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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돌멩이와 몽둥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리차드 아머 지음 | 시공사
인간은 지구상에서 이념을 위해서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 기회를 특전으로 누릴 수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로마제국의 전성기 이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전쟁에 필수적인 무기 하나를 개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니, 그 무기는 바로 '이념을 전쟁무기로 이용하는 학문', 곧 선전(宣傳)이다.



수백 년 동안이나 기독교인들은 별탈 없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회교도들에게 싼 세금을 바치고도 기독교의 성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마침내 성전(聖戰)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기독교도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기 위해 기독교 국가에 교서, 회보, 편지, 이야기, 시 등을 보내 회교도들이 성지 여행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동방에서 수입한 후추에 독약을 탄다는 소문을 냈다. 소문을 들은 기독교인들은 꺼림칙해서 고기 양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회교도가 십자가를 짓밟고 있는 그림도 기독교국에 널리 유포되었다. 분노가 충천했다. 바야흐로 예루살렘 탈환은 도덕적 의무이자 원칙의 문제였다. 전쟁 구호는 일목요연했다. "이교도를 몰아내자!"

약 2백 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화약이 발명되기 전이었지만, 많은 십자군들에게는 화약 대신에 당시의 효과적인 추진제였던 '종교적 열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cross)와 활(bow)을 합성한 석궁(crossbow)도 있었다. 이 석궁은 종교적으로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살상률도 매우 높았다. 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으니 기독교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라는 이유를 들어 사용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가 회교도일 경우에는 기독교인도 이 무기를 쓸 수 있었으며, 세월이 흐르자 기독교인들은 그들끼리의 싸움에서까지 이 무기를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기 1099년, 신고만난(莘苦萬難) 끝에 예루살렘은 드디어 십자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무자비한 살상터로 변했다. 기독교도들에 의한 회교도 학살 장면의 기록은 인류 전사상(戰史上) 가장 피비린내 나는 연대기에 속한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승리한 기독교도들은 "글자 그대로 피의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에서 회교도들은 결국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일곱 번째의 원정이 끝날 무렵부터 예루살렘은 회교도의 수중에서 난공불락이었다. 열정을 되살려 또 한 차례 십자군을 모집할 형편도 못 되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제3원정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도 당시의 군사 지도자에게 지극히 중요한 교훈 하나를 남겼으니, 그것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아무리 부하들이 뒤에서 함성으로 응원한다고 해도 인간은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에서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제2½차 세계대전생각해 보라.

개미가 의기양양하게 뽐내면서 활보하는 광경을

개미에게는 이 얼마나 신나는 풍경일까?

눈치 살필 필요도 없다.

교묘하게 설치된 개미 덫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당당하게 먹으면 된다.

파리도 파리채 걱정할 필요 없이 그렇게 날아다닐 것이다.

그저 유유히 이 방 저 방을 날아다닐 것이다.

DDT로부터 해방된 벌레

꽃 위에서 언제까지 머물러도 좋다.

하지만 기거나 나는 뭇벌레들을 위해

빵 부스러기는 누가 던져줄 것이며

뜰은 누가 가꾸어줄 것인가?

미안하구나, 벌레들아.

단언하거니와 너희들도

우리 인간을 그리워할 때가 있을 것이다.이 전쟁은 정확히 116년 동안(1337~1453)이나 계속되었는데도, 역사가들은 백년전쟁이라고 부른다. 100년이든 116년이든 이 전쟁은 기간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셈이다. 이 전쟁은 휴전 및 협상이 거듭되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된 일종의 시리즈 전쟁이다. 백년전쟁은 영국인이 프랑스의 주권을 주장하는 데서 발단했다. 영국인들은, 1066년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프랑스인이었던 만큼 프랑스 땅도 영국 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하고 영국 왕이 되었으니까 영국 왕은 마땅히 프랑스 왕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영국인이 이것을 깨닫는 데 271년이 걸린 셈이다.



영국인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프랑스인이 영국을 정복한 만큼, 프랑스 왕은 영국 왕을 겸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프랑스인들의 편협하고도 약간은 국수주의적인 견해에 따르면(이 때문에 백년전쟁이 일어난 것이지만), 프랑스 왕은 어디가지나 프랑스 왕, 영국 왕은 어디까지나 영국 왕이었다. 한편 전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불씨는, 영국과 프랑스가 영불해협이 서로 자기들 것이라고 우긴 데 있었다.



