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리더십 연구
이태섭 지음 | 들녘
제1장 서론: 경제위기와 수령체계의 확립
북한의 수령 체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많은 사람들의 눈에 북한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아마 '수령'의 존재일 것이다. 북한 사회는 수령에서 출발하여 수령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대적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는 수령을 유일 지도자로 하여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수령체계에 대한 이해는 북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자 창이다. 수령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북한 사회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회를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잣대, 서방의 잣대로 북한을 보며, 북한의 지 이념이자 세계관인 '주체사상'과 아울러 수령체계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크다. 자신의 문화적 잣대로 북한을 보며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눈에 북한은 이상한 나라, 비밀에 싸여진 나라, 비정상적인 나라로 비쳐지는 것이다. 북한의 수령체계는 정치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주목한다.
북한의 수령체계는 북한식 사회주의 발전과정의 역사적 귀결로서 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중반에 있은 두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1967년 5월에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었다. 수령체계는 1950-1960년대 북한식의 독특한 사회주의 전략의 역사적 귀결로서 수령을 유일 중심으로 하여 당과 대중의 집단주의적 통일단결을 추구하는 체계로 파악된다.
근대화, 발전론적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는 리저드 로웬탈(Richard Lownthal)은 저발전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은 유토피아 대(對) 발전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정책 목표 사이의 모순구조 속에서 결국 발전의 길을 선택하게 됨에 따라 탈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귀결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소련, 동유럽, 중국, 북한 등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했던 문제였다.
1930년대 이후의 소련과 등소평 이후의 중국은 경제발전 우선 노선을 추구하였다. 바로 실용주의 노선이었다. 이에 비해 모택동은 물질적 유인과 같은 실용주의를 배격하고 급진적인 유토피아 노선을 추구하였으며, 그 추동력은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계급투쟁이었다. 대체적으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전개과정은 혁명 초기에는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우위에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실용주의적 목표가 상호경합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실용주의적 목표가 우위에 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무엇을 선택했는가? 김일성의 주체노선은 공산주의적 인간(의식) 개조를 우위에 두고 여기에 경제발전을 밀접히 결합시켜 양자를 동시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으며. 또 경제발전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적 인간(의식) 개조를 우위에 두고 여기에 물질적 유인을 밀접히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소련 및 중국과 달리 김일성 주체노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경제발전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기본 추동력을 물질적 유인이나 계급투쟁이 아니라 '사상혁명'을 기축으로 한 당과 대중의 통일단결, 일심단결에서 찾았던 것이다. '단결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북한의 일관된 사회주의 발전전략이었다. 북한이 추구하는 통일단결이란 개인주의와 조직 이기주의에 바탕한 각 개인과 개별 단의 개별적 이익행동과 이익갈등을 배제하고, 사회적 공동이익을 중심으로 하여 각 개인과 개별집단간의 상호동지적 협조와 단결에 바탕한 행동의 통일성 즉 공동행동, 집단행동을 의미한다. 집단주의적 통일단결의 추구였던 것이다. 북한의 수령체계는 이와 같은 북한식의 독특한 집단주의적 발전전략의 제도화였으며, 김일성 주체노선의 제도화였다.
제2장 1950년대 경제위기: 사회·정치 갈등과 조직 이기주의한국전쟁 이후 북한 경제의 최대 과제는 전쟁으로 파괴된 인민경제를 복구하고 피폐된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1953년 8월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내 정책갈등이 전개되었으며, 이것은 1956년 8월 전원회의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당내 정책갈등의 핵심쟁점은 투자의 우선 순위 등 전후 경제발전 전략을 둘러싼 것이었으며, 김일성 계열은 중공업 우선 노선과 급속한 농업 협동화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에 비해 소련파와 연안파는 전쟁으로 피폐한 인민생활의 향상에 주안점을 두고 경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주장하며 김일성의 급속한 농업협동화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당내 정책갈등 속에서 국가정책은 대체로 김일성의 노선과 정책이 관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곧 축적위기(중공업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을 체계적이고 꾸준하게 양산해 내지 못함)와 새로운 사회·정치 갈등을 잉태하는 과정이었다.
우선 북한 내부의 자본축적에서 경공업의 역할이 연차적으로 증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축적자금이 부족한 상태에서 국가적 투자는 중공업에 집중되고 경공업에 대한 투자는 최소화했다. 또한 공업화를 위한 내부 축적의 가장 중요한 원천의 하나가 농업이었는데, 김일성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해 농촌에서 일정한 기간, 일정한 자금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답은 농산물에 불리하고, 공산품에 유리한 농산물과 공산물의 부등가 교환인 '협상 가격차'였다.
