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棺도 준비되어 있다
김승환 지음 | 다인미디어
1. 역경주룽지의 부친 시성은 주룽지가 태어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주룽지가 열 살 때 어머니 위씨마저 병으로 운명했다. 주룽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큰아버지 쉬에팡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촌들과 함께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소년 시절부터 주룽지는 독서광이었다. 주룽지는 윗사람들이 용돈을 주면 모아서 헌 책을 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돈을 조금 보태어 다른 책으로 바꾸어 읽었다. 주룽지는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었으며 이들 작품들은 훗날 그가 총리에 오른 뒤 때때로 인용되곤 하였다.
2. 준비주룽지는 전후 국가건설과 발전에 자연과학이 유용하리라 믿고 이공계를 선택, 1947년 가을 칭화대에 입학하였다. 입학 성적이 평균 80점 이상이었던 그는 입학할 때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며 어려운 가정형편상 더욱 학업에 열중하여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청년 주룽지는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입학한지 3개월 만에 공산당 외곽조직인 '신민주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였고 대학 3학년인 1949년 10월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 여름, 주룽지는 "인품과 학업 성적이 모두 우수하고 정치적 표현이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칭화대를 졸업하였다. 주룽지의 대학 생활 4년간은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머리의 합작품이었다.
3. 순풍주룽지가 사회에 첫발을 디디며 시작한 업무는 바로 계획경제에 따른 생산이었다. 주룽지는 곧바로 소련식 국가계획경제 이론을 이해하고 계획생산의 보고와 편성, 통제와 운용 방식을 숙지하면서 동북인민정부 부비서장 마홍의 눈에 띄었다. 그리하여 마홍의 추천으로 동북에 배치된 지 반년 만에 생산계획실 부주임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주룽지의 능력은 역시 마홍을 통해 동북인민정부 주석 가오강과 부주석 리푸춘에게 전해졌다.
1956년 주룽지는 리푸춘의 추천으로 국가계획위 주임 판공실 부처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국가계획위 부주임인 장치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룽지는 성격이 철저하고 엄격하며 공사가 분명해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동료와 국가계획위원회 안팎의 상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어쨌든 1950년대 중반 주룽지의 벼슬길은 순탄하고 춘풍이 불었다.
4. 시련1956년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제기된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과 폴란드, 헝가리의 시민 봉기는 사회주의 체제 전반에 충격을 몰고 왔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당내에 만연한 관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1957년 정풍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정풍운동이 비평의 수준을 넘어 위험 수위에 이르자 태도를 바꿔 '반 우파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평소 성격이 강직해 상사와 동료에게 미움을 받던 터라 투쟁의 화살이 당내 우파 색출로 향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주룽지는 국가계획위원회 반우판공실에서 '부르주아 우파분자'라는 오명을 쓰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주룽지는 후베이성에 있는 국가계획위원회 소속의 '57간부학교'에서 5년간 노동개조를 받았다. 이 기간에 흙과 바람, 먼지에 몸을 굴리며 돼지를 먹이고 분뇨를 퍼냈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기의 갈 길을 걸었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도 별로 하지 않고 이어폰을 꽂고 영어를 공부하는 등 꾸준히 실력을 키워 나갔다. 주룽지는 그 시절을 이렇게 떠올린다. "당시는 고통스러웠지만 내 인생에는 매우 유익했다. 나는 보다 많이 느낄 수 있었고 사회 각층을 보다 많이 볼 수 있었다. 정부 내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는 것도 아마 이때 배운 경험 때문일 것이다."
