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여인들
안나 마리아 지크문트 지음 | 청년정신
1923년 4월 3일, 친 SPD(독일사민당)신문인 「뮌헨너 포스트」 지는 여자들에게 둘러 쌓인 히틀러를 기사화했다. 최면에 걸린 듯,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히틀러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여성들과 사재를 담보로 빌린 돈을 히틀러에게 바치는 골수 여성 추종자들을 비꼬는 내용이 기사의 골자였다.(이 신문사는 후일 히틀러에 의해 당시 반 나치적인 보도에 대한 보복으로 폐쇄된다.)
여성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의 충성스런 협력자였다. 이들은 히틀러에게 권력의 핵심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폭넓은 인맥관계를 구축해주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재정적인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나치당의 전속 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은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여자들은 당 최고의 선전원이었다. 이들은 히틀러를 지지하도록 남편을 설득했고, 정치적인 흥미에 도취되어 여가시간을 흘려보냈다... 당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절대적인 헌신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었다. 히틀러는 여성 지지자들의 호감을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당의 기반이 구축되지 않은 초창기 시절, 나치당 수뇌부는 거리로 뛰어나가 가두 시위를 연출하고, 잔인한 테러로 정적을 제거했다. 그 사이 여성 사교모임에 참석한 히틀러는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호색한은 여인들의 손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이하 나치당)의 새로운 당원을 확보해나갔다.
여성 지지자들의 마음을 능숙 능란하게 조종하여, 이를 뜻대로 이용하는 히틀러의 재주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당시 히틀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여성 나치 엘리트 그룹에 입문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으며,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여성을 모멸하는 나치당의 정책을 망각하게 했다. 실제로 여성은 재정을 지원하는 일반 당원으로서 대단히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나치당의 이론가 로젠베르크가 공언한 말은 여성문제에 대한 나치당의 입장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 두어야겠소. 재판, 군사 그리고 국정은 남성들의 몫이고, 이 점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요.!"
제3제국 시절에 '숙녀들'은 수상청사의 리셉션장이나 히틀러의 수행단에서 환영받는 장식품이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들판에서 일하는 여자, 물레 옆에서 일하는 여자가 나치의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그러나 나치 지도층의 여인들에게 이러한 슬로건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화려한 주택과 최고급 승용차, 의상, 보석, 만찬 등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사실 나치 지도층의 여성만큼이나 나치의 여성 이데올로기와 반하는 여인들은 없었다.에바 브라운은 1912년 뮌헨의 이자벨가 4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교사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암울한 전후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운 일가는 평균수준을 웃도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상속받은 유산 덕분에 거대한 저택에 하녀를 두고 그 당시 웬만한 사람은 꿈도 못 꿀 자가용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에바 브라운은 수녀원 초등학교와 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에바는 또래의 어린 소녀답게 은막의 스타들을 흠모했으며 영화배우나 무용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브라운의 부모는 생각이 달랐다. 에바는 보수적인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한 영국숙녀학교를 졸업한 후 집으로 돌아와 집안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진관에서 점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9년 9월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관에 견습생 겸 점원으로 취업하였다. 에바는 사진관 생활에 만족했다. 그 일은 어렴풋하게나마 영화 세계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이 직업의 선택이 에바의 운명을 결정지을 줄은 에바 자신도 몰랐다.
1929년 그녀는 이곳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루는 근무시간이 끝나고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달린 한 신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나치당의 총수 히틀러였다. 하지만 에바는 그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그 사진관은 나치당의 전용 사진관이었으며 히틀러는 자신의 홍보를 위하여 사진관 주인을 전속사진사로 채용하여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성탄절에 히틀러는 자신의 글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에바에게 선물했다. 히틀러와 에바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것도 아마 이 무렵일 것이다. 미소를 짓고 있는 히틀러가 환한 표정의 에바 앞에서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있는 사진이었다. 가족들 몰래 히틀러의 정부(情婦)가 된 에바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비밀로 유지하기 원했으며, 그에겐 정치 외에도 많은 것들이 그녀보다 중요했다. 에바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기다리면서 보내야 했다.
1932년 11월 1일 그녀는 히틀러에게 이별의 편지를 쓰고 아버지의 권총을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에바가 얻은 것은 히틀러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저택으로 에바를 불러 손수 선택한 가구들로 가득 채워주었다. 에바의 집은 히틀러의 선물로 가득했으며, 그의 선물에는 예외 없이 히틀러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히틀러에게 에바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일부로 다가온 것은 1938년 전후 무렵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히틀러는 1938년 5월 2일에 유서를 작성하여, 이를 수상 청사의 하인리히 람머스 장관에게 남겨두었다. 히틀러는 사후 전 재산을 나치당에 헌납한다는 유언과 함께, 본인의 장례 절차까지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히틀러는 최우선 수혜자로 에바 브라운을 지명하고 에바에게 매월 연금을 지급할 것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었다. 그의 누나들이나 일가 친척들보다 에바를 먼저 언급한 것은 그가 에바에게 갖고 있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의 산장에서 에바는 그녀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산장에 있는 남자들은 에바를 '존경하는 아가씨'라고 불렀으며 여자들은 '브라운 양'이라고 불렀다. 히틀러의 정부 에바는 자신의 치장을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며 마음껏 사치를 했다.
