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함께 읽는 365일 니체
석산 지음 | 북오션
그림과 함께 읽는 365일 니체
석산 지음
북오션 / 2016년 1월 / 368쪽 / 14,500원
제1장.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의식적 사고’이다. 그저 잘 못 느낄 뿐이지 인간은 대부분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지능 지수, 감성 지수, 사회성 지수 등 인간의 다양한 지능 영역이 발견되었지만, 그보다 더 인간의 지성적 사고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배출구가 없는 본능이 잠재되어 있는데 도덕의 계보(系譜, 양심, 사회적 여론, 관심 등)를 위해 편의상 이를 ‘영혼’이라 불러왔다. 영혼의 최대 장점은 ‘격정’과 ‘지속적 의지’의 힘이다. 이 두 가지 힘이 도태와 진화에 필수 불가결한 항목이다. 격정이 없으면 인간은 무체(無體)동물과 다를 바 없게 되고, 지속적 의지가 없으면 불나방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고상한 영혼이란 격정과 지속적 의지의 아름다운 결합에 불과하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존재를 달래기 위해 신을 갈구한다. 하지만 신을 찾아 교회와 절 등에 가는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경건하다. 오히려 기도와 단식으로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학대하면서 은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퇴행적, 퇴폐적이다. 종교인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는 천국이나 극락을, 또는 신의 자비나 은총 따위를 기대하지 않는다. 종교인은 삶 이외 또 다른 대가를 바라지만,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삶의 행위’ 자체가 보답이 되는 일상만을 원한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나는 율법이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에 대해서가 아닌 오직 ‘나 자신’에 대해서만…….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즐겁게 살려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뼈는 강하고, 발은 가벼워야 한다. 곧 우리는 축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출제를 준비하는 것 외에 닥칠 수 있는 어려운 상황도 미리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자신이 만든 율법의 수호자가 되려면 자기 안의 온갖 욕망을 세심히 자제하라. 즉, 자기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지 헛된 생각을 하는 몽상가가 되어선 안 된다. 음울해서도 안 되고 늘 굳세고 원기가 왕성해야만 가장 ‘좋은 것’이 나를 향해 오게 된다.
대립의 개념을 버려라
행복의 대립은 고통인가, 아름다움의 대립은 추악함인가,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 ‘훌륭하다’의 대립은 ‘비열하다’인가……. 그대여,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특별한 누군가가 그렇게 정했는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개념어는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개념을 절대적인 언어로 옮기지 마라. ‘상대적’이 뜻하는 것은 대립이 아닌 각자가 느끼는 정도의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칫 정도의 차이를 대립으로 번역하면 조금만 개념어가 달라져도 사람들의 얼굴색이 변한다. 그대여, 언어의 형상에 예민해하지 말라.
누가 노동을 존엄하다 하는가
‘노동의 존엄성’은 자기를 기만하는 근대의 개념적 환각이다. 그토록 노동이 숭고하다면 하루하루 고달픈 노동자의 삶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근대 노동자는 고대 노동자에 비해 특이한 ‘자기 위안’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신이 노예라는 현실을 잊게 하는 허영심이다. 노동의 도덕적인 가치는 산업화가 확산된 19세기 이후로 도덕적인 가치로 평가를 받는다. 특히 기독교 윤리는 노동을 신성시하고, 찬양하며 인간의 욕구를 길들여 노예화하는 데 앞장섰다. 허영심에 들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시달리는 ‘고된 노동이야말로 산업사회의 가장 훌륭한 경찰’이다.
노동은 훌륭한 경찰
이 시대의 노동은 마치 ‘훌륭한 경찰’과 같다. 인간의 사회적 성찰과 욕망, 몽상과 독립심을 능숙하게 구속하고 있다. 만약 노동에 귀천이 없다면 노동자는 설레는 가슴으로 자기 노동에만 몰입한다. 다른 노동과의 엄연한 차별에도 ‘스르르~’ 눈을 감고, 그저 노동이 정한 작은 목표에 전념하며,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만족에 머물고 만다. 노동이 양극화되어도 사회는 안전하게 되며 이러한 ‘안전’이 최고의 존엄으로 숭앙 받는다.