주룽지는 20년 간의 고초를 겪은 뒤 당적이 회복되어 국가경제위원회 연료동력국을 책임지게 되었다. 주룽지가 국가경제위원회에 부임한 뒤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주룽지는 베이징은 물론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주룽지는 제7차5개년계획 기간 중 최우선 과제로 제품의 품질향상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품질감독 업무를 대폭 강화하고 검사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주룽지가 첫 번째 검사한 곳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맥주였던 베이징의 우싱맥주 공장이었다. 조사 결과 위생상태가 한마디로 엉망이고 맥주에 쓰는 물에서 벌레까지 나왔다. 주룽지 역시 우싱맥주가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업체인 것을 알고 신중했으나 조장의 상황설명을 듣고는 "3일간 생산을 중지하고 위생 상태를 개선한 후 3일 이후 다시 검사한다."고 통보했다. 우싱맥주는 비상이 걸렸다. 상품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우싱맥주는 요로를 통해 자오즈양 총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생산을 3일간 중단하면 수출 차질을 빚어 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니 생산을 계속하면서 지적 사항을 개선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자오즈양은 주룽지의 강직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보고를 받고 한동안 고심하였다. 결국 자오즈양은 우싱맥주 측에 전화를 걸어 주룽지가 내린 지시대로 따를 것을 통고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많은 기업들이 상품의 품질과 위생을 개선해 전국적으로 '품질개선 바람'이 불었고, 주룽지는 강인(强人)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88년 5월 덩샤오핑은 가격 조정을 통한 시장경제 운용을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자오즈양은 물가 개혁 방안을 추진하였다. 물품의 수요 공급이 국가의 배급과 통제에서 벗어나 시장가격에 맡겨지자 물가는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찾으려 몰려들었고 극심한 물건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덩샤오핑은 정책 시행을 주저하며 망설였다. 그리고 국가경제위원회에서 한 사람을 자기에게 보내 전국의 경제 상황을 보고, 분석해 줄 것을 지시했다. 자오즈양은 주룽지를 추천했다. 이렇게 하여 주룽지와 덩샤오핑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 주룽지는 물가 개혁을 잠시 보류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주룽지는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인민들이 국가의 물자 수급 조절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생산을 증대하면서 점차 시장가격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안정 속에 개혁을 추구하지 않고 모험을 무릅쓴다면 개혁은 실패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지적하였다. 이 날 최초의 만남에서 덩샤오핑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룽지는 이 날 이후 덩샤오핑의 신임과 관심의 대상이 됐으며 수시로 덩샤오핑의 자문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5. 도약상하이 시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경제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는 개혁, 개방과정에서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으며 지도자들이 바뀌어도 경직된 국면을 타개하지 못하였다. 상하이는 과거 동방 제일의 도시이며 '아시아의 뉴욕'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공산당의 통치하에 지난날의 기초 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중국 대륙의 각 지역의 발전을 지원하는 젖줄에 불과했다. 특히 공산당 건국이후 경제 중심지에서 정치 중심지로 바뀌면서 도시의 발전은 결정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주룽지는 1988년 4월 상하이 시 인민대표대회 제9기 1차회의에서 시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표 한 사람이 "시민대표에게 후보자들이 직접 각자의 이력과 업적, 시정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주룽지는 자신도 상하이 시 대표들의 평가를 받고 싶다며 찬성하였다. 주룽지는 당 지도부가 결정한 유일한 시장 후보였지만 경선 아닌 경선 연설을 하였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칭화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중 입당한 이야기, 57년 우파로 몰린 후 농촌에서 노동개조를 받은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중국 공산당의 계급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 상하이 시민과 지식인들은 주룽지의 우파 경력을 동정하였다. 주룽지의 연설 도중 박수와 웃음,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회의장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10분으로 예정됐던 연설은 무려 1시간 50분 동안 계속되었다. 주룽지는 이 최초의 연설로 상하이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룽지 우파 시장이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이다. 상하이의 어느 대기업이 개업하면서 상하이 시 당정 지도자들과 유명 인사들을 초청, 호텔에서 성대하게 연회를 열었다. 나중에 도착한 주룽지는 입구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주최측이 그를 귀빈석에 모시려고 했으나 그는 종업원에게 보통 식사를 가져오라고 시켜 비서와 함께 구석자리에 앉아서 먹고 나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일부 참석자들도 슬며시 자리를 떴고 남은 손님들은 잘 차려진 연회석을 두고 보통 식사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먹고 마시는 풍조는 자연히 억제되었다. 이후 주룽지는 관계 공무원들과 상의하여 시 정부 공무원들이 참석하는 공공파티나 연회는 '사채일탕'(요리 4가지, 국 1가지)으로 규정을 정했다.
주룽지가 시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홍콩 사업가가 상하이의 교통 문제를 지적했다. "상하이에서 택시 타기가 너무나 어렵다. 또 요금은 제멋대로이고 서비스도 최악이다. 가끔 급한 일이 있어서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아 난감할 때가 많다. 상하이의 투자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주룽지는 여려 차례 회의를 열어 전문가들에게 택시 문제에 대해 전반적인 연구와 토론을 하게 하였다.
또 택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담팀을 조직하여 종합 방안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어 후속 대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종합대책을 세운 뒤 주룽지는 TV를 통하여 규칙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시민들이 시 정부의 택시 정리작업에 협조하여 적극적으로 위반 차량을 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 시민들의 신고가 시 정부에 눈처럼 쌓였다. 주룽지는 신고 내용을 조사하여 4명의 택시 기사가 요금을 제멋대로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의 면허증을 회수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면허증은 택시 기사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봐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택시 영업을 지도하는 3개 주관 부서는 서로 책임을 미루었다. 주룽지는 주관 부서의 간부를 불러 명령을 즉각 실행하고 다음날 보고하도록 하였다. 상하이 사람들은 곧 법을 지키게 되었다.
주룽지는 또한 시민들의 편지를 통해 민생 관리부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하급 집행부서, 행정부서, 관리부서가 권력을 남용하고 폭력배 등과 결탁하여 서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주룽지는 '공개적인 업무처리, 시민을 위한 깨끗한 업무'운동을 전개하기로 선포하고 구체적인 집행 내용과 시민 신고방법을 발표하였다.
