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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1. 막스 베버, 그는 누구인가

막스 베버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19세기까지의 다양한 지적 전통과 조류를 통합하고 그 이후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오늘날의 문화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좋든 싫든 반드시 그를 거쳐야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심지어 '베버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정도다.



막스 베버는 1882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 및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법률을 전공했다. 1889년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대 로마 농업사에 관한 연구로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독일의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1892년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 부교수로 재직하는 중에 1894년에는 바덴 공화국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1897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고, 1919년에는 뮌헨 대학의 사회과학, 경제사 및 경제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막스 베버는 페르디난드 퇴니스 및 게오르그 짐멜과 더불어 현대 독일사회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베버는 1920년 6월 우연히 감기에 걸렸는데, 이것이 폐렴으로 악화됨으로써 1920년 6월 14일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1,000여 명의 조문객이 모였다고 한다.



막스 베버라는 거대한 지적 산맥

베버는 사회학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경제사와 경제학도 담당했으며,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을 구성하는 데 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정도로 그의 학문적인 스케일은 웅장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베버는 학제간(Interdiciplinary) 연구, 메타과학적 연구 또는 통합과학적 연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합문화과학자이며 사회과학자인 셈이다.

막스 베버의 학문적인 관심은 '근대 서구의 역사적 형성 조건과 그 구조적 특성 및 병리적 현상'에 있었다. 또한 베버의 연구는 인간 삶의 특정한 측면이 아니라 국가, 관료제, 봉건주의, 시민사회, 법률, 자본주의, 시장, 종교, 예술, 학문, 에로스, 도시 등 실로 다양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막스 베버의 지적 세계는 그 누구의 것보다 이론적 논의, 경험적 연구, 역사적 접근, 비교 연구 및 방법론적 성찰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그의 저술은 서구는 물론이고, 고대와 중세 및 근대의 거의 모든 문화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가 싶으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중국에 관한 논의가 나오는가 하면 서구 중세, 근대의 논의가 나온다. 베버는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에 부단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 또는 학문과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 또는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분리된 결합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2. 지식인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학제간의 교육을 통해 태어나는 진정한 지식인

막스 베버는 학제간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 진정한 지식인이다. 막스 베버는 대학에서 전공인 법학과 더불어 경제학, 역사학 및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는데, 더 나아가 문화과학의 영역에서 훌륭한 교수가 강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었다. 이것이 바로 학제간 교육의 전형인 것이다. 독일의 대학은 지금도 이러한 지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베버는 대학 시절에 엄청난 지적 욕구를 지니고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는 것처럼 지식을 탐구했다. 막스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역사학, 철학, 신학 등 광범위한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 온종일 강의와 독서, 토론에 매달렸다.

독일은 대학을 옮겨 다니면서 강의를 듣고 학점을 이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장하고 있는데, 이는 대학이 1류 대학이니 2류 대학이니 하는 서열이 전혀 없고, 어떤 대학에서 어떤 학설이나 이론이 주창되고 어떤 연구와 강의가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인 것이다. 이는 지식욕이 남다른 막스 베버에게는 행운 같은 제도였으며, 이와 같은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막스 베버의 지성이 이처럼 광범위하고 웅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버와 몸젠, 젊은 학자와 노대학자의 진정한 관계를 보여주다

막스 베버가 박사학위 및 하빌리타치온 논문과 관련해서 데오도르 몸젠과 토론했던 과정은 지성계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기성세대와 신진세대의 관계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막스 베버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이탈리아 도시의 가계 공동체 및 산업 공동체에서 형성된 공공 무역회사의 연대책임 원리와 특별 재산권의 발발」이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지도교수인 레빈 골트슈미트 교수에게 헌정했다. 제출된 논문이 통과되면 그 다음 단계로 일곱 개 분야에서 구술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구술시험에서 가장 힘든 과정은 이 시험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청중 가운데 질문자로 자원한 한 사람과의 마지막 토론이다. 바로 이 토론 현장에 데오도르 몸젠이 질문자요 토론자로 일어난 것이다. 몸젠은 거물급 대학자로서 베를린 대학의 법학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시험위원회 구성원이었고, 그의 대표작 『로마사(Rmische Gexchichte)』로 1902년 제2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석학 중의 석학이었다. 몸젠은 토론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내가 무덤으로 가게 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막스 베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들아, 내 창을 받아다오. 그것은 내 팔에 너무 무겁단다." 이 말과 더불어 공개토론은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면서 끝났다. 그리하여 수험자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노대학자 데오도르 몸젠은 젊은 막스 베버의 학자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무런 스스럼없이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렇다고 베버가 몸젠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우면서 그를 극복했다. 노대학자, 몸젠은 그가 들고 있는 창이 너무 무거워지자 그것을 베버에게 넘겨주었고, 베버는 그 창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사건은 기성세대와 신진세대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그림처럼 보여준 것이다.



