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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철학수업

윌리엄 제임스 지음 | 나무와열매


하버드 철학 수업

윌리엄 제임스 지음

나무와열매 / 2020년 2월 / 328쪽 / 16,000원



사고의 형태 -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는 의식



나는 사고 활동이 다음의 5가지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개인의식은 사고의 총체로서, 모든 사고는 개인의식의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둘째, 개인의식의 사고는 쉼 없는 변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셋째, 사고는 멈추지 않고 이어지거나 혹은 확연히 지속된다. 넷째, 사고는 언제나 자신과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사고는 선택, 취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자신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관심이 없는 것을 버릴 수 있다.

인류가 의식을 지니게 된 뒤로 우리의 사고는 필연적으로 대상, 관계로 이루어진 ‘다중체’의 모습을 띠게 됐다. 그리고 관심의 정도에 따라 단순한 감각과 복잡한 감각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조각가가 커다란 바위를 망치와 정으로 쪼개는 것처럼 우리의 대뇌 역시 우리가 감지한 정보를 가공한다. 우리의 관점에 아무리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혼란스러운 감각 상태에 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들은 모든 인간에게 사고라는 물질을 제공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인간의 사고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설사 무의식 상태에서 시간의 틈이 존재할지라도, 사고의 성질과 내용 면에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대뇌에서 정보를 재구성하는 작업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인류의 사고와 의식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방향을 통해 깨달음의 문을 열어라

책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다가 ‘비록 ……하지만’, ‘……뿐만 아니라’, ‘비단…… 뿐만 아니라 또……’, ‘왜냐면…… 그래서……’ 등처럼 논리적 관계를 지닌 문장구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하는데, 이러한 문장구조와 내용을 우리는 의식과 감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사고에서 언어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에 지나지 않지만, 사고에 존재하는 이러한 방향을 우리는 예리하게 식별해낼 수 있다. 우리의 사고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눈에 띄는 감각적 표상은 없지만 예리한 식별 감각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감각적 표상’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또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이른바 ‘감각적 표상’이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안정적인 심리 사실을 가리킨다. ‘감각적 표상’은 포착하기도 쉬울뿐더러, 사람들에게 시간 제약 없이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인류의 사고 논리 운동은 한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탓에 포착하기가 쉽지 않아 ‘심리적 과도(心理過渡)’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고 논리 운동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분명한 사실은 사고 논리 운동은 다양한 표상을 이끄는 ‘안내자’라는 점이다. 여기에 힘입어 사람들은 하나의 표상에서 또 다른 표상으로 옮겨가거나 표상의 점진적 변화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인지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우리는 사고 외에 사고의 대체품이 늘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뇌에는 수많은 사고가 존재하지만, 하나의 사고는 하나의 대상과 대응한다. 개체의 사고가 다른 개체의 사고와 동일하다면 심리학자는 해당 개체가 외부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고 간주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고 대상에 의거해 현재의 사고 대상을 판단할 수 있고, 과거 사고의 대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뒤에 이를 독립적 위치로 전환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독립적 위치는 과거와 현재의 사고에 ‘여지’를 제공하게 된다.

실용주의 - 실천의 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실용주의는 신학적 관점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적 관점 중에도 남다른 가치를 지닌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추상적인 철학 이론을 ‘인격화’하고, 지식은 현실에 응용되어야 하며, 현실에서 경험을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행동으로 교체를 대체하고, 경험으로 융통성 없는 원칙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용주의는 삶, 효과와 행위를 강조하고, 경험과 존재를 행동의 효과라고 여긴다. 자연계의 규칙과 본질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실용주의가 형이상학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비결로 작용했다. 실용주의는 행동의 효과를 이해하고, 행동에서 신념을 얻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개념과 이론은 세상의 정답이 아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의미와 가치를 판단할 때는 이론 또는 논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실제 활용도를 살펴야 한다. 나는 실용주의를 공리주의에서 비롯된, 효과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원칙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유물론과 유심론 모두 의미 없는 형이상학에 불과할 뿐이다.

실용주의 - 다양한 철학을 이어주는 ‘회랑’

실용주의는 이성에 반(反)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용주의는 독선적인 이성주의를 반대하고, 세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밝히기 위해 터무니없는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용주의는 특정 이론을 대표하지 않는다. 방법론 이외에 실용주의는 독창적인 이념이나 주장을 내놓지 못한다. 실용주의 학자 파피니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남겼다.

“실용주의는 우리가 배운 다양한 철학 이론을 이어주는 회랑과도 같다. 수많은 방이 모두 회랑을 통해 이어져 있다. 첫 번째 방에는 무신론자가 들어 있고, 두 번째 방에는 신성한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에는 기계 원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살고 있고, 네 번째 방에는 유심론적 세계관을 연구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다섯 번째 방에는 형이상학의 단편성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이 아무리 심오하다고 해도 다른 이론과 소통하려면 반드시 실용주의라는 회랑을 통해야 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적 방법론은 특별한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확한 철학적 방향을 찾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철학적 방향은 우리에게 원칙, 궁극(최후) 또는 가설의 필연성 모두 가장 핵심적인 연구 방향이 아니다. 최종 결과와 사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모든 사물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가 진리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는, 진리가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는지, 어떠한 이론이 우리의 삶을 더 효과적으로 이끄는지, 경험과 실천의 유기적 결합에 작은 허점도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실제 생활에서 하나의 이론이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면 진실할 뿐만 아니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성주의 -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다



사람의 이성을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이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보급한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다. 17~18세기 당시 이성주의는 이성이 감각보다 먼저라는 주장을 앞세우며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인류의 행위를 식별, 판단, 평가할 수 있는 지혜로서, 이성은 논점과 논거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논리와 추리를 통해 최종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각종 이론 또는 행위의 이유를 밝혀낸다.

