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모든 역사 - 세계사
이종하 지음 | 디오네
1월의 모든 역사 - 세계사
이종하 지음
디오네 / 2012년 1월 / 260쪽 / 12,000원
1월 1일
1912년 1월 1일_ 중화민국 수립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전제 정부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공고히 하여 민생의 행복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독립하고 세계 모든 국가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임시 대총통직에서 떠날 것을 국민 앞에 선서합니다.(쑨원,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취임 선서」)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912년 1월 1일 밤 11시. 쑨원은 난징에서 역사적인 취임 선서를 하였다. 쑨원은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하고, 이날을 민국 원년 1월 1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수립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난징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뿐이다. 베이징에는 여전히 청나라 조정이 있었고, 황제에게 신해혁명 세력의 토벌 권한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가 존재했다. 물려주는 대신 중국 통일을 제의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제의를 받아들여 공화제 시행을 주장하고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황제는 혁명군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위안스카이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퇴위 조건으로 몇 가지를 요구하였다. '청나라 황제는 퇴위 후에도 황제에 대한 존칭이 폐지되지 않고, 중화민국은 청나라 황제를 외국 군주와 같이 우대를 한다'였다.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긴 지 268년 만에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는 임시 총통이 되어 공화정을 실시하였으나 위안스카이는 독재를 횡행하였고, 황제가 되기를 꿈꾸던 중 실각하였다. 이후 중국은 열강의 조종에 휩쓸리는 군벌 항쟁 시대로 치닫게 되었다.
1월 3일
1959년 1월 3일_ 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포함
알래스카의 원주민은 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으로 약 3,000~8,000년 전 무렵 알래스카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과 알래스카가 유럽에 처음 노출된 것은 1741년 러시아에 의해서였으며 곧바로 제정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재정이 궁핍해진 러시아는 미국에 알래스카를 매각하였고, 그 액수는 불과 720만 달러였다. 19세기 후반 금이 발견되면서 미국인의 활발한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은, 철광석, 석탄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석탄은 전 세계 보유량의 10%가 매장되어 있고, 석유의 경우 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959년 1월 3일 알래스카는 미국의 주로 포함되었으며 이로써 미국의 주는 모두 49개, 성조기의 별도 49개가 되었다.
1월 5일
1968년 1월 5일_ 프라하의 봄
1956년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 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주의의 포기를 선언했다. 곧 동유럽 국가들은 국내 개혁에 착수, 자주성 내정 불간섭 주권 존중 등을 주장하였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 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두브체크가 제1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발생한 자유화 운동이다. 1960년대에 소련의 세력이 약화되자 국민들은 발전이 없는 경제에 많은 불만을 나타냈고, 슬로바키아인들의 민족 감정도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1968년, 스탈린을 따르던 노보트니 정권이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취임하게 되었다. 두브체크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재판의 독립, 의회 제도의 확립, 농공업 부분의 개혁, 국외 여행의 자유 보장, 경찰 정치의 종식 등의 개혁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활발한 이념 논쟁이 발생하였으며, 체코의 잘못된 정책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근본적인 이념까지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공산 당원들에게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고 공산당 내의 민주화도 급진전하였다. 또한 경제 개혁이 추진되어 국가의 간섭이 줄어들고 기업의 독립성이 강해졌으며,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자 평의회가 설치되었다. 두브체크의 개혁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매년 열리는 음악제 이름을 따라 '프라하의 봄'이라고 표현하였다.
체코의 개혁 운동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소련은 프라하의 봄을 막아 나섰다. 소련은 바르샤바에서 회의를 열어 체코의 지나친 개혁을 경고했으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합동 훈련을 체코에서 실시했다. 그러나 체코의 지도자들은 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계속 추진, 1968년 8월 20일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조약국인 동독, 폴란드 등의 군대 20만을 이끌고 체코를 침범했다. 체코는 곧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에게 무저항을 외쳤지만 다음 날 소련은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연행해 갔고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게 되었다.
