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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왕조의 복수

엘리자베스 미첼 지음 | 미래의창
Ⅰ. 슈퍼맨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태어난 것은 그의 아버지가 겨우 대학 2학년 때였지만,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그때 이미 대단한 업적들을 이루어 놓고 있었다. 조지 W가 세상에 태어나기 2년 전인 1944년, 6척 장신의 미남 청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차려 자세로 서서 무공십자훈장을 받고 있었다. 20세 약관의 청년 조지 부시는 지지시마 열도의 적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바다에 격추된 후 죽음 직전에 구출되어 이 훈장을 받았다. 종전과 더불어 학업에 복귀한 조지 부시는 전후 자기에게 바쳐진 월계관에만 취해서 지내지는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맹활약을 했다. 전국대학체육연맹 월드시리즈에서 예일대학 야구팀 주장을 맡았고, 최우수 학생이었고, 사교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아들 조지 W 는 "아버지의 인생을 보면 너무 훌륭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조지 W 의 일생은 아버지의 후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일생이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성과 이름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구별하는 데 줄넘기를 해야 했다. 조지 1세와 조지 2세, 큰 조지와 작은 조지, 조지와 조지 W 등.

조지 부시는 부유한 가정, 그것도 뉴잉글랜드 부유층 가정에서 자랐다. 집은 이웃집처럼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넓고 안락했다. 저녁 식탁에서는 웃옷과 넥타이가 필수였고 아버지 프레스코트 부시는 다섯 자녀들 모두에게 주일에는 외출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그들은 부시 가의 인맥을 통해 휴양지를 여러 곳에 가지고 있었다.

바버라의 가족은 부시 가족처럼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류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마빈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후손이었고, 그 집안은 1890년 마빈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대단한 부자였다. 그의 어머니 폴린은 오하이오 주 미인으로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바버라 아버지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가족은 하인들을 데리고 있었고, 라이의 좋은 지역에서 침실이 다섯 개 있는 집에서 살았다.

이런 배경으로, 신혼부부인 조지와 버버라는 뉴욕의 교외에 살림을 차리고, 조지는 월스트리트 직장에 출근하고, 바버라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내는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이 신혼부부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전쟁에서 조지는 성취와 감정이 혼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니스 시합에서 이겨야 하고 홈런을 쳐내는 것을 배우면서 자란 조지에게 전투야말로 최후의 승부였다. 전쟁은 또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지역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조지 W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1948년 그의 아버지가 예일대학을 졸업한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 프레스코트에게 졸업선물로 받은 붉은색 차, 투 도어 스투드베이커의 엔진에 시동을 걸고 창 밖을 내다보더니 텍사스 오데사 방향을 코끝으로 가리켰다. 조지 W 의 부모는 오래 전부터 부모의 간섭을 벗어나기를 원했었다. 조지 부시의 아버지 프레스코트의 예일대학 친구인 닐 말론이 조지 부시에게 화이트칼라의 모험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안을 제시했다. 그는 조지 부시에게 택사스의 뉴 프론티어 유전은 어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들 가족은 그야말로 석유산업의 최전초지에 자리잡았다. 오데사는 1881년에 텍사스와 퍼시픽 철도회사의 역으로 건립되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오데사는 기름과 가스 불길 투성이였다. 동부지역 출신인 부시 가족이 이 마을에 온 것은 특이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전후의 한 풍조였다.

조지 W 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 묻혀 성장기를 보냈다. 주말마다 부시가족은 매튜 린 박사가 인도하는 교회에 나갔다. 조지 W 의 아버지는 예배 후에 근처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 중등반 아이들을 가르치러 갔다. 그 후에는 크레이그 집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야외에서 햄버거를 구워 먹고, 어린애들이 떠들썩하게 뛰어 놀고, 개들이 짖어대는 동안 어른들은(모두 20대 중반이었다.) 미들랜드 고등학교 근처의 지저분한 빈터에서 미식축구 놀이를 즐겼다.

