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클레이본 카슨 지음 | 바다출판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
클레이본 카슨 편저/이순희 옮김
바다출판사/2000년 3월/496면/15,000원
1. 어린 시절
나는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인 1920년대 말, 애틀란타 시 5번가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온화한 어머니와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다. 흑백분리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부모님은 그것이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일 뿐이니 이런 제도에 순응해서도 안 되고, 열등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너는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난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5살 때였는데, 교회는 제2의 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소년기가 끝날 무렵 나는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맞게 됐다. 한 가지 사건은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됐다. 내게 충격을 준 또 한 가지 사건은 여섯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백인 친구와의 문제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놀던 친구가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이제부터는 너랑 같이 놀지 말래.”하며 멀어진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난생 처음 인종문제를 확인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치욕스런 기억들은 흑백분리제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했다. 또한 주위에 가난한 흑인들을 통해 인종차별 뒤에는 경제적 차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난한 백인들 역시 경제적인 차별을 당하며 착취당한다는 걸 알고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평등을 깊이 인식하게 됐다.
2. 모어하우스대학
나는 열 다섯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졸업한 모어하우스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었는데, 특히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로우의 책을 통해 비폭력 저항을 처음 접했는데, 선에 협조하는 것뿐 아니라 사악한 제도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대학에 들어간 직후 인종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대학간 협의회’에 참여했다. 인류에 대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성직자가 될 것인지 많이 갈등했다. 성서연구 강좌를 들으며 차차 갈등이 해소되고, 모어하우스 대학장인 메이즈 박사와 조지 켈시 교수,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성직자의 길을 결심했다.
3. 크로저 신학교
성직자의 길을 결정하고, 1948년 스무살의 나이로 펜실바니아 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사회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위대한 사회철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덤, 밀, 로크 등을 탐독했다. 1949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매혹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첫째는 신의 개념이 자리잡을 수 없는 유물론적 역사관 때문이었다.신학교 시절, A. J. 무스트 박사의 강연을 통해 간디 사상을 처음 알았다. 그후 하워드대학 총장 모디카이 존슨 박사의 강연을 듣고, 그 심오한 사상에 충격을 받고 당장 서점에 가서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책을 사 읽었다. 그를 통해 사회개혁 분야에서의 ‘사랑의 힘’에 새롭게 눈떴다. 사랑은 사회와 집단을 변모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지적 순례는 계속 됐다. 어린 시절 근본주의적 전통에서, 신보수주의로, 다시 자유주의로 선회했다. 나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비로소 현실적인 평화주의에 도달했다. 현실적 평화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피상적 낙관주의라는 허상과 그릇된 이상주의의 함정을 피해가는 방법이었다. 평화주의가 어떤 상황에서나 옳은 것은 아니다.
4. 보스턴대학
나는 보스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브라이트먼 박사와 함께 한 헤겔 공부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가르쳐줬다. 1954년 무렵 적극적인 사회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 흐름을 형식적으로나마 거의 섭렵했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권리를 위해 당당히 일어서서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됐다.
5. 내 아내 코레타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 다니던 친구 메리 포웰의 소개로 코레타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코레타와 이야기를 나눈지 한 시간만에 결혼을 결심했고, 만난지 1년만인 1954년에 결혼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우리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앨라배마 주 마리온에서 태어난 코레타는 메조소프라노 성악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한 후 온갖 역경 속에서 헌신적인 태도로 내게 위안을 줬다. 어려웠던 시기에 희망의 등불을 놓지 않았던 아내 덕에 나는 고난과 긴장을 이겨낼 수 있었다.
6.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
21년 동안의 학교생활이 끝난 후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며 일자리를 구했다. 교수직이나 여러 행정직을 제안해 왔는데, 그 가운데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에서 설교를 제안해 와 1954년 1월,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로 갔다. 그곳의 담임 목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흑백분리가 상존하는 남부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는 어려움과 희생이 불가피하더라도 고향인 남부지역에서 몇 년간은 봉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는 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 전임 목사직을 담당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줬다.
논문집필과 교회직무로 아주 바쁜 날들을 보내면서도 나는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교회신도 전원에게 선거권 등록과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가입을 권유하면서 교회 내에 ‘정치사회활동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흑인과 백인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앨라배마 인간관계평의회’에서도 활동했다. 몽고메리에 정착한지 1년만에 첫 딸 욜라를 얻고 곧 버스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다.
