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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유혹자

토어스텐 파프로트니 지음 | 말글빛냄
1. 철학의 유혹자



플라톤

플라톤의 철학에는 다양한 장점이 있다. 탁월한 문학성, 현명한 인간 인식, 대화 기술, 진실하고 끊임없는 선과의 투쟁, 신중함과 유희적인 평이함 등이 그것이다. 플라톤의 저서를 읽은 사람은 그의 철학적인 심오함과 언어적 힘으로 인해 그를 항상 높이 평가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플라톤을 읽었더라면 그들은 서로 서로 속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쿠겔멘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거 세 가지 성의 인간이 있었다. 즉 남성, 여성, 남성-여성인 쿠겔멘쉬가 있었다(쿠겔멘쉬는 손과 발이 각각 네 개이며 머리 하나에 두 얼굴이 있는 사람으로 매우 강하고 빨라서 신들이 위협을 느껴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둘로 나누어 놓았다고 한다)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활력을 얻어 하늘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제 잘 이해하고 서로 다른 자신들을 인정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서로를 마음속 깊이 사랑했다. 그들은 각각 서로를 "더 나은 반쪽"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흙덩이처럼 나뉘어져 하나에서 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다른 반쪽 부분을 찾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하나였다가 서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여기에서 표현된 자유사상은 사랑은 사회적 반대를 극복할 수 있으며, 외형적인 면을 무시하고 중요한 내용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성의 영역에 새로이 관심을 보이고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인간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산적이며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본성에 따라 출산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본성은 추한 사람이 아닌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출산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가 출산이다." 추한 것은 부적당한 것으로, 아름다운 것은 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출산의 의도가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하며 이러한 사랑이 아름답고 의미 있다는 것을 플라톤은 감추었다. 생식과 출산과 같은 이러한 행동은 인간에게 불멸의 것이다.



오비디우스

기원전의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아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선율인 서정적인 방식으로 인간적 실존에 중요한 기본 문제들, 즉 사랑과 고통, 죽음에 대해 서술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철학적 영역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오늘날까지도 사랑의 이론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사랑을 하나의 기교로서 이해한다면 자신의 삶을 결코 기교적으로 살지 않거나, 마음속 깊이 사랑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놀라 사랑의 기교를 저속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사랑의 기교』에서 금욕적인 자기 규율을 통해 자제하지 않고 인간의 솔직하고 조화를 이룬 성관계, 즉 성욕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먼저 오비디우스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인 그는 자신을 모든 실망과 환상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에 대해 믿고 있는 정직한 고백자라는 인상을 준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매력이 있어야 한다. 즉 사랑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그는 쓰고 있다. 그의 책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밤에는 무력으로 성행위를 하려고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강간도 윤리적 이유, 미학적인 이유로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각자의 파트너들이 서로의 소원과 품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두 사람만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무력을 오비디우스는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그가 여성의 자율과 권리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가능한 감성적이지 않으려고 하며 사랑이 단순한 본능이라는 것에 반대하며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숙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의 존재의 자연성에서 벗어나 합당한 수준의 사랑과 에로스를 키워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철학적 성찰의 핵심은 일상생활의 윤리가 되는 구체적인 조언뿐만 아니라 사랑의 기교를 배워서 이루어지는 인격 형성에도 있다. 그는 지식이 풍부한 인류학자로서,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자로서 글을 썼고 도덕을 설교하지 않고도 현명한 조언을 했으며, 철저하게 뚜렷한 원칙의 도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상가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기술적이며 환상적인 유혹의 이론가이고 호색가였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읽은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놀랍게도 유혹에 대한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최소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사랑에 빠졌었다. 그가 사랑한 젊은 여성의 이름은 레기나였고 몹시 예민한 사상가에게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고 솔직하며 진실했다. 그는 사랑스러운 레기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차지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그가 그녀와 함께 했었다면 그의 인생은 아주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다. 미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참된 향유'는 실제로 향유하는 것이 아닌 상상 속에서 향유하는 것이고 순간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현실에는 희망과 기대에 찬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최고의 정욕이 상상력으로 다양하게 성취되고, 아무도 상처 입지 않고 아무도 큰 실망을 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혹자는 현실에서 자극을 얻으며 여성이라는 존재는 마음을 움직이고 철학자를 글 쓰게 하는 관찰의 근원이며 숙고를 위한 끝없는 질료를 제공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관능적인 사랑'과 '영혼의 사랑'을 구분했다. 관능적인 사랑은 개념에 따라 절대적으로 진실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지조가 없는 것이다. 관능적인 사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이다.



관능적인 사랑은 순간적인 것이며 개념상 순간들의 총체도 순간이다. 관능적인 사랑이 진실하지 않고 지조가 없다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관능적인 사랑은 항상 반복뿐인 것이다. 영혼의 사랑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혼의 사랑에는 두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랑받을 수 있을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의심하는 마음과 불안함이 내재하고 있다. 관능적인 사랑은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특정한 파트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 오히려 매혹적으로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2. 기독교 철학에 비춰진 사랑의 양상



아우구스티누스

후기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신앙고백』에서 보면 그는 수사학의 전문가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발전시켰고 다채로운 자신의 길을 서술했으며 나중에는 기독교를 신봉했다. 그의 원칙은 이렇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에 있어서도 실수를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며 사랑과 함께 자라난다.