1950년 하반기에 조지 부시는 닐 말론 회사의 봉급생활을 그만두고 이웃에 사는 존 오버비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 마을 아이들에게 조지 W 의 아버지는 재미있고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존 오버비와 함께 시작한 회사가 유정의 성공으로 번창하기 시작했을 때 조지 부시는 가끔 조지 W 와 그의 친구 랜디 로덴을 유전으로 데리고 가 시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1952년 조지 W 의 할아버지가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조지 부시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부의 심장부인 워싱턴 DC를 보여주러 갔다. 조지 W 의 할아버지는 위엄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저녁에 아이들은 워싱턴 상원의원 야구시합에 함께 갔다. 그 팀은 후에 텍사스의 알링턴으로 이주하여 텍사스 레인저스 팀이 되었고 조지 W 는 그 팀의 투자자가 되었다.

Ⅱ 리틀리그의 왕자



1950년대 중반, 부시 가족은 센티넬 애버뉴 2703번지에 있는 맞춤형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조지 W 는 서재를 지나 뒷문을 나서서 수영장을 지나고, 두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지나 어린이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공원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공원 전체를 덮고 있는 잔디는 야구경기를 하기에 완벽한 높이로 깎여 있었다.

부시 가족은 조지 W 가 아홉 살에서 열세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는데, 그때 조지 W 는 미들랜드 중앙 리틀리그 소속 야구선수였다. 조지 W 집 서재의 유리창을 통해 아이들이 경기하는 야구장 일부를 볼 수가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테리, 캘리, 딕 맥파랜드, 그리고 오닐 형제들과 어울려 야구놀이를 하며 놀았고, 아이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조지 W 집을 들락날락했다. 리틀 리그 선수 생활중 조지 W 의 위치는 대개 포수였다. 그는 항상 적극적이었다. 포수는 모든 시합에 간여했다. 조지 W 는 아주 재능 있는 포수는 아니었지만 겁이 없는 포수였다.

조지와 존 오버비는 회사를 친구인 휴와 빌 리드케의 회사와 합병하여 자파타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는 450만 달러짜리 자회사 자파타 오프쇼어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부시가족에게 거대한 부의 시작을 의미했다. 부시 가족에게 거대한 부란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지 부시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 수 있으며 엔도버 고교와 예일대학이 놓아준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 곧 그도 정치에 입문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버지 프레스코트는 그 누구도 돈 없이 공직에 선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돈 없이 공직에 출마하는 것은 월급봉투가 필요하다는 말이고, 꼭 당선되어야 한다는 얘기고, 부패하기 쉽고 불의와 타협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1956년 3월 20일 아침 자파타 사장 조지 부시와 열 살 된 그의 아들 조지 W 는 강철 900만 파운드로 이루어진 시추선 스콜피언 호를 진수하기 위해 갑판에 서 있었다. 뒤이어 진수된 바인가룬 호와 마브릭 호가 석유산업을 미래의 산업대열에 올려놓았고 조지 부시를 부호로 만들어 주었다. 그 해 청년상공회의소는 조지 W의 아버지를 '가장 훌륭한 텍사스 젊은이 5명'중의 한 명으로 선정했다.

Ⅲ 엔도버의 치어리더



조지 W는 아버지가 남긴 성공이라는 유산이 곧 자기의 운명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휴스턴에서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현관을 걸어가고 있을 때 어머니가 밖으로 나와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들아, 축하한다. 엔도버에 합격됐어." 엔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매사추세스 주에 있는 남자 사립 고등학교인데, 부시 가문에는 전설적인 명성을 가진 남학교였다.

