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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트라이앵글

노암 촘스키 지음 | 이후
지난 몇 해 동안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이 한 공격이 미국에서는 PLO의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그려졌다. 언제나처럼 '테러리즘'과 '보복'이라는 범주는 서술적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PLO가 국경을 넘나드는 테러공격을 멀리하기 시작하고 노동당 정부가 공격을 강화하면서, 이스라엘은 '보복'에서 "예방"으로 기조를 바꾸었다. 이에 따라 1975년 12월 2일, 30대의 이스라엘 군용기가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근처 마을을 폭격해서 57명을 죽였다(레바논 군 성명서, 팔레스타인 통신사). 이스라엘 관리들은 그 행위의 목적이 "처벌이 아니라 예방이었다."고 강조했다.



1976년 레바논 군이 붕괴되기 전에 이스라엘은 1968 -74년 동안 레바논 영토를 한 주에 1.4번 침범했고, 기록이 끝난 1975년에는 하루 17번을 침범했다. 1977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남부의 난민(대부분 레바논의 시아파 회교도)이 30만 명에 다다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정복한 이스라엘 군이 기독교 민병대에게 통제권을 양도한 뒤 많은 사람들이 서 베이루트 빈민가에 있는 자기 집에서 잔인하게 추방되었다. 1977년 11월, 이스라엘이 시작한 교전으로 양측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났고, 결국 이스라엘이 폭격을 해 "약 70명이 죽었는데 거의 모두가 레바논 인이었다."



베이루트 근해를 통해 이스라엘에 도착한 PLO 게릴라들과 해안도로에서 교전을 벌여 이스라엘인 34명이 사망하자,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8년 3월에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 침공은 폭력적이었고 파괴적이어서 많은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약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2천 명이 죽었다. 1979년에도 이스라엘의 심한 폭격이 계속되었다. 일부 가장 잔혹한 행위가 보도되기는 했지만, 미국에서는 이 폭격을 전반적으로 무시했다.



