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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김정일

정창현 지음 | 김영사
김정일은 지금까지 의문과 신비에 휩싸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의 출생지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40년 10월 김일성과 김정숙은 소련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미국 학계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 부근의 보로실로프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김정일이 소련 극동지역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으로 80㎞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브야츠크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새로 개편된 동북 항일연구 교도려(일명 88여단)의 제1교도영 영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남야영에서 북야영으로 이동한 것은 1942년 8월 경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브야츠크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잘못된 견해다.



북한은 이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부정하고 백두산의 빨치산 밀영지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1987년 2월 12일 백두산 밀영을 김정일 혁명사적지로 지정하고 귀틀집을 지어 성역화하고 있는데, 생모 김정숙이 1941년 6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이 귀틀집에서 지내면서 국내와 장백지구 반일조직들을 지도했다는 얘기다.



국내학자들은 김일성 부자의 세습체제를 준비해온 추종자들이 김정일의 출생지가 민족의 영산이요, 혁명의 본거지인 백두산인 것처럼 선전함으로써 김정일에게 민족의 정기와 혁명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북한 주민들에게는 충성심을 고취하려는 속셈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의 문제로 김정일의 '소련출생설'이나 '백두산 출생 조작설'은 그야말로 허점투성이다.



국내 학자들의 말처럼 40년 김일성과 김정숙이 중소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소련 땅에서 태어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 데는 일단 김일성과 김정숙의 활동에 대한 증거자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의 공식 문건은 김일성이 적어도 두 차례 이상 연해주를 떠나 만주지역에 파견된 사실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1941년 4월 10일부터 11월 12일까지고 두 번째는 42년 5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이다. (「東北地久革命歷史文件彙集」甲65, 297쪽, 본문 15쪽) 만약 이 문건이 정확하다면 김정숙은 41년 4월 10일 이전에 임신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면 김정숙의 예상 출산일은 12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김정숙은 두 달 반이나 늦게 출산한 셈이 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북한의 문헌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1년 초 '북방의 훈련기지'(남야영을 의미)를 출발, 동녕을 거쳐 5월 10일 왕청에 도착했고 이때 김정숙을 먼저 백두산 지역으로 보냈다. 6월 중순 김일성은 백두산에 도착해 소백수골에서 김정숙과 다시 만났고 이때 김정일을 임신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전령병 출신인 김익현도 1942년 초부터 백두산 밀영에서 생활하게 됐다며 2월 16일 아침에 김정일의 출생을 전해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금수강산」1999년 2월 호, 본문 16쪽) 또한 신경완의 증언도 예외가 아닌데, 김정숙이 1940년 소련국경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갔다가 다음해 다시 만주지역으로 나왔으며 43년 초까지 백두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소련 땅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최광, "1943년 봄, 백두산 밀영에서", 조선신보 1994년 10월 3일자, 본문 17쪽)



필자의 말대로 북한의 주장이 '조작된 신화'인지 남한의 '잘못된 추론'인지는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고 김정일의 '소련 출생설'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확한 증언이나 문헌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한편 김일성은 어린 시절의 김정일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어려서부터 군대를 몹시 따르고 군인들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말하고 있다.(「세기와 더불어」8, 302쪽, 본문 19쪽) 신경완은 빨치산 대원과 김정일 사이에 형성된 인간적 유대가 70년대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정일 자신이 '선대 혁명원로'의 우대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어색하거나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정일은 4살 때인 1946년 고관 자녀들만을 교육하기 위해 평양 남산재에 특설된 남산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의 담임 선생인 전금선은 "원아 때부터 총명과 담력과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은 이를 두고 '유치원생에 지나지 않은 어린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전금선 같은 사람에 의해 일찍부터 시도되고 있었던 것'(본문 29쪽)이라고 적고 있는데, 사실상 유치원 선생님의 평가를 두고 '우상화' 작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세습체제 구축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원되는 모습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왔었던 사실을 인정한다고는 해도 위의 전금선의 발언이 곧바로 우상화 작업의 진행을 알리는 것이라는 말은 다소 과장되었다.



또한 우상화가 문제시되는 것은 실상 우상화를 행하는 권력 주체가 인민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강력한 정치적 선전선동에 인민을 총동원하고 권력주체에 대한 신격화를 전제로 한 전체주의 사회의 경우이다. 우리는 과거 북한의 인민 동원의 모습을 이러한 시각일변도로 분석하였다.



