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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지음 | 행성B
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지음

(주)행성비 / 2019년 6월 / 530쪽 / 22,000원





고대철학



왜 철학을 할까 - 철학의 시작

기축 시대(axial age):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지식과 사상, 철학이 형성되는 시기를 기축(基軸)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대략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를 가리킵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인도에서는 불교가 출현했고,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활동한 시대였습니다.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를 비롯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중국의 노자와 공자 등이 이때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의 많은 생각이 기축 시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현대 사회에서는 철학이 무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 철학자들의 주요 이슈였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 물체를 구성하는 근본 단위에 대한 논쟁들이 지금은 유전학이나 양자역학에서 논해지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 철학은 무용한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철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봐야 합니다. 과학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자력은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전쟁 같은 인류를 끝장낼 수 있는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과학이 원자력을 개발했다면 철학은 원자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판단하는 일을 맡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철학은 필요합니다. 누구나 걱정, 고민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 일이 재미가 없고 장래도 불투명해서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두면 새로운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싫은 일을 계속하자니 괴롭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인생관이 도움이 됩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힘들고 괴로워도 묵묵히 참으며 회사를 계속 다닐 겁니다. 견디다 보면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고 더 좋은 상황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설 겁니다. 싫은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기니까요. 아무튼 이런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과학은 큰 도움이 못 됩니다. 인생의 문제를 푸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철학을 배우고 지혜를 쌓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물이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 또한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입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행복이며 이를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쉽게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그의 설명은 현대인에게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지만 그것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괴롭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행복할 것 같아 공부를 하는데 고통이 따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질 수 있는 지성과 성품을 계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최고의 탁월성 즉 아레테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탁월성은 지성과 성품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지식 혹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성품은 행동과 태도를 말하죠. 행복해지려면 지혜를 기르고 훌륭한 태도를 갖추어 올바른 행동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중용: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이 중용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탁월함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탁월함이란 칭찬받을 만한 품성이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는 뜻입니다. 탁월함은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탁월함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때에 맞게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탁월함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입니다.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꾸준히 실행할 때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현실에 토대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돈과 같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최소한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해야 하고 그럴 때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합니다. 돈이 없다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렇다 보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욕망을 한없이 긍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중용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중용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돈과 명예, 승진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지혜와 습관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중세철학



어떻게 신의 존재를 증명할까 - 중세철학

중세철학의 문제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까지의 약 천 년 동안을 지칭합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기독교와 함께 놓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학 활동이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철학은 교부철학 시기와 스콜라철학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부철학은 3~8세기에, 스콜라철학은 9~14세기까지 큰 힘을 발휘합니다.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퀴나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죠.

중세철학은 세 가지 주제에 천착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적 노력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악의 존재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아퀴나스 또한 악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둘째, 이성 혹은 지식을 통해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때 이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셋째, 첫째와 둘째 문제에 대한 연장으로 발생하는 보편자의 존재 여부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흔히 ‘보편논쟁’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근대철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철학 특징을 말할 때 흔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란 표현을 씁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남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였습니다. 확실한 지식이 있은 후에야 믿으려는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우리도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옳다고 받아들입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정보들 중에서 내가 믿는 것과 관련된 것들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는 지식보다 믿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근대철학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중세철학이 신학에 의존적이었다면, 근대철학은 자연과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학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받아들였던 지식이 신학을 밀어내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은 지적 자신감에 충만해져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확고한 지식을 얻기 위한 자기만의 작업에 들어갑니다. 바로 ‘방법적 회의’입니다. 기존의 지식이 모두 의심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식을 쌓으려면 무엇이 진정 믿을 만한 지식인지 가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철저하게 검토한 후에 명확하고 자명한 지식을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더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배제하고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가 먼저 의심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었습니다. 우리는 크게 감각과 이성, 이 두 가지로 세상을 파악합니다.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들을 제공해 줍니다. 이성은 논리적 추론으로 얻어 내는 지식들의 기반입니다. 먼저 감각을 고려한 데카르트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감각은 변한다. 따라서 불완전하다.’ 얼마 전 맛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찾아갔는데 예전의 맛이 아니어서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맛있었다는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검토한 것은 이성적 지식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수학이나 과학적 지식은 명확하고 완전한 것같이 보였습니다. ‘1+1=2’라는 명제는 언제나 변함없고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방법적 회의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수학적 명제 또한 우리의 능력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에 의해 왜곡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뛰어난 어떤 악령이 있어서 ‘1+1’이 원래 3인데 우리에게 2라고 인식하도록 주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악령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면 우리는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악령의 가설’에 의해 수학적 진리가 진실이라는 보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악령이 나를 속이려면 어딘가에 내가 있어야만 속일 수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 거짓된 환상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배경입니다. 모든 것을 회의한 결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존재하는 나’가 ‘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말합니다. 악령이 나를 속일 때 속는 것은 ‘생각하는 나’이지 ‘내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존재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고, 나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와 나의 몸을 구분합니다.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칸트

근대철학의 비판적 종합: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 하면 떠오르는 말입니다. 직관이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개념은 구체적인 것들을 일반화해 만들어 낸 지식 혹은 관념을 뜻합니다. 각각 열한 명인 양 편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직관이고, 이런 경기를 축구라고 이름 짓는 것은 개념입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말은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이 없이 개념만 가지고 있다면 그 개념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축구의 규칙을 아무리 정확하게 안다고 해도 실제로 축구를 해 보지 않았다면 그 개념은 공허할 뿐이죠.

개념 없는 직관이란 지식으로 정돈되지 못한 감각이나 경험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떤 개념이나 지식으로 묶이지 못한다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발로 찬 축구공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개념적 지식으로 묶은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어떤 현상을 분류하고 개념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체계화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칸트가 어떤 작업을 해냈는지 이해되실 겁니다. 칸트가 말하는 직관 없는 개념이란 합리론을 말합니다. 당연히 개념 없는 직관이란 경험론을 말하겠지요. 이 둘을 종합해서 제대로 된 철학을 완성하려는 것이 칸트의 시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식을 얻으려면 경험이 필요하고, 이성을 통해 이 경험을 정리해야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입니다.

합리론은 이성의 절대성을 신뢰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 결과 독단론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반면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나 이성적 지식에 대해 간과하는 바람에 인간은 세상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인식한 칸트는 그만의 방식으로 방법적 회의를 실천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성의 능력 자체를 체계적으로 비판해서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비판적으로 다시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고 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철학으로 풀고자 했던 주제는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칸트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고대 이래로 철학자들은 인간은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이성을 가졌다고 믿어 왔습니다. 칸트 또한 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탐구 대상은 이성입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비판적 탐구, 이것이 칸트가 평생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으로 철학을 밀고 나갑니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을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풀어냈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은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성의 세계에 대한 인식 능력 자체를 재검토해 보겠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험적인 판단 형식인 시간과 공간, 범주를 통해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경험들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식은 판단 형식의 한계로 인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는 남겨지게 되고요. 여기서 실천이성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에 구속되어 식물이나 동물처럼 환경의 제약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에 속하면서도 그 법칙을 뛰어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순수이성이라는 인식 능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양심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자유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이성을 말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이성이 실천이성입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이 실천이성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선의지(善意志)라고 합니다. 그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의지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것은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은 무조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합니다. 조건 없이 무조건 행하는 명령이 정언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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