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지음 | 현대지성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지음
현대지성 / 2020년 6월 / 216쪽 / 7,700원
제1장 총론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철학이 처음 생기면서부터 최고선(summum bonum), 달리 말하면 도덕성의 기초에 관한 의문이 사변 철학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최고의 지성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온몸으로 매달렸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저 치열한 논전 끝에 여러 분파와 학파로 갈라졌을 뿐이다. 이후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사상가 또는 넓은 의미의 인류가 이 주제에 관해 의견이 일치될 가능성은 소크라테스 시대보다도 높지 않다.
모든 행동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행동 규칙도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특성과 색깔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 추구할 때는 그것에 관해 먼저 분명하고 자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순서가 뒤바뀐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거꾸로 이미 가려낸 것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공리주의는,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 - 여기에서의 행복을 고도의 쾌감을 주는 흥분 상태의 지속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런 의미의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열정적인 기쁨으로 가득한 인생을 행복이라고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일시적인 것 외에는 별로 없지만 쾌락은 다양하게 많은 그러나 능동적인 쾌락이 수동적인 쾌락을 압도하고, 전체 삶을 규율하는 기초로서 우리 인생이 허용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순간을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행복을 이렇게 규정하고 나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역정 중 상당 기간이 이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목격되는 바와 같은 잘못된 교육과 왜곡된 사회 제도만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수준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쾌락의 결핍과 고통은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무수히 많다)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이 이론은 많은 사람들, 특히 느낌과 목적에 관한 대표적 사상가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즉, 공리주의가 쾌락 이상으로 더 좋은 욕망과 더 고상하게 추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으로 야비하고 천박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돼지가 즐길 수 있는 쾌락 이상의 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정하는 그들이야말로 인간을 비참한 존재로 만드는 장본인이다. 인간은 입맛대로 사는 동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일단 그런 능력에 대해 인식하게 되면 그것의 발휘와 거리가 먼 그 어떤 것도 행복이라고 간주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쾌락의 질적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쾌락의 질적 차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enjoyment)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타고난 능력이 월등한 존재일수록 어지간한 것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기도 훨씬 쉽다. 이런 어려움에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낮은 등급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짐승이 누리는 쾌락을 마음껏 즐기게 해준다고 해서 하급 동물이 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sense of dignity) 때문으로 이것은 대체로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커지며, 품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품위가 행복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물론 즐거움을 향유하는 능력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이 늘 그렇듯,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것을 감내할 만하다면, 그는 그것을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때문에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은 것이다.
이처럼 행복이 갖는 중요성을 상기해볼 때, 영웅이나 순교자들의 자기 희생 등과 같이 자기 몫의 행복이나 행복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공리주의 도덕률에서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마저 희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런 희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지 않거나 증대시킬 경향이 없는 희생은 한마디로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다른 사람들, 즉 집단적 의미로서의 인류 또는 인류의 집단적 이해관계에 의해 설정되는 한계 속의 개인의 행복 또는 그 행복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을 위해 헌신하는 자기 부정만을 찬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를 너 스스로 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이야말로 공리주의 도덕의 완벽한 이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공리주의는 첫째,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둘째, 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 특히 보편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양식과 자신의 행복이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제3장 공리의 원리의 궁극적 제재에 대하여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런 도덕률에 복종해야 하는가? 무슨 이유 때문에 그것을 의무적으로 따르게 되는가? 그 구속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효용 원리는 다른 모든 도덕 체계가 행사하는 윤리적 제재(sanctions)를 전부 가동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효용 원리가 행사하는 제재에는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외부적 제재는 우리 주변 사람들 또는 이 우주의 주재자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희망이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외부적 보상과 처벌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신에게서 비롯되든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오든 관계없이, 그리고 우리가 신이나 인간에 대해 쏟아 붓는 모든 사심 없는 헌신과 더불어, 공리주의 도덕이 인정되는 것과 비례해서 그 도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공리주의 도덕이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교육과 일반교양도 그 목적에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내부적 제재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하나의 느낌이다. 도덕적 의무감의 구속력은, 우리가 옳다고 설정한 기준을 위반할 때 해체당하게 되는 느낌, 그럼에도 기어코 위반하게 될 때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일련의 느낌에서 나온다. 존재론적 사유방식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실제로 사람이 도덕적 의무를 따르게 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런 느낌의 강도에 의해 측정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사회적 존재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삶의 목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느끼게 되었다. 설령 생각과 정신적 취향이 달라서 타인의 실제 감정과 상당 부분 어긋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성향에 대해 비난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인생의 중요한 목표에 관한 한 자신과 그들이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 즉 그들 자신의 참된 이익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것 또는 사회적 권력이 강압적으로 부과한 법적 조치 같은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그런 것 없이는 사람이 결코 잘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 마음속에 각인되고 있다. 이런 확신이 곧 최대 행복 도덕률이 행사하는 궁극적 제재(ultimate sanction)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성숙한 감정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동기와 어긋나지 않게, 오히려 바로 그런 것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내가 말하는 외부적 제재가 이런 작용을 촉진해준다. 만일 외부적 제재가 부족하거나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이러한 확신 자체가 각자 성격의 예민함과 사려 깊음에 비례해서 그 사람 내면에서 강력한 구속력을 형성한다.
