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 휴머니스트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휴머니스트 / 2012년 7월 / 330쪽 / 15,000원
제1장 자유 - 하나의 심리학적 문제인가?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인간을 속박해 온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새로운 자유를 원하는 피압자들이 특권을 지키려는 자들과 맞선 싸움이었다.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자유는 승리를 거듭해왔다. 그 싸움에서 사람들은 자유 없이 살기보다 억압에 맞서 싸우다 죽는 편이 낫다고 확신하며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자유의 인간적 측면을 고찰할 때 제기되는 두드러진 문제는 다음과 같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사회에서 도달한 개인주의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자유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목표인 동시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위협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타고난 갈망 외에 복종에 대한 본능적인 원망(원망)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것이 없다면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데 그렇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을 정화시키고 노련하게 억제해야 한다. 타고난 충동을 사회가 이렇게 억압하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 즉 업악당한 충동이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뀌고, 그리하여 문화의 인간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문화적 행동을 바꾸는 이 이상한 변화를 승화라고 불렀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고정적이다. 개인은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고, 사회가 개인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하거나, 더 많은 만족을 허용하거나 할 때에만 개인이 변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근대인에게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동들을 반영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이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개인이 타인들과 맺고 있는 독특한 경제적 관계와 비슷하다. 각자는 자기가 책임지고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한다. 하지만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그는 상품 또는 노동 시장에서 남들과 물건을 교환해야 한다.
이 책에 제시된 분석은 프로이트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심리학의 주요 문제는 이런저런 본능적 욕구 자체를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냐가 문제라는 가정이 이 책이 제시된 분석의 기본 바탕이다. 식욕, 갈증, 성욕처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욕구는 존재하지만, 사랑과 미움, 권력욕과 복종심, 관능적 쾌락에 대한 욕망 또한 두려움처럼, 사람들의 성격에 차이를 가져오는 충동들은 모두 사회 과정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 열정과 불안은 문화적 산물이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인간의 창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의 과제이다.
인간은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육체적 굶주림이 죽음으로 이어지듯, 완전히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은 정신적 분열을 초래한다. 어떤 문화에서나 인간은 적이나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또는 일을 하거나 생산을 하기 위해서든, 살아남고 싶으면 타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로빈슨 크루소조차 프라이데이라는 하인과 동행했고, 프라이데이가 없었다면 아마 미쳤을 뿐 아니라 사실상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강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인 자의식,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의식하는 사고 능력이다. 그 자의식의 존재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사람이나 우주와 비교하여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작게 느껴진다. 그는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자신이 한낱 티끌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어떤 체제와도 자신을 결부시킬 수 없을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은 결국 그의 행동 능력, 즉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킬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유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2장 개인의 출현과 자유의 다의성
인간의 사회사는 자연계와 일체가 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주위의 자연이나 타인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인식은 역사가 시작된 뒤에도 오랫동안 아주 미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개인은 그가 빠져나온 자연계나 사회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을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주위 세계의 일부라고 느꼈다. 개인이 원시적 유대관계에서 차츰 벗어나는 과정, 즉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은 종교개혁부터 현재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의 근대사에서 절정에 달한 듯하다.
인류 역사의 특징은 개체화와 자유가 점점 증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강압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첫 걸음을 내디딤으로써 인간 이전의 단계를 벗어난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무력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본능의 결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능이 행동을 결정하지 않는 정도가 어느 한계점을 넘어선 후, 유전적으로 주어진 메커니즘이 더 이상 행동 방식을 결정하지 않을 때 인간 존재는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와 자유는 처음부터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여기서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쓰였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빠져나온 세계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원초적 유대는 그의 완전한 인간적 발달을 방해한다. 원초적 유대는 인간이 씨족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게 한다. 다시 말해 원초적 유대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유롭고 생산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측면도 있다. 자연과 씨족, 종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개인에게 안도감을 준다. 그는 구조화된 전체에 속해 있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그 전체 속에 의심할 여지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우리가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본 것과 같은 변증법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힘과 통합이 증대되는 과정,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의 이성이 더욱 강해지고 다른 사람과의 연대가 강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개체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과 불안이 늘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의심,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심이 강해지고, 그와 함께 개인으로서의 자기가 너무 무력하고 하찮다는 느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역사는 갈등과 투쟁의 역사이다. 개체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불안이 사람들을 위협했다. 일단 낙원을 잃으면 인간은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개체화된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효하고 생산적인 해결책은 모든 인간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사랑이나 일 같은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인간은 기본적인 관계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다시 세계와 결합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방금 말한 의미에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자유는 의심과 동일해지고,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삶과 동일해진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나 세계와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나타난다.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중세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또한 신과 인간의 유사성을 강조했고, 인간이 신의 사랑을 확신할 권리도 강조했다. 중세 말기에 자본주의 발생과 관련하여 곤혹과 불안이 생겨났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노력과 의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과 중세 말기 카톨릭 교리는 둘 다 사회적 지위 덕분에 자신들이 강력하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회 집단에 널리 퍼져 있는 정신을 반영했다. 반면 루터의 신학은 교회의 권위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유산계급에 분노하면서 자본주의의 발흥에 위협을 느끼는 한편, 개인의 무력감과 보잘것없음에 짓눌린 중산층의 감정을 표현했다.
