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페셜
정종목 지음 | 효형출판사
1. 3000년 전의 고래사냥그들은 고래의 상태를 알고 있었나고려(고구려)와 백제 전성기에 백만 강병이 남쪽의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 중국을 크게 압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요동을 정벌하려 했 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1998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출발한 4명의 탐사대원은 혹독한 추위, 거센 파도와 싸우며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항해 25일째인 1월 25일 새벽, 일본 해상에서 폭풍우에 휩쓸린다. 이들은 일본 오키군도 오고섬 서쪽 7km 해상에서 구조 도중, 풍랑으로 뗏목이 좌초되면서 3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건 바로 발해의 옛 항로였다. 과연 1300년 전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는 존재했을까? 그렇다면 그 출발지는 어디에 있을까?발해가 동해를 건넌 까닭을 알기 위해 좀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발해의 당나라 공격이다. 이 전투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었으며 승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산둥 반도에 위치한 당의 등주성.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때는 732년, 대장군 장문휴는 수군 정예 2만여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성으로 진격한다. 파죽지세로 등주성을 함락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인다. 우세한 군사력과 속전속결 전략이 거둔 승리였다. 한국사에서 전쟁은 주로 방어개념으로 귀주대첩이나 살수대첩 모두 방어에 성공한 예인데,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한 이 사건은 우리 역사상 정규 군대가 외국을 공격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발해에게 불리했다. 발해에 복속된 흑수말갈족이 당과 손잡음으로써 발해는 서쪽의 당, 북쪽의 흑수말갈, 남쪽에는 당시 당과 제휴한 신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이 삼각구도를 깨지 않는 한 발해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절대절명의 형세였다. 이런 불리한 정세를 타개하고자 발해가 선택한 것이 일본이다. 일본으로 하여금 배후에서 신라를 견제토록 한 다음 당과 흑수말갈의 제휴를 깨기 위해 등주를 공격한 것이다.
발해가 당을 공격했을 때 당의 대응은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특이할 만한 반격도 없었고 오히려 발해우대정책을 펼쳤다. 이것은 당시 숨막히는 정치, 외교전에서 동해를 건넜던 한 가지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3000년 전의 고래사냥2. 동북아 패권, 고구려-수나라 전쟁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던 까닭은천하의 중심은 어디인가문명대전난공불락의 고구려성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5천 명, 그러나 되돌아온 군사는 오직 2700명뿐이었다.발해 사회는 왕과 중앙관료들이 있지만 지방에도 독자적인 세력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중앙관료체제 밖에서 상당한 힘을 지닌 이 독자적인 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중앙정부는 그들 일부를 관료로 편입시키기도 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참여시키기로 했다. 일본으로 간 '수령'들은 대체로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수령을 중심으로 발해의 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역을 전개했다. 첫날은 관리들과, 둘째 날은 수도사람들과, 셋째 날은 시장상인들과 거래를 한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사신들은 첫날의 관무역에서 일본화폐로 40만 냥을 얻었다고 한다. 이 40만 냥의 돈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요즘 돈으로 6억 6천만 원이다.
발해사신들이 돌아가는 그날까지 일본왕실의 대접은 극진했다. 사신들이 한 번 다녀갈 때마다 심각한 무역역조를 감수해야 했지만 일본으로서는 발해를 통해 당의 문물을 수입해야 했고 발해는 일본이 갖지 못한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할 수 없었다. 신당서(新唐書)는 발해에 대해 "발해 13대 경왕에 이르러 고금의 문물과 제도를 완비하여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나라.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국인 당이 발해를 이렇게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발해의 영토는 과연 어디까지였을까? 발해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장소를 파악하고 외국 기록들을 꼼꼼히 분석/종합한 결과 발해 영토는 요동에서 요하를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송화강 일대를 지나 흑룡강, 즉 흑수 지역에 이르며, 흑수말갈과 인접해 있는 지금의 연해주 지역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 다시 이 드넓은 땅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왕조가 있었다. 그 왕조를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의 무대는 한반도로 축소된다. 우리 역사상 마지막으로 만주를 지배했고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졌던 그 왕조의 이름, 발해.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시대 이후의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그 시기, 통일신라의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 그래서 최근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발해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끌어안는다는 의미이다.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역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1300년 전의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문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 역사는 이 암각화를 통해 수천 년의 침묵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1970년 울주에서 처음 발견된 암각화는 이후 고령, 남원 등지에서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 현재까지 남한에서만 16곳이 발견되었다.
암각화가 그려진 시기는 대개 지금부터 약 3000여 년 전, 그러니까 청동기 시대(기원전 6-7세기) 사람들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바위에 그림을 새긴 것일까?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우리 나라에 있는 16곳의 암각화 중 바로 이런 의문을 푸는 데 좋은 단서가 되는 것은 가장 사실적인 그림으로 알려진 울주군 언양면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다.눈에 띄는 것은 각종 동물 그림들로, 수천 년 전에 새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림의 윤곽이 제법 선명하다. 암각화는 지붕 모양의 암벽에 가려져 있어 눈이나 비를 직접 맞지 않는 곳에 있으며 너비 6m, 높이 3m 남짓한 바위 면의 중앙 부분에 일일이 쪼아서 새긴 그림들이 밀집되어 있다. 암면 하나에 대개 220~230종의 동물들이 보이지만 밑에 겹쳐 새겨진 것까지 합하면 300여 종류가 꽉 차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암각화다. 우선 그림의 중간부분을 살펴보면, 왼쪽은 대부분 바다동물이고 오른쪽은 대개 육지동물이다. 왼쪽은 동쪽, 그러니까 동해 쪽이고 오른쪽은 서쪽, 그러니까 육지 쪽이다.