제4장 공리의 원리는 어떤 증명을 내놓을 수 있는가?행복을 구성하는 것은 대단히 많다. 그 각각의 요소는 굳이 하나의 큰 것으로 합쳐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효용 원리는 특정 쾌락(이를테면 음악)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혹은 건강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불리는 포괄적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갈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 스스로 갈망의 대상이 되고 바람직하다. 따라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적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행복이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의 전체다. 따라서 그것이 그 전체의 부분이 된다. 공리주의의 기준은 이와 같은 관계를 정당화하고 인정한다. 처음에는 우리의 원초적 갈망을 충족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그런 방향에 도움이 되거나 일정한 상관관계를 가진 정도였던 사물들 자체가, 그 영향을 받는 인간 삶의 영역 속에서 지속성, 심지어는 강도의 측면에서 원초적 쾌락보다 더 가치가 있는 쾌락의 원천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돈이 가치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지고 다른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돈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갈망, 즉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에 대한 집착은 인간 삶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며, 돈보다 더 고상한 다른 목적에 대한 갈망이 전부 사그라질 때도 돈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위한다기보다 그 목적의 일부분으로서 돈을 갈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행복에 관한 개인의 생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만일 세상 이치가 이렇지 않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행복을 느끼기에도 대단히 부족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공리주의 철학은 일반 행복을 해치지 않고 그것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 사람들이 습득하게 된 다른 욕구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일반 행복을 달성하는 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덕을 최대한 사랑하며 쌓을 것을 명령하고 요구한다.
제5장 정의와 공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철학이 시작된 이래, 효용이나 행복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론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를 제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의(justice)에 관한 생각이다. 많은 사상가들은 정의로운 것은 자연 속에서 온갖 종류의 편의적(expedient)인 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관념적으로도 편의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효용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이야기하는 불확실한 기준이며, 정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개념 규정을 할 수 있고 세상 생각과 무관하게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이들의 말이 옳다면 정의라는 문제를 둘러싼 그 어떤 논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 마치 수학 공식을 대입하듯이 처리하면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너무나 먼 이야기다. 무엇이 사회에 유익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듯이,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숱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에서만 정의에 대한 생각이 엇갈리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상황에 따라 정의를 하나의 일관된 규칙, 원리 또는 격률로 이해하지 않고 다양한 성질을 띤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저지른 일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에 따라 그 일을 나쁜 것이라고, 또는 보다 부드러운 말로 싫은 것이라든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의 사람에게 어떤 일을 강제로라도 시키려 하는지, 아니면 그저 설득과 훈계를 통해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고 싶어 하는지 여부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든가 그렇게 하면 바람직하다거나 칭찬받을 만하다고 구별해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것 때문에 일반적 의미의 도덕과 편의, 가치 있는 것 중의 나머지 영역이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정의 때문이 아니다.
정의라는 말은 행동 규칙과 그 규칙에 강제력을 불어넣어주는 감정, 이 둘을 상정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것(감정)은 규칙을 위배하는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아가 그 속에는 규칙 위반으로 인해 고통 받는, 다시 말해 (이 경우에 적합한 표현을 쓰자면)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는 특정 존재가 들어 있다.
나는 정의감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 자신 또는 그 사람이 동정하는 다른 사람들(보편적 동정심을 지향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지성의 진보에 따른 개명된 자기 이익 덕분에 모든 인간을 다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다)에 대한 공격이나 손해를 물리치거나 보복하고자 하는 동물적 욕구와 같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감정으로부터 그 느낌이 도덕성을 갖추게 한다. 그리고 행동 규칙은 강렬한 자기주장의 동력을 제공해준다.
나는 효용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정의에 관한 가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을 반박하는 한편,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어느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종류의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그래서 정의라는 개념의 본질적 요소인, 모든 사람이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보다 강한 구속력을 암시하며 정당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