루터는 믿음과 구원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생각했다.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권위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루터의 교리 가운데 이런 측면은 칭찬할 만하다. 그것은 근대 사회에서 정치적, 정신적 자유가 발달한 하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이 자유의 발달이 청교도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근대적 자유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개인에게 가져다 준 고독과 무력감이다. 이 측면은 독립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루터는 인간의 본성 속에는 사악함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인간도 자신의 본성으로 선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부패하고 무력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이 확신은 신의 은총이 성립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인간이 굴욕을 당하고 개인적 의지와 자존심을 파괴해야만 비로소 신의 은총이 그에게 내릴 것이다.
인간은 신의 손 안에 있는 무력한 도구일 뿐이며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신은 이해할 수 없는 정의를 작용시킴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는 루터만큼 열렬하게 확실한 것을 바라는 사람에게 주어질 만한 결정적인 해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터는 1518년 계시를 받고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다음과 같이 발견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공덕에 근거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가 행한 일이 신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믿음만 있다면 인간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믿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다. 인간은 믿음을 경험하면서 신의 은총을 받으면 본성이 변한다. 하지만 인간의 타고난 사악함은 절대로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평생 동안 완전하게 도덕적일 수 없다."
루터의 해결책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에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개별적 자아를 제거하고, 개인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 한다. 루터에게 이 힘은 신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확실성을 추구했다. 심리학적으로 믿음은 전혀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인류와의 내적 관계와 삶에 대한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개인의 고독과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뿌리를 둔 근본적인 회의감을 억제하려는 반작용의 형성일 수도 있다. 루터의 믿음은 그런 보상적 성질을 갖고 있었다.
중세 말기에 부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심리적 상황과 루터의 교리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낡은 질서는 무너지고 있었고, 개인은 확실성이 주는 안전을 잃고 새로운 경제 세력인 자본가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협동의 원칙은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하층계급은 점점 심해지는 착취의 압력을 느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착취당했고, 전통적인 권리와 특권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였고, 그것은 농민 봉기와 도시의 혁명 운동으로 일어났다. 한편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중산층의 반응은 많은 점에서 모순을 드러냈다. 그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싶었지만 그들 자신은 차츰 대두하는 자본주의에 극도로 위협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했다. 그들의 마음은 유산계급에 대한 선망과 분노로 가득 찼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무의미함과 부유층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으며,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만들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제시한 개인과 신과 세계의 모습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의미함과 무력감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마땅히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믿음으로 그 느낌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새로운 종교적 교리는 평균적인 중산층의 느낌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이 태도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여 그 느낌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또한 새로운 교리는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도 개인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의 무력함과 본성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그 죗값으로 여기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회의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겁먹고 뿌리째 뽑혀 고립된 개인,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개인의 인간적 욕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경제적, 사회적 변화로 생겨났고 종교적 신조로 더욱 강화된 새로운 성격구조가 이번에는 거꾸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성격 구조에 뿌리를 둔 자질들(일하려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정, 금욕주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된 성격 특성들이었다.
제4장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를 통해 인간은 근대의 산업 사회 체제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갖추었다. 근대의 사회 체제는 개인을 발달시켰지만 그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자유를 증가시켰지만 새로운 종류의 의존을 낳았다. 인간은 더 독립적, 자립적, 비판적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유라는 문제 전체를 이해하려면, 자유의 성장 과정이 지닌 두 측면을 모두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간을 영적으로 해방하면서 시작한 일을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계속했다. 경제적 자유는 이 발전의 토대였고, 중산층은 그 옹호자였다. 개인은 더 이상 고정된 사회체제에 묶여 있지 않았다. 이제 개인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허용되었다. 성공할 기회도 그의 몫이었고, 실패할 위험도 그의 몫이었다. 모든 사람과 맞서 싸우는 치열한 경제적 전투에서 죽거나 다칠 위험도 그 자신의 몫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산층은 자신의 장점과 활동을 기반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인간은 자연의 속박에서 점점 자유로워졌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때 인류의 통합을 방해하던 자연적 경계였던 계급과 종교의 차이가 사라졌으며, 서로 상대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중산층은 경제적 지위 덕분에 정치적 권력을 정복할 수 있었고, 새로 얻은 정치적 권력은 경제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켰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전통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를 늘리고 능동적이며 비판적이며 책임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개인을 더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자신은 보잘것없고 소용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놀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에서 멀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근대인의 고독감과 무력감은 모든 인간관계가 지닌 특징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인 관계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성격을 잃고, 속임수와 수단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은 시장의 법칙이다. 경쟁자들 사이의 관계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 무관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경제적 관계뿐 아니라 인간적 관계도 소외의 성격을 띤다. 그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와 같은 성격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