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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이진우 지음 | 푸른숲
8. 포스트모던시대의 신좌파는 가능한가?9. 글로벌시대의 인권, 주권, 그리고 세계 시민'한 국가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국가의 주권을 침해해도 되는가?' 이것은 나토에 의 한 세르비아 지역의 공습이 우리에게 던져놓은 21세기 국제법의 문제이다.예전에 정치라는 신은 인간의 땅에 내려와 진리를 실현할 왕국을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국에서 가져 온 진리의 징표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권력이라는 이름의 아들과 거짓말이라는 이름의 아들들을 시켜 진리의 징표를 찾아오라고 하면서, 찾지 못하면 돌아 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들은 각자 길을 떠나긴 했지만, 진리의 징표를 찾을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각자 헤어져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 사실을 모르고 기다리다 지친 아버지 정치는 이들을 찾아 나섰 다. 아들 거짓말은 아버지에게 진리를 찾긴 찾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아버지께 보여드리기 위해 왕국을 세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아들 권력은 아우의 말은 거짓 말이며, 진리는 사실 잔인하고 무서운 짐승이니 꼭 산 채로 포획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정치는 진리를 잡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아들의 말에 기뻤으나, 신국으로 돌아 갈 징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정치는 이 땅에서 태어난 두 아들 이 곁에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마침내 두 아들이 진리를 찾 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거짓말을 하여 자신을 멀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너무 화가 나서 두 아들 없이는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깜빡 한 것이다.



그 후, 왕이 신께 구원을 청하니, 두 아들의 피가 뿌려진 곳에서 거짓말이라는 식물과 권 력이라는 이상한 동물이 생겨났다. 권력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옮겨 다니는 곳에는 여 지없이 거짓말이라는 식물이 자라났고, 권력은 이 식물을 먹으면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치는 다시 태어난 권력과 거짓말이라는 두 아들 덕택에 간신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진리를 찾을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이 삼부자가 사는 곳을 진리의 왕국이라 부르곤 했다.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 현실은 이 믿기 어려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정치가 기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는지, 또는 거짓말을 진리로 위장하기 위해 권력을 확보하려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정치와 권력, 정치와 거짓말이 공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대부분의 국민이 눈앞의 이익과 위험만을 보고 미래를 장기적으로 예견할 능력이 없다면, 정치인들에게는 거짓말이 국민을 위해 필요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경우 필요한 것은 합리적 조치이지 결코 정치적 거짓말이 아니다.



국민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을 '어리석은 대중'으로 본다는 것이고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징표이다. 국민이 "우리는 당신들이 엊그제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치인들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자리잡지 않을까.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인본주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인간다운 삶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비인간적인 삶의 현상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억압받고, 노예가 되고, 멸시 당한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진보적인 것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신뢰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좌파는 보수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사회주의적 이념만을 고집한다면, 이러한 좌파는 보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변화된 시대에 진보주의적 신좌파는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이론을 세웠던 시대에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구조가 분명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혁명과 계급 투쟁이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게 분화된 지금은 지배구조가 점차 불투명해지고 있다. 포스트모던시대의 대중은 이미 혁명의 구호보다는 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창출되는 새로운 욕구를 쫓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시대의 신좌파는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억압구조가 도사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보이지 않는' 피지배 계층을 드러내고, 익명적인 억압구조의 형태를 밝혀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현대인들을 더욱 더 공동체에서 분리시켜 자율적인 소비주체로 만드는 것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다면, 사회의 어느 지점에서 무엇에 의해 현대인들이 공동체적 유대성을 상실하고 원자적 개인으로 분리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지적할 때 신좌파는 비로소 진보적일 수 있다.

변화하는 차이들을 민감하게 느끼고 이를 세력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좌파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국제연합 헌장은 공격 전쟁을 금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평화 파괴나 공격 행위가 있을 때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한 국가의 내정에 대한 간섭은 분명히 금하고 있다. 모든 국가가 군사적 자기 방어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코소보 사태에 대한 나토의 간섭은 오히려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공격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토의 개입이 세르비아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인종 청소라는 반인륜적인 만행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나토의 공격 행위가 국제 연합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국제 연합은 세계 시민의 인권 보호를 국민국가의 집행에만 맡겨두어야 하는가? 국가 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보편적 인권선언을 지켜야 한다면, 강제집행권을 가진 세계 정부가 필요한 것일까?



인권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권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공존하려면 일반적인 법칙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법칙을 만들어 가는 과정과 절차가 바로 주권이라는 것이다.

인권이 없다면 어떤 합의가 형식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정당하지 않으며, 주권이 없다면 인권이 현재는 보장된다고 해도 언제든지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인권과 주권의 이념은 더욱 중요해진다. 전통적 민족국가들이 성, 인종, 피부색, 종교 등과 같은 자연적 조건들에 기초한다면, 세계화는 이러한 관습적 기준을 점점 더 무력화시키고 있다.