한편 이성주의의 주요 경쟁자로 지목되는 경험주의는 영국에서 기원한 이론으로, 인간의 사상은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수학을 제외한 지식은 모두 객관적 세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경험주의는 감각기관 역시 지식을 획득하는 중요한 경로라고 여긴다. 이처럼 인식의 출처를 두고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고상하고 순결한 이성주의자

한 학생으로부터 예전에 자신이 들었던 철학 수업이 내 강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편지를 받은 적 있었다. 학생은 자신도 뭐가 다른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내 수업 내용이 무척 현실에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내 수업을 들은 많은 학생들이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교수들이 강단에서 들려주는 세상은 모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세계로, 현실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이나 충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처럼 순결하면서도 장엄하고, 온통 이성의 빛으로 반짝인다.

하지만 시장이나 거리에 나가보면 온갖 소란과 갈등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는 공장에서는 걸핏하면 파업 사태가 터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 간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심지어 유혈 충돌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되며, 심지어 더럽기까지 한지 새삼 놀랄 것이다. 즉, 철학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세상이 현실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자가 상상력으로 현실 생활의 고통을 내면에서 한 번 ‘미화’시킨 조작된 이미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객관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물로서, 현실에서 벗어난 썩 괜찮은 도피처일 뿐이다.

성향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철학의 성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철학이 한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원시적인 갈망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주의자들에게 책을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혼란 그리고 잔혹하고 기괴한 온갖 현실을 살펴보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렇게 현실을 보고 나면 그들의 입에서 ‘고상함’, ‘순결함’ 같은 단어를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고상함, 순결함이 사물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다는 걸 나 역시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철학 이론이 하나같이 고상하고 순결한 것이라면 이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철학에 심취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실용주의 - 이성과 경험 사이에 세워진 다리

철학계에서 권위, 경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세상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병들고, 아픈 몸 때문에 신음할 병 따위는 없다. 하나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이른바 전문가나 교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탓에 세상에 대한 평가와 분석 모두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고통, 배고픔, 갈등, 싸움 등의 사물은 하나같이 중요한 사실을 담아내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어떤 이론으로도 숨길 수 없다. 이는 경험주의가 이성주의를 공격하는 강력한 증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한 경험주의자는 스콜라 철학과 이성주의가 몽유병 환자 같다며, 그들에게 현실은 텅 빈 것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이 문제를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물론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유물론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이성주의는 한동안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됐다. 사람들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지만 심리적인 위안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자의 사상은 모두 어느 정도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부조화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실용주의로 양대 철학을 절충하자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성주의처럼 신학을 존중하면서도 경험주의처럼 사실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처럼 모두가 실용주의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실용주의를 인정해 주기를 기대한다.

유물론과 유심론 - 물질 속에서 방황할 것인가, 본심을 지킬 것인가



유물론과 유심론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 무엇을 결정하는가에서 비롯된다. 즉 유물론은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유심론은 의식이 물질을 결정한다고 한다. 유물론이 물질을 세계를 이루는 본질이라고 여기며 물질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의식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유심론은 선(先) 의식 - 후(後) 물질이라고 강조하며 의식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그 밖에도 세상을 통합하는 대상을 두고도 유물론과 유심론은 큰 차이를 보인다.

유심론자는 세상이 정신을 기준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주관적 유심론자가 세상이 인간의 정신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달리, 객관적 유심론자는 세상이 특정한 객관적 정신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여긴다.

한편 이들과 달리 유물론은 세상이 물질에 의해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소박 유물론(Naive materialism)과 기계적 유물론 모두 똑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유심론과 유물론은 여전히 고립되고 경직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유아론(Solipsism)과 결정론을 의식하고 있다. 한편 훗날 헤겔 등이 변증법을 유심론에 접목한 변증법적 유심론을 창시하고,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유물론에 접목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탄생시켰다.

유물론 역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유물론과 유신론은 상호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심론과 유신론은 같은 진영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단편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유물론 또는 유신론의 구체적인 관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으며, 그들의 작용만 살피면 된다고 나는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말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지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잠시 복잡한 문제를 내려놓고 우리의 인지 수준이 이해할 수 있는, 인류와 사회에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다줄 만한 문제에 집중하자는 뜻이다. 이후 사회가 일정 수준까지 발전하면 예전에 포기했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분석하면 된다.

가장 앞선 관점에서 바라본 유물론과 유신론은 필연적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유물론자일 수도 있고, 유신론자일수도 있다. 이들은 상호 모순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유물론적 유신론으로 융합될 수도 있다. 유물론적 유신론에서는 신과 영혼 등의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단순한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대자연을 뛰어넘은 정신적 존재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저 생명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해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나 신 등은 대자연의 산물이며, 자연계에서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사물일 뿐이다.

신을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생명체로 인식하면, 유물론적 유신론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로서 신학과 과학 사이의 대립 관계 역시 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학에서 비현실적인 규정이나 도덕적 규범을 더 이상 준수하지 않고도 과학을 통해 신학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유물론적 유신론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신 또는 영혼이라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연과학 분야에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원소와 에너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철학을 연구하는 데 유물론적 유신론은 든든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 준다. 이를 기반으로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면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밀도와 에너지가 상당히 작을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었을 때 체중은 거의 아무런 차이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육안이나 현미경으로 그 존재를 관찰하기 어려울 만큼 공기처럼 투명하거나 심지어 아무런 색도 띠지 않을 것이다. 셋째, 신 또는 영혼 등의 사물은 아무런 향기나 맛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미각, 후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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