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아마 도시마로 지음 | 예문서원
'종교'라는 말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 '무종교'라는 말은 '종교'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100년에 걸쳐 '무종교'라는 말을 애용(?)해 온 셈이 된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무종교'의 내실을 깊이 따져 보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으니 놀랍기까지 하다.
종교란 인간이 그 유한성을 스스로 자각했을 때 활동이 시작되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영위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중한 영위에 대해 오랜 기간에 걸쳐 '무종교'라는 단 한 마디로 치부해온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온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일본인의 정신 생활은 언제까지나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메이지 이후의 근대사와, 더욱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어 온 이른바 민족적 심성과 관련된 심층의 역사를 통해 '무종교'라는 말이 나타나게 된 사정을 밝혀보고자 했다. '무종교'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종교심의 형태를 사실에 입각하여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근세 이후의 일상주의는 중세 이래의 신관념과 마쓰리의 행사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첫째 일족 이외에 구경꾼이 생겨나고, 종교심이 변하였으며, 신주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변화하는 일상에 맞추어 마쓰리를 세속화시키는 동시에 제례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 생활의 리듬을 가능한 한 변경하지 않으면서, 신에 대한 제사를 계승하려고 하는 일상주의의 정신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적 의례라고 하더라도 일상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특별히 종교로 의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점차 '무종교'를 자처하는 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무종교'라고 자처하면서 성묘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무신론'을 자인하는 신주도 있고, 그런 신주를 불러와 제사를 지내는 마을 주민들도 있다.
이것은 언뜻 모순된 행위처럼 보이지만, 누차 강조했듯 일본의 경우 '무종교',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교단 종교에 대해 공감하지 않거나 위화감을 느끼는 것일 뿐이지 종교 부정이나 신 관념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성묘는 분명 자연 종교에 속하는 종교 행사이다.
그런데 이처럼 분명히 종교 행위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묘를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전통을 지닌 일본인들이 있다. '특정한 교단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나 오키나와의 미야코지마에서 그 섬의 신을 믿는 '자연 종교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장송은 최근까지 풍장(風葬)이 보통이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며, 영혼이 없는 육체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는 풍장이라는 형태로 처리되었지만 혼령의 제사, 즉 마쓰리는 정중하게 행해져 왔다.
이들이 묘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죽은 사람의 제사보다 더 중요한 신들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선조신 외에도 집집마다 우야가무 신과 불의 신, 수호신, 가옥의 신을 모시고 자신들의 일생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종교'임을 자처한다. 바로 이 점에서 '무종교'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종교'란 단지 교단 종교의 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에 불과하다.5. 일상주의와 타협하는 불교제5장 무덤이 없는 마을후기3. 평형화2. '악'은 어떻게 할 것인가?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생활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현실 생활에서는 때때로 흉포한 악행에 휘말려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일본인들은 비일상적인 일에 직면했을 때 불행과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왔을까? 이러한 부조리를 납득하는 방법에도 '평범 지향'의 성격이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은 교단 종교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무종교'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을 뒤흔드는 선악이나 이른바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현상들도 어느 틈엔가 '대자연'의 경관 속에 용해되어 소멸해 갈 것이라는 생각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친숙한 느낌이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즉 악이라 해도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야나기타는, 중요한 것은 '평범'을 중시하는 생활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뒤돌아보고 전래의 생활을 통해 축적되어 온 지혜를 개량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인의 전통을 유지해 온 '평범 지향'은 경쟁 사회를 지향하면서 경멸되는 듯 보였으나, 사실 소멸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책의 테마인 '무종교'의 경향, 즉 교단 종교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나 드러내 놓고 종교에 대해 논하기를 꺼리는 것과 같은 종교 기피의 경향은 일본 문화가 키워 온 평범 지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교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할 수는 없으며 일상 생활의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평범'을 철저하게 요구하는 심정이 일본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제4장 일상주의와 종교
1. 야나기타 구니오의 평범 지향7. 자연 종교의 퇴영일본인은 오랫동안 특수와 보편의 복합적 선택으로 만들어 왔던 신앙 시스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표면적으로 잡다하게 비쳐져 왔던 신앙이 글자 그대로 그 속까지 잡다하고 애매하게 변해 버렸다.
