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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민이언 지음 | 다반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민이언 지음

다반 / 2018년 4월 / 311쪽 / 16,000원





살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면사회



[1] 트루먼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세트장이란 사실도, 자신의 삶이 시청자들에게 공개되는 관찰 예능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미 관찰의 시선에는 익숙해져 있다. 관계 속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어느 정도의 연출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던가. 영화 〈트루먼 쇼〉 내에서 트루먼의 타인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시청자들과 함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트루먼의 관찰자이지만, 그들 역시 시청자들에 의해 관찰을 당하는 입장이다. 시청자 역시 관찰의 시선 안에 놓인 삶을 살아가는 페르소나들이다. TV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트루먼의 삶을 향한 시선은 ‘훔쳐보기’에 앞서 ‘돌아보기’인 셈이며, 장르는 관찰 예능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이다.

이 프로듀서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만든 신의 입장이다. 자신이 딛고 있는 세계가 그저 가상의 세트장에 불과하다는 비밀을 알아버린, 그래서 이 세계를 벗어나 진실을 보고자 하는 트루먼에게, 프로듀서는 마이크로 지시를 내린다. 어차피 세계 밖에도 진실은 없노라고, 그러니 차라리 계속 그 세계에 머물라고…. 트루먼에게 프로듀서의 음성은 하늘 아래로 울려 퍼지는 ‘말씀’이 된다. 그러나 신 역시 시청률이란 ‘절대정신’ 앞에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쇼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이미 쇼의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아이러니, 신은 세상 밖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 자본적 존재이다. 그렇듯 모든 것이 쇼이다.

우리가 순수한 ‘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관계의 메커니즘 안으로 던져지는 사회적 존재에게, 타인을 매개하지 않는 순수존재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겐 ‘나’로서가 아니라 남들이 ‘나인 줄 아는 모습’으로서 살아가는 시간들이 많다. 즉 ‘나’로서보다는 타인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너’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일반적이다.

[2] 애니메이션 〈타이거마스크 2세〉에 등장했던 캐릭터 하나가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이 쓰고 있던 복면에는 눈, 코, 입을 노출시키는 부분이 없었다. 그저 복면크기만 한 물음표 하나가 새겨져 있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그 이름이 ‘미스터 후’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면서도 대답인 것 같은 물음표, 동심은 그 알 수 없음의 표식으로부터 더욱더 사악한 기운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린 얼마나 많은 가면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을까? 변검(變?)의 예술은 찰나의 미학에 앞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을 대변하는 영원으로서의 인문은 아닐까? 능력 있는 남편으로서, 의리 있는 친구로서, 노련한 상사로서, 열정적인 부하로서…. 수많은 관계를 욕망하고, 강요받고, 피곤해하며 살아가면서, 때때로 그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또한 외로움에는 취약한 사회적 존재. 정작 그 자유의 순간에는 자신을 보아주는 세상의 시선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이다.

가면은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성질이다. 내가 숨기고 싶은 것들과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것 사이에 가로놓인, 불안과 위안의 양면성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얼굴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텅 빈 공백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자아라는 것은 차라리 벗어던진 가면에 묻어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내가 지닌 속성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적 조건의 속성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연장에 있는 페르소나를 자아의 일부로 인식할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개인의 무의식마저도 이미 타자의 담론에 오염되어 있는 형국이다. 개인에게서 반복되는 속성은 순수한 ‘나’가 아니라, 타자들에게 비춰지는 ‘너’를 포함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이 나를 존재케 하는 것들이다. 프로이트를 빌리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듯 ‘너’와 ‘나’는 서로를 비추는 빛인 동시에 거울이다. 하여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투명사회’는 곧 ‘거울사회’이고, ‘가면사회’이기도 하다는….

니체 이전의 철학에서는 순수 자아에 대한 객관적 논증으로 ‘타자’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였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결국 모든 페르소나가 분열된 나의 자아이기도 하다. 갑바 있게 살고 싶었으나, 때로 비굴할 수밖에 없고, 때로 비루할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 최소한 지켜져야 하는 자존감이, 이건 전혀 나답지 않은 삶이라고 되뇌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 이전부터 나 자신으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마법이 풀린 피오나 공주의 반전과 같은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지기를 갈망했지만, 정작 벗어낸 가면이 나의 실상이었다는….

[3] 탄생과 더불어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사회의 가치를 매개한 채로 자라난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 개념이다. 때문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순수한 자아와 페르소나를 갈무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반성의 과정을 거듭해도 결국 타인의 시선에 비춰진 ‘너’로서의 ‘나’가 자기정체성을 대신한다. 하여 나답지 않다는 판단은 상대가 하고, 나다운 게 뭔지를 상대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페르소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자아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이다. 결국 가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무의식은 엉뚱한 곳에서 ‘증상’으로 터져 나오고야 만다.