1961년 가을 조지 W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가장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엔도버의 지나친 학업 경쟁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야구장이 아닌 교실에서의 경쟁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조지 W는 적응하기 위해 자기의 재치에 의지했다. 그래서 그는 '입술'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조지 W는 익살 외에도 여타 텍사스 출신의 엔도버 학생들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다른 모든 학교에서 그렇듯이 이곳 학생들도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운동과 학업성적이 뛰어난 집단이 지도자급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 W가 속한 운동 잘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단연 뛰어났다.

조지 W는 4학년 때 응원단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응원단장이 된 조지 W는 하키 팀 구호를 외쳐대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따라하도록 강요하는 대신 온 경기장에 떠들썩하게 들리도록 메가폰에 대고 만담을 늘어놓곤 했다. 조지 W는 예일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예일대학은 부시 가족의 동문 학교였다.

Ⅳ 부시 밴드왜건의 선봉장



1959년 가족을 데리고 휴스턴으로 이사한 조지 부시는 즉시 그곳의 공화당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의 아성이던 텍사스 주의 공화당원이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대단하지 못했다. 1963년 해리스 카운티의 공화당 지구당 위원장이 된 그는 지구당의 모든 것을 현대화시켰다.

1964년 6월 6일 조지 부시는 상원의원에 진출하기 위해 공화당의 결선투표에서 콕스에게 압승을 거두고 민주당의 야버로우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선거전을 시작했다. 그 해 여름 아직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전이던 조지 W 는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했던 마틴 올데이와 지미 엘리슨 주니어는 매주 일요일 부시의 집 마당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먹으며 선거운동에 대해 숙의하곤 했다.

텍사스 주에는 선거 때마다 '묻지 마' 식으로 무조건 민주당만 찍어대는 마을도 많이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의 각주가 다시 연방정부에 통합된 이후 치러진 연방의원 선거나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된 사람으로서는 1961년 린든 존슨이 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주지사 선거에 나서 당선된 존 타워가 유일한 존재였다. 7월 들어 조지 부시와 바버라, 조지 W, 그리고 지미 엘리슨은 버스를 타고 텍사스 주 순회유세를 다녔다. '부시 밴드 왜건'이라고 이름 붙인 그 버스는 하루에 8군데 이상의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 무렵 조지 W는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조지 W와 그의 친구들은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예일의 여러 가지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조지 W 자신은 데이븐포트 칼리지의 여러 운동부에 들어가 예일대학교 산하 여러 칼리지들 사이에 팅컵을 놓고 우승을 겨루는 시합들에 선수로 참여했다. 또 기숙사의 오락부에 들어가 다른 친구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궁리했다.

11월 3일 조지 W 는 호텔 아메리카의 공화당 개표상황실에서 30여명의 부시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 결과를 계속해서 상황판에 적어 넣고 있었다. 조지 부시는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텍사스 주 선거 사상 공화당 후보로는 최고의 득표율을 올렸을 만큼 대단한 선전을 했다. 그러나 승리는 야버로우에게 돌아갔다.

Ⅴ 예일대의 학창시절



조지 W 는 운동부를 비롯한 여러 동아리에 들어갔다. 당연히 학업성적이 뛰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조지 W 는 앤도버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성 있는 리더의 역할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조지 W의 예일대 친구들은 그를 리틀 조지라고 즐겨 불렀는데 리틀 조지는 캠퍼스 안의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예외적으로 공부 좀 잘한다고 거만한 녀석들, 유명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가 그들과 아주 가깝다고 떠벌리는 녀석들, 결코 자기 아버지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는 부류는 질색했다.

조지 W는 예일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폭넓게 교류하며 만나는 상대들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좀더 사적인 부분들까지 기억했다. 그들의 부친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방학 때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지 등을, 조지 W의 친구들은 사람에 관한 일들을 기억하는 그의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한다.

"사장님은 돈버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파타에서 조지 부시와 함께 일했던 앨런 스미스가 어느 기자에게 말했다. 조지 부시는 1964년 야버로우에게 패한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선거가 끝나고 몇 달 후 조지 부시는 휴스턴의 제7의원 선거구를 재조정해 달라는 연대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원고의 승로로 끝나 새로운 의석이 생겨났고, 조지 부시는 다시 출마하기로 했다. 1966년 2월초 조지 부시는 이 하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 등록을 마쳤다.

