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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의 분노

김상수 지음 | 생각의나무
착한 사람들의 분노

김상수 지음

생각의 나무/2000년 2월/383쪽/13,000원



1장 상황과 인식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은 수많은 문제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고 눈빛은 탁하다. ‘세상의 종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될 정도로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찬 오늘날, 여기 이 땅 한국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굴절된 민족의 암울함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옥죄고 있으며, IMF를 겪으면서 심각한 경제난 속에 국민들은 고통받고 있다. 정부의 개혁은 그 성과가 우리 사회에 반영되기에는 아직까지 그 방향과 강도가 적당하지 않은 듯하며,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회의가 밀려오곤 한다. 정당제도는 이름만 있을 뿐 패거리 정치가 그 속성인 후진국형 정치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여 온 ‘발전’이나 ‘성장’을 향한 모델이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를 문제 덩어리로 만든 전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경제문제를 타개하는 문제의 중요성이 시급한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적인 위기 뒤에 있는 정치적인 위기가 더 문제이며, 정치적인 위기 속에 있는 우리 사회를 근본에서 떠받치고 있는 문화적인 위기가 더 심각하다.”

우리는 위기의 본질이 경제의 위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위기야말로 실존의 위기이며 경제 위기는 이것에서 파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의 위기는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빚어지는 무수한 갈등과 마찰, 부패의 구조적인 일상화와 그런 일상에서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고통과 인간 내면의 황폐화이다. 이런 심각한 위기 앞에서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대응하는 정부의 무책임함은 위기의 심각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금 이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서 흘린 피를 욕되게 할 뿐이다.

누구에게 위기를 말하는가

우리는 소위 고관대작의 부인네들이 벌인 옷 로비 사건의 촌극을 기억하고 있다. 구조조정이다, 정리해고다 해서 IMF의 무서운 폭풍이 한창 노동자들의 목을 옥죄고 있을 때 그들은 강남의 고급 옷가게를 들락거리고, 관용차를 타고 디너쇼를 즐겼다. 무엇을 위한 구조조정이고, 누구를 위한 고통 분담이었는가? 누구를 위한 민주화였는가? 김영삼 정권이 개혁에 실패했던 것을 반복하듯이 김대중 정권 또한 개혁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세세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직도 낡고 완고하며 원칙도 없는 근대적인 정치를 하면서, 정치를 권력의 기술이나 홍보의 기술쯤으로 알고 있는 이 정부 사람들을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이제 국민들은 의심하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을 기만하고 조롱하는 정치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정치란 국민들이 마음으로부터 깊이 동의하여 국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허탈과 비탄에 빠진 국민들을 고층 빌딩에 걸린 ‘다시 뛰자!’라는 깃발 하나로 다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낡고 멍청한 의식의 발로이며, 과거 군사정권들이 보여준 이벤트적 허구와 다를 바 없다. 이제 그만 뛰어야 한다. 이젠 잘 걸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차분히 주위를 살피면서, 말의 사실적 실천에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착한 사람들의 분노

사회 전체가 갈수록 돈 얘기뿐이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관심은 돈 버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경제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니 이즈음은 더하다. 경제가 죽었으니 경제를 살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떻게 경제를 살려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에서 살게 되며,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이해해야만 우리의 토대가 튼실하게 될 수 있는지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판단과 가치의 기준이 된지 이미 오래다. 산업, 교육, 문화, 심지어 사람까지도 ‘경제성’이 없다면 함부로 취급받는다. 사회 전체적인 생각이나 정부의 정책들이 획일적 경제주의로 몰아가는 성장 제일주의의 경제적 산업 체제인 한, 그 실상은 최저 소득의 경제적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성장 제일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반인간의 입장으로 몰려가게 될 것이며, 삶은 경제화 또는 전략화되어 진정한 인간적 삶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전체 국민을 단순한 임금 노동자나 물건 생산자, 물건 소비자로만 취급하는 지금의 경제 정책 방향을 한시바삐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국민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자존과 존엄성을 되찾고, 인간을 함부로 다루려는 잘못된 모든 정치 의도와 부패한 권력체계에 대해서 마땅히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속도, 쾌락, 중독

오래 전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던 수많은 미덕들은 사라지거나 뭉개져 버렸다. 남은 것은 혼돈과 혼란, 무기력과 분노뿐이다. 어찌 보면 한국인들은 스스로 한국인임을 체계적으로 버리고, 부정하고, 깎아 내리고, 스스로의 삶을 더럽혀 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우리의 청소년들을 유흥에 빠져 흐느적거리게 했으며, 욕망에 눈을 멀게 하여 ‘소비’에 중독되게 하였는가? 왜 우리의 꿈은 돈을 많이 자주 쓰는 것이 되었으며, 욕망은 곧 돈으로 환산되어 정확하게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일단 우리는 세계화 중독에 빠져 있다. 세계화는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만 바라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세계화는 규모의 경제와 기술에 편입되는 것이며, 공룡 같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 우리들 삶을 지속적으로 관여하겠다는 표현에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통령부터 손수 앞장서서 시장 경제니 세계화니 세계성이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스스로 다국적 기업의 포로가 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셈이다. 게다가 IMF를 겪으면서 한국은 총체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철저하게 외국자본에 매달리고 있던 한국 경제는 세계화로 내몰리면서 빠르게, 연쇄적으로 일제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이제 서구의 잘못된 문명의 발상인 시장 경제의 세계화 중독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깨끗이 인정하고 수정되어야 한다.

