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수수께끼
이희진, 오일환 지음 | 가람기획
애초 한반도에 관한 미국과 소련간의 타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타협은 분할점령이 아니라 공동관리에 목적을 둔 것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은 역시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피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나아가면서 미국이 주도권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구상 하에서는 한반도를 누가 점령하느냐 하는 점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더 이상 소련을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보지 않았다. 이때부터 미국은 소련을 오히려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인 적으로 보게 된다. 공동관리 정책을 포기한 상태에서는 진주한 부대가 점령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게 되고, 이후에 벌어질 외교적 협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반도에 미군이 신속하게 진주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갑자기 생겨난 사안이 되었다. 당연히 계획도 급박하게 변경해서 세워야 하는데, 그러자면 어느 정도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 문제가 미국의 최고 관심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이 임박할 때까지 한반도에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정책이 이어지고 있었고, 갑작스런 정책의 변경으로 진주계획은 졸속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보여준 혼란상도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제1장 분단의 미스터리--냉전구도는 있지도 않았다
1. 소련의 참전, 과연 필요했나?2. 소련은 미군의 희생을 줄여줄 수 없었다태평양 전쟁의 개전 초기에는 소련의 참전이 미국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기지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독일 전선에서 발등의 불을 끄는데 급급했던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련이 독소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여유가 생긴 1943년 이후 소련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을 밝히기도 했지만, 이 때는 이미 태평양 전선의 전황도 미국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특히 1944년 6월 마리아나 군도의 점령으로 일본 본토가 B-29의 출격권에 들어오고, 같은 해 10월 필리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소련의 참전은 이미 전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미국의 참전요청은 중지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 소련의 극동 군사력은 지극히 빈약한 수준이었으며, 실제로 소련이 참전한 이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전력의 우세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이 이미 저항의지와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줄기차게 추진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는 전쟁의 승패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에서 치러야 하는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소련이 미국의 희생을 대신 치러주고 싶지 않았고, 따라서 소련은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전쟁의 지분을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시기, 즉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참전했던 것이다. 즉 소련은 개전 일자를 고르고 있다가 일본측의 중재 요청이나 원자폭탄의 투하 등으로 갑자기 종전될 기미를 보이자 급박하게 참전해 버린 것이다.
미국 수뇌부라고 소련의 약속을 믿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미국측에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는 구상까지 했었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소련을 참전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이에 대하여는 미국측에서 일본이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 몰랐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1944년말부터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의 눈에도 뻔히 보였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까지 소련에 매달렸다.3. 맥아더의 야심미 군부 내에는 소련의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 의견은 묵살되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중 하나가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종전이 될 때까지 일관되게 소련 참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전쟁의 막바지에 미국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전략의 하나는 봉쇄와 폭격으로 일본을 굴복시킨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 본토에 침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쇄와 폭격' 전략에 있어서는 그 구조상 소련의 지원 같은 것은 별 필요가 없었다. 반면 '본토 침공' 전략에 있어서는 미군의 막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고, 이 희생을 다소라도 줄이려면 소련이 대륙에 배치되어 있었던 일본군을 견제해줌으로써 본토에 배치된 일본군의 증강을 방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태평양지역 육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맥아더 장군은 본토 상륙장전을 강력하게 요구한 반면, 해군의 레이히, 킹, 니미츠 제독과 항공대의 아놀드 장군 등은 '봉쇄와 폭격' 전략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전략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주역이 되느냐 하는 것과 직접 연관이 있고, 나아가 전쟁이 끝난 후 미 군부 요인들의 장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상륙작전이 시행될 경우 맥아더가 지휘 책임을 맡고 니미츠는 지원업무를 맡게 되어 있었다. 본토 상륙은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주일미군정의 책임자 자리는 맥아더가 차지했다. 덕분에 미국은 소련이라는 골치아픈 파트너를 만드는 달갑지 않은 보너스를 받게 된 셈이다.맥아더의 뒤에서 소련을 끌어들이도록 한 인물이 바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였다. 사실이야 어쨌든간에 미국인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의 참전을 반대하는 군부의 입김에도 한계가 있었다. 예상 외로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의 희생이 계속 늘어나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국 내의 여론은 악화되고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상 소련의 참전이 있어도 그 희생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 정치적으로는 일종의 면책이 될 수 있는 조치였다.