그러나 외형상 전체주의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으면서도 신중하게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은 북한의 경우 김일성 개인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요하는 우상화 작업을 김일성 개인이 직접 지시한 경우보다는 당 관료들이 지시한 것이 많고 김일성도 자신의 장기 영구 집권만을 의도적으로 지시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는 점에서 기존의 전체주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미세한 차이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전체주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관료주의의 경직적, 권력영합적 성격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빨치산들의 세심한 교양과 정성어린 보살핌 아래 어린 김정일은 어는 다른 소년보다도 강력하고 심각하게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이다.그러나 김정일이 여덟 살 되던 해인 1949년 9월 22일 남산병원 특별병실에서 어머니 김정숙이 해산시의 출혈과다로 운명을 달리하게 된 후 김정일은 적잖은 방황을 거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전 해에는 동생 김평일이 수상관저 연못에서 익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은 터라 주위의 안타까움은 더했다고 한다. 그 후 김일성은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김성애를 맞이하게 되는데,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김성애 간의 갈등은 많이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최고권력자의 아들로서 김정일의 어린 시절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이미 언급했듯이 빨치산 제1세대들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그는 어머니 김정숙의 유언에 따라 소년 시절에도 특별 교육을 받고 역시 여러 사람들의 세심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대단한 독서광이기도 했던 그는 이러한 교육에 대해 싫증을 느끼는 법 없이 착실하게 여러 분야에 관한 지식들을 섭렵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그의 모습이 이와 같은 사실을 증언한다. 국제정세, 남북관계 등 일련의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그는 어떤 나라의 지도자들보다도 균형감각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여러 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사와 상식을 활용해 대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가 이미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들이다. 이와는 다르게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김정일이 남산학교 고등반까지 수료한 후 동독항공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망나니 성품으로 인해 끝까지 수학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중퇴, 61년 김일성 종합대학에 편입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들은 대부분 정보제공자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사회의 의제 설정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이 이처럼 균형감각을 상실한 채 미확인 사실을, 그것도 북한의 최고 지도자 수업 중이었던 김정일에 관한 보도를 이토록 허술히 한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독자들인 우리 모두가 꼭 한번쯤 자신도 이러한 보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적은 없는지 검토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냉정한 독자의 눈만이 언론을 교정할 수 있다.



어쨌든 김정일은 모스크바 유학 대신 김일성 종합대학을 선택했고 대학시절 내내 대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김정일이 대학을 다니던 때는 김일성 종합대학 내에서 사상투쟁이 극심할 때였다. 대학생활의 경험은 김일성 대학이 소위 말하는 교조주의·수정주의 논쟁의 온상이 되는 것에 대한 그의 경계심을 고취시켰고 후일 그가 '김일성주의'를 이론적·실천적으로 제창하게 되는 중요한 내적 경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초 공산주의 진영의 급속한 해체와 소련의 붕괴.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 등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김정일을 위시한 북한의 지도층이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원칙을 강조했던 사실들로 보아 청년 김정일의 대학생활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처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신경완은 마치 '난봉꾼'처럼 묘사되는 김정일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1996년 2월 '성혜림 망명사건'이 보도된 이후 이러한 추측들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성혜림이 김정일의 첫 여자이며 그와의 관계를 유지한 채 김영숙과 결혼했다는 주장을 폈던 이한영(성혜림의 조카)의 주장은 1997년 말 그의 여동생 이남옥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신경완은 김정일의 가족관계에 대한 기조의 통설과 이한영의 주장을 모두 부정했다. 김정일은 김일성대학 동기생인 홍일천과 1965년 결혼했고 그와의 정치활동에 대한 견해 차이로 얼마 후 이혼했다는 것이다. 이후 김정일은 1973년 10월 10일 현재의 부인인 김영숙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완은 성혜림과 김정일의 동거설에 1970년 전후에 김정일이 소위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에 대해 단호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당시는 빨치산 원로인 정치국원들이 후계자 선정을 앞두고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또 하나의 문제로 '기쁨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경완은 기쁨조에 대해서도 세간의 과장된 평가를 부인하고 기쁨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외국인을 상대하는 공연단을 오해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소위 말하는 김정일의 '여자문제'에 관한 통설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근본적으로 과연 이런 문제들이 김정일의 리더십과 관계가 있는지 회의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필자는 실상 여자문제, 습관, 신체적 결함이 곧 리더십의 결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사례에서도 증명된 바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단순하게도 소위 사적인 결함으로 보이는 것들을 들먹이며 김정일의 리더십의 부재를 추론했던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북한의 실상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한 것인지, 어떻게 보면 타인에 대한 험담처럼 들리는 이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말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실상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우리들의 현주소를 실감케 한다. 입소문 정도로 취급하기에는 이러한 잘못된 추측들이 남북관계를 보이지 않게 냉각시키는 데 일조한 요소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입소문을 넘어 버거운 말들로 다가온다.제2장 출생과 성장