신들에 대한 신앙은 '제사'와 '기원'으로 분리되었다. 메이지 위정자들은 신도에서 기도가 없는 의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도가 빠진 의례 행사는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신도식의 거창한 국가 행사가 신도라는 종교에서 분리되어 국민 생활에 군림하게 되었다. 국가는 국민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비종교'라는 교묘한 논리로써 이 신도식 국가 의례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교단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직업적 종교가가 자연 종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잡다한 종교 개념에 대한 자각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천황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 근대 일본의 정책은 교단 종교와 자연 종교 모두에 극도의 왜곡과 변질을 강요했다. 특히 교단 종교에서의 신앙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되어 사회적 활동에 있어 국가로부터 제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상식'이 형성되었다.
또한 서구 문화 편중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모델로 하는 종교관이 지식인들 사이에 확대되면서 일본인의 생활에 입각한 종교론의 전개는 더더욱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명확한 교리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만이 종교이며 생활 속의 습관이나 풍속이 살아 있는 자연 종교는 열등한 종교이거나 아예 종교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집단을 유지하면서도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지 않는 지혜의 하나로 '평형화'를 들 수 있다. 이는 균형을 취한다는 의미로서, 악은 말할 것도 없고 선조차 유별나다고 느껴질 때는 가차없이 추방하고 마는 풍토를 만들어냈다.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을을 동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되었으며, 즉 일본인의 종교는 마을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삶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무종교'인 것이다.신도를 포함하여 특정 종교를 국교화하자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교부성의 국민교화 운동은 불교와 기독교, 신도주의자들 모두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윽고 교부성은 해체되었지만, 그것이 일본 정부의 교화 정책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후의 교화는 교묘한 궤변을 거듭하며 인민들 사이에 깊이 침투하며, 불가피하게 자연 종교 시스템의 파기가 진행되었다. 결국 자연 종교는 열등한 종교 또는 습관이나 풍속에 불과한 것으로서 종교가 될 수는 없다는 '상식'이 형성되어 가기 시작했다.신도주의자들은 신도가 세상에서 말하는 보통의 종교를 훨씬 초월한 '대도(大道)'임을 역설하였다. 신도 지상주의는 분명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의 하나가 되기는 하였지만, 정치 기구 모두를 복귀시키려는 시대착오를 범함으로써 일찍이 정권의 중추로부터 추방되어 버렸다.
이 점에서 '신도비종교론'은 종교 정책에서 '조헌(朝憲)'과 '교헌(敎憲)'을 명확히 분리하는 시점을 제시함으로써 정책화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조헌'이란 조정의 규칙 즉 국가의 규칙을 의미하고 '교헌'이란 이른바 종교를 의미한다.
신도는 '조헌'이지 '교헌'이 아니다. 신도가 국가의 법률인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도에 복종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에 아무런 저촉이 되지 않는 것이다.6. 신도비종교론의 대두5. 국민 교화 운동의 좌절8. 편협한 종교관4. 일상주의메이지 정부는 통치상의 기반을 천황 숭배에서 찾았다. 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자 신의 자손인 천황이야말로 일본 지도자로서 적격이라는 논법이 결정적인 힘을 얻어 '신국(神國)'으로서의 국가 경영은 일본 최대의 목표가 되었다.
정부는 천황의 제사 행위를 통해 국민들이 각자 조상의 제사에 힘을 쏟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교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열강에 의한 기독교 금령 해제 요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결국 신도의 국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초기 불교는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였지만, 석가 사후 600년 정도가 되면서 불교는 오히려 일반인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게 된다. 일반인들도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일상 생활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일상을 유지하면서 부처가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일상주의의 우위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신도 등을 포괄하여 나타나는 17세기 이후 일본사회의 공통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기독교 금령이 해제될 무렵의 대표적인 정부의 방책은 기독교를 내면의 신앙만으로 한정한 채 포교 등의 사회적 행위에 대해서는 내면적으로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종교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으로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관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종교란 교단 종교이든 자연 종교이든 그 신앙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물론 그 강약은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각각의 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널리 포교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생명이다.