에바는 베를린 최고의 재단사들이 만든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모피와 드레스는 파리에서 가져오고, 신발은 프로렌스의 페라가모에서 구입했다. 값비싼 장신구를 좋아해서 수도 없이 많은 장신구를 갖고 있었다. 심할 땐 하루에도 옷을 일곱 번이나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녀는 최고급 프랑스 향수만을 사용했으며, 오랜 시간을 화장에 소비했다.
1944년 이미 전쟁은 히틀러에게 절망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모든 전선에서 패전의 비보가 날아들고 진실을 가장한 나치의 선전도 장시간 버틸 수 없었다. 극심해지는 절망과 궁핍 속에서 독일 국민은 도시를 강타하는 융단폭격에 치를 떨며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에바는 히틀러가 떠나지 말 것을 명령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한 산장을 떠나 공습을 받은 수상청사 정원의 지하 16미터의 총통 방공호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1945년 4월 28일 자정을 앞두고 그녀가 평생 그토록 소원하던 히틀러와의 결혼이 거행되었다. 그는 결혼 증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바 히틀러라는 서명을 남겼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와 에바의 시신은 그들의 운전사였던 켐프카에 의해 불태워졌고, 독일 방송은 우리의 총통 히틀러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죽었다고 보도했다.히틀러를 사랑했던 여인들에바 브라운 - 사진관 점원에서 히틀러의 숨겨진 정부로1901년 11월 11일, 막다는 갓 20세밖에 되지 않은 하녀 아우구스테 베렌트와 부유한 건설업자이자 공학사인 리첼 박사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이들은 얼마 후 결혼했지만 막다가 세 살 되던 해 이혼했다. 막다의 어머니는 이혼 직후 유복한 가죽공장 사장 프리트랜더와 재혼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모친의 재혼과 함께 유태인 계부를 얻게 된 막다는 훗날 광적인 반 유태인주의자를 배우자로 택한다. 막다는 계부를 무척 따랐다. 이후 서로를 알게 된 생부와 계부는 아이의 교육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고등학생이 된 막다는 광범위한 영역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상황에 따라 이상과 가치를 바꾸는 경박함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불교예찬론자에서 시온주의자가 되기도 했던 막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광적인 국가사회주의자로 탈바꿈한다. 1920년 방학이 끝날 무렵, 학교로 돌아온 막다는 기차 안에서 한 고상한 신사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날 독일의 최대 갑부인 크반트는 18세의 소녀에게 정신을 빼앗겨 검토하던 서류를 덮어버렸다.
막다가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이자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크반트는 매혹적인 소녀에게 빠져 몇 달 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막다가 생각했던 것처럼 환상적이지 못했다. 전처에게서 얻은 두 아들은 막다보다 한두 살밖에 어리지 않았고,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크반트는 사소한 일까지도 참견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으며 경직된 시간표에 맞추어 사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결국 유태인 시온주의자인 한 청년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이는 결혼생활의 끝을 의미했다. 막다의 인생에 극적인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그리고 나서 불과 얼마 후의 일이다. 1930년 사교계의 귀부인 막다는 일상에서의 따분함과 호기심에 나치당의 행사가 열리는 스포츠회관으로 휩쓸려갔다.
그날 연사는 괴벨스였다. 그는 검은 가죽점퍼와 승마바지를 입고 굽 높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괴벨스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히틀러식 경례를 하는 당원 사이를 지나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연단에 올랐다. 그의 외모는 보잘것없고 빈약해서 사람들은 그를 '쪼그라든 게르만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괴벨스의 내면에는 무서운 재능이 도사리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길거리에서 역사를 만드는 저돌적인 선동가였다. 괴벨스는 충성스러운 동지들과 함께 곳곳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괴벨스는 나치 지도부에서 히틀러 다음으로 주목받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이후 막다가 신(神)이라 부르게 된 이 사나이는, 감정적인 열광에 도취된 인물이었다.
그는 동시에 냉소적이고 악랄한 면이 다분했으며 복수의 화신이자 동정심을 모르는 냉혈인간이었다. 모순된 그의 성격은 매우 다중적이었다. 선교사와 같은 자의식과 열등의식, 구원에 대한 동경과 파멸에 대한 의지가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웅변술은 민중의 혼을 사로잡았고, 선전활동은 천재적이었다.
