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자가 될까 두려운 자가 될까
이남석 지음 | 평사리
사랑받는 자가 될까 두려운 자가 될까
이남석 지음
평사리 / 2019년 6월 / 172쪽 / 12,000원
모나리자 미소의 가치
마키아벨리는 핵폭탄을 들지 않은 혁명가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사상, 아니 인문학, 인간학 일반에서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복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는 나오지 않았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그만한 인물은 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1474년에서 1543년까지 살았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의 전환을 이야기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을 다 잘 아실 겁니다. 콜럼버스는 1446년에서 1506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던 때도 1503년에서 1506년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 무렵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대 말이나 1960년 말을 세기말적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명명한다면, 1500년대도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인간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었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도대체 뭐길래’ 패러다임의 전환이야?”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그림인데, 이것을 인문학적이나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우선 ‘웃음’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신 적 있나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림이나 조각상 중에 웃음을 소재로 한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린 다빈치는 웃음이 소멸한 과거 천 년 그리고 가톨릭과 단절했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나왔을 때까지도 가톨릭이 지배했던 중세사회였습니다. 많은 화가가 종교화를 그렸습니다. 그 많은 화가의 작품 중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웃는 그림, 아니면 사람들이 박장대소하고 웃는 그림을 보신 적 있나요? 만약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그렇게 그렸다면, 죽음에 이르는 불경죄입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인간의 웃음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 소설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상적 배경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있습니다. 『시학』에는 유머(희극)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원래 『시학』에 희극이 있었지만 그 부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진 부분이 포함된 『시학』이 어느 수도원에 숨겨져 있는데, 그 책을 읽던 수도사들이 계속 죽었습니다. 웃음이 기독교에 치명적이라 생각했던 한 수도사가 『시학』 <웃음>편에 독약을 바르고 그 부분에 풀칠을 해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르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독약을 먹고 죽어갑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웃음을 박탈당하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은 웃음을 잃어버린 지 대단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리스 이후 이천 년 동안 잃어버렸던 웃음을 찾아주려 했던 것이 <모나리자의 미소>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백 년 동안 웃음을 잊어버립니다. 그 웃음을 되돌려줬던 사람이 채플린입니다. 채플린은 1947년 <살인광 시대>를 발표한 후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채플린은 인간에게 웃음을 돌려주는 혁명적 사상 때문에 빨갱이로 몰렸는지도 모릅니다. 웃음 상실 시대에 웃음은 가장 무서운 폭탄이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은 평범한 인간들이 웃고 살아가는 걸 아주 무서워할지도 모릅니다. 웃음은 무엇이든 이길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마키아벨리를 바라볼 때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해하면 매우 유용합니다. 어떤 패러다임의 전환일까요? 어쩌면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에 대한 재발견, 인간들 수(數)의 중요성,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말해준 전복적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자 중에 유일하게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제대로 말해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정치 이론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면 억제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없앨 것인가 등을 고민합니다. 정치학자는 민주주의가 급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의 기본 원리가 된다면, 예상치 못한 정치적 과정과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다수가 정치의 주인이 되어 소수를 억압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중하류층과 하류층인 양적 다수가 부자이고 많이 배운 중상류층과 상류층인 양적 소수를 억압하는 정치를 실현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가짜 민주주의론, 왜곡된 민주주의론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도전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그 점에서 인간에게 웃음을 찾아줬던 <모나리자의 미소>와 동격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키아벨리야말로 다수의 인간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져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정치학과 민주주의
정치학은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와 로마시대만 해도 일부만 민주주의를 누렸습니다. 고대 로마도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공화주의로, 귀족 중심, 원로원 중심의 정치체제였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도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만인평등의 민주주의 역사는 100여 년도 채 안 됩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역사는 매우 짧고, 이 체계는 불안정합니다. 히틀러를 예로 들어봅시다. 히틀러가 무장폭동이나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히틀러는 투표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지극히 위험한 정치체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일본의 아베나 미국의 트럼프 같은 사람이 잘 보여줍니다. 아시아, 남미, 유럽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치적 반동을 보십시오. 한국 정치사에서도 민주주의는 매우 짧고 불안정한 체제였습니다. 과연 민주주의는 믿을 만한 정치체제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승리한 다수가 패배한 소수, 배제된 소수를 어떻게 보장해줄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소수를 잘 보장해주고 보호해주면 민주주의가 잘 작동합니다. 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소수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51 대 49로 51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나머지 49를 무시하면 그 정치체제는 반드시 위태로워집니다. 배제된 소수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잘 다루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절대 과제입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회의했던 철인(哲人)이 아니라 철인(鐵人)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플라톤을 반민주주의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은 나이가 든 현명한 통치자들이 통치하는 체제, 즉 철인통치를 이야기했습니다. 소수의 현명한 통치자가 어떻게 다수를 잘 관리할지가 플라톤의 고유한 문제의식입니다. 플라톤에게는 인간의 감성이 사라진 철인(鐵人)만 남습니다. 플라톤은 이 점에서 매우 고루한 정치사상가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였습니다. 우리는 플라톤을 당대 아테네의 상황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그 시대를 변혁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습니다. 플라톤이 살았던 바로 앞 시대가 소크라테스 시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는 페리클레스 시대와 중첩됩니다. 민주주의가 가장 꽃피웠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치부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플라톤에 따른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적자들이 역설적으로 돈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세례를 받은 적자들은 돈을 벌게 해준다면, 어떤 정치체제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바로 이들이 독재와 유사한 참주정 정권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7, 8, 9장은 민주정에서 참주정으로 넘어가는 내용을 다룹니다. 플라톤은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유지했을 때, 과연 과거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최악의 전염병이 유행합니다. 무려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죽습니다. 아테네 몰락에는 또 다른 원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졌고, 스파르타가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입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이어 2류, 3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아테네는 몰락했는가?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맹점을 고치지 않으면, 아테네가 다시 전성기를 누릴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민주주의 문제점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통해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자살
