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
주현성 지음
더좋은책 / 2019년 1월 / 280쪽 / 14,800원
들어가는 말
쉽게 흔들리는 자존감은 자존감이 아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내가 왜 이랬지?’ 하고 후회를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일 하나로 이제껏 가져왔던 자신의 능력들을 부정하거나 자기 비하에 빠지곤 한다.
이성이나 인간관계가 조금만 틀어져도, 작은 키, 못난 외모, 넉넉하지 않은 경제력 등을 내세우며 신세 한탄을 한다. 일이 조금만 틀어져도 모난 성격, 둔감한 센스, 물러터진 대응을 끄집어내며 자신의 성격이나 태도를 비난하기도 한다. 평소 자신감에 차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잘 내던 사람들조차 조금만 예상 밖의 일이 생기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자기혐오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실 자기에 대한 신뢰도 확신도 없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쉽게 낙담하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일이나 인간관계에 다소 문제가 생겨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서둘러 원인을 찾고 대안을 마련한다. 매 순간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도 하지 않는다. 남을 탓하거나 원망할 일도 없다. 애써 타인과 비교하지도 않는다.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다행히 요즘 그런 자존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고, 그만큼 자존감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하고, 불안과 낙담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게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항상 ‘안 그래야지’, ‘다음엔 안 그럴 거야’ 하고 다짐하면서도 여지없이 그대로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자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좋아하지도 않는 이성을 만나 당장 진실한 사랑을 불태우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를 사랑해야 해’, ‘나를 믿어야 해’라고 아무리 다짐해도 나를 사랑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사랑하자’고, ‘나는 괜찮다’고, 아무리 다독여도 안 된다면,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감히 니체에게서 그 답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의 소중한 말과 글들이 그것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아무리 다독이고 다독여도 힘겨운 날들이 거듭되거나 죽고 싶을 만큼 절망의 순간이 엄습해온다면, 나는 그때야말로 니체를 만나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수많은 질병과 통증, 불면증 등으로 평생을 고통 받았다. 여기에 실연과 외로움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상마저 철저히 외면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삶을 불평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의 구렁텅이 속에서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이겨내고 승화하는 방법들을 익혔다. 또 그것들을 삶에 대한 통찰과 자신의 새로운 사상에 녹여냈다.
니체는 매 순간 자신을 사랑했고, 매 순간 자신을 믿었다. 수 없이 고통 받던 순간에도 모두가 외면했던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아꼈다. 자신의 가혹한 운명조차 사랑했다. 그야말로 탁월한 자존감의 소유자였고, 매 순간 긍정으로 무장한 자존감의 소유자였다.
누군가는 니체의 당돌한 기세와 굳건한 의지를 단순한 고집으로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마침내 그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세계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그를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 칭송하고 그의 주옥같은 말들을 수없이 책으로 옮겨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무한한 긍정, 굳건한 자존감으로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고 세상의 가치들을 새롭게 쓴 승리자다.
이 책에는 니체의 삶과 사상 그리고 굳건한 자존감을 소유한 그의 탁월한 방법들을 소개해놓았다. 그의 사상의 핵심 키워드인 ‘초인’은 바로 이런 긍정의 신, 자존감의 최고 고수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또한 우리에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서이다. 이 모호하기로 이름난 안내서를 좀 더 쉽고 좀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나는 때때로 로저스 심리학의 이론을 빌려 설명하고자 한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는 니체의 핵심 사상들을 수많은 임상실험을 통해 자신의 심리학 이론으로 거듭나게 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초인 사상’이 로저스를 통해 실천방법으로 제시되고, 그 방법이 우리를 쉽고 명확한 자존감 회복의 길로 안내해줄 것이다.
나는 니체와 그의 책에서 굳건한 자존감을 얻는 법,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또 진정한 나로 거듭나고 나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런 니체의 소중한 지침들을 나 혼자만 품고 있기엔 너무 가슴이 벅찼기에 오랫동안 이 책을 준비했다.
여러분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을 좀 더 알차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덮는 순간 그토록 모호해 읽는 것조차 고역일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어렵지 않게 읽어내는 행운도 함께 얻길 바란다.
무엇보다 오늘, 당신이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는 첫걸음을 뗀 것을 축하한다.
고통을 즐기는 가장 발랄한 방법
고통은 앎을 증대시킨다
니체는 ‘지독한 질병’과 ‘고통’이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때때로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거대한 변화까지도 말이다. 니체는 심지어 질병과 고통에서 회복기로 돌아오는 기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변화가 잇따르기에 고통을 그리도 감사한단 말인가?
니체는 먼저 일상적인 것과의 단절을 지적한다.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은 깨닫게 된다. 때때로 자신이 자신의 일상적인 직분이나 업무, 또는 교제에서조차도 병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깊게 숙고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질병으로 인해 강요된 한가함이 이런 지혜를 얻게 만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만큼은 아니더라도 크게 병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유사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커다란 고통은 그동안의 모든 흐름을 깨고 자신의 몸과 삶에 집중하는 계기를 만든다. 지속되는 병원 생활 또한 일에 함몰되어 있던 그동안의 생활 패턴으로부터 갑자기 자신을 단절시켜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곤 한다. 니체처럼 고약하게 오랜 고통에 시달린다면, 아마 그 단절은 훨씬 더 큰 것이었으리라. 이런 단절은 다른 변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정신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깊은 고독, 모든 의무와 습관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자유, 이 모든 지적 이점을 제외하더라도, 힘겨운 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 그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그런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하찮고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져버린다. 아니 그 전에 자기 자신이 솜털도 색깔도 없이 자신 앞에 놓이게 된다. 그가 이제껏 위험한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면, 이렇게 고통을 통해서 최고의 냉철함을 되찾는 것이 그를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것도 아마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아침놀』
자신에게 지속되는 극도의 고통은 오직 자신의 몸과 생명에만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사회적 의무와 관습, 그저 앞다투어 탐했던 다양한 욕망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이제까지 보고 익힌 모든 것을 전부 걷어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우리가 배워왔던 익숙한 길, 익숙한 가치, 익숙한 방법을 벗어던졌을 때 우리 앞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길, 다양한 가치, 다양한 방법이 열리게 된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 안에서 무수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해버린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렇다. 질병과 고통은 그렇게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을 던지는 기회이며, 새로운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이 된다.
