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평전
권수경 지음 | 이새
파스칼 평전
권수경 지음
도서출판 이새 / 2020년 12월 / 352쪽 / 20,000원
파스칼의 삶과 학문
수학자 파스칼 클레르몽에서 파리로: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불세출’의 신동이다. 파스칼은 소위 ‘박식가’다. 한 분야의 천재도 드문데 파스칼은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뿐 아니라 파스칼은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추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파스칼의 모든 학식과 재주가 또 원숙한 인격 안에 자리를 잡아 재덕겸비(才德兼備), 곧 재주와 덕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파스칼은 1남 2녀 중 둘째로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은 이듬해 세상을 떴다. 집안일을 위해 가사 도우미를 두긴 했지만, 자녀 양육은 아버지가 전적으로 맡았다. 부와 지위를 가진 귀족이 자녀를 직접 맡아 기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삼남매 모두 어려서부터 비범한 총명함을 보였기에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파스칼의 아버지 에티엔(1588-1651)은 법대를 졸업한 뒤 지방 판사 및 세무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에 통달한 인문학자였고 또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연구도 많이 하고 업적도 남겼다.
맞붙은 두 개의 원 가운데 하나를 고정하고 다른 원을 그 원 주위로 한 바퀴 회전시킬 때 회전하는 원에 위치한 임의의 점이 그리는 도형을 ‘파스칼의 달팽이꼴’이라 부르는데, 이는 이 도형을 가장 먼저 연구한 에티엔 파스칼을 기리는 이름이다. 이 달팽이꼴 하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파스칼, 그러니까 파스칼의 정리, 파스칼의 직선, 파스칼의 삼각형, 파스칼의 원리, 파스칼린, 컴퓨터 언어 파스칼, 대기압을 나타내는 헥토파스칼 등등은 전부 아들인 블레즈 파스칼의 업적이다.
파스칼이 8살이 되던 1631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이사했다. 온 식구를 데리고 수도 파리로 옮긴 첫째 이유는 아버지 자신의 학문적인 열정이었는데, 그는 파리 중심가에 집을 구입한 다음 주변의 여러 지식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35년 수학자 마랭 메르센 신부가 저명한 학자들을 모아 만든 파리 학술원에도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수학자 데자르그, 철학자 데카르트, 과학자요 신학자였던 가상디 등 쟁쟁한 인물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파리로 이주한 또 다른 이유는 자녀교육이었다. 어쩌면 이게 진짜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클레르몽에 있을 때도 세 자녀를 아버지가 직접 맡아 가르쳤지만, 파리로 이사한 뒤에는 직장에 매이지 않아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녀들에게 쏟을 수 있었다. 게다가 수도로 이사를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더욱 좋은 교육환경이 제공되었다.
파스칼의 정리와 사영기하학: 파스칼은 수학과 과학이 좋았다. 11살 때 탁자 위의 접시가 내는 소리를 관찰하여 소리에 대해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해 보았다. 접시가 뭔가에 부딪히면 소리를 내다가 손으로 잡으면 왜 조용해지는지 이유를 추론해 본 것이다. 눈높이가 아버지 어깨를 넘을 즈음에는 기하학 쪽으로 눈길이 쏠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라틴과 그리스어를 먼저 가르쳤다. 특히 수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려고 기하학 관련 서적은 아예 서재에서 없애버렸다. 그렇지만 책을 없애도 터져 나오는 재능마저 억누를 수는 없었다.
