 가슴까지 가리는 것과 얼굴을 드러내는 두건 형태가 있다. 히잡의 모양과 색깔을 지역, 종교적 성향, 계층, 연령, 취미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개방적이고 나이가 젊을수록 두건의 형태나 색깔이 화려한 히잡을 선호한다. 시대에 따라 히잡도 하나의 패션으로 취향에 따라 선택되고 있다.
꾸란에서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히잡 역시 여성보호 측면에서 간주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슬람의 보수적 시각에서는 가정 밖에 있는 여성은 유혹이며 사회적 혼란의 원천으로 간주하여 히잡 쓰기는 여성의 처녀성을 보장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방어조치로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슬람 운동이 확산되면서 이슬람 여성들은 자신을 이슬람적 가치의 상징으로 삼으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적 페미니즘 운동을 촉발시켰다. 전통적 페미니즘은 이슬람적 가치에 근거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보호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상징이 바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이었다.
최근에는 이슬람 운동에 따른 여성들의 히잡 착용이 국가와 사회 계층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엘리트 여성들의 착용이 늘고 있다. 이는 무슬림 여성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서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여성의 권리와 자유의 제약으로 비쳐졌던 히잡이 이슬람의 종교적 가치관을 이해하고 나면 어느 사회보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강한 이슬람적 가치의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이슬람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꾸란을 통해 지시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꾸란에서는 돼지고기뿐 아니라 먹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이슬람에서는 허용된 것은 '할랄'이라고 하고 금지된 것은 '하람'이라고 부른다. 꾸란에는 이 두 가지가 자세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보면 꽤 까다로운 율법처럼 보이지만 사실 몇 가지 금기 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관대한 법이다.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종교적 믿음을 모든 생활에 실천하는 이슬람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 인류에게 커피를 보급시킨 사람들이 이슬람인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커피의 원산지는 이디오피아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에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단인 수피 종단에서 수도사들이 모여 앉아 설교를 들을 때나 혹은 잠을 쫓을 때 커피를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1511년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성지 순례자들에게 커피를 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커피는 극단적인 이슬람 법학자들이나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음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커피의 향정신 성분이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과 곳곳에서 성행하던 커피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때문이었다. 커피점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도박이 유행했으며 심지어 일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