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왕조의 복수
엘리자베스 미첼 지음 | 미래의창
조지 W는 아버지가 남긴 성공이라는 유산이 곧 자기의 운명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휴스턴에서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현관을 걸어가고 있을 때 어머니가 밖으로 나와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들아, 축하한다. 엔도버에 합격됐어." 엔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매사추세스 주에 있는 남자 사립 고등학교인데, 부시 가문에는 전설적인 명성을 가진 남학교였다.
1961년 가을 조지 W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가장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엔도버의 지나친 학업 경쟁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야구장이 아닌 교실에서의 경쟁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조지 W는 적응하기 위해 자기의 재치에 의지했다. 그래서 그는 '입술'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조지 W는 익살 외에도 여타 텍사스 출신의 엔도버 학생들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다른 모든 학교에서 그렇듯이 이곳 학생들도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운동과 학업성적이 뛰어난 집단이 지도자급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 W가 속한 운동 잘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단연 뛰어났다.
조지 W는 4학년 때 응원단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응원단장이 된 조지 W는 하키 팀 구호를 외쳐대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따라하도록 강요하는 대신 온 경기장에 떠들썩하게 들리도록 메가폰에 대고 만담을 늘어놓곤 했다. 조지 W는 예일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예일대학은 부시 가족의 동문 학교였다.1959년 가족을 데리고 휴스턴으로 이사한 조지 부시는 즉시 그곳의 공화당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의 아성이던 텍사스 주의 공화당원이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대단하지 못했다. 1963년 해리스 카운티의 공화당 지구당 위원장이 된 그는 지구당의 모든 것을 현대화시켰다.
1964년 6월 6일 조지 부시는 상원의원에 진출하기 위해 공화당의 결선투표에서 콕스에게 압승을 거두고 민주당의 야버로우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선거전을 시작했다. 그 해 여름 아직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전이던 조지 W 는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했던 마틴 올데이와 지미 엘리슨 주니어는 매주 일요일 부시의 집 마당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먹으며 선거운동에 대해 숙의하곤 했다.
텍사스 주에는 선거 때마다 '묻지 마' 식으로 무조건 민주당만 찍어대는 마을도 많이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의 각주가 다시 연방정부에 통합된 이후 치러진 연방의원 선거나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된 사람으로서는 1961년 린든 존슨이 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주지사 선거에 나서 당선된 존 타워가 유일한 존재였다. 7월 들어 조지 부시와 바버라, 조지 W, 그리고 지미 엘리슨은 버스를 타고 텍사스 주 순회유세를 다녔다. '부시 밴드 왜건'이라고 이름 붙인 그 버스는 하루에 8군데 이상의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 무렵 조지 W는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조지 W와 그의 친구들은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예일의 여러 가지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조지 W 자신은 데이븐포트 칼리지의 여러 운동부에 들어가 예일대학교 산하 여러 칼리지들 사이에 팅컵을 놓고 우승을 겨루는 시합들에 선수로 참여했다. 또 기숙사의 오락부에 들어가 다른 친구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궁리했다.
11월 3일 조지 W 는 호텔 아메리카의 공화당 개표상황실에서 30여명의 부시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 결과를 계속해서 상황판에 적어 넣고 있었다. 조지 부시는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텍사스 주 선거 사상 공화당 후보로는 최고의 득표율을 올렸을 만큼 대단한 선전을 했다. 그러나 승리는 야버로우에게 돌아갔다.1969년 12월 비행훈련을 마치고 휴스턴으로 돌아온 조지 W는 이듬해인 1970년 초가 되어서야 그의 인생진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방위군의 복무 소집일이 한 달에 몇 일뿐일 정도로 시간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런 시간을 갖고 보니 제 자신이 갈 곳을 잃고 있었습니다." 조지 W는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시기에 그의 아버지도 길을 잃고 헤맸다는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사실 그 시기에 닉슨은 꼭두각시 인형을 가지고 인형극을 하는 사람처럼 조지 부시를 맘대로 갖고 놀았다. 우선 닉슨은 조지 부시가 안전하게 당선될 수 있는 하원의원을 포기하고 상원의원 선거에 나가도록 했고, 그 결과 부시는 낙선했다.