파스칼이 열두 살일 때의 일이다. 기하학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고전을 먼저 익히면 그 다음 기하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파스칼은 그럼 기하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만 가르쳐 달라 했고, 아버지는 여러 도형 사이의 관계와 비율을 연구하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후 어느 날 라틴 수업이 끝난 뒤 파스칼은 방에 혼자 남아 목탄으로 동그라미나 세모 등의 도형을 벽에 그려 놓고 도형의 면적, 비율 등을 따져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책을 치워버려 도형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런데 저 나름대로 둥근 것, 세모, 막대기 등으로 이름을 붙여 놓고는 정의를 하나씩 만들고 공리까지 만든 다음. 증명도 하나하나 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한참을 혼자 연구하더니 급기야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첫째 권 32번 정리에 도달하였다. ‘삼각형의 한 각의 외각은 그 각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각의 합과 같다. 삼각형의 세 내각을 합치면 두 직각과 같다.’ 이 정리를 만든 순간 아버지가 방에 들어섰다. 아들은 놀랐다. 아버지가 금지한 것을 하다가 들킨 것이다. 그런데 벽에 적어놓은 글과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버지는 두 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버지는 그 길로 달려가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수학 교육을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두의 뜻이었다. 아버지도 아들이 적어도 15세가 된 다음 수학을 가르치려 했던 생각을 바꾸어 즉각 체계적인 수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날부터 파스칼은 메르센 신부가 주관하는 학회에도 아버지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나이도 어린 왕초보 파스칼이 전문 학회의 수준 높은 연구와 토론을 어떻게 따라잡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기하학 공리를 홀로 터득한 파스칼에게 선배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 정도는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파스칼이 몇 년이 되지 않아 당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다.
파스칼은 학회 가입 이후 데자르그의 원뿔 곡선 이론에 관심이 끌렸다. 그런데 데자르그의 연구 과정을 줄곧 지켜본 파스칼은 막 16살이 되던 1639년에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하나 발표하였다. 원뿔 곡선에 내접하는 육각형의 성질에 관한 것이었다. ‘원뿔 도형에서 임의의 여섯 점을 골라 육각형을 만들 경우 세 쌍의 대변 (또는 대변의 연장선)이 만나는 세 점은 한 직선 위에 놓인다.’
오늘날 ‘파스칼의 정리’로 확립된 바로 그 논문이었다. 이 정리는 ‘신비로운 육각형 정리’라고도 불리는데, 이 정리에서 세 점이 놓이는 직선을 파스칼의 직선이라 부른다. 이 정리는 원이나 타원뿐 아니라 포물선 및 쌍곡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원뿔의 속성을 추론해 내는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발표를 직접 보고 또 발표문도 자세히 읽어 본 메르센 신부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그런데 학회 회원이었던 데카르트는 처음 놀랍다는 반응을 잠시 보이더니 아버지가 아닌 아들 블레즈가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십대 소년이 그런 논문을 쓰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데자르그와 파스칼의 연구는 거의 200년이 지난 뒤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이라는 독특한 학문을 탄생시켰다. 사영기하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데자르그에게 갔지만, 파스칼의 이름도 언제나 데자르그와 나란히 언급된다. 사영기하학은 간단히 말해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세상을 집어넣는 학문이다. 이들의 연구로 태어난 사영기하학은 19, 20세기 들어서는 해석 기하학, 대수 기하학으로 분화되었고, 상대성 원리나 양자역학 등 첨단 학문의 태동 및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은 3D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컴퓨터 그래픽, 증강현실, 컴퓨터의 물체 인식 등에 이 원리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도 사영기하학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고대에 시작된 지성의 탐구가 2천 년 뒤 천재들의 발견을 통해 큰 흐름을 형성하고, 다시 4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삶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 파스칼 물이 못 넘는 높이: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피티 궁전이 우뚝 서 있다. 이 건물은 피렌체의 재력가 루카 피티가 건축했다가 피티 가문의 몰락 이후 메디치가의 소유가 된 건물이다. 1549년 이 건물을 구입한 메디치의 부인인 엘레노라 디 톨레도는 건물 주위에 보볼리 정원을 만들고 그중 몇 곳에는 분수대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엘레노라가 세상을 뜨자 남편 코시모 1세가 이어받았고, 그 이후에도 두 아들과 손자를 거쳐 증손자인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까지 이어졌다.
물을 아래서 위로 쏘아 올리는 요즘의 분수와 달리 당시의 분수는 펌프를 이용해 물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 거기서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분수를 좀 높게 만들어 보려 했는데 당시 사용하던 펌프로는 아무리 해도 물이 10m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 2세는 원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 왜 10m가 한계인지 좀 알아봐 달라 부탁하였다.