196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그는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시작하라는 것이다. 상원의원 선거전에 나서는 순간부터 할 헤이즐리그가 홍보를 맡아 뛰었지만 부시를 대중에게 완전히 알리는 데는 실패했었다. 선거를 2-3주 앞두었을 때까지도 "조지 누구라고?" 하는 식으로 되묻는 사람이 많았다. 부시는 이번만큼은 자신을 확실히 인식시키려고 했다. 조지 부시는 뉴욕 시에 있는 유명한 광고대행사 제이 월터 톰슨의 부사장 해리 트릴리븐을 찾아갔다. 그는 앨리슨에게도 상근직으로 도와달라고 청했다.

두 달에 걸쳐 휴스턴의 유권자들을 위한 부시의 선거방송이 계속되었다. 조시 W가 스무 살이 되던 생일날 조지 부시이 텔레비전 광고물 '가족'이 15초 동안 전파를 탔다. '가족'의 30초짜리 광고는 선거 두 달 전부터 방영되었다. 7월말부터 조지 부시는 선거구 주민들의 의식을 파고드는 맹공을 시작했다. 부시의 모습은 어디에 가나 볼 수 있었다. 게시판의 포스터는 물론이고 순백색 바탕에 짙은 색으로 실루엣 처리를 한 부시의 전단이 온 사방에 뿌려졌다.

9월 중순이후 3개의 텔레비전 채널에서는 아침 투데이 쇼에서부터 심야영화에 이르기까지 조지 부시의 광고가 전파를 탔다. 부시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 깃발, 초대형 포스터, 자동차 지붕 위의 광고, 신문광고 등 모든 광고 수단이 총동원되었다.

1966년 11월 8일 조지 부시는 58퍼센트의 표를 얻어 42퍼센트의 표를 얻은 브리스코를 물리치고 첫 의원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매주 쉬는 날 없이 하루 18시간의 강행군으로 선거전을 치렀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의원이 되는 이외에도 부시 가문의 이름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업적을 이루었다.

월남전은 서서히 예일대학생들의 의식세계로 파고들더니 급기야 그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월남전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3학년초부터 조지 W는 줄곧 참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는 징집 연기 혜택을 받았으므로 실제 전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졸업하고 나서 월남 행 비행기를 탈 것인지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도망칠 것인지를 졸업 이전에 선택해야 했다.

1967년, 성탄절 연휴를 이용해 조지 W 는 휴스턴에 있는 텍사스 주 방위군 항공대에 전화를 걸어 자원할 경우 입대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12월 말경 조지 W는 항공대의 월터 B, 스타우트 중령을 만났는데, 그는 자원 입대할 경우 몇 명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긴 한데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해 1월 17일 조지 W는 뉴헤이븐에 있는 미 공군 병무청에서 장교 임관 자격 시험을 치렀다.

Ⅵ 풋내기 파일럿의 정계 비행



1969년 12월 비행훈련을 마치고 휴스턴으로 돌아온 조지 W는 이듬해인 1970년 초가 되어서야 그의 인생진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방위군의 복무 소집일이 한 달에 몇 일뿐일 정도로 시간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런 시간을 갖고 보니 제 자신이 갈 곳을 잃고 있었습니다." 조지 W는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시기에 그의 아버지도 길을 잃고 헤맸다는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사실 그 시기에 닉슨은 꼭두각시 인형을 가지고 인형극을 하는 사람처럼 조지 부시를 맘대로 갖고 놀았다. 우선 닉슨은 조지 부시가 안전하게 당선될 수 있는 하원의원을 포기하고 상원의원 선거에 나가도록 했고, 그 결과 부시는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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