7. 몽고메리 운동
1955년 12월 1일 버스를 타고 가던 로사 파크스 부인은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는 운전수의 요구를 침묵으로 거절하고 체포됐다. NAACP 몽고메리 지부 대표였던 닉슨, 몽고메리 퍼스트 침례교회의 목사였던 랄프 애버니시 목사 등과 함께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몽고메리 주는 특히 흑백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하지만 보이콧이라는 방법이 비윤리적이며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이때 내게 확신을 준 것은 소로우의 ‘시민불복종론’이었다. 과연 보이콧 운동이 성공할 것인지 마음을 졸였다. 마침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던 날, 시내를 돌며 버스를 살펴봤다. 버스 안에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60% 협력을 바랐는데 100%였다.
드디어 파크스 부인의 공판일, 판결은 뜻밖에도 유죄였다. 이것은 흑인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촉매제로, 또 흑백분리법률의 합당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됐다. 대책기구로 곧 ‘몽고메리 진보연합(MIA)'이 결성됐고, 나는 의장으로 선출됐다. 진보연합은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항의운동을 계속 한다는 것, 그 요구사항은 결의문 형식으로 작성해 대중집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할 것 등을 결의했다. 그날 대중집회에서 나는 파크스 부인 사건부터 흑인들이 겪어왔던 학대와 모욕의 역사를 이야기해 나갔다. 아무런 준비 없는 연설이었지만 청중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자리에서 버스 운전수들의 정중한 대우가 보장될 것 등 모두 세 가지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8. 필사적인 저항
첫 대중집회의 들뜬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는 우리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자금을 담당할 위원회를 비롯해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보다 앞서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던 루이지애나 주 배턴 루쥐 시의 선례를 따라 버스를 대체할 카풀 운동을 벌였다. 자원봉사자는 금새 300명을 넘어섰다. 버스 보이콧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백인들도 늘었다.
몽고메리 운동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과 맥을 같이 했다. 흑인들은 위기상황에서도 비폭력을 견지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이 장기화되자 시에서는 MIA에 협상을 제안해 왔다. 1차 협상은 결렬됐다. 협상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나는 강력한 저항 없이 사람들은 순순히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흑백분리제도의 목적이 흑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차 협상에서 백인 대표들은 내가 문제해결의 주요 장애물이라며 분열책동을 시작했다. 협상이 타결됐다는 거짓 신문보도를 내보내기도 하고, 시장이 TV에 직접 나와 보이콧 운동을 비난하고, 교통법규 위반혐의로 카풀 승용차를 잡기도 했다. 그러던 1월 중순 어느 날, 카풀 정차 장소에 들르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경찰차가 따라 붙더니 속도 위반이라면서 나를 체포했다. 경관에 이끌려 간 곳은 몽고메리 시립 교도소였다. 사람들이 교도소로 몰려오자 교도관은 나를 보석으로 풀어줬다. 그날 이후 나는 자유에 대한 투쟁에 더 헌신적으로 매달렸고, 그럴수록 협박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을 위협하는 전화를 받고 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울리는 조용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용기와 확신을 얻고 의연하게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죽음이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9. 몽고메리의 승리
폭력으로도 우리의 운동을 막을 수 없었던 반대세력은 대량 체포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행동이 보이콧금지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교도소는 축제분위기였다.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나는 내 죄가 자랑스러웠고 항의운동은 계속됐다. 하지만 아직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시 당국은 카풀을 방해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바로 재판 당일 미연방최고법원이 버스 내 흑백분리에 대한 위헌결정을 지지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날 카풀제도 금지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항의운동은 중지하되 강제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버스 이용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날 밤, KKK단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흑인들의 대처는 전과 달랐다. 집의 불을 끄고 죽은 듯 있던 흑인들은 KKK단원들을 오히려 구경삼아 지켜봤다. 드디어 흑백통합버스 운행이 결정됐다. 나는 새로운 제도 앞에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상호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몽고메리 흑인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흑백차별 철폐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흑백 차별에 대한 저항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비폭력저항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사용했다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흑인들 스스로의 변화가 값졌다.