직업은 삶의 척추
그대여, 이제 그만 깨어나라.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막대한 부를 획득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라. 물론 직업에 귀천은 없어야 하나 각각의 직업마다 엄연히 다른 연봉의 차이로 ‘삶의 귀천’이 따른다. 그대여, 모든 노동이 숭고하다는 찬송을 중단하라. 그래도 혹시 ‘노동 찬미가’를 부르려거든, 먼
저 자신의 취향과 몸 상태에 따른 일을 택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자신에게 가장 덜 고통스러운 일을 중심으로 노동의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척추’가 직업인데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해야만 비로소 그대의 삶이 곧바로 서고 노동도 가치가 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일
그대여,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일은 타인의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들은 저마다 특유의 수치심을 갖고 있다. 인간은 완벽할 수가 없다. 때문에 수많은 ‘당대의 표준’, 즉 화술, 외모, 가문, 학벌, 소유, 재능, 취향 등 자신에게 우월한 한 가지를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월감을 가진다. 또한 ‘자기 수치’에 민감한 자가 타인의 숨겨진 수치에도 예민하다. 그대여, 주의하라!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숨은 수치심을 자극하면 돌변할 수 있다. 그대여, 기억하라! 인간의 수치심은 영구적인 것이 아닌 시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대가 부과하는 수치심을 시대의 치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수치를 정녕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제2장. 인생의 진짜 기쁨이 있는 곳
근본 의도를 망각하지 말라
거의 모든 일이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 수단이 목적으로 굳어진다. 이런 오류를 벗어나도록 근본 의도를 잊지 않아야 한다. 잘돼 가던 일이 마무리에 가서 왜곡되는 것은 근본 의도를 망각해서다. 무슨 일이든 시작보다 마무리가 좋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상황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초심을 간직해야 한다. 그대여, 그대가 결혼할 때,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가 입학할 때, 아이가 처음 출근할 때, 처음 우정을 시작할 때 등 온갖 ‘처음’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거짓 이타심, 진정한 이타주의
타인을 돕고자 하는가. 온전한 타인의 고유성 안에서 도와라.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돕는 것은 자기 연민 때문에 출발한 이기적 행동에 불과하다.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소금을 주어선 안 되는 것처럼 ‘내가 좋다고 상대도 좋아하리라’는 생각은 그대의 오만이다. 곧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내 방식대로 가정할 때 연민은 게으르고 뻔뻔한 이기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그대여, 타인의 아픔을 동정하는 대신 그 아픔 앞에 수치심을 가져라. 이기적인 연민은 상대의 아픔에 대해 ‘나는 연루되어 있지 않고 아무 책임도 없다’는 시선의 폭력이다. 선하고 순진한 자의 뻔뻔한 가명이 연민일 뿐이다. 그대가 타인의 아픔을 보고 그 아픔은 단절된 것이 아닌, 특권을 향유하는 무리와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수치심이 작동한다.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고결한 감정이다.
골방에서 사색하고, 대기 속에서 생활하라
오늘도 내 손가락은 어린이처럼 우연이라는 곱슬머리를 만진다. 아이처럼 우연을 달래고, 반갑지 않은 우연조차도 영민하게 달래며 반긴다. 더 이상 나는 고슴도치가 아니니 이제 운명에 대해 가시를 세우지 않겠다. 세상의 수많은 일 중 인과관계나 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건적 우발’이라고 했지만, 나는 우연이라 명한다. 우연 속에 생명 있는 존재의 자유가 무한하다. 우연이 빈발하는 세계에서 우울증은 개념적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나타난다. 그대여,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 일시적인 사색은 골방에서 하고, 생활은 광활한 대기 속에서 하라. 특히 술을 멀리하고 선량하며 명랑한 감정으로 우연을 즐겨라.