선거 당일 밤 12시경, 조지 부시의 선거본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허탈상태에 빠졌다. 벤슨이 53퍼센트를 득표하여 47퍼센트를 얻은 부시를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이 패배로 부시는 상원의원이 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4년 동안 그가 그토록 즐겁게 일했던 하원의원 자리마저 잃었다. 마흔 여섯의 나이에 그는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부시는 항상 친구들이나 자신의 상급자에 대한 헌신을 자부심의 일환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국가가 불안정한 시기에 조지 부시는 국가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확실한 구심점의 하나인 대통령직 또는 대통령직을 차지한 인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1975년 조지 W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함으로써 사업을 위해 필요한 전문지식은 갖추었으나 아직도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조지 W는 자기 아버지가 오데사와 미들랜드로 와서 한밑천 잡은 그 용기를 늘 높이 사고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의 경제상황은 그곳의 원유사업이 더 큰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었다. 조지 W는 이 미들랜드라는 곳이 자기와 연때가 맞는 곳이며 그런 특이한 인연은 결국 착실하게 조금씩 돈을 모으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지 W는 이 미들랜드라는 도시에 자리를 잡고 불과 2년만에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얻고, 성취하고, 시작하게 되었다. 즉 이곳에서 아내를 얻고, 사업에 성공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결정이 충동적으로 보일 만큼 빨랐는데, 방위군으로 보낸 세월을 만회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조지 W 는 자금을 모아 첫 유정을 시추하기도 전에 벌써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선거는 그에게 정치인에게는 그럴 듯한 경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Ⅷ 지칠 줄 모르는 후보ⅩⅢ 주지사 조지 WⅩⅣ 백악관을 향해서1992년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달아오를 무렵, 조지 W는 텍사스에서 나름대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대저택들이 즐비해 있는 북부 댈러스 지역에 아주 멋진 집을 마련했고, 그의 쌍둥이 딸들은 발랄한 열 한 살 소녀로 자랐다.
워싱턴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신사다운 정치인이라는 조지 부시의 명성이 처음으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1991년 초, 조지 부시의 지지율은 89퍼센트라는 놀라운 정점을 기록했었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 인기가 상승한 것이 그의 참모진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상승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을 추진해 나가는 대신에 그들은 거의 복지부동의 자세를 보였다. 백악관 정치 보좌관이었던 론 카우프만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첨에 넘어가서 앞일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1992년 대선 캠페인은 불행하게도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바람에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10월말에 이르러 조지 W는 아버지의 선거를 돕기 위해 단 3일 만에 텍사스 내의 17개 도시를 방문할 만큼 맹렬하게 뛰었다. 그해 봄에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이란-콘트라 조사단의 특별검사인 로렌스 윌시의 표적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았다. 공화당원들은 이미 그 조사가 공화당을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조지 부시의 변호사는 윌시가 특히 부시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거일 바로 전날인 10월 30일, 부시는 그물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기소사건의 주변인물 혐의로 걸려든 것이었다. 부시가 여론조사 결과 클린턴과의 표 차를 거의 좁힌 마당에 그 뉴스는 시기적으로 그에게 최악이었다.
부시에게 있어 로스 페로나 빌 클린턴, 혹은 특별검사인 로렌스 윌시의 가혹한 비난보다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헌신한 공화당이 그에게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시의 선거전 공보비서였던 토리 클라크는 조지 부시와 몇 십 년을 같이 일하고 그토록 그의 혜택을 많이 입었던 정치인들이 불안에 떨며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난 4년간이 조지 부시에게는 정치인으로서의 마지막 시기였고,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은 그가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것을 힘겹게 바라봐야만 했다.1992년 대권을 향한 아버지의 염원이 산산이 부서진 것을 본 조지 W는 그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큰일을 다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슬픔을 치유하는 부시 가의 처방이었고 패배를 설욕하는 방법이었다. 1994년 조지 W가 앤리처드를 상대로 하여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자 그를 아는 많은 친구들은 그 말을 그냥 웃어 넘겼다.
하지만 조지 W는 텍사스 주의 경영에 대해 심기가 불편함을 느꼈고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경제성장의 좋은 기회들이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선거유세 전략을 보면 그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음을 알게 된다. 먼저, 그는 언제나 정계에 복귀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또한 선거를 바로 앞두고 새 구장의 건설이 거의 마무리됨에 따라 그의 통장에는 출마를 결심할 만큼의 돈이 있었고 또 유권자들에게 내세울 만한, 눈에 보이는 업적도 있었다.
