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철학하다
나이절 워버턴 지음 | 에코리브르
철학자와 철학하다
나이절 워버턴 지음
에코리브르 / 2012년 3월 / 304쪽 / 15,000원
물음을 던진 사람_ 소크라테스, 플라톤
약 2,400년 전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물음을 던진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이전에도 철학자들이 있었지만, 철학이라는 학과는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문을 열었다. 철학에 수호성인이 있다면 그는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들창코에 땅딸막하고 행색이 초라하며 조금 이상해 보인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묘사는 사실 잘 들어맞지 않는다. 육체적으로는 보기 흉하고 종종 씻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였다. 아테네의 모든 시민은 그와 같은 사람은 결코 없었으며 다시는 없을 거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유일무이했다. 그러나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심술궂게 물어뜯는 말파리들 중의 하나인 등에라고 생각했다. 등에는 피부를 좀 아리게는 하지만 심각한 해를 끼치진 않는다. 하지만 아테네의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위험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젊었을 적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군인이었다. 중년에 그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때때로 사람들을 불러 세워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해 물었다. 그는 대체로 이런 일을 행했을 뿐이다. 그가 던진 물음들은 매우 날카로웠다. 단순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에우튀데모스와 나눈 대화였다. 소크라테스는 속이는 행위가 비도덕적이냐고 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에우튀데모스는 대답했다. 명백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친구가 매우 의기소침해져 자살할 수도 있어서 당신이 그의 칼을 훔쳤다면 그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것은 속이는 행위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도덕적이지 않은가? 이는 속이는 행위이긴 하지만, 나쁜 게 아니라 좋은 행위이다. 에우튀데모스는 그렇다고 말했지만 곤경에 빠졌다. 소크라테스는 재치 있는 반례를 사용해, 속이는 것이 비도덕적이라는 에우튀데모스의 일반적인 언급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음을 보여주었다. 에우튀데모스는 이를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을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거듭 보여주었다. 한 장군은 '용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확신하며 대화를 시작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함께 20분 동안 대화한 후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그는 틀림없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참'으로 이해하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들이 삶의 토대로 삼는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길 좋아했다. 모든 사람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끝맺는 대화가 그에게는 성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알고 있다고 계속해서 믿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좋았다.
당시 아테네에서 부유한 사람의 자식들은 소피스트 밑에서 배웠다. 소피스트는 학생들에게 연설하는 법을 가르치는 박식한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비싼 수업료를 요구했다. 대조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봉사에 보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와서 끊임없이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어느 날 친구 카에로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사제를 찾아갔다. 그 사제는 지혜로운 늙은 여자, 즉 방문자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무녀였다. 그녀의 대답은 보통 수수께끼 형태를 띠고 있었다. 카에로폰이 물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는가?"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 "누구도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카에로폰이 소크라테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그는 당혹스러워했다.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일 수 있을까?"라고 의아하게 여겼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누가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델포이의 무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했고 그녀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훌륭하게 이행했다. 목수들은 목수 일을 잘했고, 군인들은 전투에 대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지혜롭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지혜로운 인물이 된 이유는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고 언제나 자기 생각을 논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삶이란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선언했다. 반성하지 않는 존재란 짐승에게는 어울릴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치고는 유별나게 글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야기하는 쪽이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소크라테스가 쓰길 거부했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인물이 무엇을 믿고 논의했는지는 주로 스승 못지않게 유명한 제자인 플라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그가 물음을 던진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진 일련의 대화들을 저술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대화편』으로 알려져 있고 철학서적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문학작품들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플라톤은 당대의 셰익스피어였다. 이 『대화편』들을 읽으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재치 있는지, 또 얼마나 상대를 격분시키는 존재인지 얼마간 이해하게 된다.
사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말한 것을 적어놓았는지 아니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입으로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지를 간단히 단언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들 중 하나는 보이는 세계가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현상과 실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상을 실재로 착각한다.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플라톤은 오로지 철학자들만이 세계의 진상을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감각에 의지하기보다는 사유함으로써 실재의 본성을 발견한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동굴 비유를 들었다. 상상 속의 이 동굴에는 벽면을 마주하고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이 있다. 정면에서 그들은 실재라고 믿는 깜빡이는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등 뒤의 불 앞에 있는 대상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들이다. 사람들은 벽면에 비친 그림자들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생애 전체를 보낸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쇠사슬에서 풀려나 불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야는 처음에는 흐릿하지만, 점차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기 시작한다. 그는 비틀거리며 동굴을 벗어나 결국 태양을 볼 수 있다. 동굴로 돌아온 그가 바깥세상에 관해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쇠사슬에서 풀려난 사람은 이를테면 철학자다. 그는 현상 너머를 본다. 보통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데 만족할 뿐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상들은 기만적이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림자이지 실재가 아니다.
이 동굴 이야기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고 알려진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생활 속에서 보았던 모든 원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 가운데 완전한 원이 있는가? 없다.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완전하진 않다. 완전한 원에서는 원주의 모든 점이 중심에서 정확히 똑같은 거리에 있다. 실재하는 원들은 결코 이렇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완전한 원'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원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완전한 원이라는 관념이 원의 이데아(형상)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길 원한다면 당신이 그리거나 시각을 통해 경험할 수 있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원들이 아니라 원의 이데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당신이 목격하는 선의 특수한 예들이 아니라 선의 이데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자들은 이런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데아를 사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감각을 통해 파악하는 세계에 이끌려 헤매기 십상이다.