가령 밖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인격으로 평가받는 가장이 집에서는 폭군으로 군림하는 경우, 의식의 차원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가장이 왜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는지에 대한 원인은 명쾌하게 밝혀지기 어렵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참고인으로 소환해 그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는 방법론이다. 풍선의 어느 지점을 누르면 다른 어느 부위가 팽창하기 마련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히스테리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억압을 견디지 못한 무의식은 압력의 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분출된다.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으로는 인과와 상관을 따지기가 다소 모호하다.

의식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관성과 함께 흘러가기 때문에 문제점이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 이면에는 정반대되는 성향의 무의식이 존재하기도 한다. 저것은 내가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하지만, 실은 그게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타인을 더욱 가열차게 성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명품을 지니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지 않을 시, 명품족을 성토하며 ‘고작’ 아울렛 상품이나 사고 있는 자신을 ‘검소’의 미덕으로 끌어안는 경우다.

콤플렉스를 억압할수록 더더욱 ‘증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굳이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는, 필히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심리를 동반한다. 외향적인 성격을 표방하는 사람일수록, 실상 단절과 소외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그래서 그토록 대외적인 관계에 집착하며 자신의 사회성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 결핍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은 그냥 나의 콤플렉스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에 대한 콤플렉스인지를 스스로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점. 대면할 용기가 없어 무의식에 숨겨둔 채 방치한 것들이 히스테리의 원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제거하기는 힘든 법, 그 원인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내야 도려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정신분석 상담의 원리이다. 그 도구들이 무의식의 시그널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매뉴얼들이다.

물론 정신분석이라고 해서 모든 정신의 문제를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정신을 매뉴얼화시키는 체계에 부정적인 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결핍의 속성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나 비슷비슷하다. 자신에게 있는 원인을 남에게서 찾지 말라는…. 나보다 잘난 남이 소유한 것들을 도덕의 명분으로 성토하기보단 그냥 부러움의 한마디를 내지르는 게 정신건강에는 이로울 것이다. 아니면 잘난 남보다 내가 더 잘나져야 하는 방법뿐이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서, 남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행위들 모두가 실상 좌절의 표현인 셈이다.



살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 그대로의 사랑



[1] 서로에게 지쳐 결국 이별을 택한 두 남녀는, 과학의 힘을 빌려, 서로가 사랑했던 시간들까지 아예 기억에서 지워내기로 한다. 서로를 떠나보냈지만 그와 그녀를 따라가지 않은, 상처로 들러붙어 있던 기억들을 차라리 들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망각과 망각 사이에 여전히 놓여 있었던 인연의 끈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서로의 앞에 데려다 놓았고, 그와 그녀는 마치 처음인 것만 같은 두 번째 사랑에 끌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기억에서 지워낸 이별까지도 재연이 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러닝타임 내내 그들을 비추는 태양은 겨울의 햇살이다. 다른 계절만큼이나 환하지만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은…. 여전히 사랑의 속삭임을 습관적으로 내뱉지만,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랑. 내가 여기 있고, 너 역시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조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닌…. 영화에 삽입된 알렉산더 포프의 시는, 사랑에 관한 감독의 생각을 대변한다.

처녀의 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 가는 세상과

흠 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한 빛과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은 얼마나 행복한가



인연을 확신할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에게 끌리던 설렘. 거절이 두려워서, 용기가 나지 않아서,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는 불안한 마음은, 상대를 늘 내 시선 안에 잡아두기도, 인연에 대한 기대로 우연을 가장해 서로의 시선 안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껏 지켜볼 수 있는 사이가 되면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랑은 조금씩 식어가고 그 냉각의 속도만큼으로 사람은 지쳐간다.

사랑의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이유도 단순하다. 더 이상 너를 견디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훗날 뒤늦게 도래하는 깨달음은, ‘너’이길 바랐던 내 이기적인 욕망과 관대한 ‘나’인줄 알았던 합리적 착각 사이에 방치된 무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사랑과 이별은 그 무지의 결과였다. 아울러 찾아오는 각성은, 너와 향했던 사랑이란 것이 실상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과, 내 틀에 맞춰질 수 없어서 덜어내어 버린 너를 사랑하지 못한 나였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내린 사랑의 정의는 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답지 않게 순애보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잇대어지는 해석은 니체답게 까칠하다.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사랑할 때가 아니라 헤어진 후에 비로소 깨닫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별의 또 다른 서사를, 이미 한참을 흘러와 버린 오늘의 우연 속에 깨닫는다. 그와 그녀가 떠나간 것이 아니라, 그와 그녀를 떠나보냈다는…. 네가 없는 지금 여기에서, 네가 있던 언젠가의 여기를 다시 상기하며, 너와 내가 같은 시간을 함께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순간들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그것이 사랑이다.

