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의 역사
라나 톰슨 지음 | 아침이슬
자궁의 역사
라나 톰슨 지음/백영미 옮김
도서출판 아침이슬/2001년 7월/9,000원
1장 고대의 주제들
여자들에 대한 엉뚱한 믿음의 역사를 서술하려면 짧게라도 그러한 믿음이 생겨나게 된 연유에 대해 먼저 고찰해 보아야 한다. 역사상 남녀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사회적 규범들은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 많은 사회에서 남녀관계는 사회구조를 흉내내고 있고, 사회구조는 다시 인간과 비인간 제신들의 초자연적인 위계질서를 모방하고 있다. 성서는 서구 문화에서 그러한 사회질서의 모델이 된다. 성서에서는 위계질서에 따라 맨 먼저 아담을 만들고 나중에 이브를 만든 남자 창조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브의 잘못으로 기독교 시대에 여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불완전하고 열등하고 결함이 있는 것으로 규정한 종교의 가르침 때문에 지성이 부족하고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논리적 사고 능력이 결핍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대에는 여자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질환의 원인이 자궁에 있다고 생각했다. ‘돌아다니는 자궁‘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의 카훈 파피루스와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라는 의서에 나와있으며, 이 두 의서는 그 이전시대의 의서를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자궁이 몸 속을 돌아다녀 부인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던 당시, ‘히스테리‘는 여자들의 다양한 질환을 설명하는 용어가 되었다.
히스테리, 여자들의 이 ‘고질병‘의 기원은 기원전 2천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카훈 파피루스에는 자궁의 이동이 여자들에게 다양한 질환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고대의 이집트 치료사들은 환자의 골반 위쪽과 아래쪽에서 동시에 연기를 피우고 머리 쪽에는 일부러 고약한 연기를 피웠다. 그리고 상쾌하고 향기로운 냄새로 자궁을 아래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환자의 가랑이 밑에 향기로운 연기를 피웠다. 또, 남성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따라 유향 위에 남자의 배설물을 말려서 올려놓는 치료법도 행해졌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궁을 가리켜 짐승 안의 짐승이라고 했고, 자궁이 젊은 여자들의 건강 문제를 일으키는 주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자궁이 성생활에서 오랫동안 방치된다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골반강을 탈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궁이 다른 장기에 손상을 입힐 거라는 것이었다. 2세기경의 의사 아레타이오스는 젊은 여자들의 자궁이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생각이 같았으며 자궁을 다스리려면 가능한 빨리 섹스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편 그리스의 해부학자이자 의사, 저술가인 갈렌은 “여자의 생식기는 남자의 것보다 불완전하므로 남자가 여자보다 완전한 존재“라고 썼다. 갈렌은 자궁을 열이 부족해 음낭이 뒤집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열이 부족해 음낭이 되지 못하고 체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곧 여자가 남자처럼 정액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며, 자궁성 질식이 “규칙적으로 월경과 임신, 활발한 성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여자들“에게서 발병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월경혈은 체내에 고이고, 이는 “자궁에 영향을 미쳐 질식이나 경련을 일으킨다.“고 했다.
2장 이브의 유산
불행히도 초기 유대-기독교 사상가들은 돌아다니는 자궁으로 인한 여자들의 자궁병 치료를 반대했다. 처녀성, 순결, 금욕의 원칙을 부정하는 치료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처녀성을 강조했지만 일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한 성행위를 허용했다. 즉 성행위는 결혼한 부부가 올바른 체위(남성상위)로, 신의 뜻에 따라 자녀를 생산할 목적으로 해야 했다. 번 벌로우는 기독교 초기의 남성 지배의 결과 “여성혐오증이 기독교 안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썼다. 교회에서 여자들은 예수의 12제자 중 여자가 없다는 이유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 당했을 뿐만 아니라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 동안 자궁을 치료한 이들은 산파였는데 이들은 임신, 출산, 폐경 등 다른 건강 문제도 도왔고 임신중절이나 피임에 관해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교회는 지역사회의 산파들을 주시했고, 교회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다. 당시 여자들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허용하는 종교운동은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고,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산파들은 마녀로 몰리게 되며 결국 16세기와 17세기에 수많은 여자들을 화형대에 올려놓았다. 당시에 학문의 중심지는 교회였으며 오직 교회만이 책을 펴낼 시간과 자원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의학과 과학지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교리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였다.
과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예였던 초기 의학은 기독교와 대립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신이 병을 고친다고 보았고, 그리스 의학은 이단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과거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함으로써 현실적 필요와 타협해야 했으므로 의사가 된 기독교도들은 이교도 의학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환자를 진료했다. 초기 기독교의 여성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금욕주의와 여자 혐오증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 시대의 여자들에게는 이브의 원죄, 자연을 지배하려 한 죄, 교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려 한 이단의 죄가 적용되었다.
