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최초들 1
피에르 제르마 지음 | 하늘연못
멕시코의 올맥인들은 아메리카 문명을 꽃피운 종족이며, '고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럽은 라 콩다민느 덕분에 1736년에야 비로소 고무를 처음 사용할 수 있었다. 콩다민느는 프랑스 해군장교 출신으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유명했다. 콩다민느는 당시 프랑스 과학원으로부터 아메리카의 적도 지대에서 자오선 지도를 측정해 오라는 임무를 받고 최초로 아마존강 유역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도를 작성했다. 그는 이 지도 탐사를 통해 고무를 비롯해 쿠라레(남미 토인들이 화살에 바르는 독), 세균접종 기술 등을 들여 왔다. 1780년부터 '뽀 드 니그르'라는 문방구에서 고무 지우개가 판매되었으며, 1840년대에 영국의 핸콕과 미국의 구디어가 각각 고무의 가황법(加黃法)을 발견하면서 대량생산 라인이 가동되었다. 1907년 러시아의 레베데프는 최초로 합성고무 제조에 성공했다.권투는 기원전 688년경 그리스의 '판테크라온'이라는 격투기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크레타의 왕이었던 테세우스는 권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근대 권투는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맨주먹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선수들은 아무 데나 치고 받았고, 심지어 오늘날 반칙으로 선언될 만한 간교한 주먹질도 서슴지 않았다. 초대챔피언인 제임스 피그는 머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빡빡 밀었다. 1743년 최초로 규칙을 만들어 권투를 스포츠로 정립한 사람은 제임스 피그의 뒤를 이은 존 브로턴이고 1867년 후원자 퀸즈베리 후작의 이름을 따서 퀸즈베리 규칙을 만든 사람은 저널리스트 존 그래햄 챔버였다. 이 규칙은 오늘날까지 준수되어 오고 있는 3분 경기, 1분 휴식의 라운데 제, 선수가 쓰러졌을 때 10초 남짓 일어설 시간을 주는 규칙, 그리고 권투장갑 착용을 의무화한 것이다. 최초의 권투 경기장 모형은 원형이었기 때문에 '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프랑스 대혁명 때인 1794년 2월 4일 노예제도가 철폐되었다. 그러나 1802년 보나파르트는 이 법령을 무효화하고 이로 인해 산토 도밍고 폭동이 일어났다. 1807년 영국과, 1815년 프랑스에서 각각 흑인 노예 매매가 금지됨에 따라 노예해방의 길은 한층 더 진일보했다. 1833년 영국이 노예해방을 결정했고, 1848년 3월 4일 프랑스 제2공화국도 그 뒤를 따랐다. 네덜란드와 덴마크는 1860년에,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65년에 노예해방이 실현되었다.권투노예제도 폐지기원전 제2천년기에 제작된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악어똥, 꿀, 아라비아 고무, 천연사이다 등으로 만든 고약을 질 위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해서 임신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1세기에 아비센느가 20여 가지의 피임기술을 서술한 바 있으며 16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팔로페가 콘돔을 발명했다. 1956년부터는 존 록과 민추웨이 창이 하버드 대학교수 그레고리 핀커스와 공동으로 발명한 생리적 피임법이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경구피임약의 시대가 열렸다. 1959년에는 질 내에 삽입하는 피임기구가 발명됨으로써 피임 세트 발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이집트에서 가장 명망 높은 촌로들은 동물의 피를 받아 목욕을 했으며, 제정로마 시절에는 죽은 검투사의 피를 마시기 위해 구경꾼들이 원형경기장으로 몰려들곤 했다. 이처럼 식인 풍습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전승되어 왔다. 1900년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칼 랜트슈타이너가 마침내 혈액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는 우선 똑같은 피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혈구 표면을 구성하는 두 가지 성분에 따라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때부터 수혈에 앞서 수혈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혈액형 검사가 실시되었다. 그 후 혈청에 존재하는 색다른 면역체계가 잇달아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레서스 인자(Rh)이다. 이 면역 시스템은 수혈 사고뿐만 아니라 미래의 엄마와 태아 사이에서도 면역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피임피와 혈액형기원전 450년경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이자율 안정을 위해 공공은행을 설립했다. 사실 그 전까지 사채업자들은 고리대금업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편 시도페라는 도시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공공은행이 세워졌다. 