종교는 '외(外)'와 '외형(外形)'에 깊이 관련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종교가 되는 것으로,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종교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든지 아니면 지금까지 소개해 온 정치가들의 통치상의 관점에서 생겨난 종교관을 그대로 써먹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4. 천황 숭배의 시작3. 자연 종교의 성립번역어로서의 '종교'라는 단어는 기독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는 도쿠가와 막부 때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금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가 서구 열광과의 외교 관계를 확립시키려 했을 때 기독교 금령이 걸림돌로 작용하여 이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나 불교, 신도 등을 하나로 다룰 개념이 필요하게 되어 종파라는 의미가 아닌 '종교'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74년의 일이다.
자연 종교를 배제한 조어인 '종교'가 일반화되면서 자연 종교를 진지하게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자연 종교가 일본인의 종교 의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은 더더욱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2. 종교라는 조어의 이면메이지 유신에서 1945년의 패전에 이르는 일본 근대사에서 종교는 교단 종교와 자연 종교의 구분 없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민 국가'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은 근대의 출발에 있어 국가 경영에 신화라는 신비성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신비성은 전력을 다해 인민을 철저히 세뇌시켜야만 할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이 국가 권력에 의한 교화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는 스스로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천황제 국가라는 정치 체제에 교묘하게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근대화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동적인 자세가 일본 근대 종교사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제3장 퇴색한 종교관
1. 신화에서 출발한 일본 근대'부세'의 인생관을 완성한 17세기의 인물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말이다. '부세'의 종교심은 절대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무신론의 신봉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만일 교단 종교를 믿느냐고 다그치게 되면 '무종교'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지만, '부세'의 종교심을 지닌 이들은 인생의 저류에 있는 불안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세계에 쉽게 공명할 수 있는 종교성이 충만한 존재이다.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서일본을 중심으로 '무상'의 관념이 정착하였다. 불교가 가르치는 '무상'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모든 존재는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불교에서는 '무상'의 세계를 '고(苦)'로 보아 '고'로부터의 탈각을 가르친다.
일단 '무상'관념을 체득하게 되면 인생이 '고'로 비쳐지고, 그리하여 인생을 괴로움으로 가득찬 '우세(憂世)'로 보는 사고 방식이 퍼지게 된다. '무상'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인생이 '무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는 방식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고가 전환되면서 '우세'는 '부세'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부세(浮世)'란 확실한 중심이 없이 둥둥 떠다니며 배회하는 세계이지만, 동시에 기분이 들떠 즐거운 세계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세'와 같은 심각한 고통으로부터 표면적으로는 해방되어 있는 것이 '부세'이다.'사람은 13세까지는 분별력이 없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때부터 24~5세가 될 때까지는 착실히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그 뒤로는 오로지 돈 버는 데 힘써서 일생을 살 아갈 수 있는 재산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45세 이후 유락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 인 생의 목적이다.'3. '우세'에서 '부세'로제2장 무종교의 역사
1. 신불과 더불어 살아온 시대원래 유교는 사대부라 불리었던, 중국 사회 지배 계급의 정치 철학이자 처세술이었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애초부터 현실 사회에서의 인간의 삶의 방식이나 처세 방식에 그 관심을 집중할 뿐 사후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러한 유교가 일본에서도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현세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사후의 구원을 기원하는 방식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교가 전문가 영역을 넘어 무가 사회나 호상, 부농 계급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 '무종교', 즉 특정 종파에 무관하게 된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4.'부세'의 인생관과 종교심2. 유교의 등장'무종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연 종교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일본인의 종교관이라고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쓰모데의 예를 들어보자. 하쓰모데란 일본인들이 새해가 시작될 때 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