철학자들은 실재를 사유하는 훌륭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들이 책임을 짊어지고 모든 정치권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저작 『국가』에서 그는 상상 속의 완전한 사회를 묘사했다. 철학자들은 맨 윗자리(통치자)에서 특수한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피치자인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할 것이다. 그들 밑에는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훈련받은 군인들(수호자)이 있고, 또 그 밑에는 노동자들(생산자)이 있다. 플라톤은 이 세 집단의 사람들이 완전한 균형, 즉 이성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하는 정신과 같은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의 사회 모델은 매우 반(反)민주주의적이었으며, 실제로 사람들은 거짓말과 폭력에 의해 통제된다. 그는 실재에 대한 거짓된 표현을 제공한다고 생각해 대부분의 예술을 추방한다. 화가들은 현상을 그리지만 현상들은 이데아와 관련해 기만적인 성격을 지닌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삶의 모든 측면은 위로부터 엄격하게 통제된다. 오늘날 전체주의 국가라고 일컫는 것이다. 플라톤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승객들에게 배의 키를 잡도록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짊어지게 하는 편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상상한 사회와는 아주 달랐다. 일종의 민주주의 사회였다. 물론 인구의 약 10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성과 노예는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법 앞에서 평등했으며, 모든 사람이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정교한 제비뽑기 시스템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의 평가와는 달리,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은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위험하며 의도적으로 정부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느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일흔 살일 때 멜레토스가 그를 법정에 고소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신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악행을 가르치고 당국에 등 돌리도록 부추긴다는 점을 암시했다. 둘 다 매우 심각한 고발이었다. 그 고발 내용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국가 종교를 따르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아테네 민주주의를 조롱하길 즐겼다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이는 그의 인격과 어긋남이 없었다. 확실히 많은 아테네인들이 그 고소 내용을 믿었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유죄인지 아닌지를 두고 투표했다. 대규모 배심원단을 구성하는 501명의 시민 중 과반수가 그가 유죄라고 생각했고 사형을 선고했다. 아마 원했다면 그는 사형이 아닌 다른 처벌 방법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등에라는 자신의 명성에 충실하게 자신은 잘못된 행위를 결코 하지 않았으며 아테네인들은 자기를 처벌하는 대신 무료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더 큰 반감을 샀다. 당연히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점차로 마비시키는 식물인 헴록으로 만든 독약을 마셔야 할 터였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와 세 아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제자들을 주위로 불러 모았다. 만약 더는 어려운 물음을 던지지 않고 조용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도 소크라테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계속해서 모든 것에 물음을 제기하라고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걸 배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잔에 담긴 독약을 마셨고 바로 죽었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들에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고,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사유하길 멈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이 난해한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이후 소크라테스의 정신에 따라 가르침을 수행했다. 단연코 그의 가장 인상적인 제자는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렌즈 가는 사람_ 바뤼흐 스피노자
대부분의 종교는 신이 세계 바깥의 어딘가에, 아마도 하늘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신이 세계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유별났다. 그는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신, 즉 자연'에 대해 썼다. 이는 두 단어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과 자연은 단일한 것을 기술하는 두 가지 방식이었다. 신은 자연이며 자연은 신이다. 이는 범신론, 즉 신이 모든 것이라는 믿음의 형식이다. 이런 급진적인 생각 때문에 스피노자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서 포르투갈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박해를 피하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견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대 종교 문화에서 자라긴 했지만 스피노자는 스물네 살이었던 1656년에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 랍비에게 쫓겨나 파문당했다. 아마도 신에 관한 견해가 너무나 비정통적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나중에 헤이그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유대 이름인 바뤼흐가 아니라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로 알려졌다.
많은 철학자들은 기하학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양한 기하학적 가설에 대한 유클리드의 유명한 증명들은 소수의 단순한 공리들이나 가정들로부터 출발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두 직각과 같다'와 같은 결론들로 나아갔다. 철학자들이 보통 기하학에서 감탄하는 것은 동의가 이루어진 출발점에서 주의 깊은 논리적 절차에 의해 놀랄 만한 결론들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공리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하학적 추론은 르네 데카르트와 토머스 홉스에게 영감을 주었다.
스피노자는 단지 기하학에 찬탄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철학을 마치 기하학인 듯이 썼다. 그의 저작 『에티카』에서의 '증명들'은 기하학적 증명들처럼 보이며 공리와 정의들을 포함한다. 마치 기하학과 동일한 가차 없는 논리를 지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삼각형의 각이나 원의 원주 같은 논제들을 취급하는 대신 신과 자연, 자유와 감정을 다룬다. 그는 이 주제들이 우리가 삼각형과 원, 정사각형에 관해 추론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분석·추론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세계의 근저에는 구조적 논리가 존재하며 거기엔 이성이 드러낼 수 있는 바가 있다고 믿었다. 어느 것도 우연히 그 모습으로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에는 목적과 원리가 존재한다. 삼라만상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유의 힘에 의거하는 것이다. 실험이나 관찰이 아니라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는 종종 이성주의 내지 합리론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스피노자는 혼자 있기를 즐겼다. 고독 속에서 자신의 연구를 추구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또한 신에 관한 그의 견해를 감안하면 좀더 공적인 제도에 참여하지 않는 쪽이 더 안전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가장 유명한 저작 『에티카』는 사후에야 겨우 출판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거절했고 그를 찾아온 몇몇 사상가들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논의하며 행복해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피노자는 매우 단순하게 살았으며, 집을 사기보다는 하숙집에서 지냈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 작업에 경탄한 사람들이 제공한 약간의 돈과 함께 렌즈를 갈아 번 것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만든 렌즈는 망원경과 현미경 같은 과학적 도구들로 사용되었다. 스피노자는 불행히도 겨우 마흔넷에 폐병에 걸려 사망했다. 렌즈를 갈면서 미세한 유리 가루를 호흡한 것이 틀림없이 폐에 해를 끼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