기원전 4세기경 디오게네스의 부친은 아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이 은행을 경영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 부자는 위조화폐를 주조했다는 혐의로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사실 그들은 드라코마(고대 그리스의 은화 - 옮긴이)의 함유량을 줄인 것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평가절하이다.평가절하7. ㅍ - ㅎ영국인들이 시작한 이 실내경기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그 기원은 아직도 애매모호하다. 첫 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 것은 1921년의 일이다. 그 이전인 19세기말 미국의 한 회사가 표면에 고무를 입힌 라켓을 발명하여 '핑퐁'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제출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핑퐁은 영어권 나라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인들의 탁구에 대한 열기가 시들해짐에 따라 탁구는 비인기 스포츠로 전락해 버렸다.1796년 프랑스의 화학자 풀르티에 드 라살이 담즙에서 비눗물 같이 생긴 '노르스름한 물질'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13년 러시아의 병리학자 니콜라이 안티슈코프가 토끼의 동맥에서 콜레스테롤 침전물을 발견했다. 토끼에게 극도로 기름진 먹이를 먹인 결과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한편 1947년부터 미국의 역학자 안셀 키즈가 선진 7개국을 대상으로 통계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혈액 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발생되는 심장질환과 음식물 섭취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이 조사결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핀란드였으며 미국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전나무에 야오나 선물을 걸어놓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풍습은 독일에서 생겨났다. 오랜 풍습처럼 독일 주택가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나무 잎사귀로 집안 구석구석을 장식했다. 1500년 알자스의 카이제르베르크는 이를 이교도적 풍습이라 하여 극구 반대했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은 독일 남동부 지방에서 시작하여 서쪽 지방으로 퍼져나갔다.크리스마스 트리탁구콜레스테롤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이다. 15세기 무렵 커피나무는 에티오피아 고지대에서 남아라비아로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종교 행사 중에 즐겨 마시던 커피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보급되어 애음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예멘의 이슬람 수도원에서 일하던 한 염소치는 사람이 커피의 흥분효과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신의 가축들이 빨간 열매가 달린 소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을 뜯어먹고 며칠 밤을 자지 않고 울어댔다는 것이다.6. ㅋ - ㅌ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미국 하버드 대학의 '셈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하버드 대학 고고학 탐사팀이 바빌로니아 북쪽에서 320킬로미터 떨어진 가수르라는 마을을 발굴하던 중에 출토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의 지도가 이라크 북부 지방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테라코타 판인 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 70, 세로 90밀리미터이며 제작 연도는 4,500년 전 경으로 추정된다.지도주식회사와 채권주식회사는 기원전 2세기경 로마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국책사업과 기업들의 행정 및 경영을 맡았던 징세 청부인들이 모여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자본을 지분으로 나눴다. 또한 개인 거래에 의한 양도성 주식과 상속에 의한 양도성 주식도 있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연수익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총 연수익은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에 따라 결정되었다. 한편 회사의 노력을 뒷받침해 주기 위한 불입 청구시 주식응모자들은 채권을 받았다.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설립된 곳은 네덜란드로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이 세워진 직후였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 제일의 금융시장으로 발돋움했다.