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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 창해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창해 / 2011년 10월 / 220쪽 / 13,500원



제1장 마음 비우기




카르페디엠

사람들은 과거 공간에 들어가 지난 기억을 뒤지기도 하고 미래 세계에서 자신이 꿈꾸는 상상에 잠기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를 기점으로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다가올 시간이며, 현재만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면 현재는 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은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록되어 삶의 역사를 구성해 놓는다. 노화 현상이나 알츠하이머처럼 치매를 일으키는 병이 아니라면 과거는 기억에 남아 현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억압된 감정'은 자기실현과 심리적 균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따라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혼란스러운 과거를 완화하기 위해 현재와 새로운 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야 한다.



과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지배당한다면 그것은 기억이 주는 추상적 이미지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사건은 피할 수 없지만 기억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피할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지나치게 얽매이면 의식이 과거에 종속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능동적일 수 없다. 또한 지나친 후회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많은 잘못과 오류를 범했고, 또 범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잘못을 돌이킨다는 명목으로 과거에 얽매이거나 끌려가기보다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반복하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의 시점, 즉 현재에서 실현된다.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혼하고 다시 재결합한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의 잘못 때문에 서로 이혼했을 것이다. 따라서 재결합의 경우 과거의 사건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무너지면 결코 건강하고 조화로운 부부로 거듭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면의 트라우마나 부당한 희생양이 되었던 억울함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들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그 경험들이 쉽게 치유되지 않는 심각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시간과 더불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미련 없이 과거를 떨쳐내고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현재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때때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야 하고 후회와 불안, 몽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금언을 남겼다. "네 인생의 모든 사건을 부여잡고 너 자신을 요동시키게 그대로 내버려두지 마라.(『명상록』)" '프로소케Prosoche'는 그리스어로 '현 순간에 대한 집중'이다. 이 말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를 중요시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재를 살아 있는 가치로 강조했으며,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유일한 영역으로 프로소케의 개념을 중시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의 『송시Odes』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질투하며 사라질지니 오늘을 즐겨라, 내일을 믿지 말고…."



오직 현재의 순간이 창조적인 시간이다. 우리가 인생을 즐기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행복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아름다운 감동의 근원이 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생생한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현재란 지극히 짧은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연속된 선線을 표현하는 것으로 영원을 뜻한다. 이로써 마침내 우리는 위대한 현인들이 말하는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평정과 조화, 평화가 바로 불교 선사 틱낫한이 '순간의 충만'이라고 부르는 행복 개념이다. 이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리도 모르게 온몸으로 누리는 은총이다. 틱낫한은 말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며 과거나 미래를 잊으십시오. 찻잔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지금 차를 마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육신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은 최상의 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움

미덕의 심층적 가치로 '아름다움'을 빼놓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사상가들과 현인들은 아름다움이 내면의 삶에 부여하는 효과에 주목했다. 철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나는 플라톤의 말을 자주 인용해왔다. 플라톤에게 '절대' 가치는 진리, 선의, 아름다움, 즉 진선미의 세 유형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 세계'로 자신의 영혼을 이끌기 위해 이 세 가치를 깊이 성찰하고 열망한다. 진선미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원형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고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면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연에는 추함이 없다. 추함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속할 뿐이다. 더욱이 자연의 아름다움은 무상으로 주어진다. 반면,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탐욕과 만나면서 때때로 추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보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종교에서는 '아름다움'을 거룩한 신성에 이르는 영적인 길로 생각했다. 고고 인류학자 에마뉘엘 아나티Emmanuel Anati는 『종교사 소론』을 저술하며 대략 45,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종교가 미적 대상에서 어떻게 발현했고 어떻게 일치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의 동굴에 남겨진 벽화를 가리켜 '진정한 대성당'이라고 경외감을 담아 칭송했다. 종교는 미적 감각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원들은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형형색색의 꽃과 조각과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서양의 예술은 종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에게 아름다운 성당 건축을 주문했다.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처럼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종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가는 보통 사람보다 '잘 보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일로 가려진 진실을 원형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리나 실용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보다 현실을 굴절 없이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저주 받은' 시인 보들레르는 종교적인 아름다움을 증오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을 경배하듯 자연을 찬양했다. 그는 자연을 '영원을 담아 노래하는 아름다운 사원'에 비유했다. 랭보는 이런 보들레르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들레르를 손꼽았으며 '최초의 견자見者'라고 불렀다. 도스토예스키는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제2장 마음 채우기



믿음

이 장에서 다루게 될 주제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일신교 신앙이 아님을 우선 밝혀둔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표현 기준이 없다면 믿음에 대한 설명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종종 등장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종교를 통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전제해 둔다. 동양은 그리스도교와 전혀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이를테면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보다는 선험적 확인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붓다'라는 스승과 '다르마法'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교를 통한 모든 영적 성장은 불가능하며 붓다의 가르침 또한 무의미하다.