장궁(長弓)에 힘입어 영국군은 크레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프랑스군의 숫자는 영국군 숫자의 갑절에 달했지만, 그들의 무기는 석궁뿐이었다. 석궁은 영국군의 주무기인 장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주목(朱木)으로 만들어진 장궁의 길이는 자그마치 1미터 80센티미터에서 2미터에 달했다. 이 장궁이 쏘아보내는 길이 95센티미터에 이르는 화살은 상대편 기사의 사슬갑옷을 꿰뚫는 것은 물론 2백 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군까지도 죽일 수 있었다. 기나긴 전쟁 무기사에서 기나긴 활의 등장은 괄목할 만한 진보의 성과였다.



그러나 영국군에게 장궁이 있었다면, 프랑스군에게는 잔 다르크가 있었다. 평범한 시골 처녀였던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백성들을 지휘하여 영국군에게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탁월한 야전군 사령관은 훈련을 통하여 양성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잔 다르크는 결국 사로잡혀 전범(戰犯)이 아닌,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백년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영국군은 프랑스 땅에서 쫓겨나 항구도시 칼레를 붙들고 늘어졌다. 영국 입장에서 보면, 과연 치를 만한 전쟁이었는지 의구심이 일었을 터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철두철미한 파괴와 살상의 본보기였다는 점에서, 무가치한 전쟁은 아니다. 이 전쟁은 장궁의 발달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기사를 동원하던 봉건제도를 국가 상비군 체제로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했으며, 이때부터 군인들에게 정기적인 봉급과 전리품의 배당이 돌아갔다. 이로써 귀족의 특권이던 군 복무는 직업군인에게는 쓸 만한 출세의 방편이 되었으며, 일반 시민에게는 의무가 되었다.나폴레옹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열 살에 군사학교에 들어간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지휘하고 싶어했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적을 무찌르고 싶어 안달했다. 나폴레옹의 키는 평균치에도 못 미쳤다. 그래서 그는 모자라는 치수를 보충하기 위해 되도록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 말안장에 올라앉은 채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나폴레옹은 군사와 정치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일찍부터 간파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원정기간 동안 그는 집정내각에 선물을 보냈고, 파산 직전인 국고에 돈다발을 안겨주었으며, 파리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수한 미술품을 보냈다. 이 시절, 무기 분야에서는 이전 시대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1739년 프랑스의 혁명 정부가 채택한 국민개병제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당시 프랑스 육군은 75만 명 가까이 증강되었는데, 이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래 살인에 뜻을 둔 집단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과학기술 재원도 거국적으로 동원되었다.



전술에 있어서, 나폴레옹은 대규모의 선제포격을 감행하고, 총검을 든 보병을 앞세우거나 적의 취약점을 강타하는 방법을 즐겨 썼다. 그는 보병의 걸음 속도를 분당 70보에서 120보로 늘렸다. 정복해야 할 곳이 많아서 꾸물거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보병들 옆으로 말을 달릴 때마다 그는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그래도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좋아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도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하는 것을, 또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손은 군복 깃에 찔러 넣고도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분명히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으며, 격조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승승장구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둔 직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했다. 하지만 피라미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영국, 프러시아 제국, 스페인, 러시아, 그리고 앞을 막아서는 나라들을 상대로 일련의 원정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 침공 때는 나폴레옹도 신통치 못했다. 나폴레옹은 보로디노에서 러시아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모스크바에 입성하기는 했으나 나폴레옹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던 러시아인들이 나폴레옹이 군대가 기거할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모스크바를 홀랑 불태워버렸다." 나폴레옹은 눈과 얼음을 헤치고 퇴각을 감행했다. 고약한 날씨, 고약한 길, 고약한 코사크 기병대가 합세하여 나폴레옹 군대를 괴롭혔다. 수천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얼어죽었다. 나폴레옹도 동상에 걸린 나머지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러시아 원정으로 득을 본 프랑스인은 화가 장 메소니에 한 사람뿐이다. 러시아의 설원을 지나 파리로 회군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그의 그림은 회군도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모스크바에서 회군한 뒤부터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리막길뿐이었다. 흥미롭게도 바르게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뜻이 같은 회문(回文)으로는 세계 최장의 문장 중 하나인 '엘바로 오기 전에는 만사가 여의하더니(Able was I ere I saw Elba)'는 물론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귀양간 뒤에 한 말이다. 그 직후에 나폴레옹은 엘바에서 탈출, 백일천하와 워털루 전투를 거쳐 세인트 헬레나에서 최후의 날을 맞았다. 그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가?' 하고 자문했다. 나폴레옹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이 없었더라면 법전,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20프랑짜리 프랑스 금화, 크림을 채운 직사각형 모양의 과자, 나폴레옹의 무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세계 전사(戰史)에서의 그의 지위는 자못 확고하다.한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모든 대륙, 모든 대양에서 골고루 치러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도시에 대한 폭격을 통하여 모든 소시민에게 참여의식을 심어주었던 전면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준비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은 중국을 침공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국제연맹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수백 년을 그래왔듯이) 이런 짓을 저지름으로써, 그들은 침략전쟁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증명했다.