조난구조신호커피인공수정5. ㅈ - ㅊSOS는 영어의 "Save Our Soul!(우리의 영혼을 구해주세요.)"의 약자이다. SOS는 모스 기호로 매우 간단하게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3점, 3선, 3점),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무선전신회의에서 조난신호로 채택되었다.헤브라이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가장 아쉬워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파이다. 양파는 비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채소 중 하나로 대접받는다. 양파가 인간의 기본 식량 역할을 충실히 해온 까닭이다. 양파 재배는 4,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양파는 또 이집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여론조사기구최초의 여론조사는 1935년 심리학자 조지 갤럽에 의해 시작되었다. 갤럽은 당시 아이오와 주 선거에 입후보한 장모 올가를 위해 이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몇 지역구 주만을 표본집단으로 추출하여 설문지를 돌렸다. 그의 이 노력 덕분에 올가는 당선되었고, 이듬해 갤럽은 최초의 여론조사기구를 창설했다.인공수정의 기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되었다. 아랍인들은 13세기 경마에 적합한 말을 고르는 데 인공 수정을 응용했다. 첫 '공식' 인공수정은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라자로 스팔란차니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1780년 파비에서 인공수정으로 골격이 좋은 강아지 한 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인공수정 이후 100년 동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양파인도에서 유래된 아라비아 숫자 표기가 유럽 지역에 일반화된 것은 13세기 초엽이다.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아랍인들이 쓰던 이 계산 방식을 기독교 세계로 들여와 널리 보급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아랍인들 중에서도 9세기경 수학자 무하마드 이븐 알카레스미가 아라비아 숫자 사용을 장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10진법의 창시자'이기도 하다.아라비아 숫자심장이식최초의 시험관 아기는 1979년 7월 25일 영국의 올드햄 병원에서 태어난 루이즈 브라운이다. 다년간 체외 수정을 연구한 페트릭 스텝토우 박사와 로버트 에드워즈 박사 덕택에 루이즈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루이즈의 어머니는 나팔관이 손상되어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한편 프랑스의 첫 번째 시험관 아기는 여자아이로, 1982년 2월 25일 클라마르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기의 부모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망딘느라는 이름을 지어 놓았다. 작크 테스타르 교수와 그의 동료 르네 프리드만 교수가 아망딘느의 탄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공동 연구로 '체외 수정과 배(胚) 이식'에 성공했다.이집트에서 제5천년기의 것으로 보이는 식물성 섬유가 발견되었다. 라스카 유적에서는 귀가 달린 바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실을 다루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는 제5천년기부터 메소포타미아, 인도, 나일강 유역에서 재배되었다. 모직물 또한 6,000년 전에 이집트인들에 의해 최초로 직조되었다.실1967년 12월 3일 크리스티안 버나드 박사가 인류 최초로 심장이식 수술을 집도했다. 환자는 58세의 루이 워스캔스키였고 기증인은 25세의 드니즈 앤 더블이었다. 수술은 남아프리카의 그릇셔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워스캔스키는 수술 후 18일밖에 살지 못했다.시험관 아기1914년 시카고의 외과의사 찰스 밀러가 행한 기상천외한 시술이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는 귀 절단 수술을 시작으로 새롭고도 특이한 여러 가지 시술을 감행했다. 그가 행한 수술들은 이를테면 너무 큰 입 줄이기, 벌어진 콧구멍 줄이기, 보조개 만들기 등등 다양했다. 미국인들은 이 진귀한 수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름난 의사들이 밀러의 뒤를 이어 성형수술의 길을 찾아 나섰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성형수술을 한 사람은 피부과 의사인 노엘 박사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교정 외과수술이 발달했다. 이는 전쟁 부상병들의 끔찍한 수족 절단을 방지하는 것이 목표였다.최초의 세계일주는 에스파냐의 엘 카노가 성공했다. 그는 샤를르 캥을 위해 마젤란이 이끌고 떠났던 다섯 척의 탐험선단 중 콘세페이온 호의 선장이었다. 마젤란은 1521년 4월 17일 필리핀 원주민과의 교전 중에 사망했다. 그 후 카노는 수많은 위험과 난관을 이겨내고 빅토리아호를 타고 귀환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일주자라는 자랑스런 칭호를 얻게 되었다. 