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삶
게리 스나이더 지음 | 동쪽나라
미국 서부의 개발되지 않은 메마른 땅은 미국 정치에 기이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땅은 어떤 사람들을 변화시키면서 급진적으로 만들기까지 하였지요. 한때 서부는 그 땅으로 이주할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토지가 공유지가 되었을 때,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 토지가 미래에 공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생지의 탐험과 올바른 이해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 행동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도교 사상가들은 놀라움과 오묘한 가르침이란 '무용한 것'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미국 서부의 황무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초창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땅은 접근할 수 없고, 거주할 수 없으며, 건조하며, 금지된 땅이었습니다. 그 '쓸모 없는 땅들'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러 몇몇 사람들에게는 꿈꾸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울창한 숲은 돌아오고, 돌아오고, 다시 돌아옵니다. 미 서부의 고대 숲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유레카, 코발리스, 포틀랜드, 시애틀, 롱비우에 있는 집들은 모두 그 오래된 나무의 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의 증손자들은 강바닥에서 채취한 돌과 모래 등의 혼합재로 지은 집에서 살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때가 되면 과거의 숲은 정말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숲에서 쓰러진 나무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 나무가 살아있었던 시간과 대충 같은 세월이 걸립니다. 만일 인간의 사회가 그런 걸음으로 사는 걸 배울 수만 있다면 물자 부족도 자원소멸도 없을 것입니다. 맑은 물이 흐를 것이고, 연어는 언제라도 알을 낳으러 상류로 돌아올 것입니다.우리는 어렸을 때 직접 걸으면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장소를 익히게 되고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마음속에 구체화시키는 법을 배웁니다. 장소와 공간의 규모는 우리 몸과 그 몸이 가진 능력에 비추어 측정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1마일'은 원래 로마인이 1천 걸음을 기준해서 만든 거리 단위였습니다. 자동차와 비행기 여행은 우리가 쉽게 공간을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중국인들은 '네 가지 기품'에 대해 말합니다. 서 있는 것, 눕는 것, 앉는 것, 걷는 것이 그것인데, 이 네 가지가 '기품'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인 모양에서 우리 몸이 편안하고 완전히 우리 자신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처럼 다시 걸어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가령 약 10마일마다 작은 여인숙이나 깨끗한 캠프가 있고 지나다니는 차량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중국 전체나 또는 유럽 전체와 같은 광대한 풍경을 도보로 횡단하기 위해 여행길에 나설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를 마치 기적 같은 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세계를 보는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의 육신으로 말이지요.
동아시아에서 '산'은 종종 야생지와 같은 뜻을 지닙니다. 농경국가는 오랫동안 배수를 하고 관개를 하고 저지대를 계단식 밭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숲과 야생 동물 서식지는 농사터가 끝나는 바로 그 곳에서 시작합니다. 마을, 시장, 도시, 궁, 술집이 있는 저지대는 탐욕과 욕망과 경쟁과 장사의 취기가 있는 곳, 즉 '속진(먼지 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도망쳐 순수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산에서 동굴을 찾거나 직접 은둔처를 짓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데 수행은 그들에게 깨달음이나 적어도 건강한 장수의 삶을 줍니다. 이 은둔처가 절간 건물들의 중심이 되고, 결국 종교 지역이 되었던 것이지요.
산은 또한 수직성, 정신, 높이, 초월, 단단함, 저항, 남성성 같은 신화적 연상을 가집니다. 중국인들에게 산은 '양(陽)', 즉 건조하고 단단하고 남성이며 밝은 것의 표본입니다. 물은 여성입니다. 축축하고 부드럽고 어두운 '음(陰)'은 흐르지만 강하고, 가장 낮은 곳을 찾으며 (그리고 갈망하며), 영혼적이고, 생명을 주며, 형상을 바꾸는 것과 연관됩니다. 민중 불교의 (그리고 금강승의) 도상은 <루파스>, 즉 부동명왕(확고부동한 깨달음의 왕)과 관음보살(세파를 지켜주는 보살)의 '이미지'로 '산과 물'을 의인화합니다.