우정의 균형
우정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면 서로 자기 접시저울의 저울판에 서운한 무게를 적게 올려놓아야 한다. 벗은 어디까지나 제삼자이다. 그러니 가끔 ‘우정의 손수건’을 나태라는 실로 짜보라. 그 여유 속에 친밀감이 우정의 손수건에 스며든다. 벗이란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가 외곬수라는 광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풍림이다. 그렇다고 우정이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추측과 침묵에 능통해야 우정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현대 교육
마치 ‘줄 세우기’처럼 성적을 기준으로 우등생과 열등생을 나누는 것은 타인을 압도하려는 시도이다. 우월을 향한 노력은 쉼 없이 원환을 도는 고행이다. 극단적인 힘에 탐닉한 끝에 고행자가 얻는 보답은 그
저 자기 동정심이며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끝난다. 오랫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없는 교육을 받으면 종국에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교육이 ‘사육’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와 세계를 해석하는 총체적인 사유의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올바른 교육 과정
올바른 교육 과정은 ‘나답게 되어가는 길’이다. 즉, 집단성의 훈육 과정이 아닌 올바른 자기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이다. 이런 자기개념이 없으면 ‘결정 장애’ 상태에 빠져 머뭇거린다. 자기개념이 있어야 집단성에서 벗어나 개성을 찾는다.개성을 찾는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이와 같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왜 하고자 하는가?’
스스로 고발자와 재판관이 되어라
그대여, 그대는 스스로 고발자가 되고, 재판관이 되어라. 그대의 고통을 스스로 내린 형벌로 받아들여 재판관으로서의 우월을 향유하라. 우리는 지금까지 타인의 태도는 물론 목소리, 시선, 발자국을 모방했다. 심지어 우리 신체의 작은 근육의 동작까지 타인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런 모방과 재현이 ‘공감’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연약한 본성을 지닌 탓에 ‘공포심’이라는 스승이 공감을 가르치도록 방치했다. 그대 자신의 삶 위에 올라가 깊은 심연을 바라보고, 그대의 괴로움도 넌지시 내려다보라.
발전은 공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대여, 그대의 인생이 사랑보다는 공포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는 아이러니를 이해하라. 은밀한 사랑의 충동은 나쁜 것조차 가능한 한 매력으로 보려 한다. 이런 오류로 사랑은 ‘이득’을 취한다. 그래서 사랑은 진보보다 안주하며, 개선보다는 아양을 떤다. 이와 달리 공포는 ‘애정의 눈’이 아닌 ‘의혹의 눈초리’로 다른 사람을 본다. 즉, 공포는 ‘손해’를 보지 않고자 그가 어떤 존재인지, 또 무엇을 하는지를 파악하고 항상 그 대안을 모색한다. 바로 여기서 ‘전격적 통찰력’이 탄생한다.
고귀한 이여, 그대 이름은 ‘자기 결정자’
그대여, 과연 고귀한 사람은 누구인가? 귀족이나 부자가 아닌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들이 고귀하고 품격 높은 사람들이다. 자신이 가려는 길과 방향을 찾을 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를 두고 결정하는 요인은 내면의 가치 순위이다. 가치의 순위에 따라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대여, 그대의 ‘영순위 가치’는 무엇인가? 그 순위는 무엇에 의해 정해졌는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받아들여져 본성이 된 것’과 둘째로 ‘자신의 것’이다. 전자는 출생 후 길들여진 것으로 우리는 모두 ‘그물 속에 갇힌 거미’와 같다. 즉, 그물에 걸린 것만 잡을 수 있으며 우리도 그물에 붙잡혀 살고 있는 신세다. 거미는 자라서 ‘길들여진’ 그물을 벗어나 새로운 그물을 만들 때에야 비로소 ‘고귀한’ 거미가 된다. 고귀한 자기 결정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자신과 시대의 편견을 떠날 수 있는 용기이다. 둘째, 박학다식이다. 곧 인문학은 물론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 셋째,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여도 미세한 차이를 볼 수 있는 치밀함이다.