3. 새로운 정신적 세계를 찾아서

형식적 도그마에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베버가 법학에서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형식적 도그마를 버리고 다양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이 교차하는 경험적 종합과학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경제학은 개별과학인 오늘날의 경제학과 달리 종합적인 분야를 다루었고, 유연하면서 매우 젊은 분야였으며, 반면에 독일의 법학은 형식적인 도그마에 갇혀 있었다. 베버가 법학 부교수에서 전혀 분야가 다른 경제학 및 재정학 교수로 초빙된 것은 베버의 경제학에 대한 지적 수준을 인정받을 만한 특별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바로 사회정책학회에서의 업적이었다.



1872년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을 주축으로 창립된 사회정책학회의 멤버로 활동했던 베버는 1890년부터 1891년까지 당시 독일 제국의 토지귀족 융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엘베 강 동쪽 지역 농업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하게 되었다. 이 협회가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간행한 출판물은 매우 공신력 있는 지적 과학적 유산으로서 인정받고 있었는데, 2년에 걸쳐 조사 연구했던 베버의 조사 자료는 무려 900쪽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으며, 그의 탁월하고 체계적인 연구는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베버는 엘베 강 동쪽 지역의 농업노동자 실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윤리적, 도덕적, 심리학적 및 정치적 측면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연구로 독일의 농업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또한 지주 세력이 임금이 싼 슬라브 노동자들을 선호함으로써 독일 농촌의 '슬라브화'가 진행되고 있음도 밝혀낸 것이다. 바로 이 연구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하여금 법학자 막스 베버를 경제학 및 재정학 교수로 초빙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군주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막스 베버가 베를린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인 레빈 골트슈미트의 후임으로 물망에 올라있었음에도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버리고 바덴 공화국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교수의 자리를 선택했던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막스 베버가 권위주의, 군주주의적인 시스템을 혐오하고 자유주의,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베버가 베를린 대학을 포기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초빙을 수락한 이유는 프리드리히 알트호프(Friedrich Althoff)라는 독재적인 인간의 영향력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알트호프의 영향력은 단순히 프로이센 왕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 제국의 교육정책 전반에 미쳤는데, 그는 사실상 독일의 모든 대학정책을 좌우하는 대학의 전제군주로서 막강한 힘을 행사했으며, 막스 베버는 이 알트호프라는 권위주의적인 관료의 모습을 통해서 비스마르크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숨이 막혔던 것이다.



알트호프는 비스마르크의 연장선 같은 인물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국가주의와 관료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의 상징이었고 그 자체였으며, 그 거대한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적 시스템-비스마르크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을 거의 그 자신의 독재적 의지와 능력에 힘입어 유지했으며 알트호프는 비스마르크와 동질적 인간이었다. 알트호프 시스템에 대한 베버의 비판은 단순히 교육과 대학의 관점에 국한시킨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이고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그는 비스마르크주의가 알트호프라는 통로를 통해 대학이라는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뿌리 내린 바덴 대공국이 손짓했을 때 베버는 주저 없이 거기에 응한 것이다.