“쾌락에 대한 사람들의 열중은 거대한 대단위 놀이 시설을 땅위에 세우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대지(大地)는 생명과 탄생의 근원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이 먹고 놀고 싸고 뭉개는 리조트 단지쯤으로 추락했다.”

선진국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해 온 개발과 소비 일변도의 성장 프로젝트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우리의 산과 바다와 강과 갯벌을 뒤엎어 돈으로 바꾸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관광지 개발 중독, 리조트 단지 개발 중독이야말로 우리 나라가 보이고 있는 중독 증세 가운데에서 후손들이 가장 많은 비용과 노력을 치러야 하는 분야이다.

이제 중독에서 깨어날 때다. ‘속도와 쾌락’과의 단호한 결별이 필요한 때다. 오늘과 내일은 어제처럼 ‘미친’ 것이어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중독에 빠져 있는지 진단하고 맑은 정신으로 새로운 호흡을 가다듬을 때다.

마음의 생태

“인간에게 마음의 집이 있을까. 계절을 넘기고 몸을 눕히는 물리적인 집들 - 아파트나 단독 주택 같은 집이 아니라 - 인간의 마음속에도 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양에서는 세상의 본질을 고민하면서 모든 사물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성급하고 오만한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세상은 인간이 지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좁은 실험실 내에서도 얼마든지 통제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앞만 쳐다보는 경제적 성장 이데올로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으며, 멈추지 않는 지배적 욕망은 결국 생명의 복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 스스로 신(神)의 자리에 등극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여러 종류의 혼란 속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환경의 파괴로 안한 뒤틀림으로 위협받고 있다.

만약 인간의 발전이 환경을 파괴하는 것으로 계속 진행된다면, 환경은 곧 인간 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대상을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을 때까지 분석하는 단편적이고 경직적인 과학 기술을 우리의 목표로 두지 말고, 상대나 대상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생명 가치 인식을 바탕으로 생태적 인식을 목표로 삼자. 마음의 생태가 지향하는 가치는 한마디로 인간과 자연의 하모니이다. “마음의 생태는 우리의 자각을 전제로 하는 한, 눈을 뜨고 있는 나침반이며 우리 편이다.”



2장 2000년 서구의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새로운 천년을 맞는 영국의 얼굴 - 2000년 밀레니엄 돔을 중심으로

영국의 밀레니엄 돔은 2000년 인류를 기념하는 영국의 상징물이다. 영국 국민의 지지를 받아 영국의 긍지를 높이고자 약 6억 파운드의 돈을 들여 영구적 기념 전시관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 밀레니엄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건축물로 세워졌고, 돔의 건축 자체가 영국의 첨단산업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의 창의성을 동반하고 있다.

영국은 밀레니엄 돔을 통해 템스강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중요한 수송로와 관광 명소로 새로운 관심과 흥미를 유발했다. 멀쩡한 녹지를 파괴하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낙후된 지역에 세워져 도시 재개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세워졌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위한 촉매가 되었고, 이 지역에 대한 외부 투자를 유발하여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직접 투자를 유치했다. 또한 공공 시설이 재정리되고 인프라 구축을 통해서 새로운 런던의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다.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공동사회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환경과 자연을 보존하고 이해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또한 미래를 준비하고 공부하여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훈련할 수 있는 장이 세워졌으며 인종과 계층을 떠나 인간 공통을 보게 되는 풍요롭고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게 되었다. 밀레니엄 돔 200이 영국의 야심적인 2000년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거대 돔의 건설이 문화 중심적이며 자국 패권주의적 이라는 혐의를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미래를 찾는 그들의 모습에는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노력이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21세기 생존 발전의 해결 - 독일 하노버 엑스포 2000

하노버는 인구 53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유럽의 교통 중심지이다. 2차 대전의 상흔으로 새롭게 도시 개발을 하다시피 한 하노버는 해마다 크고 작은 예술 /산업 /문화 전시를 개최하는 도시 외부 유입 인구가 상주 인구의 배를 넘는 활기찬 도시이다. 독일은 새 천년의 엑스포를 주최하면서 통일 독일의 새로운 위상을 세계의 중심에서 말하려 한다.