10. 확산되는 투쟁
몽고메리 운동은 승리했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1957년 1월 흑인지도자회의에 참가하기 직전 친구인 애버니시의 집과 퍼스트 침례교회가 폭파됐다. 여러 건의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메리 시 위원회는 버스의 운행을 중지시켰다. 흑인사회는 위축됐고, 다시 긴 투쟁이 시작됐다. 나는 혼란을 느꼈지만 여러 사람의 격려로 곧 평온을 되찾았다. 폭파사건의 용의자들이 검거됐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질서 교란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고, 흑백차별 폐지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7년 2월 「타임」지는 몽고메리 운동을 커버 스토리로 간행했다. 점차 항의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감정과 갈등이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몽고메리의 인종문제는 전에 비해 크게 개선됐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57년 5월 시민권 지도자들은 최고법원의 흑백분리 금지결정 3주년을 기념해 워싱턴 DC를 최종 목적지로 한 순례기도회를 시작했다. 또, 여름에는 SCLC(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남부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십자군운동을 계획했다. 모두 흑인의 투표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11. 새로운 국가의 탄생
1957년 3월 가나가 독립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 나는 그것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곳에 가게 됐다. 그곳의 후미진 골목에까지 울려퍼지는 자유의 외침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애굽의 지배에서 탈출해 홍해를 건넌 셈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황무지가 나타날 테지만 “편안한 예속보다 위험한 자치를 원한” 그들의 용기와 신념으로 무사히 건너게 되리라 생각했다.
12. 죽음의 위협
1958년 어느 토요일, 몽고메리 운동의 자전적 기록인 『자유를 향한 발걸음(Stride Toward Freedom)』에 사인을 하고 있다가 한 흑인여성의 칼에 찔렸다. 재채기를 하지 않은 덕분에 죽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칼끝이 대동맥에까지 닿은 큰 부상이었다. 하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13. 비폭력운동의 산실, 인도 순례
인도여행은 내 오랜 꿈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 1959년 2월 아내와 친구와 함께 인도여행에 나섰다. 그곳에서의 환대는 대단했다. 인도는 엄청난 인구와 함께 많은 문제를 가진 나라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미국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대규모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단(Bhoodan)이라는 토지개혁운동이었다. 그것은 마을 경제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대규모 농지 소유자들로 하여금 마을 단위의 공동 협동조합에 농지 소유권을 넘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조직화와 추진력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운동을 벌여나가는 ‘부단주의자’들을 보며 정신적 역량을 잃지 않고 우리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도록 인도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철폐 과정은 미국의 흑백차별 정책이 철폐돼 가는 과정에 비교해 볼 수 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착취에 대해 긴 단식으로 항의했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결국 브라만들은 불가촉천민에게 힌두교 사원의 문을 열었다.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저질러온 불가촉천민에 대한 불평등을 시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고위 공직자 가운데는 아직도 흑백차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거부하고 남부 출신 공직자 가운데는 흑백분리제도를 유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이들이 있다. 인도여행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자유를 얻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등 비폭력주의에 대한 인식과 열정이 보다 깊어졌다.
14. 연좌운동
몽고메리에 거주한 지 5년만에 나는 애틀란타로 이주하기로 했다. 그것은 흑백차별제도에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즈음 나 자신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었다. 과중한 업무에 치어 축적된 지식과 사고를 발산하는데 집중됐을 뿐 새로운 지식과 사고를 흡수하는 데는 무심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사색시간이 필요했다.
1960년 남부학생들이 연좌시위운동을 벌였다. 흑인들은 식당의 카운터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도록 규정한 런치 카운터 문제를 들어 시위를 벌이기 시작해 법정소송, 버스 보이콧, 불매운동, 대중행진과 시위 등 당당한 자세로 비폭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나는 이 투쟁에 참여해 재판을 받게 됐으나 배심원과 판사, 검사가 모두 백인인 상황에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이끌어냈다. 윌리엄 밍 변호사와 허버트 델라니 변호사의 도움이었다.
15. 애틀랜타에서의 체포와 대통령 선거
내가 존 케네디를 만난 것은 그가 상원의원으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때였다. 그는 흑인의 투표권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했다. 당시 케네디는 흑백차별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진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당선되면 시민권에 관한한 옳은 길을 걸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나는 그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