독일의 지도자 히틀러는 그저 세계를 정복해 보겠다는 케케묵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은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온, 대단히 참신한 것이었다. 특정 국가를 침공하기 직전에는 꼭 강화조약을 맺고 호의를 나타냈다. 상대가 오스트리아였을 때는 정식 강화조약을 맺는 대신 찬사를 늘어놓았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거나 통일시킬 희망도, 의도도 없다."고 단호하게 언명한 뒤 국경 너머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군대가 새벽을 틈타 폴란드를 침공하는 것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아무 유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주변 국가를 침공했다. 그 동안 두고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많은 나라들이 연합국에 가담해 순식간에 41개국으로 불어났다. 연합국은 당시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추축국과 맞섰다. 뒤늦게 독일을 돕기 위해 이 추축국에 가입한 나라가 이탈리아다.



제2차 세계대전에 도입된 혁신적인 전술은 '블리츠크리크', 즉 전격전술(電擊前述)이다. 바로 이 전격전술 덕분에 독일은 4주 만에 폴란드 전 영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지상군과 공군 보병과 탱크로 합동작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될성부른 일은 되게 되어 있고, 제대로 될 일이라면 빨리 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 맥베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히틀러는 전격전술뿐만 아니라, '시츠크리크' 즉 교착전술에도 능했다. 독일군은 지그프리트 선에서, 프랑스군은 마지노 선에서 대치할 당시 히틀러가 쓴 전법이 바로 이 교착전술이었다. 전쟁 역사상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병력이 대치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지하 저항운동, 방공기구, 선발 징집 제도, 예광탄, 레이더, 낙하산 부대, 여군 등의 개념이 생겨났다. 연합군이 장거리 증폭격기를 개발하자, 독일군은 급강하 폭격기로 맞섰다. 히틀러도 별 수 없는 인간임이 증명된 것은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를 통해서였다.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서명한 직후 히틀러는 러시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과, 히틀러가 도착하기 직전에 마을 비우기 작전은 히틀러를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독일군으로부터 '블리츠크리크' 즉 전격전술을 배운 일본인들은 미합중국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선전포고는 고사하고 한마디 경고도 없이 말이다. 이로써 미합중국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연합국 편에 가담했다. 미국이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끝에 상륙하면서 전황은 악화 일로에서 호전 일로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했고, 일본 황제 히로히토는 뼈아픈 자기성찰 끝에야 자기가 신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신격 비슷한 것은 모두 맥아더 장군에게 인계해버렸다. 전쟁은 무수한 전쟁무기와 전쟁사에 있어서 신기록을 남긴 채 6년 만에 끝났다. 연합국과 추축국을 통틀어 군인 전사자만 1천4백만 명이었다. 민간인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전사자와 부상자의 수가 밝혀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 전쟁이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상의 전쟁이었는지 최악의 전쟁이었는지는 질과 양 중 어느 쪽을 따지느냐에 따라 여전히 하나의 논점으로 남는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지도도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지도를 다시 그릴 때의 원칙은 미래의 분쟁 요소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독일 수도 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누고, 서베를린을 동독으로 둘러싸이는 지점에 둔다는 아이디어는 가히 천재적인 것이었다. 국수주의가 전쟁 발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만큼 많은 신생국이 생겨났다. 그런데 신생국의 첫 번째 목표는 군대를 조련하고, 교육 수준을 높여 자국에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보다 큰 나라, 보다 발달한 나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을 묵사발로 만드는 데 쓰였던 원자폭탄은 '화약 이래 가장 치명적인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곧 수소폭탄, 즉 열핵폭탄에 추월당했다. 요즘 들어 자주 회자되는 핵 클럽은 열핵폭탄 산업을 일으켜보자는, 미국이 설립한 독점적인 기구에 러시아와 프랑스와 중국이 불청객으로 가세한 클럽을 말한다. 이 클럽의 회원국은 회비를 내지 않으며, 비회원국가의 희망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수소폭탄이 발명된 순간부터 이것을 보다 신속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만드는 방법도 함께 발견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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