3장 중세의 자궁
그리스의 의학지식은 10~12세기에 이슬람교도, 유대인,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인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의학적 유산이 재발견됨에 따라 이를 계기로 중세 대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로린다 딕슨은 “살레르노 의학교에서는 히포크라테스의 자취와 기독교 교리가 융합된 갈렌식 아랍 이론에 기초한 부인과학을 채택해 가르쳤다.“고 썼다. 처녀성에 관한 소라누스의 조언은 관습적 규범과 일치했지만 그는 여자들의 출산모습을 지켜보면서 출산시 마취제와 항생제를 쓰지 않아 질병과 사망률이 놓아졌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자궁 속의 태아를 묘사한 중세의 도판 가운데 일부는 분만 전 ‘태아가 회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자궁에 대한 중세의 인식은 해부학적 측면보다는 신학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제왕절개술에 대한 당시의 문서를 보면 그 성공여부는 다소 의심스러우며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여자를 상대로 시행되었을 것이다.
몬디노는 1316년 『몬디노 대 해부학』을 펴냈다. 직접 관찰한 바를 토대로 저술했다는 이 책에서 그는 자궁을 일곱 개의 방으로 나누어 묘사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또한, 그는 갈렌이 범한 오류들을 답습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쓴 책은 해부학 분야의 교과서가 되어 40판까지 발행되었다. 13세기 이전 유럽에서 의학 지식은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주로 기계적 암기를 통해 습득되었다. 실제로 파리의과대학의 학장과 교수들은 “의학은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기술이 아니라 교과서를 통해 전수되는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의료 행위를 했던 여자 자코바 펠리시에는 환자들을 찾아다녔고 맥박을 측정했으며 소변, 신체, 팔다리를 관찰했고 약을 처방했으므로 박해를 받았다.
살레르노 의학교에서 강의한 전설적인 인물 트로툴라(트로타)는 부인병에 관한 교과서와 산부인과 교과서인 『대트로툴라』와 『소트로툴라』를 썼다. 『대트로툴라』는 페서리(피임기구)의 사용을 권장하기까지 했으며 『소트로툴라』는 자궁성 발작의 원인을 부패한 씨의 과잉으로 진단했다. 그밖에 중세의 치료사들로는 당시의 체액이론을 신봉하면서 “조증, 광증, 강박증, 정신지체“와 같은 증상에 따라 정신 상태를 구별하며 약초치료를 권장했던 힐데가르트와 자유롭게 소변검사를 하며 환자를 돌보았던 수녀 발부르가가 있다. 당시의 소변검사는 초자연적인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여성들의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권위였고, 최종적 권위는 (남자)성직자에게 있었다. 중요한 의학 교과서들은 대대로 물려가며 사용되었고, 그때마다 매번 다시 필사되었다. 간혹 앞 문장과 뒤의 문장에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교과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4장 르네상스 시대의 자궁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자에게도 고환이 있어서 여자의 씨 혹은 정액이 이러한 상사기관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념은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남녀 모두에게 정액이 있다면, 여자도 힘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성교를 하지 않고도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란시스코 드 발리스는 이러한 생각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여자의 정액은 남자의 것보다 차갑기 때문에 홀로 임신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아브라함 자쿠토는 “배출되지 못한 월경혈과 몸 속에 남아 있는 정액은 자궁 속에서 부패해 제일 강한 독에 맞먹을 정도의 독성을 갖게 된다.“고 썼다. 피터 포리스트의 『부인병에 관하여』에서의 한 일화는 “나는 산파를 불러서 환자의 생식기에 윤활제를 바르고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게 했다. 그러자 환자는 의식을 회복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치료법은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저술가들은 자위행위에 가까운 이 요법이 죄악이나 범죄는 아니라며 옹호했다. 중요한 점은 환자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인간의 신체가 교과서에 그려진 것과 일치하는지 알아내려 애썼고, 실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교과서에 묘사된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 자궁은 단 하나의 방으로 된 단일한 용기이고 태아는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그 속에서 자란다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모든 해부학적 지식이 르네상스 시대에 바로 잡혀진 것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혈관이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자궁을 그렸고, 수세기 동안 전해내려 온 갈렌 해부학을 따랐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그린 자궁은 외음부와 질을 합쳐놓아 페니스처럼 보일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다빈치와 베살리우스는 둘 다 직접 자궁을 관찰했지만,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가 미친 영향은 매우 커서 그의 이론이 나오자 신체에 대한 낡은 이론적 틀은 그 힘을 상실했다.
르네상스 후기의 해부도는 그 전까지의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여자들의 등뒤로는 멋진 꽃이나 정원이 그려져 있고, 여자의 몸은 ‘신의 걸작‘으로 표현되었다. 1513년 유카리우스 뢰슬린이 쓴 『임신한 여자와 산파 로젠가르텐』은 산과학의 중요한 교과서였는데 서문에서 뢰슬린은 산파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1554년 쟈콥 뤼페의 산파 교과서인 『위안의 서』가 출간되었는데 그는 분만을 관리할 때도 의학 지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육받은 남자 의사들은 산파 지원자들을 심사하고 산파들의 조산 행위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남자들이 점차 분만실을 지배하면서 산파들은 마술이나 주술을 쓴다고 비난받기 시작했으며, 차츰 남자 산파들이 많아졌는데 임신부들은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분만실에 들어온 남자 산파들은 목에 두르고 있던 천을 머리에 써야 했다.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 자궁은 하나의 방에 두 개의 관이 달려있는, 전체적으로 페니스 비슷하게 생긴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여자는 더 이상 자연의 실수나 결함 투성이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몸 속에 있는 야릇한 기관의 포로“였다. 그리고 자궁이 여자들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은 여전히 강조되었다.