또 하나 루스벨트의 전략은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미국을 능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제거하겠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즉 당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대영제국을 해체하는 동시에 보수적인 서유럽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을 키워놓아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을 조장해 놓고는 배후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식이었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소련의 영향력을 증대시켜준 이유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4. 소련은 미국이 키웠다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 역사의 뒤편에 남은 사람들은 다만 그 때의 정황을 분석하고, 또 분석하면서 진실을 캐내려 할 뿐이다.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의 커다란 한 굽이였다. 세계사의 격변하는 권력이동과 전쟁의 소용돌이, 이데올로기의 꿈틀거림에 한반도 역시 사각지대가 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국토는 반동강이 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의 아픈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도 그 상처는 그대로 안은 채 한민족은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를 꿈꾼다.
과연 개인과 민족과 국토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낸 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된 것일까. 해마다 6월이면 고개를 드는 테마지만, 이젠 세월이 깊은 만큼 진부함 때문에 또 많은 이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주제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펴낸 이 책의 저자들은 냉정하고 영악하게 사태를 지켜본다. 전쟁에서 우방은 없다.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강대국들의 야심은 주도면밀하다. 전쟁을 수행하는 책임자들은 자신의 전략적 실책을 감추기에 바쁘다. 남의 나라 전쟁보다 자국의 이익이 앞서는 게 물론이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이제까지의 상식은 대략 '소련 공산주의의 사주에 의한 남침' 아니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으로 전쟁 유도'로 압축된다. 이 책은 후자의 편에 손을 든다.
다만 그것을 풀어가는 열쇠를 소련과 미국으로 대별되는 이데올로기의 양분으로 찾기보다는 엄밀하게 전쟁이 시작되고 군사작전이 수행되어가는 군사전략 과정에서 찾는다. 전황에 별 영향력을 주지 못하던 상태에서의 소련의 참전에 한번 의혹의 시선을 던져본다. 뚜렷하게 소련이 참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의 끈질긴 소련의 참전 요구의 뒷편엔 맥아더의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엔 루스벨트도 연관돼 있다.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영국과 유럽의 세력을 약화시킬 다른 세력이 필요했다. 38선은 우연히 그어진 것인가?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미국은 이미 한국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했고, 북한 지역이 공산화할 가능성이 훨씬 농후하다는 보고도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의 '공동관리정책'은 갑자기 '분할관리정책'으로 바뀌었다. 밀약설이 나오는 대목이다.