'산과 물'은 자연의 진행 전체를 가리키는 한 방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순수와 오염, 자연과 인위의 이분법을 멀리 뛰어넘습니다. 강과 계곡을 가진 그 대자연 전체란 말할 것도 없이 농지, 들, 마을, 도시, 그리고 (한때는 비교적 작았던)인간사로 가득한 속진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현실에 대한 통찰은 지금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감정을 가지라고, 자신을 통제하라고, 24시간을 지배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잘 하되 자기연민 없이 하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모아서 자가용 승용차에 합승시켜 버스가 있는 길 아래로 데려다 주는 일은 추운 아침 법당에서 경전을 염불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한쪽의 활동이 다른 쪽의 활동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며, 각각의 활동은 따분한 것일 수 있지만 둘 다 반복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답게 세상을 경험한 사람, 세련된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런 사람은 집이나 사무실 주변에서 하는 지루한 일을 등산의 비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도전과 놀이가 충만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진짜 '놀이'는 오솔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동, 인간이나 동물이 어떤 현실적이거나 정신적인 목적을 겨냥한 규칙성의 어떤 흔적으로부터 벗어난 행동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 오솔길'로 나갑니다. 그 숲길은 가능성들로 이루어진 끝없는 직물이며, 같은 주제에 대해 무수히 많은 우미한 변화가 있으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과 난로 가에서, 그리고 집 근방의 길 위에서 안락함과 위로를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또한 해야 할 이런저런 허드렛일의 지루함과 사소한 일들이 되풀이되는 진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의 법칙은 오랜 동안 반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일시성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시간의 야생지로 가게 합니다.
우리는 무생물과 생물이 진행하는 과정의 그물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과정은 지하로 흐르는 강에 부딪치고 창공에 쳐진 거미줄처럼 반짝이면서 만물을 가릅니다. 활동하고 있는 생명과 물체는 으스스하고 강인하며, 털북숭이이고 맛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길이라고 말하는 일시적인 질서정연함이라는 작은 고립된 장소보다 더 큰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큰길입니다.
우리의 솜씨나 우리가 하는 일은 내적으로 엉성하게 질서 잡힌 야성세계의 아주 작은 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길에서 비켜나 분수령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역 전체로 보면 귀향을 위해서입니다. '오솔길을 벗어난다'는 것은 '길'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오솔길을 벗어나 소요하는 것이야말로 야성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먼저 작은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몸을 돌려 야성의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기 전에 말이지요.'곰과 결혼한 여자'라는 이야기는 마리아 존스가 인류학자이며 민족역사학자인 캐서린 맥클릴란에게 해준 이야기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종류의 변형이 있는데, 그 가운데 11개가 맥클릴란의 연구서인 『곰과 결혼한 여자: 인디언의 구전 전통』(1970)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맥클릴란은 마리아 존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마리아 존스는 1880년대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녀가 백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그녀의 가족이 어렵게 췰쿠트 해안을 통해 췰쿠트 산길을 넘어 디에아에 있는 윌슨의 가게에 거래를 하러 갔을 때였다. 이것은 1880년대의 일이었고, 당시 마리아는 어렸다. 마리아 자신은 투퀘디 씨족이나 데시탄 씨족이며, 그녀의 최초의 조상은 안구운의 바닷가 마을 틀린기트에 살고 있었다고 더듬어 올라가고 있다.
그녀의 제1국어는 아타파스칸의 타기쉬 방언이지만, 틀린기트 말도 상당히 많이 쓰고 있었다. 그 말은 사실상 타기쉬 부족의 가장 중요한 원주민어가 되었다. 그녀는 영어는 별로 잘하지 못했다. 꽤 유복하고 충만한 삶을 보낸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대부분을 반장님으로 보냈다.
내가 1948년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눈이 완전히 멀어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땅다람쥐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 덮여 있는 침대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리아는 적어도 세 곡의 노래를 작곡했고, 그녀의 다 자란 두 명의 손녀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양으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의 아이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게 분명했다.
마리아는 자진해서 내게 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리아는 분명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녀는 빈번히 무언의 몸짓 손짓으로 이야기를 했고, 목소리를 바꿔 등장인물들을 구별해 주었으며, 개와 곰의 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내가 타기로 되어 있었던 카크로스에서 오는 기차를 놓칠까 봐 걱정이 된 그녀는 끝 부분에 가서는 이야기를 조금 서둘렀다.대략 1백 5십만 종의 동식물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있고, 지상에는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1천만에서 3천만에 이르는 생물종이 있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습한 열대림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윌슨 Wilson, 1989).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있는 이들 숲의 약 절반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브라질의 길거리에는 집 없는 아이들이 7백만 명이나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요?)
나머지 삼림도 2000년에 이르면 아주 작은 부분만 빼고는 사라져버릴 것 같습니다. 개간지나 심지어 노천 채굴 현장의 높이가 1마일이나 되는 갱구조차 지질학적 시간이 흐르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기 40억 년 동안 이 지상에서 진화의 순례 길을 걸어온 종들의 절멸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입니다.
