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에스프레소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 프라하
철학의 에스프레소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프라하 / 2011년 8월 / 493쪽 / 17,000원
철학의 탄생 혹은 탈레스나이가 들어 삶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기 삶의 시작부분을 돌아보는 고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철학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 철학은 2,500살이나 되었으니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은 곧 죽어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루는 학문이 지치고 낡아서 약간 덜거덕거린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철학이 아직 신선하고 젊은 힘이 존재하던 그 시작의 시간을 알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 탄생의 순간을 알아내려는 노력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게 된다. 정신적 사건을 관장하는 관청 같은 것이 없으니 아무도 철학이 탄생한 날짜를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옛 시대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탈레스, 2,500년 전에 철학을 시작하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 속한 소아시아 지역(오늘날 터키)의 상업도시인 밀레토스 출신의 영리한 남자 탈레스(Thales)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에 살았던 이 사람이 모든 인간들 중 처음으로 철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 학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만 내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일찍 활동한 그리스 시인들에게서도 이미 철학적 사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헤시오도스나 심지어는 호메로스까지도 철학의 시조로 삼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민족이 아직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동방의 민족들 사이에 이미 일종의 철학이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처음으로 철학의 역사를 서술한 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학문과 철학이란 외적인 필요성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사람들이 그 밖의 일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이집트 사제들이 여기 해당한다. 그래서 이들은 수학과 천문학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본래 의미의 철학은 그리스 사람들과 더불어, 부유한 도시 밀레토스의 큰 상인이 누릴 수 있었던 여유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여기는 인물에 도달했다.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그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 세계의 근원을 묻다: 현대의 역사가 한 사람은 철학이 탄생한 시간을 정확하게 제시했다.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은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탈레스가 예언했던 일식이 일어난 날짜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이 태양이 어두워지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의 역사가 밝아지는 것(계몽)의 결과가 아니라 어두워지는 것(일식)의 결과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물건들이 아니라 물건들의 본질을 문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 세계에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이 정말로는 무엇인지를 탐색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산, 짐승, 식물, 바람, 별, 인간, 인간의 행동과 사유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실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탈레스는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물음들이 탈레스의 핵심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본질과 바탕에 대해 묻는 것이 오늘날까지 철학의 핵심적인 관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탈레스가 이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답변은 아주 이상하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기원이 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우리 눈앞에 온갖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 이 모든 것들, 산과 별과 짐승과 우리 자신과 우리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 등 이 모든 것이 물에서 나왔다고? 가장 깊은 본질이 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러한 그의 핵심적인 사유를 놓고 보면 우리는 탈레스를 물질주의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화가 힘을 잃으면서 철학이 시작되다: 철학은 처음 시작할 때 신화에게서 무엇을 넘겨받았을까? 탈레스가 수수께끼 같은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세계가 깊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의 신화를 신神이라 불리는 우화적 인물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표피적인 이해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의 배후에 감추어진 깊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모든 영역을 휩쓸고 지나가는 투쟁의 현실을 체험하고 그들은 거기에 '아레스(Ares, 전쟁의 신)'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낮의 미적인 고요함을 체험하고 거기에 '판(Pan, 정오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것은 거룩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거룩한 것이 거기 있음이야말로 현실에서 본래 현실적인 것이다.
이제 최초의 철학이 시작되었다. 철학은 신화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고 있는 내용을 넘겨받을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적 표상들이 의심스럽게 되면서 인간이 직접 묻고 직접 답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던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신화적 종교적 지식에서 참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온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현실의 모든 것이 앞면만 지닌 것이 아니라 배후에 더욱 깊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전해 내려오는 '참'임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배후에 숨어 있는 더욱 깊은 원칙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적 물음의 정열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철학은 처음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세계의 인간인 철학자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서 플라톤과 나란히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저 유명한 문헌학자 빌라모비츠가 말한 대로 "학자들은 존경하지만, 학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메마른 개론서를 보고 그의 체계를 외우면서 저주하는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혹은 383년에 스타기로스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스타기로스 사람'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타기로스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만도 아니다. 이 도시는 이 철학자 말고는 특별히 이렇다할 만한 것을 세상에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한 스승인 플라톤과는 달리 당시 그리스의 정신적 수도였던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시골 사람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세계의 방랑자: 이 남자는 스타기로스에서 아테네로 오면서 철학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것은 별 볼일 없는 학문을 하고 기묘한 생각에 잠기는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철학은 상당히 폭넓은 분야였다. 근본적으로 모든 지식과 학문이 여기에 속했다. 정치가나 장군이나 교육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쓸모가 있었다. 당시 아테네가 철학을 위해 제공한 큰 기회는 플라톤이었다. 이 사람은 성스러운 아카데모스 숲에 있는 자신의 아카데미에서 학생들 무리에 둘러싸여 그들과 더불어 철학을 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모임에 들어가서 스무 해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면서 배우고 토론하고 무엇보다도 열렬히 책을 읽었다고 한다. 플라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책 읽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재능이 많은 두뇌가 자기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도달하고, 늙어 가는 플라톤이 가르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플라톤은 조용한 체념으로 이것을 바라보았다. 이런 갈등은 플라톤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한 다른 사람이 아카데미의 새로운 대표로 임명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가 나서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의 왕에게서 새로운 피난처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아 이 왕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 왕의 궁전을 떠나 자기 생애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만남에 이르게 된다. 아테네에서 당시 가장 위대한 철학자와 만났다면 이번에는 마케도니아에서 자기 시대 가장 위대한 군사적 정치적 천재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그는 아직 대왕이 아니라 그냥 열세 살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고문이 아니라 교육자였다. 이 철학자의 교육 기술이 장차 정치가이며 장군이 될 소년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우리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도 인류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권력과 정신이 몇 해 동안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미래의 세계 정복자와 우주적 의미에서 정신적 우주를 정복한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의 토대를 놓은 사람: 이것이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다. 수없이 장소를 바꾸었던 것, 여러 왕궁에서 활동한 일, 수많은 장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 수많은 위험을 겪고 적대감을 얻었던 것 등 평생 그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그렇게 태연하게 철학적인 문제들에 몰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대의 철학자 가운데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지속적으로 평온하게 작업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자기 주변의 일과 개인적인 운명에 무심한 태도로 그는 탐구에 몰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의 결과로 엄청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구대의 어떤 증인은 그것이 400권에 이른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1,000권이라고도 하고, 진짜 학자인 또 다른 사람은 수고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행수를 헤아려서 모두 445,270행에 이른다고 전하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저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의 학문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된다. 그가 자연과학 저술에 적어놓은 결과들이 반드시 학문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대부분의 내용은 낡아서 시효가 없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과 힘을 합쳐서 아주 꼼꼼하게 많은 것을 기록하여 남겼다. 또한 인간에게 관심을 돌려 해부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탐색하면서도 몇 가지 기묘한 말을 남기고 있다. "생명체는 단순히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 혹은 단순히 기계적 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각 부분들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전체"라는 것이다.