바다동물에서 유난히 많은 것은 고래지만 그 중에는 최근까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쏭달쏭한 것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것도 고래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느러미가 붙어 있고 전체적으로도 뭉툭해서 다른 고래들에 비해 기형적으로 보이는데, 누워 있는 고래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고래를 아주 가까이 접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다른 고래 그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래는 세계적으로 100여 종, 우리 나라에 조사된 바로는 약 10여 종 정도가 동해안으로 회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이들을 거의 다 확인할 수 있다. 장생포 일대에서 고래잡이를 오래 해온 이들은 그림을 보면 고래의 종류나 생태를 훤히 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고래를 늘 접했던 사람들이 그렸다는 말인데, 동력선도 없고 총도 없던 3000여 년 전에 고래를 잡는 일이 가능했을까? 암각화에는 그 단서가 되는 그림도 들어 있다. 큰고래의 왼쪽에 초생달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게 바로 배다. 자세히 보면 배에 20명의 사람이 타고 있다. 이 그림은 배보다 더 큰 고래를 배에 연결해 끌고 가는 모습인데 배와 고래 사이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이게 바로 부구(浮球)라는 것이다. 고래잡이를 할 때 쓰는 부구는 고래와 배 사이에 연결한다. 크고 힘센 고래가 작살을 맞으면 저항이 격렬해지는데, 부구로 인해 배에 충격이 적게 오고 그만큼 고래는 빨리 지친다. 또한 고래가 죽어도 물에 가라앉지 않는다.반구대를 돌아 나가는 태화강은 울산 만에서 동해와 만난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이곳은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다. 암각화에는 고래를 잡는 과정도 자세하게 나온다. 바위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새겨져 있는데, 과연 당시에 이런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동안 발굴된 유물들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함을 말해준다.
청동기 시대에 뼈로 만든 바늘 같은 경우 바늘구멍이 직경 2m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 정도에 끊어지지 않는 실을 뽑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물이라든가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뜻한다. 암각화에는 적게는 10명, 많게는 20명까지 탄 배가 새겨져 있다. 배는 큰 나무를 골라 불을 지른 다음 돌자귀, 돌도끼로 깎아내서 만든다.
인도네시아 나마렐라족은 지금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래잡이를 한다. 그들의 고래잡이 과정에서 3000년 전의 고래잡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고래잡이는 보통 10여 명이 한 조가 되고 도구는 복선과 작살이 전부였다.
지금의 쇠 대신 뼈나 돌로 작살을 만들었을 뿐 3000년 전에도 고래잡이는 가능했다. 3000여 년 전 태화강을 따라 회유해오는 고래들. 이 지역 선사인들은 그 고래를 잡았던 것이다.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수나라에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한다.긴 창은 하늘을 덮고 수레와 칼은 햇빛에 번쩍이네. 산 위에선 사슴과 노루를 잡고 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칼을 들어 먼 나라를 친다 하네.
하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머리 잘리고 어찌 상하지 않으리오.중국 수나라의 두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양광. 후대 사람들은 그를 수양제라 부른다. 이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양제. 그는 왜 이렇게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일까? 수양제는 우리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일으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장장 16년에 걸친 장기전이었고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우리 역사는 물론 중국 역사에도 당시까지 그런 전쟁은 없었다.중국 양자강 하류에 있는 양주. 양주는 수양제가 살아 생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곳이다. 13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수양제의 자취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양주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마을에 수양제의 무덤이 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 그러나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수양제임을 밝히고 있다.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이 드러나 있고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다. 누군가 봉분에 말뚝을 박아 놓기도 했다. 수양제의 무덤은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을 정도로 수난을 겪었다.
이곳 양주시의 문물관리국의 장완수 연구원은 "하늘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는 민간전설이 이곳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때 무덤이 세 부분으로 쪼개졌는데 모두 수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라며 저간의 사정을 알려줬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받은 것일까?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다. 중국의 3대 기적 중의 하나라 일컫는 대운하는 수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년 동안 50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km에 이른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수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토록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이것은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함은 물론 중국의 통일 전쟁과 고구려 정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 때도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좌군대장 우문술이 지휘하는 52만 8천 명, 우군대장 우중문이 지휘하는 52만 8천 명, 수양제가 직접 이끄는 중군 26만 4천 명이었다.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 명이었다. 이들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육군 100만은 요하 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는 총 40일이 걸렸으며 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k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원정이었다.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을까?
589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다. 400년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후 수나라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무릎을 꿇린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수나라가 중국통일에 동원한 병력은 50만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그 두 배가 넘는 무려 132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셈이다.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중국 요서 지방의 조양시는 인구 80만의 작은 도시다. 하지만 1300년 전 이곳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있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북방의 이민족과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 아시아 상인까지 대거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위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 아시아를 넘어 중앙 아시아로 확대되었는데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골고원에서 발견되었다. 돌궐이 세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라칸트 아프라시압 벽화는 고구려 사신들이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는 438년, 800필의 말을 남송으로 수출한다. 이처럼 군사강국 고구려의 배경에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다. 이런 거대한 시장과 교역권, 이것이 바로 고구려-수나라 전쟁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동방사회의 맹주로서 뛰어난 고분벽화와 천문학, 관측술을 통해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했다. 수나라는 천자의 지배하에 동아시아를 통일하려 했고, 이를 거부한 고구려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문명대전, 두 나라는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다. 수양제는 100여 개의 궁궐 방마다 미녀를 데려다 놓고 호의호식을 즐기다가 전쟁에 패한 지 4년 뒤 고구려 원정군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당한다.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이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선다. 전쟁이 끝난 지 5년 후 당이 고구려에 국서를 보낸다.우리 나라와 귀국이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 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