[2]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그저 ‘너’라는 이유밖에 없다. 헤어지는 이유 역시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젠 더 이상 서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좋지 않은 이유가, 처음 좋아하게 되었던 이유만큼이나 명확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무뎌진 마음으로 이별을 말하지만, 그 이별이 아파서 다시금 되돌아보는 사랑 뒤에, 여자는 어떻고 남자는 어떻다며 서로에게서 원인을 찾는 부질없는 노력들이 남아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직 더 좋아하는 쪽에서 굳이 이별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은 왜 ‘좋지 않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찾아져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게 때로는 그렇게 쓸데없이 합리적이다.

니체에게도 자신의 일생을 함께하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슬픈 사랑으로 끝이 나고 만다.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던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니체뿐만이 아니라 당대 많은 지식인들의 흠모를 받았던 루 살로메. 니체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한 사연은, 니체를 좀 공부했다 싶은 사람들에겐 늘 거론되는 스캔들이며, 니체에 발을 걸고 있는 텍스트의 상당수가 이 이야기로 분량을 채운다. 니체는 사랑과 여자에 관한 어록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랑의 어록들로 섣불리 판단해보건대, 천재라 불리는 사상가도 사랑에는 많이 서툴렀던 것 같다. 너무도 논리적이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한 니체의 생각들이지만, 인류 역사상 사랑이 합리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이유가 없는 이유로 이끌려가는 맹목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성적 도덕 앞에서도, 자신이 저지른 불륜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로맨스라고 믿고 살아가는 너와 내가 아니던가.

니체의 철학을 대변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 아모르 파티(Amor fati)이지 않을까?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운명적인 사랑은 가능하지 않았던 철학자. 인류의 사랑을 받았어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철학자. 그가 바로 니체이다.

[3] 사랑에 이데올로기의 간섭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겐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럴까? 배우자의 조건을 따지는 세대부터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간섭이다. 감정의 사례가 아닌 조건들로 감정의 명제를 검증하려고 드니 오차 범위는 커질 수밖에 없다. 희망사항이 채워지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면서 오차가 없기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것이 오류이다. 사랑은 내가 지닌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상대에게 맹목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금오신화』에는 「이생규장전」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제목에 그대로 언급되어 있듯, 낭자 최 씨를 사랑하게 된 서생 이 씨는 양반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담벼락을 훔쳐보고, 훔쳐보다 못해 그 답을 넘고야 만다. 고고한 선비에게서 담을 뛰어넘는 남세스러움을 가능케 할 정도로, 사랑은 담론의 경계를 넘어서는 범주의 충동이다. 「이생규장전」이란 제목의 상징성을 들뢰즈의 철학에 빗대자면 ‘탈영토화’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 앞에서는 담을 넘고 경계를 지운다. 남세스러움이라는 것도 담론의 기준일 뿐,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 용기’로 다가설 수 있는 열망이 사랑이기도 하다. 샤르트르가 정의한 사랑은 그가 말한 ‘실존’의 연장선이다. 모든 것이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의 절대적 선택, 사랑은 그런 자유를 전제로 한다. 다른 누군가를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오로지 그 혹은 그녀만을 사랑하는 것. 이승환 씨의 노래를 빌리자면,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살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피로사회



[1] ‘피로사회’의 한 표집으로 살아가던 어떤 이가, 기상의 곤란함을 말끔히 씻어내게 된 어느 날에 관한 고전이 있다. 차라리 침대가 되어 버리고 싶은 아침나절의 무기력을 잊은 이유는, 기상보다 앞서 다가와 있던 황당한 사건 때문이다. 벌레가 되어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어느 날 아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가 아직 벌레인 상태로 끝이 난다.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레고르 잠자는, 그 고된 하루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이후엔 가족들의 소외까지 감내해야 했다. 자신도 벌레가 되고 싶어서 벌레가 된 건 아닌데, 가족들은 그에게 벌레가 되어 생활비를 벌어오지 못하는 죄를 따져 묻는다. 외로이 그리고 초라히, 그러나 기꺼이 벌레로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의 죽음 곁에서 삶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으로 돌아서는 가족의 비정함, 카프카는 그 비정함들을 비추는 따뜻하고도 평화로운 햇살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아름다운 크기만큼으로 파고드는 슬픔이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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