주룽지는 강력히 경고했다. "그 동안 당신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일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오. 그 동안의 부패 행위를 오늘로써 끝내야 합니다. 내일부터 죄를 저지르면 이전에 저질렀던 죄까지 모두 밝혀 처벌하겠소. 내일부터는 법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기 바랍니다." 주룽지는 일체의 예외 없이 엄격하게 새로운 법규를 집행해 나갔고 공개적인 업무처리 제도를 실시하였다.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상하이에서 외자 기업을 설립하려면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도장여행'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1987년 초, 한 외자기업이 상하이에서 설립허가를 받으려 하였다. 서류를 갖춰 상하이시 14개 위원회, 19개국을 돌아다니며 126개의 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 도장을 받기까지 1년 3개월이 걸렸지만 수속 절차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주룽지는 이런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상하이 시 외자업무위원회를 설립하여 '한 개의 기구, 한 개의 창구, 한 개의 도장'으로 논스톱 서비스를 실시하기로 했다. 외자 기업 설립과 관련된 각 부문의 책임자를 하나의 기구에 전부 모아서 24시간 운영체제로 운영했는데 여기서 심의한 후, 단 한 개의 도장으로 끝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주룽지를 주일장(朱一章)으로 불렀다.
1989년 6월 3일 밤 10시,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천안문 광장으로 진입하여 유혈 진압을 벌였다.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6.4 천안문 사태'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슬픔에 잠긴 상하이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며 도로를 장악하였다. 교통은 마비되고 극도의 혼란 속에 상하이는 도시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6월 8일, 주룽지는 방송을 통해 담화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시민,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는 시민 전체의 이익과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강조하여 TV담화를 시작하였다. "...상하이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무력 사용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시장으로서 결코 무력 사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최근 베이징에서 발생한 일들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집니다. 나는 능력을 다하여 여러분이 원하는 일들을 추진할 것입니다. 위기의 시기에 법을 준수하고 인민을 보호하는 데 나는 나의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어떠한 인사치레 말도 아닌 일상적인 언어로 시민과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주룽지 시장은 그날 저녁 각 구, 국장을 소집해 10만 노동자 및 퇴직 노동자들을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보통 때의 3배인 하루 30위안의 수당을 지급하여 거리를 청소하고 표어를 없애고 질서를 유지시켰다. 또한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총 32만 명을 동원, 상하이의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켰고 상하이의 혼란 국면을 수습하였다.
6. 입성덩샤오핑은 생의 말년에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주룽지를 발탁하여 중국경제를 떠맡게 함으로써 현대화된 초강대국 중국건설의 꿈을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마침내 1991년 4월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4차회의에서 주룽지가 정식으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주룽지가 떠맡은 업무는 하나같이 어려운 사안들이었다. 특히 삼각채는 1988년부터 더욱 심각해져서 중앙재정의 부담이 가중되고 생산 부진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삼각채란 사회주의 국유기업간에 발생하는 병폐로 A는 B에, B는 C에, C는 다시 A에 빚을 지는 삼각 고리 현상을 말한다. 국유은행이 국유기업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끊임없이 대출을 해주다 보니 삼각채는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룽지는 7월 중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해결안을 당 중앙 정치국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먼저 채무 고리의 원천에 해당하는 기업(A)을 찾아내어 그 기업에 대해 수백 억 위안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행정 감독 아래 A에서 B, B에서 C, C기업에서 D기업으로 차례차례 채무를 변제해 나가는 것이다.
주룽지는 먼저 에너지, 철강, 자동차, 방직업부터 개혁에 착수하여 엄격한 결산 작업을 통해 흑자 기업은 우량기업으로 전환시키되 장기적으로 대출에 의존하고 있는 기업과 재고가 쌓여 있는 기업은 폐업하거나 합병을 유도하고, 중점 기업은 단계적으로 주주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삼각채 청산 전쟁은 전국을 한 바퀴 돌아, 1992년 5월에는 전국적으로 고정사산 청산 항목 4,383개가 자금지원을 받아 1위안이 4위안 가까운 결손을 청산하는 효과를 보았다. 그리하여 5,000억 위안이었던 삼각채 총액 3,000억 위안 이상의 채무를 해결했다.
주룽지가 첫 번째 큰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자 덩샤오핑은 그를 중용할 제2의 공세를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우리는 간부를 선발할 때, 정치적으로 믿음직한 사람만을 뽑을 것이 아니라 경제를 아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당 고위 간부 중에 경제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주룽지야말로 진정으로 경제를 아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10월, 주룽지는 중국 공산당 제14기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에 당선되었다. 7명의 상무위원 중 서열 5위였다. 단숨에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른 것이다.
7. 비상1993년 봄, 중국 대륙에는 큰 열기가 불어닥쳤다. 주식, 부동산 투기, 개발구 설립이라는 '3대 과열'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가는 폭등하고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이에 대해 주룽지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현재 우리 경제의 각종 모순이 금융부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당시의 경제 상황에 대해 경종을 울렸지만 당시 경제를 주도하던 리평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