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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棺도 준비되어 있다

김승환 지음 | 다인미디어
1993년 봄, 중국 대륙에는 큰 열기가 불어닥쳤다. 주식, 부동산 투기, 개발구 설립이라는 '3대 과열'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가는 폭등하고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이에 대해 주룽지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현재 우리 경제의 각종 모순이 금융부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당시의 경제 상황에 대해 경종을 울렸지만 당시 경제를 주도하던 리평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중국경제의 과열은 이미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상반기의 국민총생산이 전년 동기 대비 13.9% 증가했으며, 공업생산은 무려 25.1% 급증했다. 소비자 물가지수는 12.5% 상승했고, 통화팽창률은 20%에 달했다. 은행대출은 당초 예상을 초과해 1,600억 위앤에 이르렀고 은행의 지불준비금은 급격히 줄어들어 위험 경계선에 육박했다. 전국 각 지역의 개발구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으며, 수많은 현들이 앞다퉈 개발에 나서고 농지를 팔았으나 자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금융기관들도 개발구의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다. 사기사건이 전국 곳곳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주식 열기는 남에서 북으로 번졌다. 거품경제의 범람으로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리평은 걷잡을 수 없는 금융대란에 직면하자 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결국 주룽지가 총리직을 대신하게 되었다. 주룽지는 신속하게 금융질서 확립을 골자로 하는 16조항의 거시조정 조치를 발표했고, 전면적인 거시조정 조치에 착수했다. 중국인민은행은 금리를 인상했다. 정기예금의 이자율을 평균 1.72% 상향조정하고, 대출금리는 평균 1.38% 상향조정했다. 이와 동시에 몇 차례에 걸쳐 대량의 달러를 투매했다. 금융수단을 이용해 인민폐의 화폐가치를 자연스럽게 높였다.



주룽지는 강하게 밀고 나가면서도 때로는 부드럽게 다루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과거 금융체계에서 발생했던 모든 위법 사항에 대해서 가볍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책임을 명확하게 하고, 사실대로 보고하고, 성실하게 고치려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룽지가 엄격하고 신속하게 밀어붙인 지 3개월이 지나자 거시조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위법 대출금 중 50%가 회수되었으며, 저축이 증대하고 인민폐의 화폐가치가 상승하면서 외환시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또한 주요 건축자재의 가격이 떨어졌고 땅 투기와 부동산 가격 조작 등 불법행위가 꼬리를 감추었다. 통화팽창도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국고채의 투매현상이 호전되어 재정난이 해소되었다. 주룽지는 국면을 기본적으로 전환시켜 놓았던 것이다.



주룽지는 당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전국 인민에게 고한다. 먼저 고위 관리들을 정리하고, 차례로 중하위 관리들을 정리한다. 지금 백 개의 관을 준비하고 있고, 그중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다같이 희생한다면 오랫동안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주룽지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잇따라 발생했다. 주룽지 부총리의 거시조정 조치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데 앙심을 품은 일부 금융기관과 국유기업의 간부들이 청부살인을 기도했다. 그들은 주룽지가 외출할 때 시한폭탄을 장착하거나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10여 차례에 걸친 암살 기도는 전부 미수에 그치고 범인 중 일부는 현장에서 자살했다. 주룽지의 강력한 거시조정 정책은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주룽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중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인기와는 담을 쌓은 지 오래였다.98년 국내외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주룽지 총리는 99년 들어 각종 악재를 만났다. '3대 개혁' 조치에 따라 국유기업과 정부기구의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 실업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여기에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해 수출이 감소하고 성장이 둔화되는 등 중국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 실패와 나토의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 폭격, 미 핵기술 절취 의혹 사건 등으로 대미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주 총리는 다행이 1999년 11월 15일 미국과의 WTO 가입협상이 타결되어 정치적 위기를 한 고비 넘겼지만, 개혁, 개방에 따른 국유기업의 대규모 실업 사태,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농촌문제 및 반대파의 반발 등 그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높고 험난하다.1990년 12월 상하이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주식시장이 사회주의 중국 땅에 최초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1996년 10월, 주식시장에 한 차례 광풍이 불었다. 주가지수는 엄청나게 치솟았고 거래대금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주가는 전반적으로 상승했고, 심지어 '휴지조각'에 불과하던 적자기업들의 주가 역시 천장부지로 올랐다. 전 국민이 주식에 손을 대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을 점점 불길로 빨려 들어갔고, 증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혼란의 연속이었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증권감독위원회가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엄중한 처벌을 강구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마련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주 부총리는 증시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당시에는 덩샤오핑의 병세가 악화되고 그의 서거가 임박했으므로 덩샤오핑이 서거하면 주가가 폭락하고 홍콩 등지에서 연쇄반응이 나타날 것이 우려되었다. 따라서 사전에 주식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주 부총리는 인민일보에 '현재의 주식시장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는 논설을 싣게 하였다. 이 논설을 통해 "주식 거래는 완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정부가 주식가격을 떠받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단언, 주식 열기를 식혔다. 아울러 증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거래중지제도를 도입하였다.