5장 바로크 시대의 자궁
이성의 시대로 불린 17세기에도 마녀사냥을 비롯해, 미신과 폭력이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섹시하다는 것은 마녀이거나 악마와 교제하고 있다는 위험한 표식이었기 때문에 ‘마녀 젖꼭지(클리토리스)‘는 용의자가 악마와 교접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당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것을 악마가 마녀의 피를 빤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이한 표식“으로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음부와 항문 사이에 매달려 있는, 젖꼭지처럼 생긴 초자연적인 살점“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여자들의 지위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더 이상 태아를 키우는 용기로만 남아 있기를 거부했다. 중요한 점은 이 시대에 들어와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을 흉내낸 조악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레에게서는 이러한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여자의 몸이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며 자궁 안에 뱀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생물체를 그려 넣은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월경은 일종의 기능장애였고, 여자의 몸에 결함이 있다는 증거였다. 의사 에드워드 조든은 자궁이 여성의 건강 문제를 포함해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기 때문에, 무서운 질병의 증상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것이라고 했다.
17세기에 그려진 자궁과 여자의 신체 해부도는 내부 장기를 보다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 당시에는 육체를 전시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허용되었고, 화려한 해부 극장이 생기기도 했다. 남자 해부학자들은 죽은 여자의 몸을 전시했고, 수많은 여자시체를 해부한 결과 토머스 윌리스는 여자들의 몸 속에 있는 자궁이 모두 횡격막 아래, 골반강 안쪽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이 자궁과 무관한 질병을 자궁 탓으로 돌리는 일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자궁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는데도 히스테리의 원인이 자궁과 무관하다고 설명한 의사들은 소수였다. 그 결과, 17세기에는 처녀음란증, 남자밝힘, 자궁광증, 자궁질식증, 우울증, 상사병 등의 각종 히스테리성 질환이 넘쳐났다.
17세기에도 대개 산파들이 여자들을 치료했는데 태위 이상이나 골반이 협소해 난산을 할 경우 외과의사를 부르기도 했다. 여자산파와 남자의사의 관계가 껄끄러운 경우도 있었으며 의사들은 여자산파에게 경쟁심과 혐오를 느꼈다. 제왕절개술 외에 17세기 의사들이 터득한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은 겸자 분만이었다. 이 기술은 18세기이후 자궁 통제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18세기 초기, 산과용 겸자는 남자 의사들이 자궁을 지배하도록 도왔다. 흥미로운 점은 자궁이 골반 속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히스테리가 뇌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히스테리의 원인이 자궁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6장 계몽주의 시대의 자궁
18세기 들어 현미경이 발명되고 발생학과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체액이론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이성은 여자들이 신체, 정신적으로 열등하다는 관념을 고착시키고, 구태의연한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볼테르는 월경이 여자를 약하게 만들고, 월경혈이 배출되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는 이유로 “여자는 생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다.“고 했다. 또, 성욕은 남자의 본질이 아니라 여자의 본질로 여겨졌다.
이 같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시대에 인체 전시장은 문을 활짝 열었고 교육과 연구를 위해 인체의 전부 혹은 일부를 전시했다. 이제 동물 해부학은 인체의 구조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과정이나 실험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구문화가 이발사 외과의사의 의술에서 벗어났고 이 시기에 해부학 연구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남자의 씨(정자)와 여자의 씨(난자)에 대한 의문은 이 당시에 치열한 논쟁 주제였다. 정자 속에 극히 미세한 새로운 개체들이 들어 있다는 전성설과 “암수의 교합에서 생기는 모든 동물이 단순한 형성액(월경혈)이 아니라 난자에서 발생한다.“는 후성설이 대립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라자로 스팔란차니는 자연발생설, 즉 생명이 무생명에서 생겨난다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마침내 입증했다. 새로운 과학으로 무장한 스팔란차니가 암캐를 인위적으로 임신시키는 과정에서 개의 정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에 뒤이어 인구가 증가하자 인구증가의 위험성을 느낀 요한 페터 프랑크는 사회 의학을 창시했고, 국가에서 경찰력과 의사의 힘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 여자들은 이전 시대처럼 애 낳는 기계로, 생식 능력에 그 가치가 있는 존재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크의 철학은 계몽주의의 이상이 사회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러한 진보가 여자들과는 얼마나 무관한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성의 가치를 외쳤던 시대에도, 여자들은 이성의 주인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크의 의료 경찰, 공중보건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곧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의원성 질환),경찰력 자체에서 의료 전문가의 힘은 극히 미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