우리 인간과 함께 지금까지 이 지상을 여행해 왔던 그토록 많은 생물 계보들의 종말은 우리에게 깊은 비탄과 비애를 일으킵니다. 죽음은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어느 정도는 변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 계보들 자체와 그 미래의 후손의 상실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 엄혹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당장 할 일은,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과의 일이며 싸움입니다. 인간 자신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명 생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좀더 기본적으로 마음과 영혼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혼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해 무지하며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인간이 지금가지 존재해 온 모습과 행해 온 것, 그리고 고대 인류의 삶의 방식 속에 있었던 강건한 지혜를 다시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빙하시대 이래 1만 2천년 정도가 지나갔고 앞으로 1만 2천년 정도가 다가올 이 현재의 시간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작은 영토입니다. 우리는 이 두 1만년 사이에서 인간이 저희끼리 그리고 세계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심판 받을 것이고, 또 우리 스스로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어떤 훌륭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원전에서 빠진 책장을 대조해 보고, 수로를 만들고, 별자리를 연구하는 것 말고), 그것은 자연의 다른 모든 생명체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성적인 한 패거리의 영장류 어릿광대들입니다. 그 인간이 기분이 좋아 기쁘게 음악 몇 곡을 연주할 때면 온갖 작은 생물들이 기어 나오고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이겠지요.제9장 생존과 성찬
- 탄생의 끝인문학이란 학문의 형식적 기준 가운데 하나는 텍스트의 정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는 시간 속에서 축적된 정보입니다. 암석의 층위, 어떤 습지에 쌓인 화분의 층, 나무 줄기의 밖으로 넓혀나가며 그려진 나이테를 텍스트로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역사가 남기는 층은 언어 텍스트 그 자체가 되지요.
『원시 인도 유럽어의 나무들』에서 저자 파울 프리드리히는 1만 2천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일군의 말을 통해 인도 유럽어 어족의 '의미와 뿌리'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 뿌리들은 나무의 이름입니다. 자작나무, 오리나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 사고나무, 너도밤나무가 특히 그렇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한 마리 들소의 시체나 유콘의 평야 아래로 이리저리 떠도는 큰 필적 같은 강, 또는 쿠우방미우트족과 관련 있는 고대 극지방의 세계주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서양 문화의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휴머니즘은 고대 역사와 문학에 몰두하여 깊이 감동 받은 나머지 변신했던 작가와 학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의 글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 유용한 문화적-신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다-전망을 제공해 왔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후기 인본주의자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연구하고 경험하면서 '원시 시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사 시대야말로 끝없이 확장하는 비옥한 들판이라는 걸 발견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단 하나인 인간의 뿌리의 심연을 막연히 감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야성의 자연은 자아와 문화가 풀리지 않게 직조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알게 되면 나머지 자연계는 바로 그 곳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법과 진리, '다르마'의 일부입니다.우리는 빈민가와 초원과 습지를 모두 똑같이 '장소들'로서 체험합니다. 하나의 장소는 거울처럼, 규모에 상관없이 어떤 것이나 다 담을 수 있습니다. 한 장소의 심장은 가정이고 가정의 심장은 아궁이, 화롯가입니다.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탐험은 그 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돌아오는 곳은 그 불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소는 우리 실체의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장소'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유동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장소는 시공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구 전체는 하나의 명판으로 현재와 과거의 소용돌이치는 힘이 수없이 겹쳐진 자취를 담고 있습니다. 각 장소는 그 자신만의 장소이며 영원히 야성적입니다. 아이들이 처음 장소를 배우는 것은 집과 주거지 주위와 그 너머 바깥에 있는 그 작은 영역들을 배우면서부터입니다.
'지역'을 배워 나가면서 한 장소의 크기에 대한 지식은 확장됩니다. 젊은이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탐험을 하러 나갑니다. 탐험은 또한 땔감 수집과 낚시, 장터나 시장에 가는 것처럼 생필품을 얻는 일이기도 하지요. 좀더 큰 지역의 주요 특색은 젊은이들의 깨달음의 한 부분이 됩니다. 한 집단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전체 크기는 토지의 유형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든 각기 토지에 관련되어 있고, 각기 정해진 지역 안에서 움직입니다.
모든 지역에는 그 지역만이 가진 야생지가 있습니다. 부엌에는 불이 있고, 사람들이 덜 찾아가는 장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착 지역에는 우선적인 농경지와 과수원, 포도밭과 거친 목초지, 식림지와 숲, 사막이나 산의 '황무지'가 얼마간은 서로 결합해 있었습니다. 사실상의 야생지는 그 모든 것 가운데 극히 오지에 있는 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한때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아발견의 일부입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