1982년 초기에 이스라엘은 남 레바논에서 다시 일련의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레바논 영해에서 레바논 어선을 침몰시키고, (사실상 이스라엘군인)하다드 군이 엄청난 사격을 하며 남 레바논에서 "군사 훈련"을 실행하고, 가능한 침입로에 반복적으로 군을 배치하면서 유엔이 "집중적이고, 과도하며, 도발적"이라고 묘사한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또 1981년 8월부터 1982년 5월까지 레바논 영공을 2,125번 침범하고 레바논 영해를 652차례 침공했다. 이런 행동들 가운데 어떤 것도 계획된 침공의 구실이 될 수 있는 PLO의 "도발"을 끌어내지 못했다. 「타임」은 2월 보도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이 가까스로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고 보도했다.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역사적 배경4대 강국들은 시온주의에 속박되어 있었다. 시온주의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좋든 나쁘 든, 오래된 전통과 현재의 필요, 미래의 희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고대의 땅에 지 금도 살고 있는 70만 아랍인들의 편견과 희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팔레스타인들은 나훔 골드만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유대의 정치인 이었다. 그는 모든 민족의 정의와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웠다.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유대인 국가 혹은 광범위한 유대인들의 이주를 압도적으로 반대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양도하려는 유럽의 계획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계획의 실행을 평화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미국 측 문헌에서 "비타협" 혹은 "반유대주의"라고 묘사되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설립하는 일을 "촉진"하는 데 영국이 헌신하도록 한 발포어 선언(1917년)의 작성자 아서 발포어 경은 2년 뒤 전쟁 동안 있었던 비망록을 쓸 때, 폭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담은 시각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홀로코스트 시기에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이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음을 이해 해야만 할 것이며,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 일을 정당화하던 버릇을 확실히 자제해야만 한다. 가령, 메나헴 베긴처럼 홀로코스트를 레바논 폭격의 변 명으로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며 '쇼아'(홀로코스트)라는 신성한 비극을 세 속화하는 일로, 이것들이 결단코 정치적으로 의심스럽고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미국에서 '거부주의' 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존재할 권리를 부인하거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영토 내에서 국가적 자결권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언급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거부주의'라는 용어는 대영제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민족적 고국'을 설립하는 데 전념했던 제1차 대전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국가적 자결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1967년 이래로 유럽, 소련, 그리고 대부분의 비동맹국가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국제적 합의가 형성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242호로 채택된 이 합의는 애초 대략 1967년 이전의 국경을 따라 안전보장, 국경 인정,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정치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해결을 옹호했다. 이 합의는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이 서유럽 사회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중동에 통합되는 미래상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합의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난민 문제라는 맥락 속에서만 언급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국가적 권리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거부주의적'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PLO는 이 결의안을 거부했다. 물론 이런 행동이 전술적으로는 실수일 수도 있지만, 그 동기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서 본다면 1947년에 시온주의 운동과 그 조직체에게 어떤 국가적 권리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지위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유대인의 이익을 난민문제로만 언급하는 유엔 결의안을 세계 시온주의협회가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직후에 아랍 국가들과 PLO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일관되게 유지해왔던 입장에 상응하는 거부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이 거부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70년 2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해결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경제적, 외교적, 관계를 배제하지 않는 지속적인 평화관계를 마련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임논 카펠리우크는 "이 선언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어떤 반응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세르 사후 새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즉시 두 가지 정책을 실행했다. 즉,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정책과, 이집트를 미국의 속국으로 바꾸는 정책을 실행했다. 1971년 2월, 그는 국경 인정, 안전 보장 등의 조건과 함께 1967년 7월 이전의 국경에 대한 완전한 평화 조약을 이스라엘에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곤란을 야기했는데,(저명한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엘온에 따르면 "공포"를 야기했다.)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1967년 이전 국경으로 절대 복귀하지 않는다고 발표하고 이 제안을 즉각 거부했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거부 외에, 사다트의 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유일한 반응은 점령지의 정착촌을 확충한 것이었다. 사다트의 제안이 공식적으로 거부된 바로 그 날, 노동당 정부는 "예루살렘을 두텁게 하는" 과정의 하나로 시의 기존 경계를 훨씬 벗어나는 아랍인 거주지역을 둘러싼 구릉지에 정착촌을 세우는 계획을 승인했다.골드만은 시온주의의 대의에 평생을 바치다가 1982년 8월에 서거했다. 베긴 수상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정부는 어떤 공식적인 애도사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미국의 유대계 신문은,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 정부가 "반대자"들을 다루는 "비열한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루살렘 포스트」는 머릿기사에서 "골드만의 죽음이 무시되었다."고 썼다. PLO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런 애도사를 보냈다.아라파트는 미국의 주도 아래 성취된 정전을 유지하면서 PLO의 많은 파벌들을 잘 통제했 다. 아라파트의 이 성공은 PLO가 "미래에는 좀 더 광범위한 타협에 동의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PLO는 "광포한 살인자 집단"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이 정치적 타결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의 눈에는 실제적인 재앙"이 되었다 "이것 이 바로 이스라엘이 공격을 통해 막으려고 했던 가능성이다."대니 루빈스타인은 『다바르』에 "이스라엘 정부로서는 질서 있는 정치집단 PLO가 강력한 테러집단 PLO보다 두렵다."고 썼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정부가 지난 세월 동안 내내 레바논 전쟁을 계획하고 베이루트까지 진격할 계획을 세웠던" 이유였다. 이스라엘의 안보는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었지만, 아라파트가 성공적으로 정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PLO가 그 동안 만들어온 정치적 힘" 때문에 다른 어떤 안보위협보다 훨씬 위험했다. 따라서 PLO를 협상에서 배제할 수도 없고, 협상이 이스라엘의 거부주의를 약화해 팔레스타인의 자결, 즉 팔레스타인 국가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었다." 서방의 자유주의 여론과 미국 정부가 두 국가 타협을 선호하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PLO가 "살인적인 테러"를 다시 사용하게 해야만 했다.8월 3일, 지난 10년 동안 PLO와 계속 전쟁관계에 있었고 그 지도자(아부니달)는 런던에서 이스라엘 대사 슬로모 아르고보 암살을 시도했다. 이 사실은 영국 경찰과 정부에 의해 PLO 지도자들이 공격자들의 "공격 명단"에 있었다는 더 진전된 정보와 함께 즉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 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PLO의 주장을 거부했으며, 미국 언론도 평소처럼 이스라엘 정부를 따랐다. 이스라엘 대사를 암살하려는 시도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사무실도 없는 아부니달 그룹의)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인과 레바논 인을 목표로 삼아 심하게 폭격했다. 역시 언론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해석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논조는 폭격은 불행한 일이고, 어쩌면 과도한 것 일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복'이나 '앙갚음'이라는 투다.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베이루트 포위공격은 아무 까닭도 없는 잔인함으로 여겨졌다. 베 트남 전쟁 이래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무기고가 열리자, 결과를 직접 보거나 필 름과 뉴스보도를 통해 접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산탄형 폭탄 등 악랄한 무기가 널리 사용되었다.하지만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국민들은 이 입장의 정당성을 받아들인 적이 결코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유대인에 대항해서 반복적으로 폭력적 테러를 사용했고 1936년에서 1939년 사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민족주의적 폭동을 시도했다. 탁월한 현실주의자인 이스라엘의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그 본질을 인식했다. 내부 논의에서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진실을 무시하지 말자!"고 촉구했다. 그 진실이란 "정치적으로 우리는 침략자이고 그들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나라다. 반면에 우리는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를 원하며,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자기 나라를 빼앗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이 폭동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고국을 강탈하려는 것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이다. 테러 뒤에는 비록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이상주의와 자기 희생이 내재된 운동이 있다."