사랑으로 인간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랑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고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솔직히 대하며, 다른 사람의 운명에 참여하게 하고 그들의 감정과 위기, 그리고 걱정과 희망에 민감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을 보고 느낄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즉 삶의 종류와 태도, 언어와 외형적 모습을 통해 한 사람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관심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녕과 고통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특히 존중할 줄 알고 진가를 평가할 줄 안다. 비웃는 사람, 성을 잘 내는 사람,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빈정대고 비웃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고독을 느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진지함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추진력은 사람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확실함이다.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중심적 존재를 극복하고, 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다음과 같은 짧은 엄명을 지시한다. 사랑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침묵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라, 말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라, 비난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하고 네가 용서를 빈다면 사랑으로 용서를 빌어라. 사랑의 뿌리는 너의 심장 내부이다. 이러한 뿌리에서는 미덕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별하게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와 인간의 인품을 형성할 때에 나타나며, 세상에서 그의 행동을 이끌어나가고 성격을 부여하는 인간적 이성이 아니다. 이야기하고 침묵하고, 비난하고 용서하고,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인간 활동의 원동력은 저급한 동기, 부차적인 의도 또는 이익만을 지향하는 숙고가 아니라 인간에게 다른 얼굴을 선사하는 한 사랑이라면 하나의 미덕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중세 철학자이자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고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당시의 어떠한 사상가 못지않게 이성과 신앙을 조정했고 철학과 기독교적 신학을 화합시켰다. 토마스는 의지보다 인식 능력을 더욱 고귀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신을 인식하는 것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이 더욱 좋고 적합한 것이라 설명했다. 결국 사랑 없이 신을 인식하려고 한다면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인간의 관계에 적용시키면 인간들 사이에서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것은 상호 간의 인식이 아니라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임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파트너의 모든 특성과 그가 살아온 과정 그리고 그의 가능성, 장점과 약점을 모두 알고 싶어 하는가? 그렇다. 그는 아마도 알려고 노력하겠지만, 이것은 파트너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파트너를 사랑하는 한 그를 인식하려고 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고려할 때 한 인간을 완벽하게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파트너를 완벽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인식하려고 하는 의지는 때로는 병적인 행동이 되기도 하며, 특히 파트너와 관련해서는 결코 적합한 것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는 욕망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에게 속한 그 무엇에 대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공감적 연대감이다. 사람들은 사랑 없이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토마스는 게다가 인간과 신의 유사점은 사랑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랑과 기쁨의 감정만을 인간과 신이 같은 형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달리 표현한다면, 신은 증오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기만도 하지 않고 결코 피조물의 특징인 저급한 충동이나 본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신은 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비밀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의 존재와 본질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면서 파악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인식의 끝이다. 인식이 중단되는 곳에서, 즉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된 실제 자체에서 사랑은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이 신과의 만남을 고려하여 사랑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토마스는 생각했다. 단지 이성적인 인간은 이러한 최고의 진실을 볼 수 없고 신을 찾는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라도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다. 토마스는 사랑을 본능적인 충동과 구별했다. 동물은 충동적이지만 인간이 충동적이 되면 수준에 미달된다. 충동은 비열하고 교활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족을 찾는다면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자기 자신 안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충동적인 인간은 몰락한다.



로마노 과르디니

인간만이 성욕을 억제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이것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며, 육체와의 정신적 결합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독창성이다. 과르디니는 관능적인 욕구와 격렬한 열정이 다른 충동들과 연계하여 나타난다면 인간은 자신의 충동으로 무절제하게 되고 혼란에 빠져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고삐 풀린 것 같은 성적 충동은 성격상의 모순으로 나타나고 행동을 방해하고 성행위에서 자제력을 잃은 행동을 한다. 과르디니는 무법한 성생활에서 혼란스러운 성생활 형태와 규모들을 보았다. 자연의 질서는 크게 변화할 수 있지만 철학자 과르디니는 동시에 인간의 본성, 자연적 행동은 선한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고 성적 삶을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금욕주의를 억압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적 도덕을 무언가 극복한 것으로서 규정하는 심리분석의 업적을 지적했다.



과르디니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서 성과 관련해서 책임감 없는 행동을 보았다. 시험 삼아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점점 더 증가하는 야만성,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 성을 강조하는 광고, 열정의 결여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과르디니는 사랑과 성의 감정과 행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원했다. 이러한 개념은 세상과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여 인간 전부를 포함해야만 한다. 개념 설정에 있어서 심리적인 것에만 제한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다양한 영역들을 축소시킨다고 생각했다.



인격은 신체적인 특징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성적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지도 않는다. 인격을 지닌 사람을 개념 짓는 데에 있어서 인간 전부에 대한 개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과르디니는 인간은 단지 사랑과 성의 감정과 행태 속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존재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고 인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더욱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주관적인 경험은 사랑과 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대립된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중요한 인상과 체험을 기억하고 성취와 포기, 기분 좋은 향유와 쓸쓸하고 음울한 고통을 기억한다.



과르디니는 현대의 허무주의 관념, 도덕 문제의 임의성과 무의미함의 감정에 반대하여 사랑을 강조하려고 열정적으로 시도했다. 자기 자신만을 실현시키려 하고 완전히 혼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을 강조하고 발전시키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는 허무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것을 경고했다. 왜냐하면 과르디니는 살아 있는 신, 즉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나약할 때 의지가 되었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라디슬라우스 보로스

보로스는 과르디니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사랑의 현상에 대한 그들의 해석 차이는 미세했다. 보로스는 종교를 치료에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절대적인 도덕적 요구를 포기했다. 또한 과르디니처럼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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