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지음 | 뜨인돌
로도스 섬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중의 하나이며 고대의 격전지로 수많은 정복자들이 탐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섬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청동거상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청동거상은 조각가 샤레 드 렌도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경 로도스에서 점령군 시리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완전히 축출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트라키 항구에 세워졌다.
34미터 높이의 청동거상은 바다를 응시하며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데 한쪽 다리는 단단한 땅 위에, 다른 쪽 다리는 방파제 위에 올리고 있고 그 사이를 거대한 함선이 지나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동상의 두 다리 사이로 배가 지나가려면 최소한 거상의 높이가 120미터는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로도스 섬의 거상이 그만큼 웅장하였기에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34미터의 높이의 헬리오스 거상을 만들기 위해 광산을 고갈시킬 정도로 많은 청동을 사용했고, 그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업이었다.
헬리오스는 태양 또는 그 의인신으로 천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이야기를 듣는 신으로 태양의 수레를 끌면서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의 인도를 받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린다고 알려져 있다. 헬리오스는 제우스가 땅을 신들에게 나누어 줄 때 태양을 몰고 있어서 자기 몫을 분배받지 못했다. 이에 제우스는 로도스 섬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로도스는 헬리오스 신을 유일하게 숭배하는 곳이다.
그런데 거상이 건설된 지 66년 만에 무릎 부분이 파괴되어 전복되자 로도스인들은 청동상을 재건하기 위해 델피의 신전에 '청동상을 재건해도 되는가?'라고 질의했다. 그러나 델피 신전의 신탁은 놀랍게도 청동상 복원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주었다. 델피 신전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지만 로도스인들은 신탁의 말을 존중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복원되지 않은 채 현장에 부서진 그대로 방치되어 버렸다.
고대에 청동의 가격은 금과 같을 정도로 매우 비쌌다. 아랍인들이 로도스 섬을 점령한 시기는 아주 짧았지만 그들은 거상을 보자마자 상당한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653년에 아랍의 칼리프우드만의 지시로 현장에 방치되어 있던 거상은 잘게 잘려져 시리아로 옮겨 진 후 경매에 내놓아 지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 에데스에 의해 구입된 청동 조각들은 9백여 개의 청동 낙타로 만들어졌다.페르시아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인에게 나라를 돌려주지 않았다. 이집트는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인 데다 당시 세계 최고의 부를 갖고 있었으므로 이집트를 직접 통치할 생각을 굳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를 이집트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태동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건축가는 그리스인 디노크라테스였다.
알렉산더는 파로스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레오티드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고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에 자신이 구상한 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는데, 그곳이 현재의 알렉산드리아이다.
건축가 디노크라테스는 도시를 동서와 남북으로 나누었는데, 그 길이가 5.32킬로미터 폭이 1.42킬로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건설되어, 건설된 지 2세기가 조금 지났을 때 주민의 숫자가 무려 30만이나 되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항구에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 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에도 선원들이 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기원전 280년경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이유이다.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에 건설된 파로스 등대의 높이는 거의 100미터가 넘는다. 등대는 5층으로 되어 있고 옥상에 봉화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제우스의 조각상이 있었다.
파로스의 등대가 바빌론의 성벽을 밀어내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세운 것은 19세기말부터였는데, 결론적으로 파로스 등대를 건설 할 때 이미 100미터가 넘는 고층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파로스 등대는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14세기 중엽에 완전한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1994년에 프랑스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 깊이 7미터의 바다 속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이집트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보다 먼저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던 지역이 여러 곳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다른 문명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여타 나라들과 달리 아직도 4천 년 이상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자체만을 놓고 볼 때 피라미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에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일 전부터 아득히 멀리 보이는 거대한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지평선 상에 자그마한 삼각형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완벽한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쿠푸의 대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개나 사용되었다. 중량으로 따지면 거의 700만 톤의 돌을 사용했다는 얘긴데 10톤 짜리 트럭으로 70만대 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일반적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말할 때 이집트 내에 있는 100여 개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쿠푸의 대 피라미드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 피라미드에 쓰인 모든 돌을 연마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은 돌과 구리로 된 연장이 고작이었고, 철도 같은 육상 운반기계도 없었다. 운반할 때 쓰는 도구로는 썰매와 이를 끌기 위한 밧줄과 도르래가 있을 뿐이었으며, 진흙과 벽돌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기구가 재료와 도구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세웠으니 피라미드를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기자 지역의 3개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약 250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중 제일 큰 쿠푸의 대 피라미드는 약 20년 동안 연인원 약 7천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였다. 대 피라미드는 동서남북의 변의 길이가 약 230미터이며 높이는 약 146미터이다. 기울기는 약 51도 정도 되며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된다. 18세기말 나폴레옹 시대의 수학자 몽즈는 대 피라미드의 체적이 260만 세제곱 미터나 되며 이것만 갖고도 프랑스의 국경을 3미터 높이에 30센티미터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다고 계산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이 범람기는 최소한 3,4개월 가량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가 되면 모든 농부들이 굶주려야 했다. 경작할 나일강 가의 농지가 물에 잠기기 때문인데, 당연히 파라오는 이집트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이 대책이 바로 피라미드 건설이었다.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은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는데 지원자가 많았다고 한다. 보수는 현물로 직접 지급했고, 이는 인부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하지 않는 정도의 양이었다. 파라오는 죽음 후의 영광된 장소를 마련하고 국민들은 일자리를 얻게 되는 훌륭한 실업정책 사업이었던 것이다.