괴벨스가 충성을 바친 사람은 오로지 히틀러 한 사람뿐이었다. 히틀러를 우상처럼 숭배한 그는 대중의 반발심을 사기도 하였으나 이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막다는 후자에 속했다. 고상한 막다에게 열광과 폭력 그리고 광기로 물든 베를린의 나치활동은 환희를 느끼게 했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삶'이 바로 베를린에 있었다. 막다는 자신의 앞날을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나치당 중앙당사의 자원봉사자가 되어 문서담당을 맡게 된다. 자연스럽게 괴벨스를 알게 된 막다는 두 남자와 연애하는 짜릿한 상황이 자극제가 되었고 이와 같은 '이중연애'는 평생토록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그녀가 괴벨스의 곁에 있음으로써 당의 위신이 서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히틀러가 괴벨스를 조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었다.
히틀러는 바게너 박사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흘렸다. "그 여자는 나와 결혼하지 않고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야." 바게너는 총통의 은밀한 발언을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전달하였다. 계산된 비밀누설은 막다의 내면에 격정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히틀러의 메시지를 고백하지 않은 사랑의 표시로 해석했으며, 정치가인 총통이 사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들인 그녀는 중간자 괴벨스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총통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당 동지들은 괴벨스와 막다의 약혼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상인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주변에 머무르고픈 욕심은 막다와 괴벨스를 결속시켜 준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참혹한 종말이 다가왔을 때에도 막다는 괴벨스가 아닌 히틀러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막다의 결혼생활에서의 가장 큰 행복은 히틀러를 내조하는 일이었다. '총통'은 수상청사에서 파티와 만찬을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대하곤 했다. 엠미 괴링과 더불어 제국의 제1여성으로 추대된 막다는 수상청사의 안주인 역할을 손수 도맡아 했다.
패전의 현실이 명백해지고, 히틀러 주변의 여인들이 살 길을 찾기 위해 베를린을 떠났지만, 괴벨스와 막다는 끝까지 남아 나치시대의 장엄한 몰락을 준비했다. 괴벨스와 막다는 자신들의 여섯 명의 아이들을 의사들에게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시신을 화형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완벽한 최후를 위해 확인사살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무렵, 평상시처럼 잠을 청하러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올라간 것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막다 괴벨스 - 제3국의 제1여성"9월 18일 금요일, 히틀러와 조카 사이에 또 한 번의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 무슨 이유인 지 활달한 성격의 음대생 겔리는 빈으로 가려 했고 히틀러는 격한 논쟁 끝에 나가버렸 다... 토요일 그녀의 손엔 히틀러의 권총이 쥐어져 있었고 시신은 코가 부러져 있었다. 시신의 다른 부위에서도 심한 부상들이 발견되었다. 나치본부에서는 회의를 소집하여 언 론에 발표할 사건 동기를 논의했다. 이들은 공연에 대한 꿈이 좌절되어 겔리가 자살한 것 으로 하자는 데 합의했다."경찰은 겔리의 죽음에 제3자의 살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으나, 이를 둘러싼 소문은 끊임없이 떠돌았다. 히틀러가 광분한 나머지 겔리를 살해했다는 설도 있었고, 친위대의 힘물러가 당과 히틀러를 위해 겔리를 살해하여 곤란한 상황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겔리가 임신 중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며, 겔리가 비관 자살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히틀러가 조카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만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촌 히틀러에게 겔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나치시대에 겔리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다.히틀러의 조카 겔리는 나치 세력의 어떤 여인보다도 후세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역사학자는 물론 심리학자와 언론인까지도 겔리의 경우를 분석하였는데, 그 대부분의 분석은 히틀러의 성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겔리는 과연 히틀러의 정부였을까? 또한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타살이었을까?
앙겔라 겔리 라우발은 1908년 6월 4일 린츠에서 태어났다. 이는 스무 살의 히틀러가 재차 도전하는 미술학교의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빈으로 온지 몇 달 후의 일이었다. 히틀러가 나치당의 총수가 되었을 때 겔리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와 동기동창이며 후에 오스트리아 국회의장이 된 알프레드 말레타는 '우습게도 그녀에게 히틀러의 이론과 정치운동에 대해 몇 시간이나 떠든 것은 오히려 나였다. 정치에 무관심한 겔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히틀러는 다정한 삼촌이었고, 그가 위대한 정치가였다는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1927년 가을 뮌헨으로 온 겔리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공부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학은 핑계일 뿐 사랑하는 남자 곁에 있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당시 겔리의 가슴을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