그의 선거유세는 또한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들을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비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바로 앤 리처드와 빌 클린턴이었으며, 특히 클린턴에 대한 텍사스 유권자들의 염증을 조지 W는 리처드에 대한 공격무기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의 출마를 뒷받침해 줄 이런 많은 요소들을 안고서 조지 W는 내심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주지사 선거에서 텍사스 석유사업가인 클레이튼 윌리엄즈를 가볍게 제압한 1990년 이래로 앤 리처드는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에서 주시사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텍사스 주민들은 남자같이 거친 투로 말하고 모터사이크을 타고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또한 조지 W의 아버지를 공공연히 놀려댐으로써 전국적인 언론을 사로잡았다.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앤 리처드는 조지 부시에 대한 맹공격을 퍼부음으로써 유명인이 되었다.
1994년 조지 W의 주지사 선거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1,800만 텍사스 주민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범죄였는데, 매일 밤마다 수시로 일어나는 십대들의 잔인한 살인극이 헤드라인 뉴스로 보도되곤 했다. TV 광고에 나온 조지 W는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텍사스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위험한 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7,700명의 범죄자들이 감옥에서 조기 석방된 사실들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나중에 앤 리처드 편에서는 조지 W가 이용한 범죄 통계수치의 정확성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어쨌든 그의 말은 많은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광고는 또한 한 남자가 주차장에서 한 여자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잡힌 것을 잠시 보여주었다. 그리고 화면은 바로 여자의 시신 위에 한 경찰관이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장면은 사실 연출된 것이었다. 조지 W가 들고 나온 또 다른 중요한 안건은 바로 교육문제였다. 이외에 현안으로 떠오른 복지문제에 대해서도 조지 W는 확고한 자신의 정책을 피력하여 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선거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조지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에 출마한 아들 잽은 승리할 것이고 조지 W는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1월 8일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은퇴한 퇴임 대통령은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54대 46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가 아주 자랑스럽다."주지사의 주된 임무는 경영자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조지 W의 전략은 그에게 분명한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주지사 업무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빌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조지 W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적극 옹호하기 위해 유권자들 내에서 공동의 적을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반게이, 반이민, 그리고 반민주를 소리 높여 부르짖지 않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조지 W가 주지사가 되고 나서 힘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을 위한 관심을 싹틔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이민자들이 주로 살고 있는 시골 지역에 중점을 둔 교육제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 그의 선거정책은 거의 전적으로 '목적을 지닌 번영'의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가장 가난한 미국인에게도 혜택이 갈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모두를 위한 튼튼한 교육제도에 투자할 수 있는 경제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1998년 주지사 재선에 출마한 조지 W가 2000년 대선에 나서는 데는 그렇게 큰 변수가 필요치 않았다. 사실 그는 주지사 자리를 놓고 유세를 했다기보다는 대통령직의 적임자인가를 놓고 청문회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대선 직후 공화당에서 시행한 전국 여론조사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인 엘 고어와 대적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들 중에서 조지 W를 단연 1등으로 올려놓았다. 미국에서는 특히 텍사스와 같이 언론이 포화상태인 곳에서는 사람의 지명도가 모든 것을 좌우했다. 공화당원들은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제 그들은 조지 W에게 2000년 대선에 출마해 줄 것을 간청했다.
1998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조지 W의 상대후보는 토지관리국장이었던 게리 마우로였고, 처음부터 관측자들은 그가 조지 W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텍사스 주의 민주당 지도자 100명이 조지 W에 대한 초당적인 지지를 천명했고, 철저한 민주당원인 부주지사 밥 블록 조차도 자질 있는 주지사를 내쫓기 위한 선거전에는 양심상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지사 선거유세를 하는 동안 그는 전국 언론에서 끊임없이 보도가 나도는 가운데도 2000년 대선 출마설을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입장을 취했다. 선거일인 11월 3일, 부시가는 플로리다에서는 잽이 로튼 차일스를 누르고 또 텍사스에서는 조지 W가 마우로를 이김으로써 겹경사가 났다. 조지 W가 69대 31이라는 압승을 거두었다.1998년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조지 부시의 맏아들은 텍사스 주 역사상 최초로 연달아 재임한 주지사가 되었다. 그 같은 사실은 대선 주자로 그를 낙점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만약 조지 W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는 미국에서 존 퀸시 애담스 이후로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 입성하는 사람이 될 터였다.
조지 W는 2000년 대선에서 엘 고어와 맞붙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존경받는 정치가문의 자제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닮은 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었던 조지 W의 생애를 통틀어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과의 애정행각만큼이나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사건은 없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그에 대한 희비극이 엇갈리는 가운데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