믿음은 모든 영역에서 확실한 효과를 보장한다. 과학자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리라는 굳은 믿음 아래 연구실로 향한다. 갈릴레이나 뉴턴 같은 학자의 경우,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인간은 분명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창조주가 만든 세상의 질서와 자연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만약 세상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그처럼 깊이 있는 연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가 없다고 해서 우주의 선험적 질서와 법칙에 대한 믿음마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은 진실을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종교적 영역에서 파생된다.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은 사람을 진정한 과학자로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지와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은 유대교와 이슬람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서야 비로소 내면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표현하는 내적 평화는 마음의 동요가 없는 고요한 영혼 상태를 이른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인 16세기 신학자 에크하르트는 그의 철학 사상 키워드 중 하나인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즉, '자아의 포기'를 설명했다. 내면의 평안을 얻으려면 '희망과 지적욕구 그리고 소유에 대해 초월해야 한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다가설 수 있는 신비의 단계에 이르지 않고는 평온한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통제할 수 없다. 부부나 자식이라도 완전한 소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예언자』에 썼던 것처럼, '자식은 소유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직업 역시 언제 어디서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지뢰밭이지만 사람들은 늘 안전할 것이라는 섣부른 착각으로 살아간다. 인도의 현인들은 현실과 다투지 않고 완전하게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채우면 갈등이 완화되고 참된 기쁨이 찾아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려놓음'은 믿음을 향한 힘찬 날갯짓이다.



제3장 마음 내려놓기



명상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의 고요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의식과 온전한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침묵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두렵고, 외부의 침묵을 통해 다가오는 내면의 정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육신이 피곤할 때 편안한 휴식을 취하듯, 정신도 일상을 지배하는 많은 생각을 내려놓고, 칼날 같은 긴장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명상'이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충전이며, 일상에 빼앗긴 자신을 재발견하는 정신적 행위이다. 명상은 깊은 침묵을 통해 이를 수 있다.



불교의 선사들은 명상을 하는 사람을 산에, 생각을 구름에 비유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산을 뒤덮었던 구름을 몰아내면 이내 다른 구름이 몰려온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대면 푸른 하늘에 군데군데 뭉게구름만 남는다. 그리고 한순간 구름에 가려 형태를 알 수 없었던 산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잡념이 사라지면서 내면의 맑은 의식이 살아나는 것이 바로 명상의 핵심이다. 의식을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마음 내려놓기를 방해하며, 자아의 발견을 가로막던 생각들이 구름처럼 자취를 감춘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육체 훈련과 마찬가지로 명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기적인 훈련이 중요하다.



종교적 명상은 심오한 영적 훈련을 요구하므로 전문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티베트의 불교에서는 내면의 침묵을 명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행을 위한 초보적 사전 준비로 간주한다. 엎드려 절하기, 만트라(주문) 암송, 시각화 훈련 같은 수행은 무지와 속박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영성 훈련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일신교에도 명상 형식이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묵상 기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면의 기도 즉, 침묵의 기도를 '하나님과 신자가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매우 간단한 설명이지만 나는 신자와 절대자 사이의 사랑을 이보다 아름답게 수식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무지

"무지無知는 모든 악의 근본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앎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진리로 남는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긍정과 부정을 분별하는 앎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아간다 할 수 있겠는가. 구별 능력은 가장 기본에 속하는 본능이며, 이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더 발달했다. 동물은 생존에 위협적인 존재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인간도 이와 같은 본능이 있지만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순화되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 정당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다. 남들보다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가치는, 사실을 판단하고 지식을 활용하며 분석하는 '이성'이다. 나는 이것을 동물과 구별해서 '이성적 판별력'이라 부른다.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큰 역설은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가정이나 종교 그리고 사회의 일방적인 교육을 통해 얻은 확신에 대한 재고가 바로 그것이다. 무방비로 습득된 지식은 오류와 선입견으로 뒤섞이기 쉽다. 시대와 국가, 문화와 가정은 사실에 대한 제한된 관점으로 왜곡된 지식을 전한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참된 앎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다.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혜의 등불은 분별력과 올바른 선택을 돕는다. 동물적 본능과 타성에 젖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한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사회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근거한 서양의 전통 가치는 줄곧 신이 제시한 율법에 근거했다. 따라서 기존 가치는 근본적인 규범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고 넘볼 수 없는 원칙이 되었다. 서양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 역시 규범적인 율법을 제시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제정했다. 내 말은 이와 같은 율법을 무조건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수단이며, 인간성을 보장하는 보루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동시대 사회는 율법의 권위적 규범에 만족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변별력은 행위와 결과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정당한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 얽힌 물질적, 정서적, 감정적인 요인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태도는 아무 반론 없이 종교적인 믿음을 따르기보다 훨씬 어렵다. 무엇이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잣대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소중한 가치일까? 무지를 벗어나는 출발점이 바로 이런 인간애에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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