1월 6일
1838년 1월 6일_ 모스 부호 첫 시연
모스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 출생하여 예일대를 졸업하고, 런던으로 옮겨가 미술을 공부한 다음,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대학교의 미술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배 안에서 우연히 '전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모스가 동료인 게일, 공장주인 베일과 함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전신 부호 체계를 개발하여 시연한 것이 바로 모스 부호이다. 장거리 통신의 시금석인 모스 부호는 점 선 공간, 장음 단음을 이용하여 문자나 기호를 표기하는 전신 부호로써 무선 전신이나 섬광 혹은 음고 없는 기계 소리 등으로 표현한다. 주로 선박과 항구나 등대 사이에 연락을 취할 때 사용되며, 현재 사용하는 모스 부호는 1851년에 기존의 모스 부호를 수정한 국제 모스 부호이다.
1월 7일
1948년 1월 7일_ 킨제이 보고서,『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출판
킨제이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강의했다. 1948년 1월 7일 발표한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은 혼외정사, 동성애, 자위, 매춘 등에 대한 통계를 정확하게 제시해 놓은 것으로, 당시까지 거의 금기시해오던 주제였기 때문에 큰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킨제이는 5년 후 두 번째 보고서인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을 발표했다. 이는 훨씬 더 자세한 연구서였지만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1월 9일
1969년 1월 9일_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첫 비행
콩코드 비행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해서 개발한 초음속 여객기이다. 1969년 1월 9일에 첫 비행을 했으며 1976년에 상업 운항을 시작하였다. 주로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되었고, 4개의 엔진을 이용해 마하 2의 속도로 비행한다. 콩코드 비행기가 마하 2의 초음속을 낼 수 있는 이유는 고성능 엔진의 역할이 결정적이지만, 이 외에도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한 많은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다. 한 예로 콩코드 비행기 날개가 매우 짧은 것은 초음속 전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고속 비행을 위해 개발된 것이다. 그리고 콩코드 비행기는 제일 앞부분인 노즈(Nose)가 구부러져 있다. 이것은 비행기 이착륙 시 조종사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륙과 동시에 노즈를 바로 올려서 공기 저항을 줄인다. 그러나 콩코드 비행기는 소음과 대기 오염 등의 문제가 심각하여 1976년 11월 완성된 16기를 마지막으로 생산을 중단하였다. 더구나 2000년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이륙했던 콩코드 비행기가 추락하여 113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를 낸 뒤 승객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001년 9 11테러 이후 항공 산업의 전반적 침체가 이어지자 운항을 완전 중단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1월 11일
1929년 1월 11일_ 로마 교황청, 바티칸 시국으로 독립
인구 1,000명의 국가, 국토 면적 0.44㎢.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로마 교황청은 1929년 1월 11일 바티칸 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독립하였다. 이탈리아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바티칸 시국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당 주변,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의 건물, 카스텔 칸돌포의 교황 관저가 국토의 전부이다. 로마 교황청은 19세기에 들어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였다. 이후 이탈리아와 라테라노 협약을 맺어 1929년 독립국이 되었다. 바티칸의 교황청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최고 통치 기관으로 교황이 교황청의 입법 사법 행정 등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교황은 세계 각국과 각 지역의 추기경들로 구성된 추기경단 회의에서 선출된다.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하였고 스위스 근위병만 몇 명 있을 뿐이다. 바티칸의 주 수입원은 신자들의 기부금과 바티칸 소유의 부동산 임대, 바티칸 은행의 투자 사업, 우표 출판물의 판매, 관광 수입이다.
1월 12일
1950년 1월 12일_ 미국, 애치슨 선언 발표
미국의 애치슨 국무 장관은 워싱턴 내셔널클럽에서「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을 하였다. 한국과 타이완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이 연설은 '애치슨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당시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애치슨 선언을 취소해 달라고 하였으나 묵살되었다.