출생지의 비밀어린 시절제3장 후계자의 길(1964~1974)



후계자 결정과정기쁨조의 실상본문은 김정일의 지극히 사적인 생활에 대한 소문들에 대해서도 적잖은 사람들의 증언과 함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사가 대부분 이러한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통치자로서의 도덕성이 의심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당연히 과거 정권이 김정일을 무능력하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시절에 나온 근거 없는 과장들 속에서 쉽게 확인되는 소문들이다.가족관계: '성혜림 망명사건'의 진실제1장 김정일의 사생활

베일에 싸인 사생활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순수하게 이념적인' 나라는 있을 수 없다는 면에서 이미 그것은 발상 자체가 오류이다. 다만 북한의 경제난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경제 블록 해체과정과 그 후유증으로 북한이 국제 정세 속에서 휘말린 국가적 곤경이다. 우리가 마치 IMF 경제위기를 겪었듯이 말이다.

실제로 김정일은 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남한을 최고의 경제협력자로 선택하고 있으며 북방 삼국간의 협력체제를 다시 구축하고 남쪽으로는 남한과의 경협사업을 통해 일본과 미국의 자본을 유치하는 등 다각적으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북한이 이념에만 골몰하느라 경제발전을 뒷전으로 미루었다는 등의 의견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못 본다.'는 속담에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이제 막 열린 사회 각 분야의 교류 협력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특히 언론은 남북경협에 있어서는 연일 '겉은 시끌, 속은 조용'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서방 외신들 중에는 실질적인 협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사업도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식의 회의적인 시각 속에서 바라보았다. 물론 기업적 가치에서 보면 경제적 이득이 보장되지 않을 때 움직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의 일시적 '동맥경화'가 또 다시 어떤 종류의 북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부추기고 만남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주조한다든지 아니면 더 엉뚱하게도 극우적인 반북한론이나 안보강화론과 같이 서로를 자극하는 어떤 시각으로 이어지는 측면이 목격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제4장 김정일의 북한



대남공작의 방향전환제6장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신경완은 그에 대해 인구에 회자되는 말들이 대부분 과장이 많고 근거가 없는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의 리더십에 있어서도 기존의 설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공식 간행물 등에서 선전하는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이른바 '광폭정치'와 '인덕정치'라고 되어 있다. 즉 '통큰 정치'라는 말이다.



1968년 1월 22일 발생한 '푸에블로호사건'이나 1969년에 있은 EC-121기 격추사건은 김정일의 정치 성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미국의 정보선이 원산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직접 포위할 것을 지시했고 전투기 격추사건에서도 미사일 한대 가격이 엄청난 부담이었을 때인데도 격추를 최종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판문점 사건, 우리에게 '(미군에 대한) 도끼 만행 사건'이라고 알려진 그 사건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사건이 커지자 김정일이 직접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수습된 이후에도 석 달 동안 북한 전역은 완전히 전쟁 동원 대기 상태였다고 하니 김정일의 전투적 반미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후일에 그는 김일성의 비판을 받고 대남 관련 사업에서 10년을 손해보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성급함을 인정했다고 한다. 지도자 수업과정의 대표적인 시행착오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남북정상회담 때 공개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은 그 자체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각각 언론의 표현과 주목하는 면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적어도 그의 통치 능력에 있어서는 모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여론의 목소리는 남쪽의 정치인들보다 몇 수는 앞서 간다면서 은근히 정치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까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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