어쨌든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에는 미국의 영향력만이 강력하게 남았다.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은 "어쩔 수 없는 우방"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결론 삼아 내린 '전쟁이 남긴 유산'의 대목을 읽으면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은 더욱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저자들의 수수께끼식 접근은 또다른 진실을 묻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아직도 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한국전쟁의 모든 진실이 다 밝혀질 수는 없다. 이 책을 통해 역사를 보는 또 하나의 냉정한 눈을 얻어 이제까지 반쪽의 눈으로만 보아왔던 한국전쟁을 보다 넓은 시야로 바라볼 일이다.전쟁 전, 미국은 한반도의 안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무기를 비롯한 군사원조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한반도에서 손을 뗀 것이다. 실제로 남한의 군사력을 '경비대 수준' 이상으로 갖추려는 계획도 없었고, 원조금액 자체가 수천만 달러에 머물렀다. 당시 남한에 제공된 무기에 대한 미 육군성의 공식문서를 보면 양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지상군 무기의 대부분이 개인화기 내지는 휴대용 화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결정적인 것은 현대 지상전에서 핵심적인 전력 중 하나인 대전차화기가 거의 전무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엄청난 양의 무기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었으므로 상당량의 무기를 폐기처분해야 했다. 따라서 무기 원조는 비용이 문제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렁다고 해서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즉각 미국의 개입이 결정돠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큐슈에 있었던 스미스 부대는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와 같은 확고한 결의가 뚜렷한 전략조차 없이 하루 이틀 사이에 결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 거듭된 실책인가, 고의인가?미국은 남한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 이후 남한이 단독으로 외부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주려 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의 보고서에서 한국이 중국과 똑같은 재난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하겠다는 선언까지 발표해 버린 이후 북한에 경고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전쟁을 방지할 만한 조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전쟁이 터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바보다.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이 아닌 바에야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는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미군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은 전쟁 발발을 미연에 방지하기보다, 방치해 놓고 유사시 당사자인 미군 스스로 전쟁에 개입하여 해결하는 전략을 채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 자체가 미국도 전쟁을 원했다는 얘기가 된다.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미국이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정치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오고 경제적으로도 팽창하여 미국은 명실상부하게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른바 '먼로주의'로 돌아가버림으로써 국제정세에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실상 미국의 도움으로) 강력한 상대로 부상한 소련과 맞닥뜨려야 할 유럽국가들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지역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쏟아부어가며 경제적인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은 잠재적인 위협에 불과했다. 아직 현실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소련의 위협이 눈에 보일 만큼 확인되어야만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기 위한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방위비는 매년 삭감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 경제도 조금씩 불황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미국이 지금같이 초강대국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지나칠 만큼 반복되는 '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전쟁 직전부터 계속되는 국군 수뇌부의 실책은 단순한 실수라고 보아넘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바로 전날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다. 전쟁 직전의 시점에 육군 총참모장 이하 중요 간부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서울 시내는 휴가 나온 장병들로 넘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인민군에 비해 전력이 모자라는 국군이 개전 초기에 1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이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이리 저리 이동하고만 다녔다.
이런 사태가 과연 실수일 뿐일 것인가? 전직 CIA 고위간부였던 하리마오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직전에 벌어졌던 파티를 제안한 사람은 미 군사고문단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참모장 헨리 중령이었다. 제8사단의 문제도 실수나 통신 연락상의 착오가 아니라 상부에서 내린 진짜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태는 결과적으로 전쟁 전부터 가져왔던 미국의 의도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미국의 의도는 일단 남한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습하지 못할 정도의 침략을 받게 한 다음 미국이 직접 개입하여 해결하려는 것이었다.2. 휴전회담과 열강의 속셈3. 이승만을 제거하라!전쟁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이유로 휴전이 성립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에서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양쪽이 다 지칠 대로 지쳐서 전쟁을 계속할 의지도 능력도 잃어버려서 그러한 것이 나니라, 애초부터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타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든 중국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적당히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에는 북진통일을 하려 했던 적도 있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중국이나 소련과의 충돌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에서였다. 결국 중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장담이 없었다면 북진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이나 중국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소련 역시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눈치를 보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적당히 타협해 버렸다. 중국은 전쟁에 직접 개입하여 상당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그 대가로서 대만 문제와 유엔 가입 등의 이익을 취하려 했지만 자기들의 전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끝내 얻어내지 못한 채 전쟁을 끝냈다. 결국 동족 사이에 싸움을 일으켜 남 좋은 일만 시켜준 당사자들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5. 전쟁의 유산미국은 한국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 했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으로 대통령에 재선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 정부와 유엔군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제연합군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는 유엔과 미국의 권위를 무색케 하고 국제 여론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미국은 적극 강경책과 신중론을 저울질한 끝에 결국 이승만을 대체할 확실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모험보다는 이승만의 지위를 일정한 조건 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