가장 바른 길
인생의 잠언은 마땅히 산봉우리여야 한다. 잠언을 알아들으려는 자도 역시 다리가 길어 우뚝 솟아야 한다. 고산이 선악의 공기가 희박하고 맑아 위험하고 외롭기는 하지만 즐거운 악의로 가득한 정신과 서로 잘 어울린다. 거대산맥 가운데 즐비한 고산지대로 가는 가장 바른 길은 어디일까?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건너가는 곳이다. 여기를 건너려고 긴 다리가 필요하다. 산봉우리가 더 높아갈수록 들으려는 사람의 키도 더 커져야 한다. 공기는 희박하고 맑으나 위험은 늘 가까이에 있다. 다리 아래 보이는 이 구름, 바로 그대들의 뭉게구름을 내려다본다. 이처럼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자는 비극적 현실과 모든 비극을 조롱한다.
새벽 장미가 흔들리는 까닭
어두운 밤이 지나 아직도 고요한 새벽, 저 장미꽃이 흔들리는 까닭은 이슬 한 방울이 맺힌 탓이다. 이슬을 머금고야 장미는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삶이 힘들다 하여 제발 나약하게 굴지 말자. 인간의 감수성을 경제적 안녕이 증대시켜 작은 고통에도 나약해졌다. 우리 모두 각자의 짐을 지고 가는 훌륭한 나귀들 아닌가. 나귀는 짐을 질 때 훌륭하다. 견디기 힘든 삶이어도 그래도 이 삶을 사랑하는 것은 낯선 삶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평가가 창조이다
진실이 아닌 진리는 모두 인간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다.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 광야와 하늘이 처음 열리던 까마득한 날, 인간들이 스스로의 유지를 위해 최초로 모든 사물의 의의를 부여하고 모든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칭 평가하는 사람이라 했다. 평가는 창조이다. 그러니 그대들 모두가 창조자들이다. 가치 평가화된 모든 사물의 보석은 바로 그대가 내린 ‘평가 그 자체’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는 언제나 파괴해야만 한다. 진실로 마지막 창조물이란 개인 그 자체다.
제3장. 쾌락과 고통은 마주 보고 있다
황혼의 사색
한낮의 춤이 끝나고 어느덧 석양이다. 냉기가 다시 차오르는 숲 너머로 넘어가는 붉은 햇살이 깊은 사색에 잠긴 빛으로 저녁을 맞고 있는 그대를 바라보고 있다.“아직 그대는 살아 있구나, 왜 살아 있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의지해 살아 있는가? 이제 어디에 있으려하며 어디로 가려는가? 어떻게 살려 하는가? 아직 살아 있는 그대여, 삶이 어리석지 않던가.”저녁의 시작을 잡고 있는 석양은 그대에게 그렇게 묻는다. 여기 그대는 태양이 아니라 저녁에게 이렇게 대답하라.“저녁이여, 나의 설움을 용서하라. 나도 저녁이 온 것을 용서하노라.”
인간의 원죄
인간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자기 희열을 망각한 것이다. 실낙원이라는 신화가 들어온 이래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 즐기지를 못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실낙원을 자초한 존재들이라며 타인을 괴롭히거나 굳이 고뇌하고 고행하는 모습을 연출해야만 했다. 실낙원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를 도와주면 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아야 했으며 도와주는 자신마저 부끄럽게 되었다. 괴로워하는 자의 부끄러운 모습이란 스스로 즐길 줄 모르는 모습이다. 스스로 즐길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원죄이다.
속이는 자를 내버려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