또한 핵 위협, 환경 오염, 오존층의 파괴, 생태계의 황폐화, 유전 공학의 발전과 같은 현재의 기술 진보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건드린다. 전세계는 이런 문제들을 함께 겪으며, 하나의 생활공동체, 생명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다.



즉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결코 개별 국가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세계 정부는 아닐지라도 모든 인류에게 타당성을 지닌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인권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이해되고 실천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또한 기술과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인권의 구체적인 내용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



앞으로 어떤 가치와 규범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동의 가치 토대 위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문화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특정한 문화가 절대화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공동의 문제들은 공동의 가치들만을 요구할 뿐이다. 세계윤리 강령이 다양성의 생산적 성격과 다원성 속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류의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는 가치만이 인간과 자연의 공생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인간은 근본적으로 기술 덕택에 실존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환경 오염을 유발하는 현대 기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기술 없이는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자연 자원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환경 오염은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기술이 문제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어떤 기술의 이익과 혜택이 - 원자력 혹은 생명공학의 경우처럼 -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잘못되면 그 결과가 인간의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이 기술을 무조건 발전시켜야만 하는 것인가?



어떤 기술에 대해 그것이 인간의 삶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실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윤리이다. 즉 기술과 윤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 실존의 두 전제를 이룬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기술이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지 않도록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바로 환경 윤리인 것이다.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동안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 역시 제한되어 있다. 생태학적 파국을 피하고 또 후손을 위해 그것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 보이는 과학과 기술의 지배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자연은 실제로 인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관심이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율적으로 책임짐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 내면에 있는 자연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외부의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길일 것이다."돈? 비싸게 번쩍이는 붉은 돈? 아니, 신들이여! 내가 그것을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 다. 이 가운데 많은 것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들고, 못생긴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나쁜 것 을 좋게, 낡은 것을 새롭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이것은 유혹한다... 제단의 사제를."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티몬』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돈의 실체를 가장 극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돈은 분명 자본주의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이다. 우리는 모두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을 만드는 것은 돈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양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이란 존경받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나 역시 존경받을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우리 속담은 이러한 돈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돈과 물질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서양은 근본적으로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이기주의라는 개인의 악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선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단지 돈을 벌고, 모으고 쓰는 경제 행위가 공익과 공동선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규제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 '돈의 논리'라고 한다면, 돈이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돈의 윤리'이다.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다. 본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정승을 지낸 사람은 정승같이 지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개같이 벌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읽으면 이 속담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의미가 된다.



개 같은 짓이란 직권을 남용하여 돈을 벌고 비리를 감추기 위해 돈을 쓰는 것 - 판사, 변호사, 검사들이 끼리끼리 이익을 챙기면서도 관례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부패를 싸고도는 것과 같은 짓들 - 을 말한다. 온갖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행위들 말이다.



돈은 본래 윤리를 모른다.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놓는 돈의 전도적 권력에 윤리적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이다. 그런데 정치가 윤리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도덕과 윤리를 정치적으로 오용하고 실제로는 부정 축재에 열을 올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돈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돈의 윤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제대로 돌려면 우선 사회적 정의가 올바로 서야 하지 않을까?6. 돈의 논리, 돈의 윤리7. 새하얀 정치적 거짓말의 허구5.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연을 주목하라4. 정보지식은 구원인가, 굴레인가?문명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역사적 목적도 아니고 이념적 이상도 아니다. 문명은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오늘날 문명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자율적 개인 역시 긴 역사적 과정의 산물인 까닭에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이 마치 문명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이다. 개인이 역사적 산물이라면 이 개인은 문명화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알콜 중독, 마약, 인문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오락적 가치의 증대, 삶의 기계화 등은 모두 서양의 기술문명이 야기한 현대의 야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서양을 문명의 권력으로 떠받들려고 하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문명의 기로에 서 있다.이제까지 우리의 삶에 안정된 토대를 제공해 주었던 정보의 과다한 범람은 점점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보화시대라는 개념은 인간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기술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지칭한다.



정보기술에 의한 문화혁명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허구와 현실의 차이를 해체시키며, 살아있는 사람과의 교통을 기계적 소통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축소시킨다. 또한 정보기술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종 정보 프롤레타리아는 대중 정보에서 무엇이 진정한 지식이고, 단순한 의견인지를 구별해 내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중매체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상에 부합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와 정보를 제공하는 까닭에 개인은 공동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양한 정보로 구성된 탈 현대적 인간은 이렇게 남이 본 것을 보고, 남이 말하는 것을 말하며, 남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제 텔레비전을 끄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되돌아볼 때이다.밀레니엄이 없다는 것은 역사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밀레니엄은 종말과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하는 신성한 천년간을 뜻한다. 밀레니엄의 뜻이 단순한 물리적 시간 단위로 전락한 이 시점에서 그 단어가 가졌던 역사적 의미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성을 절대화하면 성욕이 사라지고, 음악을 절대화하면 음악이 해체된다. 밀레니엄의 이벤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밀레니엄의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더 무감각한 대중에 의해 흡수되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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