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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정종목 지음 | 효형출판사
1. 3000년 전의 고래사냥



문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 역사는 이 암각화를 통해 수천 년의 침묵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1970년 울주에서 처음 발견된 암각화는 이후 고령, 남원 등지에서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 현재까지 남한에서만 16곳이 발견되었다.

암각화가 그려진 시기는 대개 지금부터 약 3000여 년 전, 그러니까 청동기 시대(기원전 6-7세기) 사람들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바위에 그림을 새긴 것일까?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우리 나라에 있는 16곳의 암각화 중 바로 이런 의문을 푸는 데 좋은 단서가 되는 것은 가장 사실적인 그림으로 알려진 울주군 언양면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들



눈에 띄는 것은 각종 동물 그림들로, 수천 년 전에 새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림의 윤곽이 제법 선명하다. 암각화는 지붕 모양의 암벽에 가려져 있어 눈이나 비를 직접 맞지 않는 곳에 있으며 너비 6m, 높이 3m 남짓한 바위 면의 중앙 부분에 일일이 쪼아서 새긴 그림들이 밀집되어 있다. 암면 하나에 대개 220~230종의 동물들이 보이지만 밑에 겹쳐 새겨진 것까지 합하면 300여 종류가 꽉 차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암각화다. 우선 그림의 중간부분을 살펴보면, 왼쪽은 대부분 바다동물이고 오른쪽은 대개 육지동물이다. 왼쪽은 동쪽, 그러니까 동해 쪽이고 오른쪽은 서쪽, 그러니까 육지 쪽이다.

바다동물에서 유난히 많은 것은 고래지만 그 중에는 최근까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쏭달쏭한 것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것도 고래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느러미가 붙어 있고 전체적으로도 뭉툭해서 다른 고래들에 비해 기형적으로 보이는데, 누워 있는 고래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고래를 아주 가까이 접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다른 고래 그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래의 상태를 알고 있었나



고래는 세계적으로 100여 종, 우리 나라에 조사된 바로는 약 10여 종 정도가 동해안으로 회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이들을 거의 다 확인할 수 있다. 장생포 일대에서 고래잡이를 오래 해온 이들은 그림을 보면 고래의 종류나 생태를 훤히 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고래를 늘 접했던 사람들이 그렸다는 말인데, 동력선도 없고 총도 없던 3000여 년 전에 고래를 잡는 일이 가능했을까? 암각화에는 그 단서가 되는 그림도 들어 있다. 큰고래의 왼쪽에 초생달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게 바로 배다. 자세히 보면 배에 20명의 사람이 타고 있다. 이 그림은 배보다 더 큰 고래를 배에 연결해 끌고 가는 모습인데 배와 고래 사이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이게 바로 부구(浮球)라는 것이다. 고래잡이를 할 때 쓰는 부구는 고래와 배 사이에 연결한다. 크고 힘센 고래가 작살을 맞으면 저항이 격렬해지는데, 부구로 인해 배에 충격이 적게 오고 그만큼 고래는 빨리 지친다. 또한 고래가 죽어도 물에 가라앉지 않는다.

3000년 전의 고래사냥



반구대를 돌아 나가는 태화강은 울산 만에서 동해와 만난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이곳은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다. 암각화에는 고래를 잡는 과정도 자세하게 나온다. 바위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새겨져 있는데, 과연 당시에 이런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동안 발굴된 유물들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함을 말해준다.

청동기 시대에 뼈로 만든 바늘 같은 경우 바늘구멍이 직경 2m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 정도에 끊어지지 않는 실을 뽑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물이라든가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뜻한다. 암각화에는 적게는 10명, 많게는 20명까지 탄 배가 새겨져 있다. 배는 큰 나무를 골라 불을 지른 다음 돌자귀, 돌도끼로 깎아내서 만든다.

인도네시아 나마렐라족은 지금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래잡이를 한다. 그들의 고래잡이 과정에서 3000년 전의 고래잡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고래잡이는 보통 10여 명이 한 조가 되고 도구는 복선과 작살이 전부였다.

지금의 쇠 대신 뼈나 돌로 작살을 만들었을 뿐 3000년 전에도 고래잡이는 가능했다. 3000여 년 전 태화강을 따라 회유해오는 고래들. 이 지역 선사인들은 그 고래를 잡았던 것이다.

2. 동북아 패권, 고구려-수나라 전쟁



고려(고구려)와 백제 전성기에 백만 강병이 남쪽의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 중국을 크게 압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요동을 정벌하려 했 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

중국 수나라의 두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양광. 후대 사람들은 그를 수양제라 부른다. 이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양제. 그는 왜 이렇게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일까? 수양제는 우리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일으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장장 16년에 걸친 장기전이었고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우리 역사는 물론 중국 역사에도 당시까지 그런 전쟁은 없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던 까닭은



중국 양자강 하류에 있는 양주. 양주는 수양제가 살아 생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곳이다. 13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수양제의 자취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양주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마을에 수양제의 무덤이 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 그러나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수양제임을 밝히고 있다.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이 드러나 있고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다. 누군가 봉분에 말뚝을 박아 놓기도 했다. 수양제의 무덤은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을 정도로 수난을 겪었다.