1997년 새해에 접어들어 증시는 다시 정상을 회복하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1996년 말, 주식시장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았다면 중국은 97년 여름 이후 몰아닥친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주주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들은 인민일보에 전화를 걸어 비난하였으며, 정저우, 충칭 두 지역의 주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1996년 증시파동 후, 주룽지는 수급조절 방식으로 주식 발행한도를 정했다. 96년도 주식발행 한도를 150억 위앤으로 정했으며 97년에는 3백억 위안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발행한도는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며 증시에 이상이 있다 싶으면 재빠르게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주식 발행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했다. 주룽지는 주식시장이 아주 좋은 자금 공급 루트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원 배분에 있어서도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어 시장경제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중국 증시는 주룽지의 이론 지도 아래 실험단계에서 발전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주 부총리는 일찍이 외환보유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외환보유고 안에는 정치가 있다. 이것은 홍콩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만약 1천억 달러가 넘는 외환 보유고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홍콩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자신감이 부족했을 것이다. 중국 역시 외채 상환 시기가 다가왔다. 우리는 국제신용을 유지해야 한다."



주룽지는 외환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동시에 인민폐 발행을 규제했다. 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각국은 순식간에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4개월 후인 11월 한국조차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유일하게 중국에는 미치지 않아 달러와 인민폐의 교환 비율은 안정을 유지하였다.



주룽지는 1994년 초 위안화를 미 달러에 대해 33% 평가 절하했다. 중국은 수출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96년에 수출입 2,890억 달러, 무역흑자 121억 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무역순위 1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 후에도 외환 보유고가 계속 늘어 97년에는 1,400억 달러를 보유해 외환 보유고 세계 2위를 차지했다.



동남아를 휩쓴 금융위기는 마지막으로 홍콩에 상륙했다. 소로스의 퀀텀펀드 등 국제 투기자금이 홍콩 달러를 공격, 홍콩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을 교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하에 달러를 시장에 대량 투입, 고정환율제인 페그제(달러당 7.8홍콩달러)를 지키고 주가하락을 막았다.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주룽지의 주도면밀한 사전 대비와 선견지명에 탄복했다.1998년 3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주룽지는 중국의 제5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주룽지는 중국이 당면한 최우선과제로 '한 가지 확보, 세 가지의 실천, 다섯 가지의 개혁'을 천명하였다.



'한 가지의 확보'란 1998년 경제 성장률 8% 달성, 물가 상승률 3% 유지, 위안화를 절대로 평가 절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의 실천'이란 국유기업, 금융체제, 정부기구의 개혁을 앞으로 3년 이내에 기필코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가지의 개혁'은 양식유통체제, 투융자체제, 주택제도, 의료제도, 재정세제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주 총리는 개혁과정에서 직면할 지도 모르는 난관에 대해 비장한 심정을 밝혔다. "한 국가의 총리라는 직위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중국 인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뿐이다. 그러나 나의 앞에 지뢰밭이 놓였건, 천길 낭떠러지가 놓였건 옳은 일이라면 뒤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



주 총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리는 기자회견장이다. 과거 중국에서는 사전에 외국 기자들의 질문 내용을 외교 담당자가 파악, 답변하기 쉬운 질문만을 선택하여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룽지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주룽지 총리의 기자회견은 매번 중국 안팎에서 감탄의 대상이다. 개혁에 대한 명쾌한 비전, 해박한 지식, 강인한 의지, 단호하면서도 유창한 언변, 능숙한 영어, 거기에다 유머까지...



주룽지 총리가 미국 방문에 나서기 직전까지도 미국에서는 반중 정서가 팽배했다. 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타이완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국 대통령 집무실에서 링컨의 사진을 보았다. 링컨도 남북전쟁 당시 무력을 동원해 남부의 분리독립을 저지하고 미합중국을 지키지 않았냐?"고 응수했다.