하노버 엑스포 2000은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렸던 환경과 개발을 위한 유엔 회의에서 결의된 새로운 천년을 위한 행동 강령인 아젠다 21을 배경으로 출발하고 있는 만큼 모든 행사의 주제가 생태 문제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하노버 엑스포 2000은 비전 있는 개발, 개발을 최소화하는 대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과 지각, 혁신적인 기술, 혁명적인 사고로 현대 기술 세계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하노버는 ‘인간과 기술, 그리고 자연’을 축으로 미래를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엑스포는 종전에 보여 주던 경제 산업 엑스포에서 문화 예술 지식 산업 엑스포로 전환되었다. 최고 수준의 예술가․과학자 등이 엑스포 스태프로 구축되어 국가간 문화 국력의 비교 실험장이 되고 있었다. 이들을 움직이는 모티브는 예술적 창조성과 21세기 세계 문제 해결을 적극적인 과학적 대안들이다. 하노버 엑스포 2000은 내일의 지구와 인간의 미래를 질문하고 있다.“

2000년 서구의 그들은 세기말을 맞아 어제를 정리하고 이미 내일의 모습을, 미래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은 오늘만 찾고, 오늘을 위해서, 오늘에 쫓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세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들 삶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가 어떤 상호성을 띄고 있으며,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3장 예술과 한국 사회

미술 비평, 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예전에는 미술 비평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따금 그 비슷한 글들을 읽은 적은 있지만, 그것을 가리켜 미술 비평이고 평론이라고 얘기하는 걸 알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무식하고 무지하다니, 이런 무식과 무지가 지식으로 둔갑하여 유포되는 데도 아무 탈이 안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과 글의 목적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평론이라 함은 이치를 따져 대상의 사실이나 사태를 바르게 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하는 지적 행위이고, 모호함과 낯선 것들로부터, 심지어는 거짓으로부터 사실과 진실을 보는 인식의 힘이다. 따라서 대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인식과 통찰이 뒷받침되어 있지 못하다면 주체자의 가치관은 흔들리게 되고, 그 사람의 평론은 거짓과 독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모든 해석의 출발은 작품을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때 보는 사람의 의식, 미술 대상, 미술 표현 언어가 서로 내포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사유의 방법적 핵심은 이성이 되어야 하며, 책임감이 되어야 한다.

발전적이고 비판적인 대안과 협력도 제안하지 못하면서 충동적으로 말하고, 권력으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평론가의 자격이 없다. 예술은 결국 진실을 드러내는 인간의 본원적이고, 양심적인 행위이다. 평론가라는 탈을 쓰고 다수의 뒤에 숨어서 덮어놓고 트집을 잡고, 매도하고, 시비가 되지 않는 것을 시비로 붙이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가장 비겁한 행위이다. 그건 예술을 빙자한 저급한 차원의 정치다. 한국 미술계, 한국 예술계가 지니고 있는 파벌 의식과 정치 놀음, 이것이 우리 문화의 수준이다. 재능과 열정을 가진 예술가들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주는 방법은 이 썩은 병폐를 고치는 것이다.

시대와 미디어, 이미지 전쟁을 읽고 있는가

우리의 근현대사는 물질적 궁핍과, 정치적 억압, 사상적 혼란을 빠져 나오는 고난의 시기였다. 세상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중심이었으며, 생각이나 삶의 의미를 물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로 취급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 문명사의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무수한 소리와 빛깔, 수많은 기호와 이미지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으며, 해체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수요’를 넘어서는 시각 미디어의 광포한 확산과 지속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상업적인 생산의 줄달음질 속에서, ‘아찔한 현실‘에 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와 복잡한 그 ’대상‘은 존재에서 이미 불안한 관계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성과 감성, 그밖에도 수많은 감정들로 구성된 인간이 하나의 물체처럼, 기호처럼 이미지로 인식되고 처리되는 현실은 끔찍한 고통이다. 미디어 중독은 벌써 오래 전부터 하나의 개념으로 상정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감정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컴퓨터에 의해서 조절되기 시작했으며, 인간은 ‘주체’와 ‘객체’, 혹은 ‘나’와 ‘대상’을 구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말에 현혹되어, 앞으로 나아가는지, 뒤로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마구 달려나가는 것만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인양 살아가고 있는 슬픈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풍요’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장과 진보에만 매달린 채 오로지 ‘정보’만 부르짖을 때, 이미 정보는 무목적, 무가치의 운영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자연과 생명, 그 속의 인간의 미묘함을 무시하고 단순한 관념과 이미지의 기호들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면 자연은 파괴되고, 생명 질서는 교란될 것이며, 사회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미술은 무엇이고 미술작가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21세기 ‘새로운 예술’은 매체나 표현의 문제 이전에 예술 작업의 반성적인 태도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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