4. 아들로서, 시민으로서, 학자로서 맞서다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투쟁

베버는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자였는데, 그의 민족주의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적 자유주의였다. 이것은 당시 비스마르크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던 권위주의적 국가,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저항이었던 것이다. 베버는 세계의 강대국, 독일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발전적인 변화를 위해 세대교체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국가의 통일은 아버지의 업적이자 공로이기 때문에 아들은 이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아버지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며, 만약 계속 무대에 남아 공연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지금까지의 업적과 공로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이제 아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차례이며, 그 아들은 다름 아닌 시민계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 실증적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베버가 1890~1891년 사이에 사회정책학회의 연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엘베 강 동쪽 지역의 농업 노동자 실태를 조사했을 때,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국가를 주도하는 세력인 대지주들이 독일 농촌노동자를 밀어내고 임금이 싼 슬라브계 노동자를 선호함으로써 농촌을 슬라브화하는 반독일, 반국가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학인하고, 독일을 주도할 세력은 더 이상 대토지주주가 되어서는 안 되며 시민계층이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막스 베버의 정치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권위주의는 근대 시민계층의 사고와 행위 위에 존립하고 작동하는 정치체계와 부합할 수 없으며,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일지라도 국민들의 정치적 의지와 자유, 그리고 행위를 억압해서는 안 되며,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가야말로 진정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학문 체계에 대한 투쟁

막스 베버는 절충주의자였다. 기존의 다양한 학문적 전통과 조류를 비판적으로 검토, 수용하고 종합하면서 그 자신의 독특한 지적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베버는 당대에 접근 가능한 모든 학문적 요소들, 아직 형이상학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회학, 법학, 역사과학과 문화과학, 심리학, 철학 그리고 인식론과 논리를 이용했다. 베버는 이것들로부터 그가 필요로 하는 수단을 얻어냈고, 그것들이 방법론적으로 유용성이 없다고 드러나면 버리거나 변형시켰다.



당시 경제학의 판도는 크게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한계효용학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베버는 자신의 지적 토대이며 모태였던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에 대해 사망을 선고한 것이다. 베버는 오스트리아의 한계효용학파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학파는 경제학은 근대 서구의 인간 유형과 인간의 경제행위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은 시민계층의 주관주의적, 개인주의적 경제 행위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 역사학과 경제학은 집합 인격체, 곧 국가를 역사와 경제의 행위주체로 파악하고 있다. 베버는 사회학을 사회적 행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행의의 주체는 집합인격체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베버는 한계효용학파의 이론을 인간과 그 행위에 입각하는 문화과학적 인식의 유형으로 파악했는데, 한계효용학파의 경제이론은 문화과학의 '한 특수한 경우'이지만 이를 문화과학 전반으로 일반화시킴으로써 그 영역을 광범위하게 넓혔다.



5. 대학과 학문은 어떠해야 하는가

대학은 정신적 자유와 투쟁의 장이다

막스 베버는 대학을 정신적 자유와 정신적 투쟁의 장(場)으로 보았다. 즉 대학이란 다양하고 자유로운 정신들이 모여 서로 투쟁하는 곳이므로 사회주의도 둥지를 틀 수 있어야 하며, 무정부주의자도 둥지를 틀 수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정신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전문적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느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대학은 정당과 다르고 교회와 다르며 군대와도 다르다고 보았다.



막스 베버가 대학의 정신적인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 주장한 각론적인 내용을 보면, 대학 강단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교수의 허영심은 사라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하면 베버는 대학을 스케일이 한없이 큰 학문의 우주로 보았으며, 교수는 사심이 없는 순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막스 베버와 더불어 독일 사회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게오르그 짐멜은 1881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1884년에는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고 1885년 베를린 대학에서 사강사로, 1901년에 이르러서야 부교수가 되었다. 짐멜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짐멜의 유추적 접근 방법이 연역적 사유의 논리에 반한다는 사실, 국가도 사회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짐멜의 주장은 사회를 국가의 일부분 또는 구성 요소로 보는 이론에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 짐멜의 탁월성에 대한 동료 학자들의 시기, 이와 같은 이유로 짐멜이 보수를 받지 못하는 등, 여러 불이익 처분을 받은 것을 베버는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한 베버는 대학은 어떤 체제의 이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대학에서 배척당했던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와 같은 학자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헬스의 사회주의 노선은 신디칼리즘과 아나키즘이 결합된 것으로서, 신디칼리즘은 급진적 노동조합주의를, 그리고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를 의미한다. 미헬스는 좌파 중의 좌파였던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하고 결합하라

막스 베버는 이론과 실천은 분리를 통해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론과 실천의 분리 결합을 입증하기 위해서 농업 노동자 연구와 산업 노동자 연구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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