또한 1950년대 초·중반 북한의 공업화를 위한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협상 가격차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농업 생산력 문제였다. 축적의 원천 증대, 즉 농업 생산력 증대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업화를 위한 농업협동화가 추진되었고, 이것은 농촌 계급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동반한 농업협동화 운동은 당시 59.4%를 차지하고 있던 중농들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결국 1956년 당시 농업협동화를 통해 과거의 빈농이던 약 25만 호의 농민들이 중농 수준으로 생활이 향상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북한은 빈농을 주요지지 세력으로 하여 중농의 반발을 무마하고 부농의 저항을 억압하며 농업협동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아 김일성의 이러한 일련의 노선은 군부와 빈농에게 유리하고, 중농과 부농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때문에 군부와 빈농은 김일성의 노선을 지지하였을 것이며, 부농과 중농은 소련파와 연안파의 노선을 지지하였을 것이다. 또한 행정관료, 관리자, 기술자 등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일정한 태도 차이가 있었지만 소비보다 축적을 우선시하고,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하는 김일성의 노선은 도시 근로자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갈등과 당내 정책 갈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즉 생산자들의 조직 이기주의 보수 소극 경영과 함께 행정 관료조직의 소극성과 보수성, 김일성의 속도와 행정 관료조직의 반발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주체노선은 대중운동(천리마 운동)을 통해 이러한 1950년대 중반의 축적위기와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1950년대 후반에 확립되었다. 당시 사상혁명을 통해 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집단주의적으로 변형하는 핵심수단은 공산주의 사상교양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걸쳐 북한 내 모든 단위, 모든 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공산주의 사상교양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 강화는 이데올로기의 담지자로 간주되는 당 조직의 지도적 역할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당-정 관계가 전면적으로 재편성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경제관리 시스템은 스탈린식 모델에 따라 유일관리제에 기초한 국가 행정 관료조직의 행정·경제 기술적 지도를 우위에 두고 여기에 당적 지도체계를 보완적으로 결합시킨 구조였다. 국가 행정 관료조직을 통한 경제발전의 추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제3장 행정 관료적 지도체계의 한계와 당적 지도체계의 확립국가 행정 관료조직의 한계에 직면하여 1957년 이후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당 조직은 사회적, 국가적 이익의 관점에서 각 개인과 개별집단의 개별적 이익행동과 이익갈등을 조정·통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생산을 직접적으로 지도·통제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까지 부여받았다. 정치사업 선행과 당위원회 제도에 바탕한 당적 지도체계를 우위에 두고 여기에 국가 행정 관료조직의 행정, 경제 기술적 지도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특히 1961년 12월에 도입된 대안의 사업체계는 집단주의 원리에 기초하여 경제관리와 생산에 대한 전면적인 당적 지도체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직 이기주의와 소극 보수 경영과 같은 행정관료적 지도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서, 당 조직을 통한 경제발전의 추구였다. 당시 당 정책과 당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국가적 이익을 침해하며 각 개인과 개별집단의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조직 이기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서 당과 대중의 집단주의적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절대화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위기와 모순의 해소과정은 다른 새로운 위기와 모순의 잉태과정이기도 하다. 1950년대의 연장성상에서 개인주의와 조직 이기주의에 바탕한 각 개인과 개별집단의 개별적 이익행동과 이익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갈등에 따라 외적 자원 제약현상이 가중되면서 1960년대 중반 북한 경제는 다시 위기에 직면하였다. 계획경제의 한계였으며, 공산주의 사상교양의 한계, 이데올로기의 한계였다. 여기서 북한은 소련의 실용주의적 개혁정책과는 달리 국가 유일 계획체계의 확립을 통해 중앙 계획경제를 더욱 완벽하게 하면서도 모든 생산활동에 대한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계획의 유일성이란 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생산자들의 모든 경제활동을 완전히 계획화, 조직화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생명 유기체와 같이 일치되게 움직이는 행동의 완전한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의식변형의 한계가 개인의 행위에 대한 국가적 통제 강화를 가져 왔던 것이다.
특히 계획의 유일성에 기초한 행동의 통일성이 강화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당과 대중의 통일단결은 '사회발전을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마침내 절대화되고, '통일단결을 전면적으로 심화시키고 완성'하는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목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행동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개인주의, 조직 이기주의, 자유주의, 무규율성, 무책임성이 배격되고, 행동의 통일성을 위해 높은 의식성(애국적 헌신성과 책임성)과 조직성, 규율성이 추구되었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공산주의 사상교양, 조직생활, 국가적 통제, 당적 지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즉 권력, 조직, 이데올로기, 리더십의 강화였다.