처음 떠났던 200여 명의 선원들 중 함께 귀환한 숫자는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 포르투칼, 독일인 등을 모두 포함해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첫 세계일주는 1519년 9월 20일부터 1522년 9월 6일까지 3년이 걸렸다.스케이트의 탄생지는 대서양 연안의 네덜란드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리슬란드이다. 이곳에서 2,000년 전 뼈로 만든 스케이트가 발굴되었다. 스케이트는 중세시대 네덜란드의 가장 보편적인 운송 수단이었다. 이때는 뼈 대신 나무나 철을 이용해 스케이트를 만들었다. 그 후 유럽 한대지방에서 스케이팅은 인기를 구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은반 위에서 미래의 남편감을 만났다.세계일주스케이팅사진기자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진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와 관련된 직업들도 덩달아 빛을 보게 된다. 당시 크림전쟁(1854-1856)과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사진술의 호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두 전쟁 덕분에 오늘날 '르포르타주'라는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었다. 크리미아에서는 영국의 로저 펜튼과 미국의 매튜 브래디, 알렉산더 가드너가 전쟁의 참상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전문가들은 암실로 개조한 화물 운송차에서 콜로디온 판을 현상하곤 했다. 남북전쟁 때 조지 버나드는 공식 사진기자 자격으로 남부 윌리엄 셔먼 장군을 따라 이동하며 전쟁의 생생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불타버린 폐허 도시 애틀랜타의 모습도 찍었는데 75년 뒤 영화제작자 빅터 플레밍은 이 영상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에 응용했다.성형수술4. ㅅ - ㅇ역사상 비둘기는 선사시대부터 길들여졌으며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초기 이집트 왕조의 유물에서도 비둘기를 다룬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무렵부터 비둘기를 이용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먼 곳까지 소식을 전했다. 984년 이슬람에서도 비둘기를 통신사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역사상 첫 기록에 해당한다. 당시 튀니지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를라비데스 최고 통수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브라힘은 최정예 부대를 보내 반란민을 토벌하도록 했다. 진압 과정은 잔인했지만 성공을 거두었고, 이 기쁜 소식을 당시 수도 알 카이라완에 머물던 이브라힘에게 전한 것이 바로 비둘기라고 이집트의 한 역사가는 주장하고 있다.비둘기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버섯 중독은 그리스의 비극시인 에우리피테우스에 관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를 포함한 일가족이 독버섯 중독으로 사망했다. 한편 54년경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네 번째 부인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 당시 그녀의 살해 방법은 버섯요리를 좋아한 황제에게 독성 알광대버섯의 즙을 낸 요리를 먹이고 주치의 크세노폰을 매수하여 클로신트를 다량으로 함유한 약을 조제해 황제에게 바치도록 했다. 한편 이기주의가 야기한 버섯중독 사망도 있다. 딱한 희생자는 다름 아닌 교황 클레망 1세였는데 그는 혼자만 몰래 먹을 속셈으로 일반인들에게 궁 주변에 핀 버섯의 채취 행위를 일체 금했는데, 결국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버섯중독기원전 280년경 이집트의 라기데스 왕조를 창건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최초의 박물관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성전으로 쓰임과 동시에 모든 지적 연구활동의 온상지에 불과했고, 박물관 역할의 예술작품 컬렉션은 부차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귀족, 대상들의 배려에 힘입어 유럽에 본격적인 미술 컬렉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521년 역사가이자 인본주의자인 이탈리아의 파울로 조비오가 근대적 개념의 박물관을 건립했으며, 이때부터 이러한 용도로 쓰이는 건물을 박물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박물관문신40,000년 전부터 신석기인들은 자기 부족과 동물 떼를 알아보기 위해 문신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4,000년 전 이집트의 미라에도 문신을 새긴 흔적이 있다. 20세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도형수를 비롯해 나치에 의해 감금된 포로들, 19세기 영국의 탈옥수 등도 몸에 문신을 새겼다. 이는 옛날 로마의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