분수 문제가 불거질 무렵 갈릴레오는 사이펀 문제로 또 오랫동안 씨름해 오고 있었다. 일정 높이의 물을 관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높은 지점으로 밀어 올렸다가 다시 처음보다 더 낮은 위치로 내려 보내는 장치가 사이펀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북부 사보나 지역에서 활동하던 과학자 발리아니가 사이펀에 한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공사를 하던 중 사이펀을 이용해 21m 높이의 언덕 위로 물을 넘기려 하는데, 펌프에 아무리 힘을 가해도 안 되더라는 것이었다.
발리아니는 오랜 기간 서신으로 의견을 나누어 오던 갈릴레오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대기의 압력이 약해 그런 것 같다는 자신의 의견도 덧붙였다. 편지를 받은 갈릴레오는 직접 실험을 해 보았다. 낮게 시작하여 둑을 조금씩 높여 보았는데 사이펀이 작용할 수 있는 높이는 10m가 한계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런 고민을 10년째 해 오던 차에 공교롭게도 보볼리 정원의 분수 역시 똑같은 10m에서 막힌 것이다.
진공이냐 대기압이냐: 당시 사람들은 사이펀과 펌프가 같은 원리에 근거해 작동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원리는 이천 년 전부터 전해오던 ‘진공 혐오’ 원리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상태에서는 진공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 이후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이 원리가 거의 이천 년 동안 서양 과학을 지배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갈릴레오는 자연의 진공 혐오 원리가 10m 높이까지만 힘을 쓰는 모양이라고 얼버무린 다음 쓸쓸한 말년을 마감하였다.
10m가 한계라면 그 이상에서는 어떤 다른 원리가 작용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실험을 시도한 사람은 로마 대학의 수학 교수요 물리학자였던 베르티였다. 베르티는 납으로 긴 관을 만들어 한 쪽 끝을 막았다. 물을 가득 부은 다음 뒤집어 물이 담긴 그릇에 세웠더니 물은 어느 정도 내려오다가 약 10m 높이에서 멈추었다. 관 위쪽은 밀폐되어 있고 아래는 물이 공기와의 접촉을 막고 있으니 물 위에 생긴 공간은 분명 진공일 것이다. 베르티는 그 진공이 물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물이 더 내려오지 않는다고 추정하였다. 베르티는 사이펀 실험도 하여 갈릴레오의 10m 한계론이 옳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피렌체에 있던 갈릴레오의 제자 토리첼리도 수은을 이용해 비슷한 실험을 했다. 토리첼리는 관 위의 공간이 진공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물이 더 내려오지 않는 건 진공이 아닌 다른 어떤 힘 때문이라고 보았고, 그 힘이 대기압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오늘도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수은 기압계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토리첼리는 이듬해 여러 가지 연구 및 실험 결과를 담은 두꺼운 논문집을 출판하면서 수은 실험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대기압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 무렵 진공이라는 주제가 철학적, 신학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에 있던 친구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실험으로 확인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오늘날 시험관 위에 생겨난 그 진공을 토리첼리의 진공이라 부르고, 진공의 압력을 계산하는 단위로 토리첼리의 이름을 쓴다 (Torr).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토리첼리의 업적이 친구 리치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된 덕분이다. 1m짜리 관을 이용한 간단한 이 실험으로 토리첼리는 오랜 세월 서양 과학계에 군림해 오던 핵심 원리 하나에 과감한 도전장을 던진 다음 몇 해 뒤 세상을 떴다.