핵무기 기술 절취 논란과 관련, 주 총리는 "미국이 철저한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오해를 막기 위해 중국의 미사일마다 미제가 아니라 중국제라는 글씨를 써넣어야겠다."고 능청을 부리면서 겨우 24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는 중국이 6,000개 이상을 보유한 미국에 안보상 위협이 될 수 없다."고 엄살을 떨었다.



특히 주 총리는 미국 대선 자금 불법 헌금 의혹에 대해 "중국의 외환 보유고가 1,469억 달러에 이르는데 만일 선거자금 헌금이 그토록 효과적이라면 최소한 1백억 달러는 쏟아 부어야지 왜 겨우 30만 달러냐!"고 말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여기에다 경제 논리에 민감한 미국 재계를 파고든 그의 의중은 주효했다. 그는 워싱턴과 시카고에서 가진 기업인 초청연설에서 "중국의 금융, 통신 시장의 개방은 미국 국민에게 매우 유리하다. 기회를 놓치면 유럽에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는 적수가 아니다. 동반자 관계에 있다. 이제 중국 위협론은 중국 기회론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미국내 반중 정서를 비판했다.21세기 중국 경제의 사활은 국유기업 개혁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유기업 개혁은 세 가지 부담 때문에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첫째, 실업대란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기업의 부채규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셋째, 기업들이 안고 있는 과중한 사회보장 기능이다. 여기에다 WTO 가입에 따른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로 대규모 추가 실업발생과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 20년간 중국 사회에는 엄청난 빈부격차가 생겨났다. 문제는 과거에 다 같이 가난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상대적 박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농촌 주민들의 박탈감은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지역간 빈부격차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중국은 현재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법률 제정을 서두르고 있으나 그 효과는 회의적이다.



'중국이 가진 것은 인구뿐'이라는 말이 있다. 장쩌민 국가주석도 종종 "중국이 12억 인구를 조용히 먹여 살리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말한다. 중국의 인구문제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중국의 인구 문제는 단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98년 말 현재 중국인구는 12억 4천8백만 명, 최근 세계인구가 60억을 넘었다 하니 지구촌 인구 5명 중 1명이 중국사람인 셈이다.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98년 출산율은 1.8명으로 떨어졌으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여아 낙태 및 살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됐고 남녀 성비가 120대 100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중국남성 1억 2천만 명이 결혼상대를 찾지 못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밖에 타이완 처리문제, 정치개혁 및 각종 사회문제와 환경파괴의 문제 등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현안사항들은 산적해 있다. 국제 사회가 중국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21세기에서의 무한한 성장 잠재력 때문이다. 21세기 세계 경제질서는 미, 유럽, 중국 3각 체제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21세기 청사진은 이들 산적한 과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 가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주룽지는 전후 국가건설과 발전에 자연과학이 유용하리라 믿고 이공계를 선택, 1947년 가을 칭화대에 입학하였다. 입학 성적이 평균 80점 이상이었던 그는 입학할 때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며 어려운 가정형편상 더욱 학업에 열중하여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청년 주룽지는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입학한지 3개월 만에 공산당 외곽조직인 '신민주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였고 대학 3학년인 1949년 10월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 여름, 주룽지는 "인품과 학업 성적이 모두 우수하고 정치적 표현이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칭화대를 졸업하였다. 주룽지의 대학 생활 4년간은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머리의 합작품이었다.1956년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제기된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과 폴란드, 헝가리의 시민 봉기는 사회주의 체제 전반에 충격을 몰고 왔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당내에 만연한 관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1957년 정풍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정풍운동이 비평의 수준을 넘어 위험 수위에 이르자 태도를 바꿔 '반 우파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평소 성격이 강직해 상사와 동료에게 미움을 받던 터라 투쟁의 화살이 당내 우파 색출로 향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주룽지는 국가계획위원회 반우판공실에서 '부르주아 우파분자'라는 오명을 쓰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주룽지는 후베이성에 있는 국가계획위원회 소속의 '57간부학교'에서 5년간 노동개조를 받았다. 이 기간에 흙과 바람, 먼지에 몸을 굴리며 돼지를 먹이고 분뇨를 퍼냈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기의 갈 길을 걸었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도 별로 하지 않고 이어폰을 꽂고 영어를 공부하는 등 꾸준히 실력을 키워 나갔다. 주룽지는 그 시절을 이렇게 떠올린다. "당시는 고통스러웠지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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