1월 15일
1971년 1월 15일_ 이집트, 아스완 하이 댐 완공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천 년 동안 해마다 범람했던 나일 강은 비옥한 충적토를 형성했고, 고대 이집트 문화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나일 강의 범람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준다고 느낀 현대인들은 농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초 나일 강의 홍수를 막기 위해 카이로 북쪽에 갑문장치를 만들어 더 많은 농토를 확보하려고 했다. 19세기 말에도 영국인들은 아스완 댐을 만들었으나 나일 강을 지배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여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인간의 끊임없는 집념은 결국 기자 언덕의 대 피라미드 공사에 버금가는 대역사를 시작하여 1971년 1월 15일 아스완 하이 댐을 완성하였다. 이후 매년 범람하였던 나일 강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강변의 많은 땅들은 전천후의 농토가 되었다. 그 대신 자연의 선물인 천연의 충적토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1월 16일
1979년 1월 16일_ 이란의 팔레비 국왕 이집트로 망명
1979년 1월 16일, 이란 팔레비 왕조의 제2대 팔레비 왕은 자신의 전용기를 직접 몰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이란을 떠나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1925년에 시작한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란에는 회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41년 이란의 왕위에 오른 팔레비는 이란의 근대화를 기치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들을 실행하였으며, 1963년부터 시작한 백색 혁명은 도로 철도 항공망의 확장, 질병 문맹 퇴치 등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팔레비 왕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비민주적으로 추진했던 그의 개혁들은 국민들에게 친미 노선인 동시에 이슬람 전통에 대한 무시로 다가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의 경제 정책 실패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확대와 정부 관료의 부패 등과 더해져 국민의 불만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또한 학생 시위 등을 일방적으로 유혈 진압함으로써 도리어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이란 국민들의 폐위 요구에 팔레비 왕은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호메이니가 귀국하였으며, 이란에는 왕정이 사라지고 공화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1월 17일
1991년 1월 17일_ 걸프전 발발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가 세계에 석유를 너무 많이 공급하여 석유 가격이 떨어졌다고 쿠웨이트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 이사회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은 이라크의 철수 시한 이틀 뒤인 1991년 1월 17일 대공습을 단행하여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군을 철수시켰다. 이 사건을 걸프전이라고 부른다. 걸프 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1월 19일
일본항공, 파산 신청
2010년 1월 19일, 일본에서 6번째로 큰 기업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항공사 일본항공(JAL)이 도쿄 지방 법원에 법정 관리를 신청함과 동시에 회사 갱생법 적용을 신청해 사실상 파산 상태임을 알렸다. 일본항공은 1951년 민영 항공사로 출발하였으나, 1953년 국유화되었고, 1987년 다시 민영화되었으나 이후 수차례 공적 자금을 지원받는 등 지속적인 경영난이 있었다. 이날 일본항공의 사장이었던 니시마쓰 하루카의 사임도 결정되었다.
1월 20일
2009년 1월 20일_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
2009년 1월 20일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미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이 시선을 집중한 취임식의 주인공은 바로 버락 오바마였다. 오바마는 영국계 백인 어머니와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인 버락은 아버지 나라의 말로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었다. 이날 있었던 버락 오바마의 제44대 대통령 취임식은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조지 워싱턴이 제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1789년 이후 최초의 유색 인종 대통령을 맞이한 사건으로 미국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1월 21일
1793년 1월 21일_ 프랑스 루이 16세 처형
왕의 권력은 신에게 부여받는다는 왕권신수설에 가장 어울렸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유렵 절대주의 시대의 상징적인 왕이었다. 앙리 4세에서 루이 16세에 이르는 17~18세기의 프랑스 왕들은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절대왕권을 누렸다. 이 무렵 프랑스는 계몽사상의 중심지로서 유럽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헌법 비슷한 것조차 없었고 의회도 거의 열리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중세부터 이어진 봉건적인 관습과 사회적 모순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귀족들은 농민층에 지나친 세금과 충성을 요구했다. 신분적으로도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시민으로 나뉘어 있었다.
특권층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2%도 되지 않았지만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은 토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십일조, 인두세, 소득세 등과 같은 직접세와 소금세와 같은 간접세로 수입의 절반가량을 빼앗기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으나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원하느라 재정은 거의 위기 상황이었다. 루이 16세는 이러한 국가 재정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튀르고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루이 16세는 상인, 공장 경영자 등의 부르주아 계급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신분회를 소집하였다. 신분회가 열리자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구체제에 얽매여 있던 모든 모순들이 갑자기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분회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사실 루이 16세는 성실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며, 정무에는 열심이었으나 난국을 타개할 만한 기량이 없었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옮겨져 민중의 감시하에 놓였다. 그 후 미라보의 중개로 의회가 궁정 사이가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1791년 6월 일가족과 함께 파리로 탈출하여 국외로 도망하던 중 체포되었다. 1791년 헌법 성립과 동시에 입헌 군주제 원수의 지위가 보장되었지만 1792년 8월 10일 파리 시민의 재차 봉기하여 탕플에 유폐되었다. 결국 루이 16세 왕권은 정지되었고, 다음 해인 1793년 1월 21일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에 따라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