이곳 양주시의 문물관리국의 장완수 연구원은 "하늘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는 민간전설이 이곳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때 무덤이 세 부분으로 쪼개졌는데 모두 수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라며 저간의 사정을 알려줬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받은 것일까?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다. 중국의 3대 기적 중의 하나라 일컫는 대운하는 수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년 동안 50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km에 이른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수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토록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이것은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함은 물론 중국의 통일 전쟁과 고구려 정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 때도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좌군대장 우문술이 지휘하는 52만 8천 명, 우군대장 우중문이 지휘하는 52만 8천 명, 수양제가 직접 이끄는 중군 26만 4천 명이었다.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 명이었다. 이들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육군 100만은 요하 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는 총 40일이 걸렸으며 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k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원정이었다.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을까?

589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다. 400년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후 수나라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무릎을 꿇린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수나라가 중국통일에 동원한 병력은 50만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그 두 배가 넘는 무려 132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셈이다.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천하의 중심은 어디인가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당시 신라 땅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는 신라에 고구려 군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군대 주둔 사실은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진출은 남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13명의 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 속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고증을 통해 파악된 위치는 놀랍게도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이다. 이것은 5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가 된다. 당시 중국은 5호 16국 시대로,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해 나라를 세웠다가 망하고 왕조들이 단명해 자주 바뀌는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가 중국에 진출한 것이다.

한편 광개토 대왕의 비문을 보면 당시 고구려인의 기개를 읽을 수 있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7m 높이의 이 비문은 광개토대왕을 왕 중의 왕인 '태왕'이라 부르면서 태왕의 업적이 황천에 달하며, 그 위력을 사해(四海)에 떨쳤다고 새기고 있다. 함경남도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판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일컫고 있다.

이 두 가지 유물에 나타난 기록들 - 태왕, 사해, 천손이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 국가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고 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다.

문명대전



중국 요서 지방의 조양시는 인구 80만의 작은 도시다. 하지만 1300년 전 이곳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있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북방의 이민족과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 아시아 상인까지 대거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위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 아시아를 넘어 중앙 아시아로 확대되었는데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골고원에서 발견되었다. 돌궐이 세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라칸트 아프라시압 벽화는 고구려 사신들이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는 438년, 800필의 말을 남송으로 수출한다. 이처럼 군사강국 고구려의 배경에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다. 이런 거대한 시장과 교역권, 이것이 바로 고구려-수나라 전쟁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동방사회의 맹주로서 뛰어난 고분벽화와 천문학, 관측술을 통해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했다. 수나라는 천자의 지배하에 동아시아를 통일하려 했고, 이를 거부한 고구려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문명대전, 두 나라는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난공불락의 고구려성



수나라는 침공을 위해 1,000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거대한 군함을 만들어 10만 수군을 출발시킨다. 607년 수양제는 또한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을 명령하여 가공할 무기들을 만들어낸다. 수나라가 이런 무기를 만든 것은 모두 고구려의 성을 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 동안 모두 네 번의 전쟁을 치른다. 그러나 1차 전쟁과 3, 4차 전쟁에서 수나라는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패전을 숨기고 싶어서였는지 그 원인을 자연재해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살수대첩으로 알려진 제2차 전쟁이다. 그러나 살수대첩은 이 전쟁의 일부분일 뿐이다. 고구려 대 수나라. 천하의 두 중심이 맞붙었던 일전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612년 4월 수나라의 백만대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는 단 한 번도 이 성벽을 넘지 못한다. 당시 성안에서는 50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해 놓고 3개월째 수나라 백만대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양제는 고구려 평양성으로 별동대 30만을 보낸다. 수군과 합동작전을 폈지만 고구려 수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 군의 보급로를 차단한다.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별동대를 유인하여 지금의 청천강, 살수의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 군이 건너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월 초순 수나라 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다. 살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은 둑을 무너뜨려 적의 허리를 끊고 고립된 후미와 선두를 총공격한다.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압록강까지 추격한 끝에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거의 없었다. 실패의 역사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중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5천 명, 그러나 되돌아온 군사는 오직 2700명뿐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수나라에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한다.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수레와 칼은 햇빛에 번쩍이네. 산 위에선 사슴과 노루를 잡고 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칼을 들어 먼 나라를 친다 하네. 하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머리 잘리고 어찌 상하지 않으리오.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다. 수양제는 100여 개의 궁궐 방마다 미녀를 데려다 놓고 호의호식을 즐기다가 전쟁에 패한 지 4년 뒤 고구려 원정군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당한다.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이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선다. 전쟁이 끝난 지 5년 후 당이 고구려에 국서를 보낸다.

우리 나라와 귀국이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 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 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 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통일 왕조가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도전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 그것은 바로 오늘 대면하는 고구려의 참모습이다.

3.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1998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출발한 4명의 탐사대원은 혹독한 추위, 거센 파도와 싸우며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항해 25일째인 1월 25일 새벽, 일본 해상에서 폭풍우에 휩쓸린다. 이들은 일본 오키군도 오고섬 서쪽 7km 해상에서 구조 도중, 풍랑으로 뗏목이 좌초되면서 3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건 바로 발해의 옛 항로였다. 과연 1300년 전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는 존재했을까? 그렇다면 그 출발지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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