파스칼의 여러 실험: 이탈리아의 실험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졌고, 파리 학회의 회원이었던 프티가 공무로 루앙을 지나면서 파스칼 부자를 만나 진공 관련 실험 소식을 전했다. 파스칼의 관심은 즉각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스칼은 물이나 수은을 일정 높이로 유지하는 게 대기의 힘이라 본 이탈리아 과학자의 추정이 옳다고 믿고 그걸 사실로 입증하기 위해 수은 위 빈 자리에 생긴 공간이 진공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파스칼은 한 달 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프티를 아예 동업자로 고용한 다음 함께 실험에 착수하였다. 1646년 가을의 일이었다. 파스칼의 다양한 실험은 이듬해 여름 파리로 옮긴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파스칼은 2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첫째는 물과 포도주를 비교하는 방법이었다. 예수회 학자들은 물 위의 공간이 진공일 리가 없고 물에서 나온 모종의 물질이 거길 채우고 있다 주장하였다. 그런데 포도주는 물보다 기포를 많이 만들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물질도 더 많이 만들 것이고, 따라서 포도주를 사용할 경우 물보다 더 큰 공간이 생길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파스칼은 물과 포도주로 동시에 실험해 보았다. 결과는 파스칼이 공언한 그대로 물과 포도주가 똑같은 높이에서 멈추었다.
둘째는 진공 속의 진공이라는 독특한 시험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파스칼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이 시험관을 이용한 실험은 우선 가운데 구멍을 단단히 막은 상태로 관을 거꾸로 하여 수은을 가득 채운다. 그런 다음 관을 다시 뒤집어 수은 그릇에 놓으면 수은이 쏟아져 내려오다가 반원 부분에 일정량이 걸려 고이고 나머지는 아래쪽 관에 일정 높이로 머무르게 된다. 시험관에서 수은 이외의 빈자리는 전부 진공이 된다. 아래 관 위쪽도 진공이지만 반원 부분의 수은 위쪽 역시 진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았던 중간 구멍을 여는 순간 아래에 머물렀던 수은이 중력 때문에 그릇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반면 반원에 고였던 수은은 관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 일정한 높이에서 멈춘다. 공기가 들어가 밀어 올리는 것이니 명백한 대기의 압력이다. 그 수은 위쪽의 줄어든 빈자리는 여전히 진공으로 남아 있다. 진공 속에 있던 또 하나의 진공이다. 진공 속의 진공 시험관은 수은 위의 빈 자리가 진공이라는 것과 수은을 일정 높이로 유지하는 것이 대기압임을 동시에 입증하는 멋진 장치였다.
파스칼은 사이펀 역시 진공 혐오 원리가 아닌 대기압의 작용임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결론은 명확했다. 물 위에 생긴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며, 물을 밀어 올리는 힘은 대기의 압력이다. 이로써 펌프나 사이펀이 진공을 안 만들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린다던 유서 깊은 이론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오류였음이 분명해졌다. 파스칼은 이 밖에도 몇 가지 실험을 더 한 다음 결과를〈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들(1647)〉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논문에서는 자연 상태에서 진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4년 전 이탈리아에서 행해진 실험의 구체적인 내용을 논문 서두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자신이 행한 실험은 그 실험의 연속임을 명시하였다.
높은 산에 올라: 파스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물이나 수은을 밀어 올리는 것이 대기의 압력임을 수치로 정확하게 증명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과학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퓌드돔 실험’이었다. 높은 산에 오르면 기압이 낮아질 것이니 수은주의 높이도 낮아지지 않을까? 그런데 파리 주변은 인근에 높은 산이 없었다. 하여 고향 클레르몽에 살고 있던 자형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 실험해 달라 부탁하였다. 처남의 부탁을 받은 페리에는 1648년 9월 동료 학자 5명과 함께 실험에 착수하였다. 수은을 담은 기압계를 2개 준비하여 일단 산 아래에서 대기압을 측정했다.
그런 다음 하나는 수도사 한 사람에게 맡겨 수시로 관찰해 달라 부탁하고 나머지 하나를 갖고 1465m 높이의 휴화산 퓌드돔 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에 닿자마자 수은주의 높이를 측정했다. 예상대로 수은 기둥은 땅에 있을 때보다 낮아졌다. 차이는 8cm 정도. 실험을 되풀이해도 수은의 높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다가 중턱에서 다시 측정해 보았는데, 수은이 땅바닥과 산꼭대기의 중간쯤에 머물렀다. 땅에 내려와 보니 아침에 맡겨둔 시험관의 수은은 처음 높이 그대로였다. 하루 종일 아무 변화가 없었다고 했다. 산에 갖고 갔던 시험관으로 다시 해 보니 아침과 마찬가지로 둘의 높이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