이것은 1960년대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며 당과 국가의 지도적 역할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켜 나간 소련과 다른 것이었으며, 또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며 대중운동을 통해 당과 국가 관료조직을 타파하고자 했던 중국의 모택동과도 다른 것이었다. 북한은 밑으로부터 대중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는 군중 노선과 대중운동에 기초하면서도 대중운동 그 자체보다 당과 국가의 위로부터의 지도를 보다 강조하였던 것이다.
제4장 1960년대 경제위기: 성장전략의 한계와 외적 자원 제약북한 경제의 내적 한계는 1959년 하반기를 지나 1960년대로 들면서 다시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외연적 성장방식의 한계에 따른 경제 효율성의 저하였다. 현상 형태로 볼 때, 1960년대 북한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원부족 현상의 심화였으며, 그에 따른 설비 이용률의 저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북한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 생산과 투자증대와 아울러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기술혁신과 생산조직 혁신을 추구하였다. 일종의 내포적 성장의 추구였다. 먼저 생산조직 혁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1959년 하반기를 지나면서 본격화되었다. 1959년 이후의 상황변화에 따라 대중운동과 생산조직(지도) 사업에 대한 북한의 인식도 변화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에 있어서 증산과 절약의 주되는 예비는 매개 기업소들에서 기계와 설비, 원료와 자 재, 노력과 자금을 더욱 합리적으로 이용하는데 있으며, 모든 것은 전적으로 지도 일군들 의 조직지도 사업 여하에 달려 있다."
이에 따라 지도 일군들의 지도수준을 제고하는 문제가 가장 날카로운 초미의 문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지나친 속도경쟁에 따른 대중운동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1959년 이후 강조점이 대중운동에서 다시 조직지도 사업, 생산조직 사업으로 이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6년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행정경제 사업에 대한 당적 통제가 강화되고, 생산조직 사업에 대한 당 조직의 역할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에 대한 당적 지도체계의 완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부 지도 일군들은 대안의 사업체계를 도입하는데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보여주었다.생산조직 혁신과 아울러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은 기술혁신이었다. 기술혁명은 1960년대 북한 경제의 중심과업이었다. 즉 1960년 8월 당중앙위원회 확대 전원회의는 기술혁명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대한 방침을 제시하였으며, 1960년 12월 당중앙위원회 확대 전원회의는 '전면적 기술혁신,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제1차 7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기술자, 전문가 수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북한의 기술혁신의 성과는 매우 미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창의 고안 및 합리화안들이 제안되었지만 아무런 심의도, 대책도 없이 사장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에 대한 국가적 요구와 달리 개별 생산자들은 여전히 기술혁신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계획경제를 전제로 할 경우 효율성보다 효과성을 추구하는 개별 생산자들의 소극 보수 경영은 조직 이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북한은 생산자들의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기술혁신의 가장 큰 장애'로 규정하고 이것들을 근절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갈등, 특히 북한과 소련의 갈등은 북한의 자원부족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북한과 소련의 갈등은 반제투쟁의 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되었으며, 특히 그것은 소련이 평화공존론에 입각하여 북한에서도 반제투쟁을 그만두도록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소련의 평화공존론, 코메콘 경제통합 문제, 쿠바 사태, 중인 국경 분쟁 등 1962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소련에 대한 북한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쿠바 사태는 "나라 방위를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서 북한 마침내 독자노선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1962년 10월부터 가시화되었다.
소련은 반제투쟁의 문제와 코메콘 경제통합의 문제 등과 관련하여 북한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 수단으로 경제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소련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당시 소련의 수정주의자들이 북한에 경제적 압력을 가했으나 "강철 몇 톤 더 얻기 위해 혁명적 지조를 굽히고 수정주의자들의 투항정책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고 술회했다. 경제발전 때문에 혁명적 지조와 민족적 자주성을 굽히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후진 약소국가로서 북한은 민족적 자주성을 위해 경제발전을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하였다.
북한의 자주노선에 따른 경제희생은 1963년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1963년부터 북한의 경제상황은 급변하였다. 먼저 투자의 우선 순위가 급변하였다. 공업 부문 투자는 중공업에 86.3%를 투자하고 경공업에 13.7%를 투자하도록 계획되었다. 경제 자립성과 국방력 강화에 따른 조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집중은 경공업에 대한 투자감소와 소비재 생산의 감소를 가져오고 결국은 자본축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