대 피라미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논쟁거리는 현재 비어 있는 석관이 있는 공간이 진짜 파라오의 현실(玄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 피라미드 내에 비밀의 방, 즉 진실한 쿠푸의 현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고 프랑스, 일본, 독일 팀들이 탐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피라미드를 더욱 더 신비한 건축물로 관심을 끌게 하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제6장 로도스섬의 청동거상제7장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1663년 루이 13세 때, 뵈시우스 대사가 교황청에 있는 도서관의 책들을 열람하고 있었다. 320장이나 되는 지리에 관한 서류들을 뒤지던 뵈시우스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멈추어 버렸다. 겨우 여섯 장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인데다가 마지막 부분도 사라지고 없었지만 '비잔틴의 필론' 이라는 저자가 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는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 다. 이 자료는 비록 교황청 도서관 직원인 알타리우스에 의해 발간되었지만, 자료를 최초 로 발견한 영예는 뵈시우스에게 돌아갔다.기계기술자이며 건축가로서 많은 책을 저술한 필론은 기원전 225년경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를 저술했다. 이 원본은 유럽 전역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신드롬'을 일으킨 후에 정치적인 협상에 의해 때로는 강제적인 요청으로 유럽을 떠돌다가 지금은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 고대부터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에 수없이 많은 불가사의로 불리던 기념물 등을 필론이 피타고라스의 완벽한 수인 7개로 한정하였고, 최종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가 들어감으로써 『세계의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된 것이다.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를 갖는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있었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을 스쳐 지나간 훌륭한 왕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가장 유명하다.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앗시리아의 이리'라 불리며 공포정치로 당대의 패권을 차지한 아슈르나시르팔의 손자인 샴시 아다드 5세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 통치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직접 통치하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녀는 아시리아의 가장 용감한 전사였고 뛰어난 정치적 수완이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서쪽으로는 리비아까지 원정하여 영토를 넓혔다. 그녀가 진정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하고 공중정원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기원전 500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하여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온 왕비가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건조한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항상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정원이 있다는 의미이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발코니에 풀 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침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 세로 400미터, 폭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이 올라가는 것이다. 옥상의 커다란 집수정(集水井)에서 물이 공급되고 잎이 무성한 식물들과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심어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사람들의 머리 바로 위에 거대한 산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레토의 딸로 아폴론과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는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인들로부터 부를 가져다주는 여신으로 추앙 받았다. 에페소스인들의 아르테미스에 대한 믿음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가장 충실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50년부터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로 부상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에페소스를 점령한 후에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에페소스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새로운 신전의 건축을 명령한다. 이것이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에페소스를 점령하고 건물을 착공한 지 무려 120년이나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큰 신전이었음은 물론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이기도 하다. 높이 18미터의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의 대형 건축물이다. 현대인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약 8배나 큰 엄청난 크기임을 알 수 있다.
신전의 자재는 가장 아름답고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전면에 있는 36개의 돌기둥 하단부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고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고대 신전은 원래 신탁(神託)의 장소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전이 은행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종교에 관련된 물건을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거의 모든 신전이 매년 신을 모시는 행사를 주관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다른 지역의 신전과 다소 다른 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아주 크고 화려한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렸다는 점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356년에 헤로스트라토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불을 지른 미치광이로부터 고트족, 로마군에 이르기까지 파괴와 재건축을 되풀이하게 된다. 마침내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결국 이 유명한 신전은 종말을 맞이한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용광로를 설치하고 신전의 대리석을 모르타르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평화와 화합의 축전으로 알려진 올림픽은 올림피아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통상 4년마다 열렸다고 한다. 올림픽은 종교와 예술, 스포츠의 혼합이었다. 도시 국가마다 각각의 신을 섬기던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이 개최될 때면 각지에서 몰려들어 제우스 신전에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
올림픽이 열리기 3개월 전에는 그리스 전역에 휴전이 선포되었고 이를 어긴 도시국가엔 벌금을 물렸다. 전쟁 중에도 올림픽은 열렸고 올림픽 기간 동안 어떤 논쟁이나 충돌도 금지되었으며, 재판도 중지되었고 사형도 연기되었다.
그리스에서 제우스 신은 번개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누구에게든지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이었다. 엘리스는 그리스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제우스 신전이 있는 올림피아를 관리하고 올림픽을 잘 치르는 것이 주임무였다.
엘리스인들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신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보다 가까이 참배하고, 한편으로는 부정행위를 하면 제우스신의 벼락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제우스 신전을 건립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되고 40여 년이 지나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