그렇다면 질병이나 고통뿐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지독한 시련과 절망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절망 속에서 우리는 부수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우리의 진실한 욕구와 새로운 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 우리는 니체의 다양한 조언이나 로저스 심리학의 도움을 통해 고통 없이 그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나를 지배하던 것들
나답게 살아가는 자, 초인
한때 더 많은 발전, 더 많은 생산을 기치로 목표만 보고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더 좋은 사회, 더 강한 국가나 더 강한 기업을 앞세워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가 있었다. 뛰어난 팀을 만들고 뛰어난 조직원이 되기 위해 철저한 자기계발을 독려하던 시대도 있었다. 더 많은 돈, 성공을 위한 더 많은 자기계발은 여전히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돌보고,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에게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온전히 나답게』,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어디 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등 최근 ‘자기답게’를 강조하는 수많은 위로의 책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불경기, 실업, 치열한 경쟁 등으로 위로와 내적 성찰을 원하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그러나 이전보다 이런 메시지들이 자연스럽게 들리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한 사람 한 사람씩 알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원래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부자연스러움으로부터, 자기의 정신으로부터 가장 회복이 잘되는 것은 자기의 본성 안에서이다. -『우상의 황혼』
원래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의 삶을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을 우리는 ‘입법자’라고 바꿔 쓸 수 있다. 입법자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가치와 의미에 따라 사는 것이고, 자기답게 사는 것 역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그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가치와 기준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오직 자신이 느끼는 의미와 즐거움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새로운 사람,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 비교할 수 없는 사람,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의 입법자인 사람, 스스로를 창조하는 창조자! -『즐거운 학문』
그러므로 초인의 또 다른 이름, 아니 입법자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답게 사는 자’다. ‘자기 자신이 되는 자’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양심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너는 너 자신이 되라!” -『즐거운 학문』
그렇다면, 어쩌면 최근의 이런 상황들은 여기저기서 초인을 꿈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너도 나도 초인을 꿈꾸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니체는 200년이 지나야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의 시대가 우리 안에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
신은 죽었지만 여전히 신의 그림자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 장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관습과 의무에 휘둘리고 있다. 혼자 있든 함께 있든 그 순간순간 해야 할 의무들과 지켜야 할 체면, 언제부터인지 자리 잡은 끈질긴 신념들이 따라다닌다.
어떤 것에 대해 갑자기 질문을 받았을 때, 보통 우리에게 떠오르는 최초의 견해는 우리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계급, 우리의 지위, 우리의 출신에 속하는 일반적인 견해일 뿐이다. 우리 자신의 견해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를 끝없이 비교하게 하고, 주눅 들게 하며 지치게 한다는 것. 그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욕구나 현실적 필요들을 가려 왜곡시키고 원하지 않는 삶을 당연한 듯 살아가게 한다. 도대체 누구의 삶을 사는 것인지, 무엇에 만족하며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속 깊이 심리적 저항과 허탈감만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말한다.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삶은 고역이라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하지만 니체는 원래의 제대로 된 삶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용감할 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언제나 호기심이 가득하고, 즐거운 것이며, 희망에 차고 기대가 돼서 매 순간 삶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고통과 허무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해 니체가 보여준 것이 ‘초인’인 것이다.
니체는 신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법을 세워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자기를 부정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매순간 긍정으로 맞서라고 말한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그 기쁨을 만끽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초인’이다.
나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사람들이 건전하고 건강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을 견뎌내면서 쓸데없이 방황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이로써 초인 사상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우리는 쉽게 방향을 정할 수 있고, 우리 역시 초인을 꿈꿀 수 있다. 실천하는 것만 남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우리가 머리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니체의 철학이고 초인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를 우리는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실천을 통해 니체의 초인 사상을 내 삶에 적용하고 또 내가 초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거듭난다’는 것.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변하는 것이다. 그저 ‘초인이 어떻게 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초인처럼 느끼고 초인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니체가 어떻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얻게 되었는지 상기해보자! 그것은 그저 지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고통을 통해 몸이 바뀐 것이었다. 표범이 나무늘보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저 사는 게 즐거워 기쁜 사람의 감각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감정과 감정 반응이, 또 몸이 변해야 한다. 달리 니체의 사상을 몸의 사상이라고 부르겠는가.
누군가는 이 순간 황당한 소리라고 폄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다. 이제껏 수많은 임상심리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 반응을 바꾸고 몸의 감각을 바꾸어 저절로 우러나는 긍정을 만끽하고 산다. 무엇보다 몸의 반응이 바뀌어야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자존감을 소유할 수 있다. 살아 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감정 반응을 가져야만 더 이상 자기 부정으로 후퇴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