가면 뒤의 철학자 혹은 데카르트17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며, 흔히 근대철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데카르트(Descartes)는 기묘한 말을 남겼다. "배우들이 이마에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도록 가면을 쓰고 등장하듯이 나도 세계라는 무대에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철학자가 가면을 쓴다고? 물건들과 인간을 밝히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는 사람이 가면 뒤에 숨겠다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성서》의 진리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개신교 종교회의와 몇몇 대학들은 그의 저술을 금지했고, 가톨릭교회도 금서목록에 그의 저술을 포함시켰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철학적 활동을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한 작업에 비유하고, 그를 《구약성서》의 입법자인 모세와 비교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신앙 없음, 무신론, 부도덕함 등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은둔을 얻기 위한 싸움: 그는 1596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하마터면 그의 전기는 이것으로 끝날 뻔했다. 숨고 싶은 열망이 어찌나 컸던지 그는 지상이라는 무대에서 곧바로 사라지기를 원했고, 그것도 의사들이 완전히 희망을 포기할 정도로 열렬히 원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삶을 허약하게 시작한 덕분에 한 가지 이점을 얻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고, 이것이 그가 평생 유지한 습관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벌써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말 잘 듣는 모범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저항적인 정신이 숨어 있었다. 그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전통을 남몰래 거부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지식이라고 제공되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극단적으로 의심스러웠다. 특히 철학이 의심스러웠다.
그에게는 철학적 사색이 중요했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을 두루 살펴보고 난 후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완전한 고요함이 필요했던 그는 네덜란드로 은둔했다. 그곳에서 '고독 속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인간의 정신 영역의 여러 발견들에 헌신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물론 "그때까지 내가 품고 있던 모든 확신들을 극히 광범위하고도 근본적으로 뒤집을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네덜란드가 생산적인 고독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처럼 보였다.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여기서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짜 주소를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계속하고 있던 광범위한 편지 교환만이 그를 이 세상과 연결시켜주었다. 이런 고독은 그때까지 얻지 못하던 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그토록 염려하면서 자신의 고독을 지켰는데도, 그가 마침내 자신의 생각 중 일부를 발표하자마자 그는 적대감을 얻고, 무신론을 지니고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고발을 받기에 이르렀다. '신학자들의 수염과 목소리와 눈썹을 두려워하는' 여론의 영향을 받아서 당국까지 그에게 적대적이 되었다. 그는 이런 공격들이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탄식했다. "내가 회의주의자들을 반박했기 때문에 어떤 신부는 내가 회의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어떤 설교자는 내가 무신론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과격한 의심: 이처럼 데카르트의 삶은 은둔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똑같은 것이 그의 책에도 나타난다. 그의 책도 이상한 모호함으로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문제로 삼은 주제 자체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는 두려울 정도의 대담함으로 과격하게 철학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다가 자기 앞에 입을 벌린 심연을 보고는 놀라 물러서서 옛날의 생각과 옛날의 믿음을 다시 붙잡았다. 어쩌면 급변하는 시대의 사상가에게는 새 것을 따르면서도 낡은 것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의무감과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분열된 지식을 가졌다는 점이 데카르트라는 수수께끼 현상의 진짜 비밀이다.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는 철학의 역사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내놓는다는 의미였다. 맨 먼저 확고한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니까 수학의 공리처럼 직접적으로 확실하고 명백하고, 그래서 철학의 전체구조를 떠받칠 수 있는 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절대적인 시작을 하려면 온갖 잠정적인 확실성들을 먼저 파괴하는 일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근본부터 뒤집어엎고 맨 처음 토대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라고 보았다. 그는 단호하게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의심하는 생각의 자유 속에 자신을 세웠다. 이런 대담성을 통해 그의 과격한 의심 속에서 새 시대의 철학을 위한 결정적인 출발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로운 철학은 데카르트의 뒤를 따라 주체와 그 자유에 기초하게 되었다.
사유의 시간 엄수 혹은 칸트교수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도 교수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약간의 건망증과 산만함이 뒤섞인 묵중하고 경직된 권위, 게다가 특별히 세상과 거리가 먼 태도 같은 것을 교수 같은 태도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말하자면 약간 우습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존경할 만하기도, 비웃음을 살 만하기도 한 독특한 꼼꼼함 말이다. 그와 같은 교수의 한 예를 들어보라는 질문을 들으면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이름이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