1938년 뮌헨협정 이후 충분한 군사력을 파병할 수 있었던 영국은 이 폭동을 상당히 잔인하게 진압했다. 토착 아랍인들은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보상하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희생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서방에서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생각을 거부했다. 아마 이들은 바바리아인들을 쫓아내고 유대인 국가를 새우는 것이 왜 좀더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없는지, 또는 미국의 독선적인 도덕적 설교를 보면, 왜 매사추세츠나 뉴욕에서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없는지를 궁금해할 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상반되는 요구를 고려할 때 유대인 이주민들과 달리 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이 원했던 것에는 못 미치지만 공평한 해결책인 '영토타협'을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유대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거나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이 토착민들이 이 결론에 반발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당신의 집을 빼앗고, '공평한 타협'으로 당신에게 방 몇 개를 제공한다면, 당신은 그가 비록 집도 없고, 가난하며,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마 그의 자비로움에 감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위임된 팔레스타인(요르단 쪽)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고했다. 베긴의 테러부대와 LEHI(강경파), 현 외무장관 이츠하크 샤미르가 지도하는 테러부대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상당수 시온주의 운동은 승인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미국은 트루먼이 1948년 5월에 세워진 유대인 국가를 승인하기 전까지, 얼마간 신탁통치를 내세우면서 양면정책을 취했다.



5월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건국하자마자 아랍 여러 국가들의 군대는 전쟁에 들어갔다.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대개 팔레스타인에 할당된 영토 안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분할이 더욱 촉진되어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로 제안된 부분의 절반 가량을 이스라엘이 합병하고 나머지는 요르단과 이집트가 점령했다. 이런 배치는 이스라엘이 나머지도 시리아의 골라고원과 시나이와 함께 점령한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1948년 충돌에서 팔레스타인인 약 70만 명이 도망을 가거나 쫓겨났다.



미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요르단의 서안지구 합병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취할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주장이 팔레스타인 국가로 명시된 지역의 절반을 이스라엘이 합병한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 이 주장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측 모두 1947년과 1948년에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그들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비밀협정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나훔 골드만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세계 시온주의 협회>의 의장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이 미국의 편에 서서 냉전 체제에 가담한 것과 거부주의를 비롯해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는 또 홀로코스트를 잔학 행위와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환하려는 전술에도 비판적이었다. 1981년 10월,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될 때 그는 이렇게 썼다.1976년 1월, 미국은 이제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포함해 국제적 합의에 따른 해결을 요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과 점령지에 세워진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를 포함해 "지역의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보전, 정치적 독립, 안전하고 공인된 국경 안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적절한 조치"와 함께, 1967년의 국경에 따라 타협할 것을 요구했다. "대결국가들"(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PLO, 소련)은 이 결의안을 지지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유엔 대사였던 헤르조그는 PLO가 이 평화계획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준비했다."고 쓰고 있다.



아랍국가들과 PLO는 계속해서 두 국가 타협을 촉구했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경악과 거부반응을 보여 왔다. 1977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은 "포괄적인 중동협정의 일부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에 서명하겠다."고 미국에 알렸다. PLO의 통치기구인 팔레스타인 국가회의는 1977년 3월 20일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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