소크라테스는 다수결 원리에 따라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사실 살 수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남기로 결정합니다. 그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일흔 살쯤 됩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고 인류사에 배팅합니다. 친구이자 제자인 크리톤이 찾아와서 “도망가게.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네”라고 말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부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배심원들 앞에서 구걸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기를 각오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집니다. 수적으로 다수인 사람이 통치하는 체제가 옳은가 그른가? 그는 다수의 판단이 그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플라톤은 배우지 못한 자, 현명하지 못한 자 모두를 정치에서 배제합니다. 민주주의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절대 다수가 맹목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면 방향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완할 방법이 있습니다. 다수의 현명한 사람들이 통치하면 어떨까요? 혼자 통치하는 것은 독재화의 가능성 때문에 위험하고, 다수는 어리석음 때문에 위험하다고 한다면, 현명하고 경험도 많은 노인이 모여 통치를 하면 어떨까요? 사실 그 통치체제는 오래전부터 정착해온 정치제도입니다. 바로 원로원 체제이고 오늘날 국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원로원이 출신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국회는 선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을 정치에서 배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이 정치학을 배울 수 없다고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정치학은 앎, 즉 지식의 문제가 아닌 경험의 학문이기 때문에 청년은 정치학을 배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리해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을 대놓고 비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 격인 플라톤 스승과 할아버지 격인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스승들은 앎이 지식이고 지식을 아는 자가 통치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철인통치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들과 정반대로 정치학은 앎의 문제가 아닌 경험의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이 중요하지 않고, 경험이 중요하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스승님들과 학문의 방법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플라톤이 이데아에서 출발하여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서 출발해 경험적 방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방법을 사용해 학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나누고 또 나눕니다. 플라톤이 인구가 20만 명밖에 안 되는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사상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의 정치적ㆍ사상적 스승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이 정치를 배워서는 안 되는 이유를 청년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청년은 감정에 지배당해 욱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청년의 기준이 나이와 무관하다는 단서 조항도 잊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었다 할지라도 경험이 부재하고 감정에 지배당하면, 최고의 학문인 정치학을 배울 수 없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서 청년을 슬쩍 배제합니다.
근대 정치 이론가인 로크는 돈이 없는 자를 정치에서 배제합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부를 갖춘 자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세금을 낼 수 있는 자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이것이 로크 주장의 핵심입니다. 로크의 이러한 주장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만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정당화합니다. 그는 정치를 하려면 필요노동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필요노동을 하지 않아야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시민이 아니며, 그런 사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입니다. 시민이 정치를 하거나 문화를 향유하려면, 노예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왜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가?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급의식이나 계층의식을 갖지 못하는가? 왜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가? 왜 가난한 자들은 부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정당을 위해 투표하는가? 이것은 정치학의 난제 중 난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응용해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먹고살기 바쁘다 보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로 하면 먹고살기 위한 필요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시민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정당이 어느 당인지 확인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부자 정당들의 선전과 선동에 휩쓸려 올바른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시민이라면, 다시 말하면 필요노동에서 자유로운 시민이라면, 소통하고 작업하는 시민이라면 선전과 선동에 휩쓸려 투표하지 않습니다.
정치에서 통치하는 자는 항상 소수입니다. 정치에서 지혜, 부, 권력, 나이 덕에 통치하는 자는 소수인 반면, 통치 당하는 자는 다수입니다. 민주주의는 결국 극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계입니다. 현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국가의 주인으로, 어떤 도시의 주인으로서 주인 행사를 해본 적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투표하는 날 빼고 우리는 국가의 주인으로 살지 못합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것처럼 보이는 미국이 잘 보여줍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시민 배제의 민주주의를 가장 정치적으로 잘 구현한 체계가 미국의 선거제도입니다. 다수표를 받고도 지는 것이 미국 대통령제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선거인단에 의한 승자독식 투표제로 뽑힙니다. 선거인단 후보 중 한 사람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하면, 그 선거구의 모든 선거인단을 다 획득합니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힐러리가 시민의 표를 더 많이 받았지만, 대통령은 공화당의 트럼프가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민주당의 고어가 표를 더 많이 받았지만, 대통령은 공화당의 부시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정치체계는 교묘하게 시민을 배제합니다. 하원은 시민 다수의 지배를 받습니다. 투표하고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당선됩니다. 따라서 시민 다수의 민의가 정확하게 반영됩니다. 하지만 상원은 시민의 민의, 다수의 힘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상원은 주가 크든 작든, 유권자 수가 많든 적든 주별로 무조건 2명입니다. 따라서 다수결의 원리와 무관합니다. 또한 상원은 거부권이 있어서, 하원의 의결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상원의 거부권은 다수의 의견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수단입니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다수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배제시킨 정치제도입니다.
미국의 정치제도를 기준으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다수가 정치적으로 자기 의견을 표현한 적이 있는가? 다수가 정치적으로 지배한 적이 있는가? 다수는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은 적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민주주의는 역사도 짧고, 제대로 구현된 적도 없는 매우 불안정한 체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